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1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은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에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하여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함으로서 이전 세대들이 전개해왔던 반일 · 항일독립운동도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도 물론 무장을 갖추기는 했지만 일사분란한 지휘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각 무장독립운동단체들간의 상호 연계를 하여 대일무장투쟁을 벌이지 못했다. 결국 몇몇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존재를 했었지만 산발적이고 일시적인 항일전투밖에 벌이지 못했다. 결국 바닷가 모래알과 같이 흩어져있었으니 일치단결하여 투쟁을 못하고 희생은 컸지만 성과는 미미하였다. 물론 민족주의독립운동계열에서 벌인 몇몇 전투가 큰 성공을 거둔 사례들도 있지만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고 확산을 하지 못하다 보니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민족주의독립운동계열은 1920년대 초 이후부터 벌어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극심한 탄압과 독립운동계열의 분열 및 통합이 없었던 탓에 19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그 명맥만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쳤다.
반면 공산주의계열의 반일 · 항일운동가들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변변한 항일투쟁을 벌이지 못했다. 반면 그들은 극심한 교조주의와 종파사대주의에 빠져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운명을 위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 거부감을 가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다 낡아빠진 봉건잔재인 《민족》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파업이나 태업 그리고 기업가들이나 일제에 항거를 하는 것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공산주의혁명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전 공산주의 세대들이 명목상 내세운 주장이 진정한 공산주의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재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자신들 개인이나 혹은 집단의 이익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무산자계급을 동원하여 큰 항쟁을 일으키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당의 신임을 받아 국제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그들은 좌경모험주의와 심각한 분파주의에 빠져들어 있었다. 먼저 자신들이나 집단이 유일한 조선의 공산당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상대파들에 대한 모해와 모략을 일삼았으며 한 발 더 나아가 테러까지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 중반이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상을 보면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이 서로 주도권다툼에 몰두를 하였다. 당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분열주의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3인1당이요, 5인1파라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이와 같이 교조주의와 종파사대주의에 찌들어있는 이전의 공산주의자들이니 무슨 가열찬 항일투쟁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항일투쟁보다는 자신들 세력확장에 혈안이 되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그들의 좌경모험주의로 인해 1930년과 1931년 나라를 빼앗기고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낯 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땅에 이주하여 갖은 천대와 설움속에 살아가던 조선인들을 폭동에 내몰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상당하고 감옥에 끌려갔는가. 결국 이로 인해 반일 · 항일운동은 혹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반일 ·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타격만 입혔으니 그들의 항일운동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민족주의계열과 이전 공산주의세대들의 반일 · 항일운동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그들이 조선의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민족주의계열이건 공산주의계열이건 이전의 반일 · 항일세력들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투쟁의 방향을 잡고 그들과 함께 투쟁을 이끌어가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일부 상층부의 의사와 의지에 따라 운동을 벌였으니 결국 기초가 없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은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세력이건 공산주의계열의 운동 모두 시작단계부터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반면 192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세대들은 민족주의계열과 이전 공산주의계열에서 벌여왔던 반일 · 항일운동의 실패에서 큰 교훈은 찾고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의 반일 ·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나하나 철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해나갔다.
먼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반일운동을 진행하였다. 위에서 민족주의계열이나 공산주의계열의 반일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혁명운동은 분열과 분파에 찌들어 일사분란하고 강력한 반일 · 항일투쟁을 벌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이전 세대들의 반일 · 항일독립운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세대들은 이에서 교훈을 찾고 조선의 젊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일치단결하여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론은 짓고 착실히 준비를 해나갔다.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의 반일 ·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결정을 하였는바 이는 손에 무장을 잡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또 유격대를 조직지도 해나갈 수 있는 《당》을 꾸리는 것이었다. 1930년과 1931년 중반까지 벌어진 각종 명목의 폭동의 후과를 가시고 파괴된 조직을 복구 · 확대하고 당 조직을 꾸리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를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쉴 새 없이 방문을 하였다.
우리는 이미 이전 장들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분석을 하였다. 이번 장에서는 이를 요약 종합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사업과정과 1932년 초부터 동북만과 남만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반일인민유격대》 《반일유격대》에 대해 결론을 짓기로 한다. 이번 장에서는 필요할 시 이전에 인용한 연변조선족학술자료, 남측자료, 북측 자료 등 모든 자료들을 짧게 인용하여 종합적인 분석을 한다.
2. 1930년 《5 · 1폭동》 《5 · 30폭동》 《8 · 1폭동》에 대한 종합
《5 · 1폭동》은 1930년 5월 1일 국제노동절을 기념하여 대부분 조선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폭동이었다. 간략히 사건 개요를 보면 아래와 같다.
1) 《5 · 1폭동》 《5 · 30폭동》
《5 · 1폭동》은 1930년 5월 1일 국제노동절을 기념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자료에는 《투쟁》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난 번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을 때 연변조선족학자들인 이송덕 선생이나 최후택 교수는 《투쟁》라고 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였다. 하지만 북측 자료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투쟁》의 결과가 얻은 것은 전혀 없고 후과가 너무 크기에 《폭동》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 결과 뿐 아니라 그 폭동을 이끈 지도세력들의 운동방향설정과 투쟁목적이 대부분의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며 매우 제한적 이었다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할 수 없다.
《5 · 1폭동》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료를 짧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 1930년 4월 24일, 승지촌 오원세네 집에서 “ ‘5.1’에 대한 사업결의”를 집행하러 연변에 파견되여온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와 마준,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 왕경(일명 리완룡), 위원 이복해(伊福海), 조선공산당(엠엘파)동만도책임자 김근, 원 조선공산당 당원 김철, 엠엘파계렬의 고려청년회 동만도책임간부 등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붉은 5월투쟁”행동계획을 구체적으로 짜고들었다. 우선 이번 “5.1”투쟁을 지도하기 위하여 연변당부와 본 특파원은 4월 24일 “5.1행동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책임에 김한봉(金漢峰, 전임 엠엘계 연변책임), 위원에 박xx, 만(萬)xx(전임 엠엘계 Y책임), 김평철(金平鐵, 폭파총지휘)외 2명의 중국동지(이름 미상)들로 구성되였다.”(김철수《연변항일사적지연구》)
1930년5월, 중공연변특별지부와 “5.1투쟁행동위원회”의 령도밑에 연변 각지의 농민, 로동자, 학생들은 반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파업, 동맹휴학, 시위행진 등을 성세호대하게 단행했다.
“5.1”투쟁은 륙도구(룡정)로동자와 학생들의 파업, 동맹휴학을 선두로 일어났다. 당시 륙도구에는 200여명 로동자가 있었는데 이번 투쟁에 200여명의 로동자들이 한결같이 참가했다. 이들 로동자들은 철도로동자 30여명외에 양말, 인쇄, 목상(木商), 목공, 철공 등 로동자들이였는데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중앙학교(원 보통학교)를 제외한 20여개 학교에서도 모두 동맹휴학을 하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위에서 인용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봐서도 알 수 있지만 《5 · 1폭동》 연변으로 특파되어 온 중공당만주성위와 그를 따르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인 엠엘파가 주동하여 일으켰다. 이미 전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 · 1폭동》은 중공당의 좌경모험주의자인 이림삼 노선을 따르는 엠엘파가 일으킨 폭동이었다. 따라서 폭동은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립삼노선에 대해서는 중공당에서도 후일 좌경모험주의라고 공식적으로 평가를 하였다.
《5 · 30폭동》에 대해서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아주 짧게 인용하도록 한다.
❝ “붉은5월투쟁”이 심입됨에 따라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5.30”참안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폭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모든 행동은 계획대로 진척되였다. 하여 1930년 5월 29일 밤, 삼도구충신장(지금의 화룡시소재지)에서 친일지주 로명화, 김주황의 집을 소각하는 것으로 폭동의 봉화가 지펴지였다. 폭동대오는 이날 저녁 평양려관에다도 불을 놓았다. 청파호부근에 파견된 폭동대오는 부근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전선대를 찍어넘겼다. 삼도구지대의 폭동을 서막으로 투도구, 룡정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폭동이 료원의 불길마냥 타오르기 시작했다.
……
간담이 서늘해난 일제는 피비린 탄압을 감행했다. 일제경찰은 김근 등 67명을 체포하고 39명을 서대문형무소에 압송하였다. 폭동책임자인 김근은 사형에 언도되고 소성규는 무기형, 황진영은 10년형에 언도되였다. 이것이 “제4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인용문을 보면 《5 · 30폭동》 역시 중공당 만주성위 연변특별지부의 지시아래 조선인 엠엘파가 주도하여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또 인용문에도 언급되어있지만 《5 · 30폭동》의 후과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 있다. 후과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상세히 분석을 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북측자료를 보면 《5 · 1폭동》 《5 · 30폭동》으로 인하여 새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꾸려놓았던 공식조직 및 지하조직들까지도 혹심하게 파괴가 되었다고 하여 그 후과가 얼마나 참혹했었는지 알 수 있다.
《8 · 1폭동》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를 짧게 인용한다.
❝ “1930년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제2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배하에 ‘혁명세력의 회복기’를 ‘혁명의 고조기’로 오인하고 전국적인 대폭동을 발동하여 ‘한개 성 또는 몇 개 성(省)에서 먼저 혁명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전국혁명승리를 달성, 나아가서는 세계혁명의 승리를 추진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연변에서도 례외없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1930년 8월 1일, 돈화, 액목 지구의 조선인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 그 실례입니다.”
……
중공중앙 “8.7”긴급회의의 “좌”경로선을 계속 집행하고있던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연변의 “붉은 5월 투쟁”을 거듭 긍정하면서 새로운 투쟁을 벌릴 것을 지시하였다.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로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연변특별지부서기 왕경이 돌아왔다. 그는 “붉은 5월 투쟁”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연변의 대중운동을 한걸음 더 추진하기 위하여 “8.1”봉기를 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
민중들의 공격을 받은 지방군벌들은 악에 받쳐 폭동군중들을 참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길림에 “방공사무처”를 설립, 12월에는 “길림성비적사령부”를 신설하였으며 “길림성관민이 공산비적을 방지, 토벌할데 관한 장려 및 징벌규정”, “길림경찰, 보위단의 공산운동방지법” 등 수십가지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륙군보병 제7려단 제19련대와 제13려단 제7련대를 동원시켜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서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8.1”길돈폭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13려단 제7련대 련대장 왕수당은 300여명 전예부대를 거느리고 돈화에 와 본부를 설치하고 지방에 주둔하고있는 공안경찰과 보위단을 모조리 출동시켜 도처에서 폭동군중을 체포하였다. 지방군경들이 초보적통계에 의하면 돈화에 있는 제7련대 본부 창고에 70여명, 교하공안국에 78명 도합 277명이 체포구금되였다. 봉기에서 실패한 폭동대의 대부분은 이미 적들의 탄압을 피하여 부근 산중에 들어가 은폐하여있었기에 구금된 대부분은 무고한 민중들이였다. 8월26일부터 27일까지 지방군경들이 체포한 사람들을 심문한 끝에 대부분 군중을 석방하고 협의가 있는 21명을 계속 감금하였다. 그중 리상수 등 15명은 돈화현성밖에서 군경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였다. 향수하자에서는 12월중순 2명이 살해되였으며 길림시당부의 책임자였던 마천목도 1930년 교하감옥에서 살해되였다. 이번 폭동의 지휘자들인 리형준, 한일광 등은 길림감옥에 압송되였으나 “9.18”사변후 전부 석방되여 연변에 나와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이번 폭동의 실패원인과 의의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중국공산당의 제1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도하에 진행되였기에 모험적이고 맹목적이였다. 중공만주성위와 연변당조직이 나이가 어리고 투쟁경험이 결핍했다. 투쟁의 예봉을 일제침략자들한테 돌린 것이 아니라 지방군벌에게 돌렸다. 한족(중국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지방군벌세력에게 일정한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인들의 반제반봉건투쟁정신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폭동을 통하여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민족평등정책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며 투쟁방향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이번 폭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영향은 길돈지구 조선인들속에 더욱 깊이 침투되였고 조선인들속에서 당조직과 혁명단체가 신속히 확대되여나갔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8 · 1폭동》 역시 인용문에도 나와 있듯이 중공당의 좌경모험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만주성위 연변특별지부의 지시아래 조선공산주의자들인 엠엘파가 주동하여 일으켰다. 이미 본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 장들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주요한 것은 《8 · 1폭동》 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처참한 결과만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인용문 마지막에서도 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가운데 중시할 내용은 “투쟁의 예봉을 일제침략자들한테 돌린 것이 아니라 지방군벌에게 돌렸다. 한족(중국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동원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투쟁의 방향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돌리고 힘을 모았어야 했는데 중국 군벌들이나 지주들과 봉건관료들에게만 집중되다 보니 광범위한 중국인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함으로서 압도적 다수의 군중동원에 실패를 하였던 것이다.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에서는 그래도 백성들이 투쟁의 방향과 중국공산당의 민족평등정책을 잘 알게 되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하였다. 하지만 긍정적 성과를 보기전에 폭동으로 입은 후과가 얼마나 컸었는지에 대해 되돌아보아야 한다.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살해된 사람들이 무려 18명이나 되었다. 살해된 인원이 18명이면 집계에 잡히지 않은 중경상을 입은 사람들은 또 얼마였겠는가.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폭동의 후과는 투쟁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마저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북측 자료를 통해 자세히 분석을 하였다.
이와 같이 1930년에 벌어졌던 《5 · 1폭동》 《5 · 30폭동》 《8 · 1폭동》은 일부 중공당의 좌경모험주의자들이 기획해서 지시를 했고 이를 받아든 좌경모험주의와 종파사대주의 그리고 개인적 야심에 사로잡힌 조선의 엠엘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해서 일어난 폭동이었다.
폭동의 성과는 극히 일부의 군중만이 투쟁의지를 가다듬을 수 있었을 뿐 대다수 인민들 뿐 아니라 반일운동에 뛰어들었거나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마저도 등을 돌려댈 정도로 참혹했다. 또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어렵사리 꾸려놓은 공식적, 비공식적 지하조직마저도 혹심하게 파괴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1930년에 일어난 폭동의 후과는 성과는 거의 없고 참혹했다.
3. 폭동의 후과로 파괴된 조직을 수습 · 확대하기 위한 지도자의 피 타는 노력
1930년과 1931년 중반까지 각 종 명목의 수백여 차에 벌어진 폭동의 후과는 참으로 참혹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어렵사리 꾸려놓은 공식적인 조직은 물론이고 지하조직들마저 노출되어 대부분 잡혀가 처형을 당했거나 철장 속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가까스로 탄압을 피한 인원들마저 모조리 달아나거나 지하 깊숙이 숨어들었다.
이전 세대들인 민족주의계열이나 공산주의계열이 벌이던 반일 · 항일투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높은 단계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준비를 해놓았던 조직들이 혹심하게 파괴되었으니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이를 한시라도 빨리 수습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한시도 쉼 없이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를 다니면서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고 확대하려 피 타는 노력을 하였다.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를 다니면서 조직을 수습복구하고 확대하는 것은 향후에 있게 될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젊은 조선의 반일 · 항일세력의 지도자는 파괴된 조직을 수습하고 확대하기 위해 길림 → 교하 → 하얼빈 → 왕청 → 온성(조선 국내) → 연길 → 안도 → 돈화 등 드넓은 동만지역과 조선 북부국경지대까지 찾아다니었다. 이는 향후 벌이게 될 유격근거지 개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이미 있던 동지들은 더욱더 튼튼히 혁명의 두리에 뭉치게 하였으며 새로운 동지들은 많이 만났다.
폭동의 후과로 파괴된 조직을 수습하고 확대하기 위해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사업 가운데 주요한 활동에 대해서만 몇 가지를 요약하는 의미에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지도자의 조선북부국경 조직사업
지도자는 폭동의 후과로 파괴된 조직을 수습확대하고 당을 꾸리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넘어가는데 있어 조선북부국경지대에 나가 공작사업을 하였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 조선북부국경일대를 매우 중시하였다. 어차피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물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조국독립투쟁을 벌이는 것과 동시에 혁명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조선북부국경일대를 앞으로 벌이게 될 항일무장투쟁에서 중시했던 만큼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온성에서의 사업 역시 대단히 중요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장들에서 상세하였기에 여기서는 요약하는 의미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조선북부국경인 온성에서 지도자의 주요 사업은 당을 꾸리고 항일무장투쟁시 거점으로 만들이 위한 것이었다.
아래에서 북측 주요 내용만을 인용해보도록 한다.
❝ 일단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간도일대를 중요한 전략적거점으로 삼을것을 결심하였다
……
륙읍일대는 리조때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량반들이 정배살이를 하던 고장이였다. 곡식이 바르고 기후가 엄혹한데다가 우두머리들의 구박과 학대가 심해서 변방수비에 동원된 군사들이 여기에 왔다가도 인차 다른 고장으로 달아나버리군하였다. 벼슬자리를 하는자들도 이 일대의 관리로 가라고 하면 다들 끔찍해하였다. 그들은 임명장을 받은 다음에도 여기에 오기가 싫어서 이구실저구실을 붙여가며 서울거리에서 빈둥거렸다. 봉건통치배들이 그것때문에 500년동안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
온성으로 말하면 우리의 영향밑에 1920년대말부터 김준, 채수항, 오중성과 같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한 고장이였다. 우리는 벌써 그때 조선혁명을 발전시키는데서 백두산지구와 온성을 비롯한 두만강연안의 륙읍일대가 가지는 위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일대를 항일혁명전쟁을 위한 전략적거점으로 꾸릴 계획을 품고있었다. 국내혁명을 새롭게 앙양시킬 돌파구도 바로 여기에서 열어놓으려고 하였다.
……
내가 온성지구에 나오게 된것은 국내에 당조직도 내오고 카륜회의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대책도 세워 전반적조선혁명을 확대발전시키자는것이였다.
혁명가의 일생은 대중속에 들어가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수 있고 혁명의 실패는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인민대중속에 들어가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수 있다.
……
나는 거기서 투쟁을 갈망하는 로동자들, 자기들의 운명을 지켜주고 개척해줄수 있는 옳바른 길을 찾아 헤매는 로동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나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내 가슴은 로동계급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싶은 열망으로 불탔다.
나는 그때 철도부설공사장에서 온성출신의 항일투사들인 최춘국, 최봉송동무들과도 처음으로 낯을 익히였다.
……
나는 그때 로동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장투쟁문제, 당창건문제,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도 내놓고 이야기해주었다. ❞
〈세기와 더불어 두만강을 건너 중에서〉
위 인용문에서 중요한 내용은 카륜회의를 관철하는 것, 혁명가들은 인민대중을 믿고 인민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지도자의 온성공작사업 중에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은 든든한 혁명동지들을 얻었다는 점이다. 지도자의 온성공작사업의 목적은 앞으로 벌어지게 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과정, 무장대를 조직지도 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고 모든 사람들을 반일 ·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에 묶어세울 수 있도록 조직원들이 활동을 하도록 지도를 한 것이었다. 또 당시 온성의 노동자들은 항일투쟁과 혁명을 하기 위해 목말라 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모든 문제를 온성을 방문한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시원스레 해결을 해주었다.
지도자는 온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당을 꾸리기 위해 두루봉회의를 개최하였다. 이에 대해 핵심내용만 간추려 인용하도록 한다.
❝ 온성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1930년 10월 1일 두루봉에서 당조직을 무은것이였다.
……
나는 먼저 회의참가자들에게 카륜에서 채택된 로선을 전달하고 그 로선을 관철하기 위해 선차적으로 나서는 과업은 혁명적인 당을 건설하는것임을 밝힌 다음 온성지구에 새형의 당조직을 내오게 되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조직생활과 실천을 통해 검열된 우수한 선진분자들로 당대렬을 부단히 확대강화할데 대하여서와 대중을 반일투쟁에 조직동원할데 대한 온성지구 당조직의 과업을 제기하였다.
나의 제의에 의하여 오중성, 전장원, 전창룡, 최춘국, 최봉송, 최근주동무들이 온성지구 당조직에 가입하였다. 당조직책임자로는 오중성동무가 선거되였다.
……
온성지구에 당조직이 나온것은 국내에서 당건설의 기초를 축성하는 돌파구로 되였으며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을 떠밀어주는데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되였다. 온성지구 당조직의 활동에 의하여 륙읍일대에서는 대중의 의식화, 조직화과정이 빠른 속도로 다그쳐지고 반일투쟁이 앙양되였다.
……
나는 당조직을 결성한 다음 그자리에서 륙읍일대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공작원들과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지도하고 귀로에 올랐다.
……
조국에서 보낸 한주일은 우리가 카륜에서 제기한 혁명로선이 만민이 접수할수 있는 옳은 로선이라는것을 실증해주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우리는 조국의 인민들에게서 우리의 로선을 판정받은셈이였다. 그때부터 온성사람들은 줄곧 우리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
〈세기와 더불어 두만강을 건너 중에서〉
인용문한 두루봉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토의 결정한 내용은 당을 꾸린 것이다. 또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온성에서의 공작사업의 성공은 후일 온성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향 후 벌어지게 될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거점을 꾸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때부터 온성사람들은 줄곧 우리와 운명을 같이하였다.”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조선북부국경지대인 온성에서의 젊은 지도자의 공작사업은 카륜회의 주요 결정사항을 관철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며 당을 창건하였으며 든든한 항일혁명투쟁과정에서 함께 할 동지들을 얻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2) 이상촌을 혁명촌으로
온성에서 공작사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계속해서 연길에서 조직을 복구하고 확대하기 위한 공작사업을 벌여 역시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찾은 곳은 소위 《이상촌》으로 불리던 오가자 마을이다. 오가자 마을에서의 공작사업 역시 매우 중요하기에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주요한 내용만 압축 요약하여 인용해보도록 한다.
❝ 료하농촌을 처음으로 개척한것은 남만지방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이였다. 송석담, 변대우(변창근), 김해산, 곽상하, 문상목을 비롯한 남만의 민족주의세력중 일부가 서부방향으로 방황하다가 료하기슭에서 보짐을 풀었다. 그들은 조선의 리상촌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여기에 300여호의 동포들을 이주시킨 다음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별세상을 꾸리기 시작했다. 우에서 렬거한 다섯세대가 먼저 살았다고 하여 그들이 정착한 고장에 오가자라는 지명을 달았다.
……
한때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자들은 《리상촌》건설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
《리상촌》건설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물은 안창호였다.
……
《리상촌》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당시 독립운동에서 하나의 풍조로 되여있었던것 같다.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장을 만들고 무관학교의 설립으로 실력양성의 소박한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
오자가를 개척한 유지들은 자기들의 리념이나 주의주장과 맞지 않는 이색적인 사상조류가 마을에 들어오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
우리는 오가자를 중부만주일대에서의 민족주의세력의 마지막보루로 보았다. 여기에서 사업을 잘하면 오가자를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만들수 있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북부국경일대에서 농촌마을들을 우리의 영향하에 둘수 있었다.
……
인구의 80%이상이 조선사람이라면 그중 90% 정도는 농민이였다.
……
오가자의 유지들은 대통을 휘두르며 요새 젊은것들의 머리에 딴물이 들어간다고 하면서 료하벌에 사회주의를 끌어들이는 놈팽이들은 뼈가 성하지 못할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간도는 공산당때문에 다 망했다
……
촌공회를 뒤에서 조종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총찰하는 사람은 변대우라는 로인이였다. 그가 마을의 실권자로서 유지들을 조종하였다. 마을에서는 그를 《변뜨로쯔끼》령감이라고 불렀다.
…… 이하 대화 내용 요약
《로인님, 자치기관을 꾸려놓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생활상 편의를 도모하는 마을을 건설한것은 애국적인 소행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마을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독립할수 있겠습니까?》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리며 위엄을 뽑던 로인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눈섭만 씰룩거리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독립은 못해. 자네가 내 아픈곳을 면바루 건드렸네. 〈리상촌〉이라고 만들어는 놓았지만 독립운동에 보탬은 못주고있지. 그래서 나도 고민하고있네. 〈리상촌〉을 건설해서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이국땅에다가 《리상촌》을 건설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로인님들의 노력으로 오가자가 다른 고장에 있는 조선인부락보다 더 살기가 편한 동네로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사람들의 리상이 해결되였다고 볼수는 없다, 우리 민족의 리상은 왜놈도 없고 지주도 없고 자본가도 없는 독립된 조국에서 착취와 압박을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것이다, 그런데 지주한데 빚을 지고 살면서 리상적으로 산다고 말할수 있는가, 왜놈들이 만주로 쳐들어오면 오가자도 무사치 못할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먹는것은 시간문제이다, 왜놈들은 조선민족이 리상적으로 사는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
우리는 이 마을을 현상유지나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위해서 싸우는 마을로, 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자는것입니다
……
그런데 그 후 고려공산당을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공산주의자들 이라는 게 말짱 미친놈들뿐이더란 말일세. 그놈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전부 종파질 뿐이야. 그 다음부터는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오한이 나더군.
……
사실 나는 뜨로쯔끼를 숭배하지 않네. 지금 청년들이 덮어놓고 큰 나라 사람들을 숭배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거네. 뜨로쯔끼면 뜨로쯔끼고 쓰딸린이면 쓰딸린이지 지금 젊은것들은 쩍하면 큰 나라 사람들의 명제를 끄집어내놓고 무엇이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그리 대단한것인가. 쓰딸린의 명제가 어떻고 뜨로쯔끼의 말이 어떻다는것이야 로씨야사람들이나 할 말이지 조선사람이야 조선의 얼을 가지고 제 나라 혁명을 잘하기 위한 말을 해야 할게 아닌가.
……
나는 카륜회의에서 우리가 채택한 로선을 두고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새형의 당과 군대를 내오고 사상과 신앙, 재산정도, 남녀로소의 차이를 뛰여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2천만의 항전으로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나의 말에 로인은 강한 충격을 받는것 같았다. 로인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무으려는 우리의 의향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특별이 환영하였다.
……
변로인의 아들 변달환은 오가자에서 농민동맹책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우리의 지도밑에 반일투쟁을 하였다는 《죄》로 1931년부터 여러해동안 신의주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오가자의 혁명화를 위한 돌파구는 이렇게 열리였다.
……
조선혁명군 대원들은 청년회간부들과 함께 여러 부락들에 나가 반제청년동맹을 내오기 위한 사상동원사업을 하였다. 그 과정을 통하여 자연히 우리의 혁명로선이 청년군중속에 침투되여갔다. 나도 매일같이 청년들과 담화를 하였다.
이런 준비단계를 거쳐 우리는 삼성학교 교실에서 오가자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동맹은 각 부락들에 지부를 두었다. 동맹위원장으로는 최일천, 조직부장으로는 문조양이 선거되였다
……
《꽃파는 처녀》의 대본완성작업에 달라붙었다. 대본이 완성되자 계영춘이 삼성학교에 조직되여있는 연극조성원들을 데리고 형상작업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10월혁명 13돐기념일에 삼성학교 강당에서 이 가극을 공연하였다.…우리는 오가자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성원속에서 짧은 기간에 료하농촌을 조선혁명군의 믿음직한 활동기지로 꾸려놓았다. 우리가 길림주변에서도 농민들과의 사업을 하고 장춘근방에서도 농민들과의 사업을 하였지만 오가자에서와 같이 그렇게 철저히 농촌을 혁명화해본적은 일찌기 없었다.❞
〈세기와 더불어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중에서〉
위 인용문은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가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길에 거의 자포자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오가자 마을의 구성원들 뿐 아니라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진영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남쪽에서는 1930년대 이후 벌어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고 있지만 기실 제시하는 근거라는 것들이 그다지 크게 평가를 받을만한 것들이 못된다. 조국을 찾아보겠다고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지 못한 좌절감에 이상촌을 꾸리는 데 민족주의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이 집착을 하였다는 사실을 인용문은 변대우 노인의 말을 통해 후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인용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 이다. 첫째 우리민족에게 있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이나 혁명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남의 나라 것이 아닌 조선의 것 조선인의 주체와 자주성을 가지고 조선인을 위해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공산주의사상을 가지고 혁명을 하는 것도 우선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오가자 마을을 기어코 혁명촌화를 이룩하려고 했던 이유이다. 그것은 농촌혁명화를 위한 거점으로 이를 드넓은 전 동북만과 조선의 농촌마을을 혁명촌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한 모범을 창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결국 그다지 완고했던 《이상촌》 오가자 마을에 대한 혁명촌화 역시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향 후 벌어지게 될 항일무장투쟁에서 주요한 거점이자 많은 투사들을 배출해낸 고장이 되었다.
3) 항일무장준비를 위한 안도현 공작사업
이상촌인 오가자 마을을 혁명촌화 하기 위한 사업에 성공적으로 끝낸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1931년 5월 중순 안도현 명월구에서 조직사업을 총결산하는 《봄명월구회의》를 개최하였다. 당 회의에서는 폭동의 후과를 빨리 수습하고 조직을 확대하며, 《카륜회의》 주요결정사항인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또 조직을 튼튼히 꾸릴 조직노선에 대해 토의결정하였다. 또 항일의 길에서 조-중 양 민족 사이에 연합전선을 하는 문제에 대한 토의결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반일 · 항일투쟁에 있어 전략전술에 관한 토의결정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놓고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젊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여 토의결정된 사항을 기필코 달성할 것은 다짐하였다.
이렇게 《봄명월구회의》를마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본격적으로 항일무장대를 조직하기 위해 안도현 공작사업을 벌였다. 안도현은 조선인들이 민족의 성산으로 받아들이는 백두산 동북부지역에 자리 잡은 지리적 조건이 매우 유리한 고장이었다. 안도현은 1930년과 1931년에 벌어진 수백여 차례에 걸친 폭동의 후과를 심하게 입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다른 고장들에 비하면 그 후과가 덜 하였다. 또 안도현은 교통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으며 지형적으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고장이다 보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이 다른 지방에 훨씬 덜 하였다. 안도는 또한 교통이 발달하지는 못하였지만 연길, 화룡, 왕청, 훈춘지구와 무송, 돈화, 화전지구는 물론 조선북부국경지역과 쉽게 연계를 가질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갖추어진 고장이기도 하다.
반면 안도현지방에 거주를 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성향은 매우 좋았다. 지리적으로 백두산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조국에 대한 사랑이 항상 고무해주는 조건도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했던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에게는 투쟁의 기운을 훨씬 더 북돋워주는 이점이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안도현 흥륭촌에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항일무장대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 준비사업도 함께 진행을 하였다. 또 항일무장대를 조직지도 할 당건설도 함께 다그쳐 나갔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안도현 공작사업은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하여 전 안도현으로 조직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도 기울였다. 결국 젊은 지도자의 전 안도현에 걸친 공작사업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 데 있어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이에 대해 북측자료를 핵심내용만 인용하도록 한다.
❝ 안도는 철도와 대도로, 도시들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지대여서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고 주변에 온통 험한 산악과 밀림으로 에워싸여있어 연길, 화룡, 왕청, 훈춘지구와 무송, 돈화, 화전지구는 물론 륙읍일대를 비롯한 국내의 조직들과도 련계를 가지기 유리하였고 유격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당조직건설사업을 추진시켜나가는데서도 매우 편리한 고장이였다. 주민구성도 대단히 좋았다.
더우기 조종의 산 백두산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조국을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우리로서는 그 숭엄하고 장중한 모습에서 크나큰 정신적위안과 고무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우리는 1931년 6월중순 김정룡, 김일룡과 그밖의 핵심분자들로 안도현 소사하구당위원회를 조직하고 구당위원회앞에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대전자, 푸르허, 처창즈방향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기층당조직들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구당위원회를 내온 다음에는 류수하, 소사하, 대사하, 안도 등지에 공청조직을 확대하고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소년탐험대와 같은 반일단체들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안도지방에서는 대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완료되였다. 조직이 들어가지 않은 마을은 하나도 없었다.
……
만일 우리가 안도에서 대중을 조직화할데 대한 방침을 제때에 관철하지 않았더라면 백색테로가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간도대지에서 무한장과 같은 큰 지주를 굴복시킬수 없었을것이며 그를 감히 중립화하여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지 못하였을것이다.
조직된 대중의 힘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며 그 힘앞에서는 불가능이라는 말이 있을수 없다.
흥륭촌과 그 일대의 혁명조직들은 활기에 넘쳐 자기의 력량을 확대해나갔다. ❞
〈세기와 더불어 수난당한 대지 중에서〉
위 인용문에 대한 분석은 이미 위에서 언급을 했기에 여기서는 하지 않는다. 일단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사업으로 진행한 안도현 공작사업은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본격적인 항일무장대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1931년 5월 대폭동의 후과를 수습하고 조직을 확대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한 공작사업을 총결산하는 《봄명월구회의》를 끝낸 4개월 후인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만주침공을 위해 조작한 《9 · 18만주사변》이 발발하였다. 일제는 9월 18일 요녕성 심양(당시 봉천)역 유조구에서 일본만철회사의 철도를 폭파하였으며 이를 만주의 장학량군이 저질렀다고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며 전격적으로 만주침공을 단행하였다. 1만여명을 동원한 일본군의 전격적인 침략에 30만의 대군을 거느린 장학량 만주군은 총 한 방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야망인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망상을 하였으며,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강대함에 놀라 총대를 놓아버리거나 중국 서부지역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때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 뿐 아니라 공산주의계열의 운동가들 역시 투쟁의지를 꺾고 말았다. 특히 일부는 배신하여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을 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계열의 운동가들도 있었다.
반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와 그 주위에 모여든 반일 · 항일세력들은 일제의 만주침략은 강대함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허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당초 준비하고 있던 항일무장투쟁대를 하루 속히 내올 것을 결심하였다. 또 만주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침략당한 중국인들 역시 일제에 대한 반일감정이 폭발하였다. 이는 동북만주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조선인들에게는 든든한 지지세력을 가져다주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반일 · 항일투쟁의 길에서 조-중 양 민족은 손을 잡고 함께 투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만주사변은 힘겹게 분투하던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세력들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역경이 순경으로 악조건이 호조건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당시의 조건에 대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아래와 같이 규정을 하고 있다.
“9.18사변으로 하여 우리에게는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였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가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와 자기 진지를 차지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포성에 만주지방사람들이 그해 가을 단단히 정신이 들었다고 할수 있다. 그 포성은 사람들을 위축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분발시키였다. 적의 폭압으로 초토화되였던 만주지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투쟁기운이 태동하였다.”
라고 하여
만주사변이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에게는 투쟁의지를 더욱더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 해주고 있다.
이렇게 《9 · 18만주사변》 후 조성된 조건을 투쟁으로 이끌기 위해 그동안 준비해온 튼튼한 조직을 동원하여 동북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주축으로 하여 《추수 · 춘황투쟁》을 전개하였다.
《추수 · 춘황투쟁》을 이끈 세력은 새 사조를 맏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세력들이었으며, 그들은 동북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투쟁의 주력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민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젊은 지도자의 신념에 의해 인민들이 투쟁의 주력으로 참여를 하였던 것이다. 또 당시 투쟁은 치밀한 계획과 정당성의 확보에 있었다. 특히 이전의 폭동의 실패를 교훈삼아 좌경모험주의를 완전히 걷어낸 데 투쟁의 특징이 있다. 또 폭력사용의 적절성을 확보하였으며, 투쟁의 목적성과 명확성, 투쟁지휘부의 단일성과 투쟁대오의 질서정연한 투쟁이었다. 마지막으로 투쟁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확실하게 지닌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추수 · 춘황투쟁》의 지침에 따라 투쟁지도부와 시위대간의 일치단결된 투쟁으로 결국 승리로 결속지어 졌으며 이는 향후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데 있어서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다. 이때 배출된 많은 이들이 항일무장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유격대의 기둥으로 되었다.
※※※ 반일인민유격대 · 반일유격대창건에 대한 내용을 아무리 줄이려 해도 더 이상 줄일 수가 없기에 할 수 없이 다음 회 차에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어서 여기서 줄인다. 다음 회 차에는 겨울명월구회의를 요약하고 무장대를 꾸리기 위한 무기탈취과정 간략하고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 · 반일유격대 창건과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원들의 5·1절 기념 열병식 그리고 맺음 말로 끝마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