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하13;23-39. 마음의 응어리는 빨리 풀고 고통은 짧게!!! 2023. 10. 1.
오늘 본문은 계속 되는 사무엘서의 말씀입니다. 특히 압살롬과 그의 형 암논과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과의 관계에서 파생되어지는 문제가 어디까지 이르게 되는가의 시작입니다. 지난 말씀의 끝은 13;22절이었고 오늘 시작은 23절입니다.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일단 덮어지고 용서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만 이 년 이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2절이 끝난 이후에 압살롬은 만 2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시작을 하는데, 아버지 다윗 왕을 끌어 들여 정당방위를 가장하여 이전에 응어리졌던 문제를 풀어갑니다.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매듭이 되지 않았고 용서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응어리를 간직한 채 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때와 기회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잊어지도록 계획적이었습니다. 이 것이 내용의 시작인데 무엇을 말씀하나요?
1. 특정 인물, 다윗에게만 적용되는 매듭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매듭은 하나님께서 하실 어떤 일이 끝이 나야 매듭이 됩니다. 그럼에도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일반 사람에게는 쉽게 매듭이 되기도 합니다만 다윗은 인생의 매듭이 딱 딱 끊어지지 않았고 다윗의 의도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정리될 것 같은데 다윗에게만은 정리가 잘 안되고 매듭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기름을 부으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위인이며, 크게 쓰임을 받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사건을 통해서 백성들로부터 그 위상이 급격히 추락되고 하나님의 선택과 기름을 부으신 그 일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반 사람들이 받았던 은혜가 아니고, 실패와 고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무엘하 13장부터 18장까지는 다윗의 일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이었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울 왕으로부터 쫓겨 다닐 그 때보다도 더욱 어려웠고 더 힘들었고,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라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윗의 가정 안에 온갖 불미스러운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문제들이 빨리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소망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그렇잖아요? 행복은 길고 고통은 짧게. 기쁨은 계속되지만 고통과 고난과 슬픔은 간단히 끝나기를 원합니다. 어느 누구도 아픔과 고통과 사건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사건에 대한 고통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든지, 다윗 때문에 발생 되었든지 다윗에게만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건을 종결 시키지 않고 하나하나 매사건마다 일이 끝 날 때 까지 진행 시킵니다. 기도하고 회개하면 다 끝이 나야 하는데 끝나지 않고 종결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다윗에게만 적용이 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투정도 하고 불평도 할 만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답은 다윗이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나도 자세히 알기 때문입니다. 끝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길게 고통이 주어져도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 합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붙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에게만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여러분 되게 하시는데 아픔과 고통의 시작은 가정사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다윗에 대한 가정사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데, 다윗보다 먼저 죽고 그것도 어린아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어린 아들을 위해서 다윗이 기도를 하는데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데려가고 대신 솔로몬이라는 아들을 줍니다. 이 솔로몬이 다윗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남 암논의 사랑으로 이복누이동생, 다말이 아픔을 겪습니다. 여러분, 다윗에게 부인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이 많았는데 암논과 다말은 서로 배다른 남매이었습니다. 암논은 다말을 깊이 사랑한 이유로 상사병에 걸리고 급기야는 그 누이동생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사랑의 결과뿐만 아니라, 수치와 모욕을 주었습니다. 연이은 아픔을 주는데,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하인에 의해서 내어 던져지는 수치와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은 가문의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분노에 떨게 되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마음에 응어리가 생겼습니다. 안 그래도 다윗왕의 다음이 암논에게 돌아갈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이 두, 세 번씩 아픔을 겪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도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에 응어리가 질까요? 그런데 여러분, 응어리는 될 수 있는 데로 응어리가 되도록 가슴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는 감정의 응어리가 싸여도 빠른 시간 안에 풀어야 문제가 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복수의 결심을 하고 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잊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가슴에 담고 한을 품었습니다. 여러분, 풀 것은 왜 빨리 풀어야 합니까? 감정이 쌓이고 응어리가 맺히면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이미 하나님이 떠나게 되고 연이어 이때 성령이 떠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떠나고 성령이 내주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해지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고 성령이 내주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51;10에서, 하나님이여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 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영을 구하므로 매듭의 실마리가 풀려 지기 시작했는데 압살롬은 그렇게 못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시고 주의 영을 사모하며 응어리와 한과 맺힌 것을 풀어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응어리를 풀지 않고 복수를 꿈 꿀 때에 가져다주는 결과가 무엇인가요? 죽음과 파멸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에밀 가보리유(Emile Gaboriau)는 복수는 다 익을 때까지 내버려둬야 하는 달콤한 열매라고 했습니다. 복수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열매라고 합니다. 압살롬은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누이의 복수를 준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슴에 응어리를 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그 응어리를 가슴에 쌓아두면 그 한이 어디로 튕기게 될지 모릅니다. 압살롬은 가슴에 한을 품고,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2년 동안 이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얼마나 마음과 육체가 황폐화 되었을까요? 당장 복수할 수 없었던 것은 지켜보는 눈이 많은 데다 왕세자인 암논의 권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자신의 복수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2년의 세월을 보냈으며 마침내 복수를 단행합니다. 여러분, 2년간 복수의 칼날을 간다? 한을 품고 응어리를 가지고 사는 압살롬, 본인의 마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3-39절은 그 복수의 내용을 보여주는 말씀인데 이미 2년 동안 압살롬은 복수의 달콤한 열매 때문에 영과 마음과 육신이 썩을 대로 다 썩었습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얼마나 철저합니까?
2-1. 복수하기 가장 좋은 시기와 때를 정합니다. 23-24.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시기를 원합니다. 때는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양 털을 깎는 때입니다.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입니다. 28절,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2-2. 모든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위장을 합니다. 풀지 못한 뭉쳐진 응어리는 이렇게 사람을 이끌어 갑니다. 때와 장소와 상당한 이유를 말하지만 왕이 거절하고 축복을 하니까? 다시 압살롬이 간청을 합니다. 24-27.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 니라.
2-3. 사람의 생명을 쉽게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이 개입하실 공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양털 깎는 시기를 맞이하여 크나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양털을 깎는 시기가 되면 친지들이나 친구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일종의 추수할 때의 잔치와 같습니다. 여러분, 나라에 사슴 공원이 있는데, 언제 사슴의 뿔을 자르던가요? 시기가 가을 입니다. 그래서 이 때에는 관광객들을 초청하고, 대대적으로 신문 광고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뿔을 자릅니다. 잔치입니다. 압살롬은 때를 맞이하여 큰 잔치를 베풀면서 그 자리에 자기 아버지 다윗 왕을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초대를 극구 사양하였습니다. 25절,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우리가 다 갈 것이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압살롬이 간청하되 저가 가지 아니하고 위하여 복을 비는지라. 참여를 못하겠다고 합니다. 압살롬은 당연히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압살롬이 고대했던 답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잔치 자리에서 형, 암논에게 복수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버지 다윗 왕이 오게 되면 다윗을 수행하는 많은 용사들이 함께 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암논을 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다윗이 올수 없다고 하자 압살롬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다윗에게 형, 암논을 잔치자리에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그 요청을 수락 합니다. 26∼27, 압살롬이 가로되 그렇게 아니 하시려거든 청컨대 내 형 암논으로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저와 함께 보내니라. 왜 이렇게 허락을 하게 되나요? 다윗이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설마라고 생각 했는지, 또는 암논과 압살롬의 감정이 사라졌다고 믿었든지 이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아니 합니다. 형제간에 응어리를 풀어 주었나요? 불러다 놓고 선후를 이야기 했나요? 여러분,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냥 넘어 가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도록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래서 매듭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조금만 살피면 압살롬의 요청은 미심쩍은 요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초청이 암논을 죽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을 참석케 했습니다. 이미 2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더 이상 원한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압살롬의 노림수이었습니다. 2년 전엔 자기 형을 살해할 힘과 능력이 없었고, 보는 눈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복수의 열매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그 잔치 자리에서 그 형 암논을 무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28절-39절, 압살롬이 이미 그 사환들에게 분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저를 죽이라. ~ 압살롬의 사환들이 그 분부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 하니라. 암논이 살해를 당하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걸음아 날 살려라!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곧바로 할아버지가 왕으로 있는 어머니의 나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결국 압살롬은 자기 누이의 복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복수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 집안의 자기 형제를 죽인 것이 아닙니까? 이로 인하여 자기 가정만 더 비극적인 가정이 되었습니다. 서양 속담에, 결코 노하지 말라! 단지 그대로 갚아줘라! Do not get mad! Get even! 조용히, 복수는 두 개의 무덤을 가져온다. 하나는 원수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무덤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대로 갚아 주래요.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와 같이 하라는 말 입니다. 압살롬은 조용히, 그대로 갚았습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들이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려야 속이 풀립니다. 둘 다 죽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죄 성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행위이고, 인간의 본성은 당한 만큼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give and take입니다. 받은 것만큼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극입니다. 결과는 엄청난 사단을 몰고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복수는 결코 참된 해결책이 아닙니다. 원수만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까지 허물어집니다. 먼저 상처 받고 먼저 괴로움을 겪는 것이 복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응어리를 푸시고, 용서하시고 용납 하시고, 도리어 축복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복수의 근원과 대처 방법이 무엇입니까?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으로 James Garfield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88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불행히도 대통령에 취임한지 6개월만에 저격을 당했습니다. 등에 총을 맞았는데 병원에서 의사들이 총알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X-Ray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여서 의사의 시각으로 몸에 박힌 총알을 찾아야 했는데 아무리 상처 부위를 찾고 찾아도 총알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은 건강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7월에 총을 맞은 대통령은 8월을 지내고 9월이 되도록 계속 병상에 누워있었으며 결국 9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사인을 규명 했는데 대통령이 사망한 것은 총에 맞은 것 때문이 아니라 총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 것 때문에 상처부위가 부패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임스 갓필드의 가족들은 저격을 한 사람이나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용서하고 용납을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취임한 지, 6개월 밖에 사역을 못 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래도 예수를 믿는 신앙과 믿음 때문에 용서를 하고 서운해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필드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는 줄 아십니까? 미국 20대 대통령 James A. Garfield는 가난한 개척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겨우 학교에 들어갔지만, 책을 살 형편조차 못 되어서, 가른 사람의 책을 빌려서 겨우 공부를 했습니다. 엄마가 가난해서 책도 못 사주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가필드는 아니에요, 저보다 가난해서 학교에 못 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웃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날 새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는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식장에 나타났습니다. 다들 의아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앉아야 할 대통령 자리에 어머니를 앉히고 자신은 그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저를 대통령이 되도록 늘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신 분입니다. 오늘 이 영광을 모두 하나님과 어머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식장에는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필드는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사로 보답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망스러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받은 상처보다 받은 사랑이 훨씬 많았음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2년간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압살롬의 삶은 모든 것이 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입니다.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억울한 일이 그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일로 인해 보복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그것이 그 사람을 죽게 합니다. 복수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이 복수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주는 어두움입니다.
3-1. 그러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롬12;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로부터 악행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면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는 결코 내가 직접 복수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이것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원수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원수에 대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억울하게 재판 받으시고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공평하지 못하고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보다 더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결코 보복하지 않으셨고, 용서했습니다. 이는 결코 선택사항이 아니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필수사항입니다. 왜요? 우리 자신들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 입니다. 골3;13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분명히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원수를 용서하라고 합니다. 용서할 경우 결코 두 개의 무덤은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의 무덤도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해와 평화와 상생(相生)이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하나의 무덤만 있습니다만 그것은 원수의 무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대신 원수를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조국, 일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소다 가이치 (曾田 嘉伊智)입니다. 그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생했고,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와 탄광 광부와 노르웨이 상선 선원과 독일 회사 직원으로서 여러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행실도 불량배라서 주위에서 좋은 소리도 못 들었지만 머리만큼은 똑똑해서 중국어와 영어와 독일어와 일본어를 구사했습니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일하던 소다는 술에 만취해 길거리에 쓰러졌다가 깨어나 보니, 어떤 여관방에 눕혀져있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여관주인에게 물었더니, 어떤 이름 모를 조선인이 당신을 업고 와서 숙박비와 약값까지 모두 지불하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소다는 자신을 도와준 조선인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소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술도 끊고 망나니처럼 살던 행실도 고쳤고 이름과 성을 모르지만 은인의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6월 조선으로 건너왔습니다. 소다는 황성기독교청년회,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YMCA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YMCA 종교부 총무를 맡고 있던 월남 이 상재선생님을 만난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4년 뒤에는 숙명여고와 이화여고 영어 교사인 우에노 다키코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때부터 소다는 경성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 9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을 암살 모의했다는 혐의로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이 있을 때에 윤 치호 선생과 이 상재 등 YMCA 인사들이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되었는데 소다는 데라우치 총독을 직접 찾아가서 죄 없는 사람들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따졌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는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고, 법정에서 이 상재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습니다. 소다는 1913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설립된 가마쿠라보육원 책임자로 임명됐는데, 당시 세계 대공황으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경성, 서울의 거리는 고아들이 넘쳐났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간 사람들이 돌보지 못해 버려진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926년 부인 우에노와 함께 교사를 퇴직하고 함께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매일 같이 직접 수레를 끌고 일본군 부대를 돌며 군인들이 먹고 남긴 밥과 헌 옷가지를 주워 아이들을 먹이고 입혔습니다. 젖을 물리기 위하여 젖동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다 부부를 향하여 일본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거지라고하며 일본의 수치와 배신자로 부르며 대놓고 비국민 취급을 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위장한 자선가와 인신 매매 범으로 헐뜯기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키운 고아들의 상당수가 훗날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 때문에 경찰서로 불려가 독립 운동가들의 끄나풀이라며 심문을 당했습니다. 어린 고아원 소년들이 잘못하여 유치장에 갇히면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이라고 빌고 아이들을 데려 왔고, 그런 행동을 한 아이들을 절대 혼내지 않았습니다. 보육원은 기부에 의해서만 운영되기 때문에 항상 재정난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기독교계 인사들과 익명의 복지 가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해외로 망명하던 조선 사람이 고아들을 위해 써달라며 남긴 옷들과 시계, 그리고 현금 1천원을 두고 갔는데 당시의 이 금액은 80키로 쌀 한 가마니가 13원이었으니까? 77가마의 금액이었습니다. 소다와 우에노 여사는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1945년 해방까지 약 1천 여 명의 고아들을 키워냈습니다. 해방 후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야했지만, 미군정은 소다 부부에게 남을 수 있도록 특별히 영주권을 발급해주었습니다. 1947년, 소다는 본토 일본의 회개를 촉구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우에노 여사는 고아들 때문에 조선에 남았습니다. 소다는 세계 평화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며, 60만에 이르는 재일교포를 포용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다가 떠난 자리를 지키던 부인 우에노는 1950년 1월, 고아들을 돌보다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는데, 당시 한일 간 국교가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소다는 아내의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사히신문의 한 기자가 1960년 소다의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칼럼을 싣고, 한국에서도 기독교계열 인사들과 성인이 된 보육원 출신 인사들이 힘을 합쳐 소다의 방한을 주선했는데 그런 노력 덕분에 소다는 1961년 5월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들어 왔습니다.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고 영락보육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 3월 28일 눈을 감았는데 그의 나이 95세이었습니다. 그의 장례는 국회의사당에서 대한민국 각계계층 2천 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소다 가이치에게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소다와 우에노 여사의 묘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수많은 선교사들 묘비 사이에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비석에는 고아(孤兒)의 자부(慈父)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그 어떤 조선인보다 조선을 사랑했습니다. 왜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응어리는 빨리 풀고 고통은 짧아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믿음과 신앙으로 예수님처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용서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대신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용서할 때 우리는 복수심으로 인한 고통에서 평안과 자유 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용서가 복수보다 더 귀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복수할 때 얻어지는 것은 단지 본성의 만족뿐 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합니까? 육체와 정신과 세월까지 허비하게 되고, 더 나아가 파멸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용서하는 것이 자신에게 영광이 됩니다. 잠19;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입니다. 이 얼마나 용서의 귀한 유익 입니까? 자신이 해놓고 자기의 영광이 되는 것은 용서 밖에 없습니다. 용서와 용납이 이렇게 중요 합니다. 압살롬은 그 누이 다말의 복수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형을 용서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 형도 회개 했을 것이고, 다윗의 가정에도 화목과 평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 형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 하니 하실 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마음의 사무치는 그 어느 것이 있습니까? 되도록 주님 안에서 푸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악행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할 것 입니까?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무엇이 소중한 삶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잘 되는 길인지 무엇이 영광의 길이고 축복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길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려면 때때로 목숨을 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려면 밥줄이 끊길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옳은 걸 옳다고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진수성찬 앞에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른 떡 한 조각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건강한 신체가 있음에도 환경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고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음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살아가면서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불평하고 어떤 것에 감사해야 할까요? 바로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어제 삶을 마감한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오늘입니다. 길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아야지요. 내가 너를 닮아 가는 것이 나를 잃겠다는 것이 아니고, 너를 잃지 않겠다는 최선의 신앙의 노력입니다. 진정한 사람이 되려면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고 좋은 관계가 되려면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지만 성령님을 의지하고 내주 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용납의 삶을 사시는 그래서 자기의 영광이고 축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