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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출처: https://moktaksori.net/
괴로움을 건너뛰지 않기
괴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빨리 해결하여, 건너뛰려 하지 마세요.
그것은 경험되기 위해 찾아온 저 너머로부터의 선물입니다.
그 너머가 바로 지금 이대로이고, 나 자신이고, 지금 이것이라는 하나의 진실입니다.
빨리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 애쓰지 말고, 그저 그것을 경험해 주세요.
나를 찾아 온 모든 것들은 경험되기 위해, 진리로써 온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오는 것들은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를 돕기 위해, 깨닫게 하기 위해 옵니다.
쌓여있던 해소되어야 할 것들이 발산됨으로서 해결되기위해 찾아옵니다.
그것을 해소하고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기에 지금 그것이 나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해소되지 않고 내면에 쌓이게 되면 지금보다 더 큰 폭발로 나를 괴롭힐 지 모릅니다.
그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업장, 업장소멸이라고도 부르지만,
업장이 두텁다는 의미를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크게 보면 그것은 나를 돕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온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진실이며 진리로써 옵니다.
모든 번뇌는 그것이 곧 보리(깨달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옵니다.
지금 이대로의 문제 투성이인 나 자신을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럼으로써 진리의 일원이 되어, 진리의 일을 하세요.
일어나는 일을 분별 해석 판단없이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는 것이
곧 진리와 하나되는 중도의 실천입니다.
괴롭고, 아프고, 슬프고, 답답하고, 가난하고, 남들보다 못난 그대로 당신은 온전합니다.
그 모든 아프고 싫은 요소들이 없어지고 난 뒤에 더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없애려는 생각만 없다면,
지금 이대로, 그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바로 그 문제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온전히 허용하고,
그것으로 살아줄 때, 비로소 내가 본래 이대로 완전한 부처였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수행을, 행복을 위해 그 무엇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존재하면 됩니다.
지금 나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이든 그것과 함께 있어주면 됩니다.
지금 이대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추구와 충족을 향한 갈구의 끝
우리의 내면에는 늘 어딘가 모를 공허감, 결핍감, 허무함, 부족함 같은 허한 느낌이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끊임없이 채워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바깥으로 찾아 나선다.
돈, 명예, 지위, 친구, 사랑 등 나를 충족시켜줄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그 무엇도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켜주지는 못한다.
시간과 공간, 그 어디에도 나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또 미래를 향해 충족을 바란다.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충족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미래의 언젠가에 나는 반드시 깨달을 수 있으리라.
과연 그럴까?
그런 모든 추구와 충족을 향한 갈구는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본질적인 공간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충족된 무량대복의 공간이고,
본래부처의 현현이지만,
우리는 그런 현재는 걷어차 버리고 곧장 미래를 향해, 다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속에 당신이 원하는 그 모든 것은 이미 구족되어 있다.
이미 충족되어 있다.
당신은 전혀 결핍되어 있지 않은 존재다.
지금 이 순간의 이 단순함으로 돌아오라.
이 평범함으로 돌아오라.
풀벌레 소리로 당신의 현존을 채워보라.
뺨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모든 것은 충족될 것이다.
들숨의 이 단순한 호흡하나가 당신을 가득 채운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가?
생각으로 쫓아가는 그 추구와 갈구를 버리고,
분별과 망상의 생각을 잠시 내벼려 둔 채,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이 올바르게 사는 것일까?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해야해'라고 믿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건 둘째 치고, 먼저 그 '올바르다'는 것은 무엇이죠?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그 생각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내 안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내 식대로의 '올바름'을 내세우고 그것을 믿게 됩니다.
내가 만든 '올바름'이라는 잣대, 색안경에 사람들의 행동을 저울질해 본 뒤에,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여기며 비난하거나, 그런 사람을 보기 역겨워하곤 합니다.
TV에서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이 나오면 인상을 찡그리며,
인터넷을 찾아 악플을 달 수도 있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패배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생각의 잣대,
옳고 그름의 잣대를 세워 놓고, 그 생각에 집착한 채,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자기를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올바름의 기준 자체가 모호할 뿐 아니라,
사람들마다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은 다 다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명제 즉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해야 해'라는 명제를 정말 믿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할 수도 있고 올바르지 않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일 뿐이며, 그것이 정말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 식대로 판단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 생각을 믿을 근거가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요?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해야 해'라는 그 생각이 사실은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을 묶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을 묶고 있는 족쇄와도 같습니다.
어떤 생각도, 어떤 견해도, 그것을 절대시하며 믿지는 마세요.
그 생각은 도리어 자기 자신을 구속합니다.
생각 자체는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가 없습니다.
생각은 허망합니다.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을 그저 지금 이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내 생각으로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되라고 조종하려고 해도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도록 그저 허용해 주세요.
내 생각으로 규정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유보해 보세요.
그럴 때,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 완전합니다.
생각이 당신을 괴롭힐 때
생각이 없을 때, 세상에 대한 특정한 믿음이 없을 때,
어떤 견해가 없을 때, 우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저 이대로 평화롭습니다.
평화로운 오후 아무 일 없이 완전히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거야,
무언가를 해야만 해,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거야 라는 생각,
믿음, 견해가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죠.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평화는 깨지고,
나는 일순간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토록 간단하게 당신은 고요한 적멸의 평화를 누리는 자에서
갑작스럽게 무능한 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기는 이토록 간단합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렇게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각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
그저 왔다가 가는 바람과 같은 것일 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만히 있는 것을 무능하다고 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고, 무수히 많은 증거들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이 세상에는 가만히 고요히 있는 것을 깊은 평화로,
부처님의 적멸로, 깊은 명상 상태로,
지혜로운 현자와 성인들의 삶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 생각 중에 어떤 것일 옳을까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둘 중에
어느 생각이 옳은지의 증거를 찾아도 끝끝내 결론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마음먹기 나름이지요.
정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옳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면 거기에 성공할 것입니다.
그런 증거는 너무 많으니까요.
후자가 옳다는 증거 또한 무수히 많으니 그것도 성공할 것입니다.
왜 이럴 수 있을까요?
도대체 진짜 진실은 무엇일까요?
옳다고 결론을 내리든, 틀리다고 결론을 내리든,
전자의 손을 들어주든, 후자의 손을 들어주든, 그 모든 것은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은 진실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을 몰아갈 수 있을 뿐.
그러니 생각을 쫓는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언제나 괴로움을 맛볼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천상에 있다가 지옥에 떨어지기는 한 생각에 달렸거든요.
그런 생각의 농간을 아직도 믿으시겠습니까?
내 인생이 괴로운 이유
세상은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하는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어떻게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일까요?
지금 이렇게, 지금 이대로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고,
조금도 남을 것도 없이, 지금 이대로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이렇게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전부 우리의 생각이며,
이 세상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현실에서 더 해야할 무언가는 없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이어야 합니다.
현실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이며, 망상이고, 판단일 뿐입니다.
세상은, 현실은, 진리는 늘 있어야 하는 온전한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늘 있습니다.
누구도 거기에 해서 판단하거나, 해석하거나, 규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판단, 분별, 해석, 규정을 내리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허망한 분별망상일 뿐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괴롭히는 원인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곧장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엉망진창인 이대로가 진리라고?',
'이렇게 괴로운데 지금 이대로여야 한다고? 아니야 나는 지금 이대로에서 벗어나야 한다구!'
'나는 지금 이대로가 아닌, 내가 원하는대로 삶이 변하고 나야 행복해질거야!'
'다른 사람들처럼 돈도 더 벌고, 더 건강하고, 더 성공하면 그 때 행복해질거야'
끊임없이 생각은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현재의 내 상태를 괴로움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는 현실에 대한 나의 규정, 판단, 해석, 분별이 없으면,
지금 이대로는 그저 지금 이대로일 뿐입니다.
지금 '아니야'라고 소리치고 있는 그 생각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현실이 나에게 정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 때는 괴로움이라고 여겼지만,
훗날 되돌아보면 그 때의 괴로움이 나를 살렸구나, 나를 성장시켰구나 하고 느끼곤 합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해석을 믿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면서,
내 인생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힐 뿐입니다.
이처럼 사실은 내가 나를 괴롭힐 뿐,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근원에서 세상은 결코 나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엉망진창인 현실 조차 말이지요.
이 세상, 삶 그대로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삶은 나를 늘 도울 뿐입니다.
무엇으로 도울까요? 삶으로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요 사랑입니다.
삶은 이처럼 장엄한,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삶은, 세상은 늘 나를 완벽하게 돕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괜한 걱정을 만들지 마세요.
내 생각이 오로지 나를 괴롭히고, 나를 죽일 뿐입니다.
삶은 나를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늘 돕고 있습니다.
아직 내가 그 도움을, 그 사랑을 사랑이라고 느끼지 못할 뿐이지요.
무명, 어리석음, 원죄 때문입니다.
분별이라는 원죄, 생각이라는 어리석음 때문이지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바른 견해, 정견의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으니, 늘 세상을 내 식대로 판단하고,
지금 이대로를 내 생각으로 해석하기만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원죄가 생겨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선악과는 세상을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내 편과 네 편 등으로 나누고 분별하는 이분법적인 생각입니다.
그 생각, 망상, 분별이 올라오자마자,
우리는 곧장 에덴동산, 천국, 장엄한 정토에서 쫓겨나
이 현실이라는 괴로움의 고해바다에 내던져지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현실은 괴로움이야'라는 이 생각이 없다면,
지금 여기에 곧장 지금 이대로 여법한 에덴동산, 불국토가 펼쳐집니다.
세상을, 현실을, 진리를 지금 이대로 있도록 허용해 주세요.
내 생각으로 그것을 규정, 판단, 분별, 해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세상과, 현실과, 진리와 싸우지 마세요.
현실이 그대로 진실입니다.
현실을, 세상을,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고,
사랑해 주고, 지금 이대로 존재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이 아무것도 아닌, 할 일 없는 무위행이야말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단 하나의 실천 아닌 실천입니다.
괴로운 일들이 생기는 이유
내 인생에 일어나는 좋고 나쁜 다양한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업(業) 때문이다.
업이란 과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는 3업의 행위를 말하고, 그런 행위는 결과를 끌어온다.
그 행위의 결과가 업보(業報)다.
사실 과거의 행위는 이미 지나갔다.
대부분의 행위는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즉 무위행은 행위를 했지만, 그 행위가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행이다.
그래서 하되 함이 없는 행이라고 한다. 무위행에는 업보가 없다.
아픔, 상처, 괴로움 같은 기억이나 원한, 화 같은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특정한 업은 업보를 불러온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해소되지 않은 찌꺼기, 화와 증오, 원한 같은 것을 남긴다.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거나, 무시했거나,
빼앗아 가는 행위를 했을 때 당한 사람 마음 속에는 복수심이 남는다.
그 복수심이 바로 훗날의 복수라는 업보를 불러온다.
그 복수심이 바로 찌꺼기요 업장이다.
모든 일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우리들 또한 행위를 하고 나서 왔다가 간 뒤에 흔적 없이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 의식, 분별심을 가지고
그 행위에 대해 판단하고, 집착하고, 화를 내고, 증오를 하는 등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찌꺼기를 양산해낸다.
본래 아무 문제 없이 인연 따라 왔다가 가는 것들에 대해,
붙잡고, 사로잡히고, 화내고, 원한을 느끼고, 집착하는 등의
마음으로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속에 문제, 업장, 찌꺼기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반드시 풀려나고 해소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과거의 특정한 업이 해소되지 않고 쌓여 있는 것을 업장이라고 하고,
그 업장의 찌꺼기들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삶의 경험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해소되기 위해, 풀려나기 위해 일어난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주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으면, 내 안에서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해결되지 않은 복수심이나 원한심은
내 몸에 병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무시당한 경험은 자존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해소되기 위해 찾아오는 모든 경험을 해소되도록 허용해 주어야 하는 이유다.
나를 찾아온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게 되면,
해소되기 위해 올라온 것이 해소되지 못한 채 또 다른 찌꺼기를 남기며 억눌릴 뿐이다.
억눌러 놓기만 하면 훗날 더 큰 화가 되어 폭발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괴로움이 오든, 역경이 오든, 아픔과 슬픔이 찾아오든,
나를 찾아 온 그 모든 괴로운 것들이 풀려나가도록, 해결되도록, 해소되도록 마땅히 허용해 주라.
온전히 그것을 경험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 살아주는 것이다.
아플 때 충분히 아파해 주고, 괴로울 때 그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어
흠뻑 괴로워해 주기를 선택해 보라.
그것이 바로 직접적인 마음치유다.
그것이 곧 불이중도의 실천이다.
불이(不二)란 곧 그것과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
그것과 하나가 되어 허용되는 경험이다.
하나가 되어 그것을 살아주게 될 때,
그것은 잠시 해소되며 올라오겠지만, 빠르게 해소되었기에 빨리 지나가게 될 것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때, 괴로움은 더욱 나를 옭아맨다.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어 하나되어 경험할 때, 괴로움은 금방 흡수된 뒤 사라져 간다.
해소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업장 소멸이다.
주어진 삶이야말로 진실이다.
진리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 진리와 하나되어 그저 경험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수행이다.
둘이 아니게 있는 그대로 보기
이 몸이 나라는 '생각'만 없으면, 이 몸과 눈앞의 컵이 둘이 아닙니다.
이 몸은 '나'이고, 눈앞의 컵은 내가 아닌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 생각, 아상, 에고, 아견이 없다면 어떨까요?
느껴지는 어떤 것에 '나'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이 몸이라고 이름 붙인 이것에 '내 몸'이라는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그저 있는 그대로가 경험될 뿐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온 몸을 스치웁니다.
바람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현상이 경험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코라고 이름 붙인 곳에서 들숨과 날숨이라고
이름 붙인 바람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말은 전부 다 생각이고, 해석이고, 언어여서 참된 진실이 아닙니다.
말에 사로잡히지 말고 들어봐 주세요.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바람과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우리는 나와 남이라고 둘로 나누어 놓았지만,
사실 '나다' '너다'하는 둘로 나누는 분별심이 없다면,
그저 움직임이 감지될 뿐이지 않은가요?
컵이 만져지고, 책이 만져지고, 흙이 만져지듯이, 이 몸도 만져질 뿐입니다.
음식의 향기가 알아지듯이, 내 몸의 땀냄새 또한 그저 알아질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음식의 향기는 내 밖의 대상 경계이고,
그것은 어떤 음식이라고 이름 붙여서 대상화시킨 뒤에 알아차립니다.
내 몸의 땀냄새에 대해서는 그저 알아질 뿐이지만,
거기에 해석을 붙여서, '내 몸에서 나는 땀냄새'라고 아상을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습관적인 해석, 아상, 나다하는 생각을 멈추고 바라본다면
그저 보일 뿐이고, 들릴 뿐이지, 거기에 나와 너는 없습니다.
그저 경험될 뿐입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가 있는 그대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도이고, 팔정도의 정견이며, 명상이고, 위빠사나이며, 지관수행입니다.
그것이 곧 아상타파입니다.
나를 괴롭힐 수 있는 딱 한 가지
날씨가 많이 무덥습니다.
날씨가 무덥기 때문에 짜증스럽고, 무덥다는 이 상황 때문에 싫은 느낌이 생겨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실은 무더운 날씨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더위로 인해 짜증이 난다는 내 생각이 나를 괴롭힐 뿐입니다.
만약 무더위라는 경계 자체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면,
더우면 모든 사람이 다 괴로울 것이고, 더울 때 우리는 항상 괴로운 상태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날씨가 무덥더라도 그토록 기다렸던 사랑하는 이와 처음 사귀게 되었다면
그 무더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인도 여행에서 만난 한 청년이 그러더군요.
인도에서 제일 싼 기차칸에 올라 무더위 속에 에어컨도 없이 달리고 달리는데,
심심하고 무덥고 너무 짜증이 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10시간 만에 중간 정차역에서 올라탄
자기 또래의 예쁜 한국 여학생이 옆자리에 와서 함께 대화를 하며 갔더니,
나머지 10시간은 더위도 모르겠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고, 그렇게 행복했더라도 하더군요.
이처럼 같은 무더위지만 자신의 상황에 따라,
자기의 마음에 따라 더운 정도는 전혀 다릅니다.
더위가 나를 괴롭힐지 말지는 더위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지, 더위나 추위, 부자나 가난,
내 외부적인 경계가 내 인생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내 바깥 경계, 상황은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내 바깥에는 나를 괴롭힐 만한 힘이 없어요.
언제나 그 힘은 나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언제나 내 마음이 나를 괴롭힐 뿐이지요.
그러니 내 바깥 탓을 하고, 상황 탓을 하고, 더위 탓을 하며,
너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외부 상황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살핍니다.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나오고, 모든 괴로움의 해결 또한 마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군대에서 30km 행군을 간다고 했다가 30km를 거의 다 왔는데,
갑자기 50km로 늘린다고 하면 그 추가된 20km가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러나 100km 행군을 간다고 했다가 30km 쯤 될 때, 50km로 줄인다고 하면
나머지 20km는 너무 힘이 나고 가벼운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50km 행군이 이토록 괴롭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50km를 걷는 그 자체에 괴로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군을 대하는 나의 태도, 자세, 마음에서 그것이 괴로움이 될지,
행복이 될지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무엇무엇 때문에' 괴로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괴로움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괴로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나 자신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매 순간 자신이 상황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늘 여여한 삶의 주인공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부산에 있다보니 가끔 서울에 올라가느라 비행기를 타게 됩니다.
자리가 불편하여 늘 복도 쪽 자리에 앉았다가,
어느 날 창가 쪽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침 해가 지는 풍경과 그 햇발에 비친 붉은 뭉개구름이며,
그 구름 아래에 펼쳐져 있는 대한민국의 장엄한 풍광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문득 10여 년 전 히말라야로 떠나던 날,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의 그 풍경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아름답고 설레고 경이로웠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었고,
사실 그날 못지않은 풍경들을 종종 보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독 그 10년 전 인도, 네팔, 히말라야로 떠나던
그 때의 비행기에서 바라본 풍경에는 미치지 못하는군 하는 느낌이었지요.
그런데 문득 오늘 펼쳐진 이 놀라운 풍경을 바라보며, 깨닫게 된 점이 있습니다.
사실 매 순간 비행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늘 위 풍경은 늘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달라졌을 뿐이지요.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나던 그 들뜬 마음, 생경한 마음,
낯선 새로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담을 수 있는 열린 마음,
그런 여행자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일로 출장을 떠날 때는 같은 풍경이라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 풍경이 달라서가 아니라, 내 상황이, 내 마음이 달라서 이겠지요.
눈 앞에 인생일대의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풍경이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 있으면, 매 순간의,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모든 것들이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세상에, 상황에, 경계에, 외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움, 모든 경이로움, 모든 평화, 모든 사랑, 모든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혜, 사랑, 기쁨, 행복, 깨달음은 늘 지금 여기에 완전히 주어져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열릴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 뿐.
정말로 알 수 있어?
당신은 정말로 나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은 정말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심지어 과거에 나에게 일어났어야 했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단언하며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일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아들은 어느 학교를 가야만 하며, 어떤 성적을 받아와야만 하는지,
남편은 나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당신은 정말로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전부 내가 만든 생각이 아닌가요?
그 생각을 어떻게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죠?
생각은 내가 만든 허망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진실한 사실이 아닐까요?
1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과연 1분 전에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알 수 있고, 알아야 하고, 알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생각들이 당신을 구속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이 광대하고도 광활한 '모름'의 무한 가능성 속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이 자유한 공간에는 무엇이 와도 좋고 무엇이 가도 좋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고 어떤 일이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나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름'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 '모를 뿐'에 내맡길 때,
어둡고 컴컴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와집니다.
아는 것이 병입니다.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법상스님 글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