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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송 병 수
삼천 피트의 고도. 김진호(金鎭浩) 중위는 지상으로 급강하하고 있었다.
차디찬 영하의 암흑 속을 급강하하며 그는 다급히 립코오드를 잡아당겼다. 낙하산이 활짝 펴졌다. 순간 몸뚱이가 허공에 탁 멎는 듯한 충격을 박았다. 그러면서부터 무척이나 초조한 순간 순간을 겪어내기에 그는 숫제 눈마저 찡그려 감고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체념에서였지만 기실 눈을 뜨나 안 뜨나 시계(視界)는 칠흑의 허공이었다.
무척이나 맵고 거센바람 ――이기보다 마찰되는 공기――이 몸뚱이를 치훑을 뿐이었다. 그 거센 바람은 비행기를 탈출할 때 그가 당황하여 캐노피에 부딪쳐 비행 헬멧이 벗겨진 맨머리의 머리칼을 치솟게 했다.
그런 경황 속에서도 그에게 깊이깊이 메아리쳐 오는 소리가 있었다.
‘하필이면 비행기 조종사의 아내가 된담’
쾅―.몸뚱이가 지상에 부딪치는 충격을 그는 한참만에야 의식했다.
무사 착륙, 착륙이라기보다 숫제 충돌이었다. 마치 높은 지붕에서 맨 몸으로 떨어진 것만큼이나 충격이 심했다. 온몸이 으스러지듯 아팠다. 그는 한참 동안 고통을 이기지 못해 거동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낙하한 지점은 다행히 어느 산기슭 편편한 땅바닥이었다. 그래도 얼어 굳어 돌덩이나 다름없는 땅바닥이었으나 서너 뼘이나 눈이 덮여있었다.
그는 애기(愛機) 무스탕을 탈출할 때 이미 자기 몸뚱이가 성해나리라고는 바라지도 못했었다.
운수 사나워 거친 바윗덩이에 떨어져 몸뚱이가 박살이 되거나, 나뭇가지에 몸뚱이가 걸려 그대로 실신하고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는 많이 들은 터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경우를 피할 만한 행운을 지니고 있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낙하한 지점은 편편한 땅바닥. 그가 낙하 훈련을 제대로 받은 익숙한 다이버라면 눈이 푹신하게 쌓인 땅바닥에 떨어지고서도 발꿈치와 궁둥이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안 받았을 것이다.
그는 파일럿 생활 일 년 남짓한 동안 아직 한 번도 낙하해본 경험이 없다. 내 언제 조난당할 때가 있으랴는 자만과, 그보다도 게으른 습성에서 파일럿들에게 때때로 시행되는 점프 훈련을 요령 좋게 피하곤 했었다.
그는 한참동안을 낙하산의 라이자를 단단히 움켜잡은 채 옴짝도 하지않았다. 옴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냥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다섯 걸음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 눈으르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래도 인가(人家)의 기척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를 수색하는 적병들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곳은 위험 했다.
그는 억지로 몸을 가누며 일어났다. 그는 적지(敵地)에 조난한 파일럿이 마땅히 해야 하는 민첩한 수습 활동을 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서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팔다리를 건성 놀려봤다. 몹시 얻어맞은 것 모양 온몸이 뻐근하고 거동이 부자유스러웠다.
그는 천천히 파일럿의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지상에서는 무용의 물건일 뿐 아니라 가장 표적이 되기 쉬운 낙하산을 거둬치워야 했다.
그 작업은 처음부터 수월치가 않았다. 낙하산의 한쪽 끝이 키 두곱쯤 되는 나뭇가지에 걸려 걷혀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무척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껄이는 말소리가 들렸으나 심한 바람소리에 묻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군대이든 민간인이든 적지(敵地)의 사람들인 만큼 무조건 경계해야 했다.
그는 무척 난처했다. 낙하산을 거둬칠려면 나무에 올라 낙하산이 걸린 가지를 꺽어야 했다. 그 작업을 말소리가 들릴 정도의 저쪽이 모르도록 해치우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낙하산을 그냥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적에게 낙하 지점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다.
그는 한참동안 기척나는 곳에 귀를 기울여봤다. 수색대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나무에 기어 올라갔다.
낙하산이 걸린 가지는 밑동이 어른 팔목만큼이나 굵었다. 그는 잭 나이프로 가지 밑동을 자르기 시작했다. 자세도 편치 않으려니와 소리 죽여가며 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으스스 오한에 떨던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들어 갔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비한 끝에 겨우 나뭇가지가 당기면 휘어질 정도로 베어졌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 발돋음하며 나뭇가지를 잡아 휘었다. 웬만한 소리는 심한 바람곁에 묻혀버리지만 그래도 잎이 스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밑에서 조심조심 받쳐들어야 했다.
칼자루를 잡았던 손바닥이 장갑을 끼었으나 심한 추위에 겹쳐 쓰라렸다. 그토록 고심한 끝에 겨우 나뭇가지를 땅에 휘어내렸다.
부시럭 소리가 몹시 났으나 바람소리는 그보다 더 요란해서 멀리는 안 갔다.
그는 급히 낙하산을 거둬멨다. 그리고는 실물(失物)이나 흔적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펴 다듬은 다음 그곳을 떠났다.
김진호 중위는 우선 북쪽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웅퉁붕퉁한 골짝을 더듬어나가 산비탈에 이르렀다.
그는 산비탈을 올라갔다.
남쪽으로 향해 날던 그의 무스탕기는 그가 탈출하고서도 한참 동안은 그대로 주인 없이 비행하고 있었다.
그자 지상에 착륙할 때까지의 오랜 동안 날아갔으니까 아마도 이삼 킬로미터 이상은 넉넉히 할공 비행을 하다가 어느 산마루에 충돌했을 것이다. 멀리 산너머 하늘이 번쩍하는 섬광에 이어서 굉장히 요란한 폭음이 은은히 들려왔었다. 지상 거리로는 산 몇 개를 넘어야 했다. 그러니까 적의 수색 범위에선 벗어난 셈이지만 그래도 더 안전히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적이 탈출한 조종사를 수색한다면 기체의 추락 현장에서 그 부근과 그 남쪽을 수색할 것이다. 그러니까, 추락 현장에서 되도록이면 멀리, 되도록이면 북쪽으로 일단 피하는 것이 안전했다.
그는 눈구덩에 빠지고 미끄러지고 하면서 때로는 무성한 나무숲에 긁히고 들이받치고 하면서 산비탈을 올라갔다. 가면서 나침반(羅針盤)을 꺼내봤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야광침(夜光針)이 짐작한대로 가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온몸이 후줄근히 땀에 젖어 산마루에 이르렀다.
몹시 피로했다. 우선 사방을 경계하고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눈바닥에 털썩 맥을 놓고 주저앉았다.
나무와 바위가 널린 둔덕바지, 당장은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 정작 위험이 닥칠 때 민첩하게 피신 활동을 하자면 충분한 기력을 남겨놔야 했다.
다리를 뻗고 푹 쓰러지고만 싶었다. 무척 배가 고팠다. 그는 우선 할 일을 해놓고 봐야 했다.
그는 엉금엉금 무릎으로 기어 주위를 더듬어 살폈다. 바위 틈새에 수북이 쌓인 눈을 손으로 파헤쳤다. 가죽 장갑이 후줄근히 젖어 들었다.
그는 파헤친 구덩이에 낙하산을 묻고 다시 눈을 덮었다. 흔적이 안 남도록 주위를 대충 다듬었다.
나일론으로 짠 길고 질긴 낙하산 줄을 따로 몇 가닥 뽑아 간수했다. 조난당한 파일럿이라면 으레 그런 것을 필수품으로 간수해야 된다는 교관(敎官)이나 선배들의 말을 많이 들어 익힌 터이지만, 기실 당하고 보니 언제 어디서고 요긴하게 쓰여질 성 싶었다.
그는 곧 다음 작업을 착수했다.
등에 지고 있는 구명대(救命袋)를 열어 조사해 봤다.
잔뜩 흐려 깜깜한 하늘. 깜깜한 어둠 속에 비장품들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갑낀 손으로 대충 더듬어봐도 무엇들인지 다 알 수 있었다.
휴대용 라디오 송신기 하나, 구급약품 상자와 비상용 식량 상자가 각각 하나, 이밖에 간편하게 접힌 고무 보트, 모조 고기밥이 달린 낚시 바늘, 모기나 독충(毒蟲)을 막기 위해 몸에 바르는 방독액(防毒液), 우군 비행기서 신호할 때 쓰이는 내광통(內光筒), 신호경(信號鏡) 따위가 들어 있었다.
휴대용 라디오 송신기는 보턴만 누르면 <채널D> 표준주파로 SOS 신호를 자동으로, 또는 구급신호를 수동으로 보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식량상자에는 쇠고기와 감자를 버무린 통조림 두 통과 후춧가루, 소금, 설탕, 성냥, 담배 따위가 납봉(鐵封)되어 있었다.
구금약품 상자에는 머큐름, 옥도정기, 페니실린, 모르핀 주사약, 가제, 붕대 따위가 겨우 쓸 만큼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 말고도 열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호주머니가 비행복에 달려 있으며 그 호주머니마다 넣기 알맞는 잭나이프, 볼펜, 초컬릿, 담배, 성냥,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는 필요 없는 고무보트와 낚시, 방독약 따위를 다시 눈을 파헤치고 묻었다.
그에게는 고무보트나 낚시나 방독약보다토 한 장의 담요와, 한 벌의 메인 웨이스트, 한 병의 동상 예방약이 당장 아쉬웠다.
꼭지만 따면 저절로 바람이 들어가 물에 띄울 수 있는 고무보트, 심심치는 않게 고기가 물린다는 낚시, 몸에 바르기만 하면 세상없어 독한 벌레도 덤비지 못한다는 방독약, 교관이 자랑처럼 용도와 용법을 일러주던 그 우수한 장비들을 왜 하필이면 때없이 챙겨줬는지, 보급장교놈들의 무성의가 괘씸하려니와 이제까지 한 번도 구명대를 조사 해본 일이 없었던 자신이 새삼스레 후회도 되었다.
그는 물건을 구명대에 간편하게 챙겨 넣고, 라디오 송신기만을 남겨놨다. 배터리를 송신기에 연결해 놓고 버튼을 눌렀다. 1.5볼트 배터리의 전력이 다 소모될 때까지 마냥 ㅅ가ᅟᅵᆫ호 가게 마련인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상 레이다 기지까지 주파가 미치는 것인지, 아니면 대공 신호만 가능한 것인지 송신기의 성능을 알지 못했다. 그는 평소 그런 것에 무관심했고, 교관의 교습에 귀기울이지도 않았었다.
그는 무응답의 신호를 마냥 보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적의 수신기에 포착(捕捉)될 위험도 많지만, 그보다도 그리 수명이 길지 못한 배터리를 아껴야 했다.
멀리서 유효 파장거리 밖에 비행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주파수가 다른 적기인지……, 그는 신호 보내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산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산 하나쯤은 더 넘어야 마음 놓일 것 같았지만, 어차피 추워 견딜 수가 없어 좀 거동을 해야 했다.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팔목의 시계는 야광침이 없어 시간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탈출한 지 세 시간은 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기지에 귀환하려면 시간이 밤 열 시. 돌아가던 중 사고가 났으니까 지금쯤 밤 한 시 가량이 되었을 게다.
그는 자기의 비행기가 적의 대공포화에 맞았는지, 아니면 미그기의 기총소사에 맞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기체 후미에 무엇인가 부딪는 가벼운 충격을 의식했을 뿐이었는데 캐노피 밑의 위험신호등이 탈출을 재촉하고 있었다. 반짝반짝 빨간 불이 켜지기 마련인 그 등은 기체에 고장이 났을 때는 자동으로 켜지는 것인데 그는 그래도 한참 동안은 조종간을 잡고 있다가 엉겁결에 탈출했다.
애당초 달빛조차 없는 깜깜한 밤의 적지 출격은 무모한 것이었다. 야간비행을 한 경험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구름 낀 밤만은 피해야 했다. 그러나 임무는 때를 가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편대는 폭격이 목적이기보다 적 후방기지의 야간 보급상황을 정찰하고 경우에 따라 위협 폭격이라도 할 임무를 띠고 밤 여덟 시를 기해 기지를 출발했었다.
삼십 분 만에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무스탕 네 대로 편성된 비행 편대는 종열비행을 하며 일제히 조명탄을 투하했다. 삽시에 목표지점이 대낮 같이 훤했다.
마치 개미떼가 놀듯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편대장기가 급강하하여 저공비행으로 지상을 정찰했다. 그동안 남은 세 대의 비행기는 그대로 높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지상에 위장한 트럭의 행렬과 허둥지둥 당황하고 있는 무리들이 여실히 보였다.
편대장기가 기수를 치켜 급상승해 왔다. 그동안 '세 대의 비행기는 제이의 조명탄을 투하했다. 주위는 한층 더 훤해졌다.
편대에 돌아온 편대장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수송차량 이동중. 공격 개시―”
편대장기를 선두로 차례차례 급강하하며 표적을― 겨냥했다. 일번 기가 선두의 트럭을, 이번 기는 다음 트럭을, 삼번 기, 사번 기의 순으로 각기 표적에 로켓탄을 발사했다.
잇달아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차량에 만재한 탄약이 연쇄폭발을 했다. 콩 볶듯 폭음은 계속되었다.
편대는 급강하, 급상승, 선회비행을 되풀이하며, 장비한 여섯 문의 로켓탄과 두 개의 네이팜탄을 모조리 내리 퍼부었다. 낮에는 분명히 끊어져 있던 콘크리트 교량이 어느새 복구했는지 멀쩡히 이어져 있으며, 화물자동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네이팜탄에 맞아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편대는 마지막 기총소사를 하고 유유히 기수를 돌렸다. 흔히 있음직한 대공포화도 미그기의 습격도 없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는 지상에 안하무인의 활개를 치고 쾌재를 부르며 남하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적의 탐조등에 포착되었다. 하나둘 휘젓는 기다란 광선 줄기는 어느새 수십 가닥으로 늘어 편대에 집중되어 왔다. 그와 함께 지상에서 고사포를 쏘기 시작했다.
편대는 급상승하였다. 탐조등은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으나 대공포의 사정거리는 벗어나 안심했다.
적의 대공포를 조롱하듯 자꾸 고도를 높이며 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예광탄 몇 줄기가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런가했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미그기 두대가 머리위를 스쳐 앞으로 지나갔다.
편 대는 당황했다.
“각자 개별 비행하라―.”
편대장이 명령했다.
프로펠라 추진의 무스탕으로는 제트 추진의 미그와 적수가 되지를 못했다.
편대장기는 수십 줄기 탐조등이 깔린 밑으로 급강하해갔다. 그도 편대장을 따라 내려갔다. 미그기에게 쫓기기보다는 차라리 대공포화를 뚫고 나가는 게 더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저공(低空)일수록 탐조등이 조명 범위가 좁아 빠져나가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공포를 얕잡아본 것이 큰 오산이었다. 의외루 적의 화력은 맹렬했다. 그는 기체의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부터는 거의 자포적인 돌진을 감행하여 간신히 탐조등을 벗어났다.
그때는 편대장기도, 각기 흩어진 다른 두 동료기도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타이거, 타이거…….”
그는 우군을 불러봤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응답 대신 머리 뒤의 위험 신호등이 번쩍이며 기체의 고장을 알려줬다.
그는 계속해서 위급산호를 보냈다. 그러나 끝내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한 채 탈출간(脫出稈)을 잡아당겼다. 캐노피가 벗겨지며 몸뚱이가 기체에서 십 미터는 실히 튀어 올랐다가 포물선을 그으며 급강하 했다.
그는 다급히 낙하산의 립코드를 잡아당겼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생명을 허공에 맡긴 채 체념했었다.
그러나 무사히 착륙했으며, 무사히 구조받아 귀환해야 했다.
그는 산비탈올 내려가 계곡을 지나 다시 산비탈을 올라갔다. 먼저 산보다도 더 가파르고 더 험했다.
동녘 하늘이 훤히 트여올 무렵, 김진호 중위는 높다란 산마루에 올라왔다. 근방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었다. 두루 싸인 높고 낮은 산봉우리와 갈래진 골짜기, 멀리 트인 들판을 두루 감제(瞰制)할 수 있었다.
산마루 능선 줄기에는 드문드문 묵은 산병호(散兵壕)가 있었다.
그는 산병호에 들어갔다. 바람막이도 되었고, 밑을 잘 살필 수 있는 위치여서 한차례 쉴 자리로는 십상이었다. 드문드문 구름이 끼였으나 트인 날씨였다.
그는 우선 한잠 자기로 했다. 몹시 졸리고, 몹시 배가 고팠다. 그는 초콜릿을 씹으며 잠을 청했다.
그는 금세 잠들었다. 그러나 금세 잠이 깨었다.
요란한 폭음이 산마루를 뒤흔들었다. 제트기 편대가 머리 위 높다랗게 날으고 있었다. 우군기였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급히 송수신기를 꺼냈다.
UN군이나 한국군에게 표준 주파로 쓰이는 채널D로 구급신호를 보냈다. 무응답이었다.
그는 송수신기를 집어치우고 급히 신호경을 꺼냈다. 그러나 이미 늦였다. 동녘 하늘에 겨우 솟아오른 해와 북녘 하늘 멀리 달아난 비행기 사이의 반사각도가 당치도 않았다.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도 그는 몇 번이고 반사경을 조작했다. 끝내 헛수고였다.
그는 맥이 확 빠졌다. 몹시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그는 식량 소지량을 다시 조사해봤다. 감자와 쇠고기를 버무린 통조림이 두 통, 초콜릿이 두 쪽, 구조될 때까지 그것으로 유지해야 했다.
벼르자면 두 끼 분은 되었다. 이미 한 끼는 굶었으니까 지금 아침을 먹고 점심은 굶는다 하면 저녁때까지 하루는 견딜 수 있겠다.
그는 통조림 한 통을 땄다. 후춧가루와 소급을 쳐서 마른 목을 눈을 뭉쳐 씹어 적시며 먹었다. 식욕에 비해 택도 없이 모자랐지만 참아야 했다.
대신 하얀 눈을 뭉쳐 물대신 밥 대신 씹어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을 떠났다.
나무가 무성하고 지대가 높아서 사방을 경계하고 은신하기는 좋았지만 구조 장소로는 마땅치 않았다. 그는 능선 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이제까지의 산보다 험하지는 않았으나 이제까지보다도 더 가기가 힘겨웠다. 그만큼 그는 지쳐 있었다.
가면서 가면서 몇 번이고 쉬곤 했다. 처음으로 담배도 피웠다. 담배는 쭈그러진 대로나마 피울 수는 있었는데 누진 성냥이 불이 잘 일지 않아 애먹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펑퍼짐한 둔덕 위에 이르렀다. 사방을 경계하기도 좋고 우군 헬리콥터에 구조되기도 좋은 장소였다. 그는 이곳에서 견딜 만큼 견뎌보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더는 거동할 수 없을 만큼 지쳤다.
그는 눈바닥에 벌렁 누워 우군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무전연락은 단념했다.
몹시 질기고 방한(防寒)과 방습(防濕)을 겸해 만든 비행복은 눈 위에 그냥 뒹굴어도 한기가 몸에 스미지는 않았다. 손발이 몹시 시리고 귀뿌리는 이미 감각을 잃을 만큼 얼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자 누진 성냥으로 불을 붙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을 때 머리 위로 우군 비행기 편대가 날았다.
태극표지가 선명한 우군 비행기일 뿐 아니라 여덟 대 중 두 대는 어제 같이 출격했던 동료기임을 넘버 표지로 알 수가 있었다.
그는 급히 무전신호를 보냈다. 응답은 없었으나 있든 없든 자동 신호를 보내면서 신호경을 꺼냈다.
마침 신호경을 쓰기에 가장 알맞는 위치에 해가 떠 있었다.
그는 햇빛을 거울에 받아 비행기 쪽에 반사 광선을 보냈다. 비행고도가 높아서인지, 이쪽의 신호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최후의 신호 수단인 내광통(內光筒)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내광통을 꺼내 발사 준비를 하는 동안 이미 비행기 편대는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가끔 구름이 햇볕을 가려 신호가 제대로 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선호를 받고서도 그냥 지나친 것 인지……
그 자신 이제까지 편대비행 중 목포 임무가 따로 있는 이상 지상을 주의해 본 적은 별보 없었다.
그는 언제라도 쉽게 발사할 수 있도록 내광통을 준비해 놓고 다시 그 자리에 벌렁 누워 우군기를 기다렸다. 편대 가운데 어제의 비행 동료가 있으니까 곧 구조하러 올 것 같았다. 편대장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멀리서 고사포탄의 공중파열음이 간단없이 들려왔다. 매운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그는 조난당한 조종사가 곧잘 헬리콥터에 의해 구조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구조되어 돌아왔다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이대로 구조를 기다리기보다는 한 걸음이라도 남쪽으로 내려가 우군 진지를 찾아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기도 했다.
비행기 편대가 또 머리 위에 날았다. 아까의 편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내광탄을 발사했다. 하얗코 빨간 연기가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었다.
그는 계속해서 모두가 세 발인 것을 다 쏘았다.
적지에서 내광탄을 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지만 그는 너무나 절박했다.
드디어 편대 중에서 한 대가 따로 처져 그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그는 냉큼 라디오 송신기보 자기의 소속 관등 성명을 알렸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대신 알았다는 듯 머리 위를 선회하기만 했다.
그는 그제서야 자기의 라디오 송신기가 고장임을 알았다.
비행기는 머리 위를 선회하다가 산 밑으로 급강하하며 기총소사를 했다.
그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산 밑 여기저기서 비행기에 응사하는 소총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내광탄 연기를 보고 몰려오는 적병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사방에 적이 깔려 있는 한가운데 이때까지 있었던 셈이다.
비행기는 몇 번 기총소사를 하다가 기수를 돌려 남쪽 하늘로 사라져갔다.
그는 다급히 은신처를 찾았다. 적병들이 있는 반대쪽 기슭에 무성한 나무숲이 깔려 은신처로는 가장 적합했으나 그는 그곳이 내키지 않았다. 가장 숨기 좋은 곳은 그만큼 수색대상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병들이 올라음직한 곳으로 마주 내려갔다. 얼마 안 가서 적병들을 발견했다. 십 미터 전방에 무장병 십여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바위를 방패삼아 엎드렸다. 최악의 경우에는 웅전할 각오로 권총을 겨누어댔다.
적병들은 십 미터 옆을 그냥 스쳐가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었었다. 적병들이 뒤돌아보면 눈에 띌 위치에 그는 그냥 엎드려 있었다. 다행히도 적병들은 저희들끼리 떠들며 그가 있었던 마루턱으로 올라갔다.
그는 적병들이 보이지 않자 급히 산비탈을 내려갔다. 계곡을 지나 건너쪽 산으로 들어갔다. 되도록이면 무성한 나무숲을 골라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건너쪽 산에서 소총소리가 몇 번 났다. 아마도 찾다 찾다 못 찾겠으니까 아무데나 대고 위협사격을 하는 모양이었다.
김진호 중위는 산마루에 이르렀다. 서산에 기우는 저녁 해가 구름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다. 낮에는 멀쩡하던 하늘에 잔뜩 구름이 끼여가고 있었다.
산마루는 아직 훤하지만 내려다뵈는 골짜기는 어느새 짙은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북녘으로 발 밑에 내려다뵈는 산기슭에 백여 호 남짓한 마을이 있었다. 드문드문 저녁 연기가 솟아오르고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도 보였다.
그는 더 이상 북향하는 것을 단념 했다.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따라 내쳐 걸었다. 어둡기 전에 마을이 가까운 이곳을 멀리 피해야 했다. 그는 묵은 산병호가 널린 산등성을 몇 개 넘었다.
비행기 편대가 날아갔으나 그는 신호하는 것을 단념·했다. 이제까지의 실패에 비추어 보아 무모한 짓이었다.
그는 구출될 가망이 없을 경우 스스로 적지를 탈출할 방도를 생각해둬야 했다.
이곳에서 우군진지까지의 지상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숱한 산을 넘고 들을 건너야 하며, 사고 없이 내쳐 간다 해도 일주일은 넉넉히 걸리는 곳, 게다가 무사히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열에 하나도 어려웠다.
휴대식량은 한 끼 먹을 것도 되지 않았다.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하나 남은 초콜릿을 씹으며 내쳐 산등성을 타고 갔다.
되도록이면 멀리 동쪽으로 갔다가 적당한 지점에서부터 남하할 작정이었다.
낙하지점에서 우회하는 것은 적의 수색망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니까 그만큼 시간과 거리를 밑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날은 완연히 어두워졌다. 하늘은 잔뜩 구름끼어 별 하나 뵈지 않았다.
그는 되록이면 눈 깔린 곳을 피해 갔다. 눈 위를 가더라도 지그자그로 걸어 발자국이 분명치 않게 했다. 그러니까 가뜩이나 험한 길에 시간은 오래 걸려도 행진한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주저앉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곤 했다. 구두 속의 발은 땀이 흠뻑 배어 미끈거렸다.
밤도 이슥히 저물었을 무렵, 그는 평탄하게 뻗어나간 둔덕 밑에 이르렀다. 그는 사람 몸 하나 겨우 드러눕기 알맞은 바위틈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무작정 가기만 하는 것은 위험했다. 전선의 피로를 더는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는 바위틈에 들어가 웅크렸다. 의외로 자리가 편했다. 편할 뿐 아니라 어두워서 살필 수는 없으나 누군가가 먼저 은신하고 있었던 자리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날 새기까지 자기로 했다. 구두를 벗고 흠뻑 젖은 양말을 벗었다. 후끈한 다리가 갑자기 찬바람에 쐬어져 아픈 것인지 시원한 것인지 도무지 감각초차 명료하지 못했다
그는 발에 붕대를 친친 감고 크 위에 다시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는 한 통 남은 통조림을 뜯었다. 땡땡히 얼어 굳어 도무지 무슨 맛인지도 몰랐으나 허기진 공복(空腹)에는 그나마도 아쉬웠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웅크리고 누웠다. 목덜미로 해서 그 위쪽이 온통 추위에 마비될 지경이었으나 워낙 지친 몸에 잠부터 왔다.
거센 바람소리, 멀리서 은은한 비행기 소리……. 독한 위스키를 한 병 단모금에 마셨으면 좋겠다. 따뜻하고 조그마한 계집의 몸뚱이라도 안았으면 좋겠다.
술과 계집은 그의 생활의 일부이듯 그의 분신이듯 그는 주색을 즐겼었다.
출격에서 돌아오면 어떤 수단을 부려서라도 영외에 나가 술을 마시고 계집을 끌어안곤 했다.
함께 출격하던 일행 중 으레 축이 나는 한 두 사람, 그것이 바둑 승부를 겨룰 일이 남아 있는 전우이거나 노름 빚이 청산되지 않은 전우, 또는 계집 사냥 가기로 약속한 전우일 때 그는 심란한 자신을 감당할 수가 없어 술이라도 잔뜩 마셔야 했다.
술에는 반드시 계집이 부수되었다. 한자리에서 봉급을 몽땅 털어내는 젊은 공군 장고에게 계집은 흔해서 걱정이었다.
숱하게는 술을 마셨으며, 숱하게는 계집을 희롱했다. 근무시간, 그것도 출격 시간 외에는 동료간의 봉급털기, 도박과 취흥과 엽색 행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항상 억세게도 운이 좋았다. 도박에서는 반드시 엄청난 돈을 땄다. 백회 이상의 출격에서도 예상 이외의 전과를 올릴 때가 많았다.
많은 전우들, 취홍에 겨워 대로를 활개치며 대성방가하던, 수틀려 카바레의 카운터랑 유리창을 때려 부수던, 장기 바둑 도박을 하다가 약이 올라 주먹다짐을 하던, 영내 막사에서 밤새도록 음담패설(淫談悖說)로 밤을 새던 전우들이 출격 에서 불귀:(不歸)했어도 그만은 기체나 인체에 흠 하나 입지 않고 돌아오곤 했다.
동료들끼리 나선 엽색 행각에서도 그에게는 남보다 빼어난 계집이 차례지 곤 했다.
그토록 숙달하고 빈번한 엽색 행각에서 차례진 계집들에겐 항상 파일럿이 지니는 미구의 공포를 무마하기 위한 육체의 희롱과 학대와 쾌락이 요구될 뿐, 지나구 나면 미련이란 털끝만큼도 없었다.
단지 하나 예외가 있다. 공군장교의 신분 덕분에 한강 도강의 편의를 보아 준 것이 인연이 된 여인, 이름은 미애라 했다.
미수복지구인 서울. 도강증 없이 한강을 건너려다가 헌병검문소에서 되돌아서는 그녀를 그는 운수좋게 발견했으며, 마침 공무로 타고 있는 지프차에 그녀를 태우고 강을 건넜다, 검문 헌병도 공군장교의 선심을 눈감아 주었다.
강을 건너서는 굳이 사양하는 그녀를 굳이 그녀의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녀의 집과, 그 집에 애당초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 있는 그녀의 늙은 어머니, 어린 동생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두고, 거듭거듭 고맙다는 그녀의 치사에 그는 외려 회심의 미소와 정중한 인사를 남겨놓고 왔다.
다음날 그는 영내 장교 주보에서 값진 과자랑 군용담요며 양말이랑 난리 통에 시중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음식물과 생활필수품을 한아름 잔뜩 사들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당황하면서도 반기는 그녀의 환접은 물론, 오랫동안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피난 가 있는 통에 사람 대하기를 어렵게 지냈던 그녀의 노모도 그를 정도 이상 환접했으며, 그의 선사를 무척 고마워했다.
그로부터 그는 틈만 나면 그녀의 집을 내 집 드나들듯 찾았다. ˙노모를 비롯한 가족과 허물없이 친숙해졌으며, 그녀와는 유별히 접촉이 잦았다.
그들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거리를 자주 거닐었고, 때로는 화재를 입어 엉성히 골체만 남은 빌딩 옥상에 올라가 도란도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결국 그는 숱해 겪은 계집들에게 하듯 그녀를 희롱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결코 여느 계집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여기곤 했다.
기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그렇듯 그녀 앞에서는 진지해지곤 했다.
언동이 예의발라야 하고 정중해야 하는 데서 오는 구애감이 그의 방탕한 기질에 도시 번거롭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 여자와의 이것은 결코 장난일 수는 없다는 각성이 막연한 대로나마 앞서 오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알고서도 한편으로는 술마시고 취하고 부수고 계집을 쫓고하는 습성은 여전했지만 그럴 때마다 전에 없던 뉘우침이 가벼운 대로 나마 일곤 했다. 아무튼 공포의 출격과, 안도의 귀환과, 주색과 뉘우침과 막연한 기대와, 막연한 죄의식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끝의 그저께, 그는 장교 면회실에 찾아온 그녀에게 단호히 선언했다.
“떼어버려―”
“…….”
“벌쎄 2세를 갖는 것은 번거롭단 말야.”
몹시 상기되어 주저하지도 않고 내뱉듯한 이 말에 그녀는 그저 파랗게 질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곧 너무 지나쳤다고, 같은 말이라도 그렇게 거칠게 할 것은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 말은 결코 본의는 아니었다고 뉘우쳤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기 조금 전에,
“하필 조종사의 아내가 된담.”
그 말만 듣지 않았어도 그는 그녀에게 그렇게 본의 아닌 말은 하지않았을 것이다.
마악 출격에서 돌아온 그가 면회실에 기다리고 있는 동료의 부인을 만나야 했던 것이 아무래도 불운의 계기였다.
그는 그 부인에게 그녀가 기다리는 남편이 그와 함께 출격했다가 실종됐음을 일러주고 그녀를 전대장실에 인도하는 것이 임무였다.
남편의 불귀를 안 그녀는 자지러지게 흐느꼈다. 그녀가 임신중임을 만삭의 배를 보아 알 수도 있었으려니와, 그녀의 남편인 그의 동료로부터 마누라 자랑과 대한민국 제일의 파일럿 2세가 불원 탄생하게 되노라는 말을 귀 아프게 들어온 터였다.
그는 동료의 불귀가 마치 자기의 책임이기나 한 듯 그녀에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뜩이나 그런 판에,
“하필 조종사의 아내가 된담.”
그와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다른 내객들 중에 누군가가 남의 일이 아니란 듯 불쑥 내뱉았다.
그는 되게 얻어맞은 사람모냥 어리벙벙히 막사에 돌아와 심란한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 관물 상자 속에 감추어 둔 G·I위스키라도 꺼내 마셔야 했다. 아니면 영외에 나가 슬과 계집에 진탕 묻혀 버리기라도 해야 했다.
마악 그러려는 판에 자기에게 누가 면회왔다는 위병의 전갈이었다.
야릇한 예감을 안은 체 면회실에 가봤다. 거기 뜻밖에도 미애가 초조하게 그러나 담담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비장한 결의 끝에란 듯 임신을 알리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만 아찔했다.
“떼어버려.”
망설임은 파일럿에게 금물이었다. 매사에 신속한 결단이 따라야 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그러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심했다. 결코 그녀에게 유복자를 남겨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를 울려 보내놓고 그는 정작 견딜 수 없었다.
무엇인가 자꾸자꾸 미워지고 적개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런 판에 마침 야간 출격이 있어 그는 차례되지도 않은 것을 자청해서 나섰으며, 끝내는 그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전대에서 ‘불사(不死)의 보라매’로 칭호되던 그도 이제는 여지없이 실종자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안다면 지금쯤 그녀의 심상은 어떨까……. 그는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언제 과부가 될지 모르는 각박한 운명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다졌어야 옳았다.
한사코 한사코 살아 돌아가서 파일럿이 아내를 맞을 때 응당 치름직한 그 다짐을 그녀에게 꼭 해야 했다. ‘불사의 보라매’가 이대로 실종할 수는 없었다.
김진호 중위는 잠을 깨었다.
훤한 아침이었다. 싸락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너무나 추워서 그는 잠이 깨고서도 팔다리를 웅크리고 누워 있는 채로 그대로 옴짝을 못 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온통 하얗게 덮인 시야, 한참동안 눈이 부시었다. 그 자신 흠뻑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눈을 털고 일어나 구명대를 챙기고 실물이 없나 바닥을 살폈다. 어제 비워논 깡통이 하나,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똑같은 깡통이 또 한 개가 바닥에 굴렀다.
그는 어제 분명히 하나뿐인 통조림을 땄으며, 공복과 식욕에 미치지 못하는 양(量)을 아쉬워했었다. 그는 바닥을 다시 더듬어 살폈다. 미제 담배 꽁초가 널려 있었다.
이곳에서 도시 담배를 피운 일이 없는 그는 이곳에 자기보다 먼저 머물러 간 사람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의 소유와 똑같은 미제 통조림과 미제 담배, 그는 무척 반가웠다. 아마도 편대장인지도 모른다.
그는 폐물을 눈으로 덮어놓고 다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워낙 지친 몸이 마음 따라 움직여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선행자(先行者)의 발자국은 커녕, 방위를 분간할 수 없이 온통 하얗게 덮인 바닥에 어디로 걸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대충 남쪽이라고 짐작되는 능선 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몇 번이나 뒹굴고 나자빠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눈 내리는 하늘을 쳐다봐야 태양의 위치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무척 배가 고팠다.
그는 능선을 내려와 고르지 않은 들판을 한참 가다가 외딴 오막집을 발견했다.
그는 권총을 겨누어 들고 오막집 앞에 다가갔다.
울도 없고 대문도 없는 방 하나 부엌 하나뿐인 오막사리, 방안에 기척이 있는 것을 보아 빈 집은 아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부엌으로 들어갔다. 크게 입을 벌린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이글거렸으며, 부엌바닥 한구석에 날 고구마가 쌓여 있었다.
그는 고구마를 큰 것으로만 골라 구명대에 잔뜩 담았다.
주인에게 사정을 하거나 권총으로 위협을 해서 얻어가느니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주인 몰래 감쪽같이 홈쳐가는 쪽이 더 안전했다. 그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본의 아닌 살인이라도 해야 할 때에 대비해서 노상 권총을 한 손에 겨누어 잡고 있었다. 다행히 주인은 도적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집을 빠져나와 되도록이면 빨리 되도록 멀리 달아났다.
시름시름 내리는 눈이 얼굴에 차갑고 매우며 그만큼 걸음도 더디었으나 지나온 발자국을 이내 덮어 없애 버리는 이점(利點)이 있어 마달 수도 없었다.
그는 앞에 당도한 강파른 산비탈을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지형은 점점 더 험했다. 겨우 한 걸음을 내딛으면 두 걸음이 미끄러지는 그런 비탈에 몇 번이나 뒹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구급품과 고구마가 잔뜩 든 구명대를 떨구고 말았다. 구명대는 사람이 오르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파른 비탈을 한 없이 내리굴러 멀리 눈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는 그것을 다시 주우러 내려갈 용기는 없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로서는 버틸 만큼 기력을 버틴 다음이었다.
그는 마루턱에 올라와 맥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얼결에 비행복 주머니에 넣었던 자잘한 고구마 두 개뿐이었다.
그는 고구마를 꺼내 두 손에 움켜쥔 채 멍하니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차디찬, 어쩌면 포근하기조차 한 눈송이가 마냥 먼 산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날아 앉곤 했다.
김진호 중위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기력이 미치는 데까지 갈만큼은 가야 했다. 갈 만큼이 아니라 한사코 살아 돌아가 ‘불사의 보라매’를 실증해야 했다. 그보다도 먼저 미애를 만나야 했다.
그는 우선 주위를 살폈다.
바로 산 아래 골짜기에서 눈을 돌렸을 때 그는 움찔했다.
길게 뻗은 산기슭 나무숲에 많은 탄약더미와 화물차가 늘어서 있었다.
그는 이곳 상공을 수없이 지난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냥 지나쳤을 뿐, 적의 보급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기실 비행정찰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만큼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강설을 피하느라고 구름 위 높이 날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우군편의 비행기로 알아 틀림없었다.
그는 새삼스레 무전기가 아쉬웠다. 자신의 구명보다도 적의 탄약고를 우군기에 알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자신이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다면 대공수비도 없는 이곳을 소화운동삼아 때려부술 자신이 있음을 상기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무스탕이 키 스칠 만큼 아슬아슬하게 저공비행을 하며 통쾌하게 모조리 폭파하고야 마는 환각에 잠겨들고 했다.
이 황당한 환각은 환각에만 그치지 않았다.
돌연 무스탕기는 한 편대가 구름을 뚫고 밑으로 내려왔다.
네 대의 비행기는 탄약더미 위를 되풀이 저공순회하다가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골짜기는 탄약더미의 연쇄폭발로 폭음 폭염의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마치 관제탑에서 이착(離着)을 지휘하듯 정신없이 소리쳤다.
“북방으로 기수를 돌려라―. 북방 이십 미터 지점을 때려라.”
이상하게도 그의 이 명령을 따라 편대는 움직였다.
편대는 화물 자동차가 은닉되어 있는 지역에 차례차례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삽시에 검붉은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편대는 위장된 목표물을 정확히 찾아내어 되풀이 되풀이 폭격을 하고는 유유히 구름 위로 치솟아 사라져버렸다.
백 회 이상 출격한 그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아무리 능숙한 조종사라도 은닉한 목표물을 그렇게 정확히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암만해도 지상 유도에 의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목표물이 잘 보이는 이 근방 어디에 편대로 무전 연락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산등성을 더듬어 내려갔다.
등성을 하나 넘어 야트막한 둔덕바지에 사람의 흔적을 보아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엎드려서 거동한 듯한 흔적이었으며, 이곳에서 산 아래 폭격지점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우군기를 유도하다가 폭격이 끝나자 피해서 달아났을 것이다.
남쪽으로 줄기진 능선에 발자국이 깔려 있었다.
그는 발자국을 따라갔다. 혹시 파일럿이 신는 군화 자국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내리는 눈에 덮혀 그 정도를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파 손에 들고 있는 고구마를 깨물어 먹으면서 갔다. 얼어 굶어 잘 깨물어지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허기진 공복에 수월히 받아지지도 않았다. 이가 시리도록 차디찬 것이 목에 걸려 제대로 넘여가지 않았다.
그는 목에 걸린 것을 칵 뱉아내고 다시 발자국을 찾았다.
어느새 발자국은 새로 쌓이는 눈에 덮여 희미해지더니 얼마 안 가서 그나마 어느 쪽으로 뻗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 바를 몰랐다. 한참 동안 주춤거리다가 내친 방향으로 곧장 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는 또 주춤거렸다. 다리가 휘청대고 마구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마치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모양 걸음새가 안전치 못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멀리 남쪽 하늘에 한 대의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것이 하얀 눈발 속에 아물아물 보였다.
헬리콥터는 차츰 가까워지더니 그리 머지않은 건너편 산마루 상공에서 선회 했다.
그쪽 산마루는 이쪽과 등성이가 연해 있어 성한 몸이면 십분 이내에 뛰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선회하던 헬리콥터는 드디어 산마루에 내려앉았다. 누군가 지상에 있던 사람이 헬리콥터에 올랐다. 얼핏 보매 비행복을 입은 것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눈발 속에 묻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헬리콥터는 산마루를 떴다.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고함이기보다 숫제 울음이 터지는 거나 다름없는 절규를 하며,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의 절규를, 그의 허우적임을 아랑곳없이 헬리콥터는 멀리 사라져갔다. 그는 고구마를 움켜쥔 두 손을 허공에 허우적이며 내달리다가 움푹 패어진 구렁 텅이에 푹썩 곤두박혔다.
그는 눈 속에 처박힌 채 오래도록 송장 모양 옴짝을 못했다.
몸뚱이 어디가 아픈 건지 시린 건지 의식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저 천여만여 낭떠러지로 한없이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만에 그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몸을 가늘 수 없을 만큼 발목과 무릎이 아팠다·. 내려꼰칠 때 마디가 부딪혀 상한 모양이었다.
눈 속에 파묻혔던 두 손과 얼굴은 송곳이 박히듯 쓰라렸다.
두 손에 움켜쥐고 있던 고구마는 몰론, 장갑까지 어디에 빠져 박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이곳에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기어코 돌아가고야 만다고 다졌다. 마음만은, 의지만은 그랬으나 몸뚱이가 따르지 못했다.
그는 어디라 방향을 가릴 것도 없이 내치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발목을 삔 한쪽 다리가 제대로 내딛어지지가 않아 그는 소아마비 환자처럼 절뚝거렸다.
몽유병자모양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내걷던 그는 비탈목에 이르러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나 그는 곧 일어났다.
발목을 삔 다리를 더는 내딛을 수가 없어 그는 무릎과 두 팔로 눈덮인 땅을 짚고 비탈을 기어 올라갔다. 수없이 배를 깔고 엎어졌다가는 다시 기곤 하면서 그는 비탈을 올라갔다.
온통 눈범벅이 된 손과 얼굴이 이제는 아프지도 않았다. 오직 가야만 한다는, 가고야 만다는 일념뿐이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서 할 일을 해야 했다.
“미애야, 기다려라. ‘불사의 보라매’는 기어코 가고야 만다…….”
김진호 죽위는 돌뿌리에 무릎이 걸려 푹썩 엎으러졌다. 더는 거동 할 기력이 없어 그냥 엎으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목표하지도 않은,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도 없는 높다란 산등성이었다.
그는 쓸어안듯 눈 덮인 땅을 짚고 있는 두 팔에 문득 야릇한 감촉을 의식했다. 바닥은 무척 견고하고 고르게 판판했다. 선뜩한 예감이 뇌리에 스쳤다. 예감은 뭉클한 기대를 자아냈다.
그는 손으로 바닥의 눈을 헤쳐봤다.
바닥은 사람 하나 얹어놓기 알맞을 크기의 알미늄판이었다. 비행기 날개의 일부임을 크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근을 두루 살폈다. 비행기의 잔해(殘骸)가 널려 있었다. 어느 비행기가 이 산마루에 충돌한 모양이다.
그는 여기저기 눈을 헤치며 흩어진 알미늄 조각을 더듬어 살폈다.
그는 눈 속에서 널찍한 알미늄판을 끌어냈다. 판의 휘어진 모양새를 보아 동체의 일부임을 알 수가 있었다. 거기 쓰여진, 아직도 선명한 기번(機番)이 눈에 띈 순간 그는 그 자리에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R.0.K A27=
A는 전대(戰隊) 표시, 27은 비행기 번호. 다름아닌 그의 무스탕기였다.
그는 자기 몸뚱이가 박살이 난 것처럼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알미늄판을 쓸어안았다.
너무나 서러워, 너무나 억울해 왈칵 울음이 텨졌다.
흐느껴 물결 이는 그의 등때기에 수북히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함께 어스름이 깔려왔다.
-끝-
2016년 7월 18일 읽음
<줄거리 요약>
‘불사의 보라매’라 불리는 조종사 김진호 중위는 행운아였다. 그의 생활은 출격, 술, 여자, 노름의 반복이었다. 자만과 게으름은 그를 나태하게 만들었지만 언제나 행운은 그의 것이었다. 그는 한강 도강의 편의를 보아준 것이 인연이 되어 미애라는 여인과 사귀게 되었고 그녀에게만큼은 진지했다.
마악 출격에서 돌아온 그는 면회실에서 실종된 동료의 부인을 만나, 어쩔 줄 몰라하던 참에 내객들 중의 누군가가 “하필 조종사의 아내가 된담”하고 내뱉는 말을 듣는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임신을 알리러 온 미애를 울려서 돌려보낸다. 그는 착잡하고 불안한 마음에 자진해서 야간 비행에 나선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그는 적기로부터 총격을 받아 적지에 낙하한다. 눈이 쌓인 산에 착륙한 그는 불행에 대한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았기에 당황한다. 구조 신호를 보내고 무전을 쳤지만 무반응이다. 비상식량이 떨어지고 배고픔, 추위, 피곤, 긴장이 그의 기력을 잃게 했다. 그러던 중 적의 탄약보급지를 발견한 우군의 정확한 폭격을 보게 된다. 그는 가까이에 편대장이 있음을 확신하고 찾아 헤맨다.
그때 산마루쪽에 헬리곱터가 산마루에 내려앉아 비행복을 입은 사람을 태우고 떠난다.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그쪽으로 달려가다 구덩이에 빠진다. 안간힘을 쓰며 한참만에 일어선 그는 눈길을 걷다가 주저앉는다. 문득 선뜻한 예감이 뇌리에 스친다. 그는 손으로 눈을 헤쳐 비행기 날개의 일부를 찾아낸다. R·0·K·A대, 그의 애기(愛機) 무스탕이었다. 그는 알루미늄판을 쓸어안고 흐느낀다. 그의 등 위로 수북이 눈송이와 함께 어스름이 깔려왔다.
<해 설>
이 작품은 1957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수상작인 ‘쑈리 킴’ 이래 주로 전쟁이 빚어낸 상처를 소재로 전후의 사회상을 그리면서 인간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면서, 현실에 대처하는 데 있어 깊은 통찰과 성실성을 보여준 작품으로서, 특히 ‘작품의 짜임새와 소재를 다루는 데 보여준 작가의 역량’이 높이 평가되어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대표작이다. 무엇보다도 적지인 산속에 낙하한 후 적의 수색망을 피하여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의 치밀하고도 박진감 있는 장면묘사와 구성에서 단편소설의 정수를 보게 된다. 그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안간힘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생존본능 이상의 강렬한 휴머니즘이 또한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토록 숙달하고 빈번한 엽색행락에서 차례진 계집들에겐 항상 파일럿이 지
니는 미구의 공포를 무마하기 위한 육체의 희롱과 학대와 쾌락이 요구될 뿐, 지나고 나면 미련이란 털끝만큼도 없었던 그가 미애을 알고부터는 ‘전에 없던 뉘우침’과 ‘막연한 죄의식’에 눈뜨면서, 출격 했다가 실종된 동료의 만삭이 된 부인 앞에서 그것이 ‘마치 자기의 책임이기나 한 듯 그녀에게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래서 임신을 알리는 미애에게 “떼어버려.”라고 냉담하게 잘라 말한 데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의 비참에 대한 깊은 연민을 읽게 된다.
“미애야, 기다려라. ‘불사의 보라매’는 기어코 가고야 만다…….”
실신 직전에 주인공이 보여준 이같은 투혼은 바로 전쟁의 니힐리즘올 극복하려는 지고한 휴머니즘에의 의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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