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 소시집 평설
모든 기대어 사는 것들의 환호
장수철
혐오가 돈이 된다. 혐오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개인과 세력들이 혐오를 유통하고 대중화시킨다. 개인적 취향에서부터 인종이나 성별을 넘어 정치,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혐오들이 개인이나 집단의 이윤을 만들어내고, 동조 세력을 확보하는데 주효하게 작용한다. 휴머니즘, 사해동포주의, 인간애, 인간성 등을 이야기하던 시절은 이미 지난 것 같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보다는 무엇을 싫어하는가 로서 개인은 자신을 정의하고, 집단은 이를 통해 연대되고 공고해진다. 혐오의 강도가 강할수록 집단 내의 결속은 더욱 공고해지는 유의미한 사회적 지표들도 속속들이 뉴스에 출몰한다.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맞물려 무한경쟁구도 속에 재편된 개인들의 절망적 세계인식과 이러한 현실은 맥락을 같이한다. 정서적 친밀감으로 맺어진 공동체는 점차 사라지고 이해관계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만이 활력을 얻는다.
유진 시인의 시들은 이러한 사회적 경향과 물살을 정확히 짚어내고, 이러한 세태를 거슬러 오르려는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정신을 열편의 작품 속에 여여히 펼쳐놓는다.
둘러앉음과 조화로움의 가치
길고양이 챙기기를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 위에
먹이를 주자는 동물보호 전단지가 덧붙는다
밥만으로는 삶을 바꿀 수 없어요
일용할 양식에는 이해와 사랑도 들어 있어요
공존과 경쟁은 살아있는 목숨끼리 하는 거잖아요 (중략)
위협을 받는 건 공존을 거부한 당신일 걸요
(중략)
캣맘,땡큐! 경계심 풀어놓은 상가 골목
여기저기 진달래가 핀다
인구절벽이 눈앞이라는 뉴스에 끄덕이며 눈칫밥 끼니 때우고
무료급식소를 나오는 사내의 눈빛이 선량하다
ㅡ「캣맘 땡큐!」 중 부분
길고양이의 개체수 증가는 인간의 삶의 일정 부분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위주의 관점일 뿐 개체의 증식과 개체수의 증가는 유기체의 유전자가 추구하는 지상의 목표이기 때문에, 고양이의 관점에서는 당위적인 당대의 유전적 사명일뿐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공존을 위한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지구를 빌려 사용하는 생명체들 사이에 어느 종이 다른 종의 증식을 위력으로 제한하는 것은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아니고서야 어떠한 정당성도 확보할 수 없는 극악한 일이다.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고양이와 같은 신세일 뿐인 한 ‘사내’의 눈빛이 선량해지는 것은, 모두 캣맘의 관용에 대한 지상 모든 유기체의 환호가 아닐까.
물속에 발을 담근 건 물풀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날쌔고 누군가는 우직하고
작기도 크기도 한
신생으로 이어지는 동맹이자 한 가족
비화가야의 후예들이다
가시연꽃 눈뜨는 습지의 가장자리
우렁이와 다슬기가 길러낸 자식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산란들 수런거리는 새벽이 아니면 물안개는 얼마나 무료했을까
너무 늦은 때란 없다
따오기의 귀환을 기다리는 늪의 모성 앞에
덕지덕지 껴입은 말의 화장을 지운다
떠나와서 떠나온 곳 그리운 발길들
강변을 가득 채운 유채꽃 물결 천천히 천천히 끌고 가는
ㅡ「오월, 우포」 전문
신생의 오월 우포늪 앞에서 시인은 조화롭고, 조화로움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 보이는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노래한다. 우포늪의 모성이 키우는 다채로운 생물종들의 향연을 바라보며, 시인은 모든 만물들은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있다는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잊혀지기 쉬운 상대성의 가치를 되새긴다. 늪지가 없으면 우렁이와 다슬기는 있을 수 없고, 산란이 없다면 물안개는 무료해진다. 이러한 자연스런 연대와 상호의존은 생태계의 연쇄적 순환을 지속케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의 시각은 사라진 ‘따오기’에 머문다. 우포에는 따오기복원센터가 있다고 한다. 따오기가 사라진 자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회복하는 위대한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을 믿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따오기가 사라짐으로 해서 연쇄적으로 대체되거나 사라질 것들에 대한 깊은 우려를 시인은 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자연으로부터 떠나온 것들이며, 지금 그것을 관상하고 있는 화자 자신조차 그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거시적 시각을 얻는다. 결국 우리 모두 떠나온 존재, 즉 이방인이고 국외자이며 이 지상의 주인은 위대한 모성, 자연이라는 것, 그러므로 떠나온 것들은 떠나온 것들끼리 기대어 살아가야한다는 소박하지만 원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식탁의 감정」에서는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잊어버린 공동체적인 가치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노래한다. 화자는 시에서 ‘많아서 넘치는’ 물질적 풍요는 결국 ‘불행’일뿐이라고 인식한다. 식탁 위의 화려한 소품들과 음식들은 ‘손가락으로 부딪치며 얼굴 맞대고 둘러앉던 두레상의 정겨움’을 대신할 수 없다. ‘가난의 고삐에서 풀려’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우리의 현실이 오히려 인간성을 훼손하고 마침내 멸절시키는 현실 속에서, 물질과 정신의 균형감과 중용의 덕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역사와 현실에 기대어
소문은 보이지 않는 입
큰 입이라고 닥치는 대로 삼킨 걸까
아귀의 볼록한 배를 가르자
잡동사니가 쏟아진다
소속도 출처도 모른 채 통째로 삼킨
병어 황새기 앵미리 오징어 과자봉지 작은 페트병까지
씹히다 만 가자미눈이
소화되지 않은 것들을 노려본다
소화도 못 시킬 잡동사니를
헤엄치는 것이라고 마구 삼킨 아귀는
흉측한 제 몰골도 모르고 입만 키운다고
한때는 물에 텀벙 버려지기도 했다는데
잔뜩 불린 원망을 도마 위에 올려 토막토막 내리쳐도
느물거리는 살덩이만 드러낼 뿐
보이지 않는 입은
정의도 없고 책임도 없다는데
ㅡ「귀가 얇다」 전문
시인의 몇몇의 시편들은 우리 사회의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의 어두운 단면들을 비춘다. [귀가 얇다]는 도마 위에서 아귀를 손질하는 화자의 시점에서 허위와 거짓에 쉽게 경도되는 사회의 경박함을 꼬집는다. 우리 사회에는 끊임없이 가짜뉴스들이 유포된다. 정치적 막말과 혐오, 허무맹랑함의 정도가 심할수록 사람들을 더 유혹되곤 한다. 가짜뉴스는 사실에 대한 추측과 예단만으로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이에 대해 ‘책임’을 회피한다. 또한 오직 클릭 수, 조회 수 만으로 자신의 상업적 이윤을 극대화하려 들지 사회적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작품을 읽으며, 아무것이나 삼켜대는 아귀의 거대한 입보다, 아무것이나 듣고 넘어가버리는 얇은 귀보다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합리적 지성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너 하나 피우자고 계절을 다 쏟았는데
씨앗이 되거나 쓰레기가 되거나
꽃답게 피지도 못한 채 막바지에 이른 꽃
어차피 사그라질 걸
뭐에 쓰나 추레한 옷 한 벌
(중략)
시국마다 엇갈리는 이념
팽팽한 시위
높게만 나는 새의 옹고집은 규율이 없다
ㅡ「꽃의 유통기한」중 부분
「꽃의 유통기한」은 정치적 풍자시로 읽힌다.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란 경구를 모티프로, 정치권력의 생리와 그 흥망성쇠의 파노라마를 꽃의 생리에 빗대어 표현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통해 탄생한 권력이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혀 대중을 혼미케하는 상황에 대한 탄식을 시인은 절절하게 그려낸다.
그땐 몰랐네 사월의 섬이 어떻게 어두워졌는지
눈부신 노랑 노랑 노랑
무리지은 유채꽃 빛깔도 먹물이 된다는 걸 차마 몰랐네
불붙은 집에서 수용소로 가는 길
턱을 스쳐간 총알이 옆 사람의 가슴팍에 꽂힐 때
비껴가는 눈빛, 어린아이를 패대기쳤던
바위조차 숨을 죽였다는 참호의 북새통
순이 삼촌의 해묵은 죽음과 화해와 상생의 위령탑이
핏빛 가득한 역사의 폐허를 장식하네
ㅡ「무사에게」중 부분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한 권력의 폭력성에 짓밟힌 제주 양민들의 참혹한 슬픔의 현장에서 화자는 경악한다. ‘그땐 몰랐네’로 시작하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진솔한 고백에서부터 진상의 발견과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에서 서술자 ‘나’가 겪은 인식의 과정과 비슷한 얼개와 흐름을 보인다. 화자는 지금의 무사한 오늘이 수많은 역사적 인과와 필연으로 정교하게 직조된 것임을 깨닫는다. 유채꽃 만발한 그 숨막히게 아름다운 봄의 풍광이 피로 얼룩진 4,3제주의 핏값으로 주어진 것이라할 때 그 아름다움은 전혀 다른 차원의 숨막힘이 되어버린다.
인간다움을 지켜내기
사회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누수된 인간들의 추악한 일면들을 바라보다가 시인은 이제 그 너머를 바라보려 한다. 민족의 역사적 아픔과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아우르며, 이념에 의해 인간성이 짓밟히고, 증오와 혐오가 판치고 인간적 신뢰와 공동체의 유대가 사라져가는 이 땅 위에 우리가 끝까지 견지해야할 미덕과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착목한다.
지켜본다는 말 참 고마운 말이에요
애써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려는 건 아니죠
사람을 보는데 색안경은 필요치 않아요
해설도 자막도 없는 은막을 열면
진지하고 그윽한 눈빛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중략)
한 벌 누더기 인생이 무슨 말을 할까요
남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지 않고 비참하지 않겠다는 건
생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죠
지켜본다는 말은 두고 보겠다는 경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지켜준다는 말이죠
사람을 알아봐 주는 것보다 고마운 일이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지켜주는 것보다 눈물겨운 일이 또 있을까요
ㅡ「지켜본다는 말」 부분
일상에서 ‘지켜보겠다’라는 말은 앞으로 벌어질 상대방의 행위에 대해 적극적 개입 없이, 그 행위의 잘잘못을 감독하거나 감시하겠다는 겁박의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인은 그 말의 새로운 이면과 낯선 질감을 펼쳐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지켜보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행위이다.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없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진지하고 그윽한 눈빛’이며, ‘마음을 만지는 일’이며, ‘사람을 알아봐 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고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일. 이러한 행위들이 결국 인간성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처방임을 역설한다.
나를 떠난 건 잘한 일이야
곁에 있는 행복을 놓치지 마
놓쳐버린 밥그릇을 조롱하는 자들은
인생이나 드라마나 막장을 원해
(중략)
음보 없는 소리도 음악이 되고
불러주는 이름 없이도 꽃은 피지
이정표 없는 길이 강줄기를 따라 흐르다가
불쑥 나타나는 물안개 시야를 가리지만
굽이굽이 울고 간 새들의 발자국마다
싸라기별처럼 영롱한 꽃이 피었어
(중략)
떠난 뒷모습 기억하지마
다시 생각해도 나를 떠난 건 잘한 일이야
ㅡ「채널 바꾸기」중 부분
시 「채널 바꾸기」에서는, 기왕에 ‘보았던’ TV채널을 1인칭 화자로 설정하고, 지금 현재 ‘나’를 떠나 ‘다른 채널’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충고와 조언들을 뼈대로 살을 덧대어 나간다. 인생에 있어 선택의 문제는 간혹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가지 않은 길의 기회비용과 지금 가고 있는 길의 매몰비용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또다시 원치 않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화자는 ‘음보 없는 소리도 음악이 되고/ 불러주는 이름 없이도 꽃은 피’어 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스스로 꽃을 피워내려는 노력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교과서적인 논리인 것 같지만, 시인은 1인칭 화자 즉 선택받지 못한 길로서의 ‘가지 않은 길’이 보여주는 선량한 너그러움과 ‘떠나보낸 자’로서의 관용을 통해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오색병꽃, 그 가지각색의 여흥을 희망하며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는 인류의 문명만큼 오랜 역사를 갖는다. 가까이로는 2천만이 넘는 정치적 반대자를 숙청했던 러시아 혁명기의 공산정부와,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코소보의 인종청소 등 끔찍한 만행들이 이어져왔다. 자기와 다른 생각들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물리적으로 억압하려는 것을 우리는 차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야만과 폭력이 얼마나 인류를 비참한 지경으로 이끌었는지를 종과 횡으로 아우르며 진단하고 시인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빛나는 정신과 가치들을 일목요연하게 들추어 보여주었다.
‘한 나무에서 다섯 색깔이 섞여 핀’ 오색병꽃처럼 닮은 구석 없이 제각각인 다섯 남매를 바라보시며 환하게 웃으시는 팔순노모의 표정 속에서 공존과 평화의 아름다운 비의를 함께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