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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번에 있는 1편에 이어> 아니...저 이비인후과 의사가... 내가... 병을... 의사가 림프종이라고 말하다니...? 내가 림프종이라는 암에 걸렸다니...!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습니다.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왜 하필 나에게 일어난단 말인가...? 하는 원망도 맘 가운데 소용돌이쳤습니다. 한 동안 멍하니 서있던 나는 절망감이 밀려오는 것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암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사실 림프종이라는 병은 처음 들었고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단지 암에 걸리면 빠른 시간 내 사망에 이른다는 사실만이 내 머릿속에 꽉 차 있었습니다. 이비인후과 교수는 바로 내과로 옮겨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치료약은 어느 병원이든 똑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병원 내과에서 치료받기를 권면했으나 그 의사의 태도가 왠지 영 친절하지 않고 무뚝뚝한 게 맘에 걸려 치료는 어디서 할 건지는 생각해 보고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치료약은 다 같을 수 있지만 의사는 다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 그 의사의 무뚝뚝함으로인해 권면을 거절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으로 오히려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내는 전직이 간호사였기에 저 보다도 마음에 빠른 냉정을 찾았는지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가족들과 친지들 지인들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러는 중에 지나온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내가 너무 인생을 막살았는가? 이런 병이 들 정도로 무슨 죄를 많이 졌는가? 나는 그 동안 이런 자리에 오기 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7년간의 석 박사과정의 유학생활을 보냈지 않았는가? 첫 째 아들은 결혼 8년 만에 아들을 얻어 기도하고 낳은 아들이고,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의미의 이름인 “사도”라고 지었다. 유학 2년이 되는 해에 둘째 아이를 얻었었다. 아내의 임신 중독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그 땐 한 참 석사논문을 완성하고 논문 구두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예정일 보다 3달을 먼저 태어나기에 미숙아(premature)로 태어났었다. 태어날 때 0.9kg이었는데 생존율이 20%정도이니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다고 의사가 말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그래서 지은 이름이 “영광”이지 않는가? 아내는 갑작스런 외국생활에 익숙지 않았고 임신중독과 이른 출산으로 찾아온 디프레이션(우울증)으로 근 반년을 고생했었다가 완전히 나았었다. 그 때 좋은 의사를 만나서 가난한 유학생인 나를 도와주어 큰 도움을 받았고 아내는 깨끗이 치료를 받았다. 이렇게 저렇게 고생하고 도서관 지하 개인 연구실에서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온통 시간을 연구에 몰입하면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었다. IMF 시기에 한국에서 부친 생활비가 적을 때 장학금을 받고 아주 싼 학교 기숙사를 얻어 견딜 수 있었다. 그 뒤 한국으로 귀국 후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교수 생활 7년차로 이제 막 틀을 잡아가려는 시점인데... 아들 둘이 아직 학교를 다니고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은데... 함께 했던 아내의 고생한 보상도 못해줬는데... 이렇게 끝나면 너무 아쉽고 아까운 인생이 되질 않는가?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눈이 뜨거워지고 뻘겋게 달아오르는 듯 충혈이 생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진단이 나온 이상 발병한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고 주위 사람들과 제가 속해 있는 학교 당국에도 전화를 해 알렸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들었는지 계속되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격려와 위로의 말들이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불안한 상태여서 위로하는말의 내용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도 않았고 위로도 되질 않았습니다. 갑자기 아내가 빨리 서둘러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처제가 근무하는 부산의 정형외과(로컬)병원의 원장님의 아래 동서가 강남성모병원의 의사인데 그 분이 림프종을 잘 보신다고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어서 직접전화를 드려서 코 막힘이 심해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임을 설명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자신은 외부 강의 때문에 현재 지방에 내려와 있지만 응급실로 와서 입원하면 다음날이 토요일이어서 자신은 쉬는 날이지만 아침 일찍이 응급실로 찾아와 진료를 하겠다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검진 CD를 복사 한 뒤 서울로 급하게 차를 몰았습니다. 강남 성모병원은 카톨릭 대학 부속병원이라서 사실 마음은 썩 내키질 않았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긴장이 내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특히 오래된 건물에다 응급실의 시설 수준이 제 생각의 기준치에 못 미친다고 느껴졌었습니다. 지금은 2009년에 들어설 CMC 본부가 이미 크게 건물이 들어서고 현재 MBC 수목 드라마 "종합병원 II"의 배경으로 나오고 있지만, 2007년 9월의 성모병원은 지방의 주민들이 버스터미널에서 가깝기 때문에 서울에 쉽게 올 수 있는 최고급병원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서울 사시는 분들도 많이 이용하지만 특히 응급실에는 경상도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와 억양을 쓰시는 분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희 집에서는 처갓집이 더 신경을 많이 쓰고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번 경우에도 처형들이 부산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놀라서 서울로 직행하여 저녁쯤에는 처형 두 분이 응급실로 달려왔습니다. 저희 처가는 딸이 여덟이라 처형 둘에 처제가 다섯입니다. 그러면 제가 몇 번째인지는 알겠죠...? 정답은 세 째입니다. *_- 그 날 저녁과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불안함과 간혹 찾아오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레지던트 2년차 권** 선생님이 주치의라고 인사하며 찾아왔으나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고, 잠도 거의 오질 않았습니다. 심리적으로 더 힘들었는지 호흡도 가파지고, 거의 코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으로 숨을 쉬면서 산소 공급 호스를 코에 밀어 넣고 잠을 잤던 것을 기억합니다. 다음 날 토요일 이른 아침에 흰 가운을 입고 응급실로 중년 의사 선생님이 찾아왔습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인상은 아주 온화하고 말씨는 부드러운 서울 말씨를 쓰는 중후한 멋이 있는 신사였습니다. 가운 이름표에는 홍영선이라고 보였습니다. 이것이 홍영선 교수님과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다음 계속> |
첫댓글 혈액암에서 유명하신 교수님과의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 처가댁에 딸만 여덟이라... 음~~~ 대단하네요!!
^^ 하나님붙드시고 힘내세요 ~ 아직하실일이 너무도많으신데 먼가 더좋은 뜻이 있으실거예요
제 동생도 현재 홍영선교수님께 치료받고 있어요...교수님을 믿으시고 힘내세요~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