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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1-11)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 종교개혁가들의 글, 청교도들의 글들을 비롯하여, 성도들이 쓴 믿음의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책 가운데, 기독교 3대 고전이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서문에서, “이 책의 줄거리를 대략 말씀드리면, 한 인간이 영원불멸한 하늘의 상을 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독자들 앞에 그려놓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않는지, 보여 주고 있으며, 하늘나라 영광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뛰고 또 뛰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을 읽노라면,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크리스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라고 하는 목적지만큼은 분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루하루 걷다 보면, 하늘나라, 그 영광의 문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옮겨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첫 번째 문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새롭게 감화되기를 원하고, 모든 어두운 마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갈 때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길을 걸어가셨습니까?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만 할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져 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힘들고 고달픈 인생길이지만, 우리는 죽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하여,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매순간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향하여야 하고, 우리의 발걸음은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야 하고,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고, 그 생명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원도 태백에는 성공회 소속의 대천덕 신부가 세운 예수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태백에서 사역할 때, 선교단체에서 거지 순례로 태백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예수원에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원을 여러 번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온갖 잡다한 생각을 내버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산책로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말없이 한 바퀴 돌고 나면, 차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언제 주님을 생각하고, 언제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야만 합니까? 그 십자가의 길에서만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4-6절 말씀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선구자”라는 가곡을 아십니까? 옛날에, 참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오래 전, 중국 길림성 용정시를 방문했을 때,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생가와 그가 다닌 중학교, 그가 자주 올라갔다고 하는 한줄기 해란강이 내려다보이는 일송정에 올라, 푸른 소나무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중국인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더 시골로 깊이 들어가, 하룻밤을 잔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지하 교회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삼자교회였습니다. 교회 본당 입구에 있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중국인 전도사님이 계시는 사택은 멀리 떨어져 있고, 중요한 것은, 화장실이 넓은 옥수수 밭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코 그 밤을 잊지 못합니다.
20년 전이기는 하지만, 한밤중에, 옥수수 밭 한 가운데 있는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가로등도 없고, 별도 없어, 논두렁 길이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그 밤에,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그렇게 어둠컴컴했던 밤을 잊지 못합니다.
25년 전쯤, 서울에서, 인제와 원통을 지나, 한밤중에 미시령을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속초 대포항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하여, 미시령을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때에는 탁트인 고속도로가 아니라, 고불고불한 산길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 밤, 고불고불한 가파른 고개길을 넘을 때,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 별들을 보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험한 산길이었지만, 그 별들로 인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아니라, 황홀했다는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깊은 산골인 태백에 살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쏟아지는 별들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불고불하고, 가파른 고개길 같은 인생, 캄캄한 어둠밖에 없는 그런 고달픈 인생을 원하지 않고, 탁 트여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와 같은 그런 인생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길은 탁 트인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푹 패인 포토홀을 만나, 깜짝 놀랄 때도 많습니다.
여호수아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무슨 단어가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옵니까?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말 대신에, “평탄”과 “형통”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바로, “평탄과 형통”일 것입니다. 탁 트인 고속도로와 같은 인생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따라가면서, “평탄과 형통”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과 수고, 그리고, 운명과 요행으로, 아니면, 도박이나 나쁜 짓을 한탕함으로, 그 “평탄과 형통”을 원할 것입니다.
태백에서 함백산을 넘어가면, 고한과 사북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옛날에는 탄광 캐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카지노가 있는 곳입니다. 태백에서 사역할 때, 카지노에서, 가진 모든 것을 다 잃고, 집에 돌아갈 차비마저 없어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찾아오면, 그 사람들에게 시청에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시청에 가서, 이름과 인적사항을 적으면, 집에 돌아갈 차비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왜 카지노에 왔을까요? 그들은 아마도, 인생 역전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탁 트인 고속도로 같은 인생을 원했지만, 구덩이에 빠져 가파른 고개길도 올라가지 못하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있는 것마저 다 잃고,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선 댓가인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가 아니면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파멸과 죽음의 길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을 사셨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제자들을 양성했지만, 예수님께서 위급했을 때,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아먹거나, 부인하거나,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평탄과 형통”과는 멀고도 너무 멀었습니다. 늘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험난한 인생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마도 그 길을 따라가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높이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넓은 문, 넓은 길을 원하고,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을 갔을 때, 베들레헴에 위치한 예수탄생기념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하얀 돌로 높게 지어졌습니다. 그 교회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겸손의 문이라고 하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라는 말과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 어른 한 사람이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교회 입구문이 아주 작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가면서,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얼마나 화려한지 모릅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한 샹들리에와 여러 가지 그림들을 장식한 벽들, 높은 기둥들을 보았을 때, 겸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화려함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겸손한 척 하지만, 겸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겠노라고 크게 외치고,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기도 하지만, 당선되고 나면,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른 아침부터 길거리에 나와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에게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고 머리 숙여 약속하지만,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습니다.
“평탄과 형통”을 외치지만, 당선만 되고 나면,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잘 먹고 잘 산다 해도, 아브라함 앞에 선, 부자와 나사로 중에, 부자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에게 오면,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을 수 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많은 일들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이 되시고,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동산 중앙에 두 나무를 두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영생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영생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에덴동산에 다시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찾아, 미지의 땅을 헤매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에덴동산에 다시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 그 곳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딴 길로 가면 안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만을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딴 데로 눈길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만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딴 마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둠 속을 헤매이지 않고, 참된 생명의 길을 걸으며,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
우리의 나아갈 길을 보여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딴 길로 나아가지 않고, 오직 길이신 주님만을 따르게 하옵소서.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이신 주님만을 따를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