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 士衡, 乙卯生’으로 ‘東經大全 出刊, 庚午11月24日卒, 墓 東面 德星里 山512’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 표영삼 삼암장의 글과 정반대의 사실이라, 이 족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삼암장의 아래 글을 보면 '천안시 동면죽계리450번지'가 김은경접주의 집터인가에는 의문이 든다. 삼암장이 분명 동면의 김은경은 동학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후 집안 족보에 '동경대전출간'이라고 문구가 추가되었을까? 확인해야 보아야 할 일이다.
<표영삼, 동학의발자취, 2003> 중에서
"간행장소는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1985년에 아우내 장터에서 동쪽으로 3km떨어져 있는 들 한 가운데 위치한 평기리(平基里)로 찾아가 김내기(金乃基)를 면담한 일이 있다. (1985년 3월에 김내기의 집으로 찾아가서 증언을 들었다.)
그는 동학혁명 당시 평기리의 면실 마을에 동학군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기와집이 많았으며 김곤양(김고양)이라는 접주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선친이 일제 때에 만들었다는 병천팔경(幷川八景이란 소책자를 보여주었다. 첫머리에 “병천(並川)은 곧 구계(九溪)라”고 하였다. 지금의 병천이 구계리라는 것인데 이 병천은 아우내 장터(또는 아오내, 아내장터)로 통한다. 아우내라는 말은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합쳐서 아울렀다는 뜻이라 한다. 구(九)라는 글자는 많다는 뜻으로 통하므로 구계(九溪)란 많은 물줄기가 합쳐진 시내라는 뜻이다. 천도교서에 구내리(區內里)로 기록한 것은 구계(九溪, 아홉내)의 음을 따 적은 것이다. 즉 구계의 아홉 구(九)자를 구(區)자로, 시내 계(溪)자를 내(內, 川)자로 기록하여 구내리(區內里)라 한 것이다.
이 곳에는 구계리가 하나 더 있다. 병천에서 진천 쪽으로 8km쯤 가면 동면 죽계리(竹溪里)가 나온다. 초엽 산기슭에 구계리(九溪里)라는 5호 정도의 작은 자연촌락이 있다. 우연하게도 김씨 족보에 김은경(金殷卿)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동학과 관련이 없는 고장이며, 김은경은 동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필자는 평기리 면실 마을이 동학접주 김은경이 살던 곳이고 목천판 경전을 간행한 고장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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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링크 기사 내용에서
1. 천안시 동남구 동면(당시는 목천)에 있는 김은경 접주의 집에 간행소를 마련하고 동경대전 1천 부를 인쇄해 배포
2. 2002년경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발견. 소유자가 2021.4월 충남역사박물관에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