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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내맡김
의식혁명
의식수준의 향상
현대인의 의식지도 13. 의심, 회의론 그리고 불신
들어가며
에고/정신은
실수나 오류를 범하면서 생기는 고통과 불쾌감에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취약함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에고는
'의심이나 회의론이
일종의 보호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추정한다.
신뢰를 필요로 하는
에고의 성향도
성장 초기에 부모와 아이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의 특징을 반영한다.
다시말해,
사랑은
신뢰와 믿음을 지탱해주는 반면,
가혹함과 태만은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낳는다.
신뢰도라는 견적서에 기초하여
순진하게 잘 속아넘어가는 수준부터
적대적 반항, 인습타파, 심지어 여성혐오까지
정보처리에 필요한 매우 다양한 패턴이 새롭게 나타난다.
실용적 현실감각을 개발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신은 유추와 가능성에 기초하여
활용가능한 것을 취하고
극단을 피하는 정신적 처리시스템을 발전시킨다.
경험을 거치며
정교하고 성숙해진 정신은
새로운 정보를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증거나 다른 경험을 통해
그 정보를 확증하기까지 기다린다.
이 현실검증 과정에서
에고는 천성적으로 우선 '감각에 의존'한다.
동시에 형상이 있는 선형적 세계와
그것을 이미 재현한 이미지와 개념을
주로 정신작용으로 처리한다.
이해의 범위는
의식수준에 좌우되는
뇌 생리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 결과 동물적 본능이 지배하는 좌뇌형 처리방식은
생물학적/의식적 진화의 한계때문에
영적 차원을 포함한 비선형적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
(본능적 대뇌 변연계 시스템은 의식수준 120으로 측정된다). 좌뇌는 선형적 내용을 찾는 반면 우뇌는 비선형적 내용인 의미와 이해를 찾으려고 한다.
비교적 유리한
카르마적/생물학적 상속을 받은 뇌의 역량은
믿음과 신뢰를 목적으로 발달한다.
그 결과 주관적 확증이라는
필연적 요인이 없어도
비선형적 맥락과 이해를
기꺼이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정보는
하나의 신념으로 간주되고
진실한 것으로 옹호된다.
사실상으로 가능한
고등 양자이론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그 이론을 이해하는 전문가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들은
최소한 지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그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을 신뢰하며,
그 신뢰를 통해
그들의 삶 자체가 개선되고 헤택을 입게 된다.
회의론자들
회의론은
현재 유행하는 태도로서
정서적 장애나 인격장애의 결과
(프로이트의 항문기 반항이나 부모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항적 성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주관적 경험과 1인칭 증거의 진정성과 관련된
최근 과학계에서 처럼
논쟁과 장황한 담론으로 번질 수 있는
지적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갈등은
단순히 패러다임의 한계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펜실베니아 주립대의 '찰스 아이젠스타인' 교수는 회의론을 상세히 연구한 끝에(신념의 상태가 존재의 상태다), 실험자의 속성과 예견 등이 실험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실험자 효과가 주류과학에서도 신뢰도에 문제를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하이젠베르크 불확실성의 원리는 이미 주류과학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이른바 합리적인 지적 회의론의 기저에
은밀하고 악의적이며
비열한 태도와 흔히 냉소적이고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거만하고, 감정적인 것으로 판명되는 관점이자
주로 전문 폭로꾼들이 드러내는
세계관을 담은 동기의 장이 있다.
수년간 이론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을
가짜 사기꾼,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기술하고 묘사한
강연과 책을 들이대며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전문 회의론자들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런 책의 저자들은 부정적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핵 에너지 개발이라는 이슈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진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정신병리학에서는 '논리 증명형 망상장애'라고 부른다. 홀로코스트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거나 미국정부가 9/11사태를 획책했다는 말을 믿는 것도 바로 이 정신장애에 해당한다. 이런 정신장애에서 당사자의 세계관은 나름 타당하지만 세상은 망상적 상태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장애는 독선적 과대망상증에서 발생한다.
독선적 과대망상증은
이성의 권위밖에 있으면서
오히려
질투와 시기심,
그것에 동반하는 유아적 자기도취형 전능감, 그리고
질시받는 권위적 인물을 향한 적대적 태도,
이 세가지가 교묘하게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다.
피론 학파들이 진술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은 진실은 알수가 없고 지식의 불확실성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을 설파한다.
데카르트가 지적했듯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의 정신은
외부 사유실체(지각이나 견해, 곧 사물이 정신을 어떻게 나타내는가?)와
외부 연장실체(본질, 내재적 실재)를 구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도
이와 똑같은 관찰을 했다.
인간은
오직 선을 추구하지만
환상에 빠진 선(외관)과 본질(진짜 선)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론주의 또는 피론 회의주의는 기원후 2세기 후기 또는 3세기 초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기록한 게 남았고, 기원전 1세기 아이네시데모스가 설립한 회의주의 학파다. 이는 기원전 360년에서 270년 사이 살았던 철학자 피론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17세기 동안 용어 사용의 부흥이 일어났다
합리적 회의론은
틀린 주장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회의론 자체가
어리석은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은 회의론에 앞장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부터 라디오까지, 현재의 의학과 양자론을 비롯한 물리학까지 역사상 중요한 발견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맹렬히 비난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회의론자들이 맥락을 담은 비선형적이고 영적인 패러다임의 실재는 물론 신성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새삼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만약
회의론이 생각하듯,
실체적 진실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면
회의론 자체의 전제와 논쟁도 거짓이다.
회의론은 자가당착에 빠진 셈이다.
회의론의 진실측정수준이
160정도로 낮게 측정되는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의 변종이기 때문이다.
회의론은 태생적으로 맥락의 실재, 특히 의식수준 500대와 600대 혹은 그 이상으로 측정되는 실재를 해결하거나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스스로 공언한 목적마저 수행하지 못한다. 게다가 회의론은 오직 내용만을 다루기 때문에 의미 자체의 중요성이 전적으로 맥락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맥락은
하이젠베르크 불확실성의 원리가 증명하듯이
의도를 반영하고
관찰자 의식수준의 힘과
일치한다.
순진한 태도나 회의론과는 대조적으로
의식연구는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반박할 의도가 없다.
다만 의식연구는
개념과 견해를 건너뛰기 때문에
에고의 정신작용,
이성 또는 가설에 의해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정보의 수준을
분별하거나 확증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의식측정은
개개인과 무관하며
단순히 숫자로 결과가 나온다.
그 수치의 중요성은
이미 측정된 의식 지도상의 위치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회의론은
선형적 정신영역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더구나 회의론 자체는
선형적 영역마저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어쩌면 회의론자는 맥락의 심오한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을 증명하거나 반박하기 위해서 유추를 통해 뉴턴 물리학이나 미분을 이용할수는 없다. 회의론이 좀 더 확장된 실재의 패러다임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정보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훨씬 더 높은 지식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회의론의 또 다른 이상한 점은 부정을 부정해도 긍정적인 것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그 유명한 역설의 상자가 증명해준다. 상자 하나를 만들고 그 안에 이런 문장을 넣어둔다.
"이 상자안의
모든 진술은 가짜다"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진실을 깨닫는 능력이 없는 이유를 들자면
1) 정서장애
2) 심리학적 갈등
3) 나르시시즘적 지배수준에서 성숙이 멈춤
4) 단순히 의식진화 수준때문이기도 하다.
"의식수준을 넘어서"에 기술했듯이 정신의 기능은 끌개 에너지장의 지배를 받는다. 끌개장은 낮은 정신 155과 높은 정신 275으로 지정되어 있다. 편의상 그 특성을 여기에 다시 옮겨와 본다.
정신의 기능
낮은 정신 155, 내용(세부사항) | 높은 정신 275, 내용과 장(조건) |
축적 | 성장 |
습득하다 | 음미/감상하다 |
기억하다 | 성찰하다 |
유지하다 | 진화하다 |
생각하다 | 처리하다 |
외연적 지시 | 유추 |
시간=제약 | 시간=기회 |
현재/과거에 초점을 맞추다 | 현재/미래에 초점을 맞추다 |
감정/원하는 것에 지배되다 | 이성/영감에 지배되다 |
비난하다 | 책임을 지다 |
부주의한 | 훈련된 |
구체적인, 문자 그대로의 | 추상적인, 상상의 |
제한된, 시간, 공간 | 무제한 |
개인적 | 비-개인적 |
형상, 사실 | 중요성, 의미 |
세부사항에 중점을 두다 | 일반성 |
배타적 사례들 | 유형을 분류하다-포괄적인 |
악 | 거부 |
반응하는 | 유리된 |
수동적인/공격적인 | 방어적인 |
사건을 회고하다 | 의미의 중요성을 맥락화하다 |
계획하다 | 창조하다 |
정의 | 본질, 의미 |
특정화하다 | 일반화하다 |
단조로운 | 초월하는 |
동기 | 영감, 의도 |
도덕 | 윤리 |
사례들 | 원칙들 |
신체적, 감정적 생존 | 지적발달 |
쾌락과 만족 | 잠재성의 성취 |
선형적 내용 | 본질, 맥락 |
종교적 극단주의 | 영적 균형 |
회의론 | 지적연구 |
순진함 | 정교화 |
무엇보다 낮은 정신이 미국 인구의 55%, 전세계 민족과 사회의 약 85%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높은 정신과 낮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 문화와 민족은 서로 매우 확산된(충돌하는) 세계관을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그 차이는 지능지수에 반영되지 않지만
그대신 본질과 외관을 분별하는 능력과
나르시시즘적 자아중심성의 정도를 드러낸다.
기술해보면
낮은 정신의 특성은
단조로운 문자,
그대로의, 세속적인 정치화와 합리화와 수사인 반면
높은 정신은
분별하는 추상적인 원칙이 있는
훈련된 것이다.
낮은 정신은
특히나 증오같은 부정적 정서로
향하는 성향과 연결된다.
반대로
높은 정신은
보다 긍정적이고 온화하며
일치와 용서를 추구한다.
낮은 정신은
좌뇌, 동물형 정보처리와 연관되기 때문에
위력에 지배되기 쉽다.
한편
높은 정신은
진실과 이성이라는 높은 수준을 통해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
따라서
낮은 정신은
태생적으로 폭력으로 향하기 쉽고
공격적인 반면,
높은 정신은
평화를 추구하므로
공격을 받았을때에도
마지못해 방어에 나선다.
이는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의 공격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동물의 세계와 비교된다. 오늘날 세계에서 육식동물은 핵폭탄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이에 맞선 초식동물은 멍청하게도 방어 미사일 경고 시스템에 관한 결정을 내릴수도 없고, 더구나 육식동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두려워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할수 조차 없다.
진실에 대한 반박
영적진화는
의식수준과 상관이 있다.
이에 따라
영적진화는
에고에 대한 충성 대
진실에 대한 충성간의 균형을 나타낸다.
진실은
영적 실재의 반영이다.
측정가능한 의식수준은
에너지 끌개장의 지배를 반영한다.
그 결과,
에너지 끌개장에는
조화를 이루는 여러 선택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400대 중반의 의식수준을 품은 세계관은
170에서 195정도 의식수준에서는
가짜로 보일 수 있다.
이는 매우 흔한 현상이자 세계 역사상 사회정치적 갈등의 핵심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인간의식의
최저수준을 가리킨다.
범죄자는
순간의 쾌락을 지연시키거나
동물의 충동을 통제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해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 결함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할 만한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능력의 부재로
나타난다.
임상적으로
그 상태의 생물학적 기층은
대개 뇌회백질 전두엽의
선천적 장애와 연관이 있다.
이 상태는
세살 정도면 진단이 가능하고
임상적으로는 보통 난치병이자
불치병에 해당한다.
본 저자는 그 한가지 사례를 비행기 여행중에 직접 관찰한 적이 있다. 옆자리 할머니가 어린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 징징대며 할머니의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그럴때마다 할머니는 안돼!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아이는 고집을 피우며 계속했고, 그럴때마다 할머니도 아이를 때리면서 꾸중했다. 똑같은 행동이 30분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아이를 때리면서 안돼라는 말을 백번쯤 했다. 하지만 아이는 행동을 그만두거나 경험을 통해 학습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이와같이 부정적 경험을 통한 학습이 실패하는 모습은 자국민의 대량살상을 선전하는 과대망상증 독재자와 악당국가의 지도자들로 생생하게 증명된다.
통제불가능한
고집과 반항은
"미운 두살"이라는 유아기 상태에서 볼수 있다.
바로
이 시기에
유치한 에고의 전능함과
부모의 통제가 맞붙게 된다.
부모 입장에서는
여기에 적절히 대응할 에너지나
의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는
충동통제를 학습하지 못하고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교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특히 범죄성을 나타내는 90이하의 낮은 의식수준과 합을 이룬다. 여기에 덧붙여 입심좋게 말을 내세우는 성향은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악한 나르시시즘(과대망상증)이라 부르는 정치적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성향은 "질실대 거짓"에서 서술했듯이 모든 독재자의 특징이다. 그들은 온화한 자비심이나 선의가 없다. 그 결과 증오에 기반한 정치적 세력이 득세한다. 편의상 진실대 거짓에서 독재자의 특성을 옮겨왔다.
위험한 정치지도자의 특성
무자비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교활하다.
남들이 자신과 같다고 가정한다
인간의 생명을 배려하지 않는다.
순진한 옹호자들을 끓어 들인다
진실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논리나 이상으로부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빈번이 거짓말을 하는게 일상이다.
편집증적이며, 방심하지 않으며 엄중하게 경계한다
사실은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군대를 총알받이로 간주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이기려고 한다.
포식자의 성질, 약자는 그런 운명을 겪어 마땅하다
도덕성이나 윤리가 없다. 애국심을 조작한다
영적가치가 없다.
인명손실을 상관하지 않는다
............
반항적 성격은
진실이나 권위에 분노한다.
그들에게
진실이나 권위는
그저 귄위주의자 부모의 통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상된 성격은
온전한 진실을
위협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가짜로 여겨
무턱대고 거부하게 된다.
손상정도는 약하지만 사회정치적 관점과 관련있는 상태를 가리켜, 나/민감한 세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이상 징후는 나르시시즘과 쾌락주의의 부풀려진 권리에 앞다투어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등장했다. 이런 관점은 세속주의자, 반종교주의, 신에 대한 반대, 영성 실재를 반대하는 사회적 견해로 떠들썩하게 표출된다.
소위
포스트모던적 도덕 상대주의(160-190)이라는
철학체계가 등장하면서
이런 관점에 지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그리고
부풀려진 에고이스트의 관점을
탁월하고, 엘리트적이고 옳은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에고의 과대망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요한 점은,
이런 일련의 경향이 현실검증에
손상을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소위
학계/포퓰리스트, 사회정치학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앞장세운 궤변이
현실검증을 가로막고 있다.
그렇게
편견이 심한 수사가
학계로 침투하면서
현재 학계의 우수성은
상당히 하락하고 말았다.
이 점은 학계가 의식수준 130점,
심할 경우
최저 90정도로 측정되는
온갖 강의를 용인하고
더 나아가 미화하는 형태로 증명된다.
(다시 그 질문이 등장할 차례다. 의식수준 90인 외과의사가 당신의 뇌 수술을 하기를 바라는가? 그 정도 수준의 투자 컨설턴트가 당신의 돈을 굴리게 둘 것인가? 좀 심하게 말하면 당신 아이들을 그 정도 베이비 시터에게 맡겨둘 텐가?)
반권위주의적 입장 추종자들이
보이는 역설은,
그들 자체가
악과 증오에 휘말리기 쉬운 성향인데다
너무나 권위주의적이고
압제적인 전체주의자와 똑같이
모두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서로 연관된 감정은
의식수준이 낮은 끌개장의 산물이자
거기에 내재된 것이기도 하다.
그 정치적 낙진은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결정적 의식수준 200이상과
200이하 분파간의 피터지는 충성싸움으로 나타난다.
사회/정치적 논쟁은 흔히 도덕성 자체를 주된 표적으로 삼는다. 그 결과 수천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잔인한 범죄자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혹은 (역시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간) 이슬람 테러리스트나 수천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책임이 있는 MS-13 갱조직의 권리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상대주의라는
허위 수사학이 주입되면서
현실검증은 손상되었다.
이는 소아성애 아동 살인자인 유명인사와 자국민 수천명을 살해하고 심지어 여성들을 천정에 와이어로 매달아놓고 성적 고문을 자행하면서 고의적으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사이코패스 독재자에게 너도나도 달려가 동정심을 표현하는 등 극도로 기이한 사례로 나타난다.
반드시
권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야만
그 권위에 반발하고
저항할 수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반대하는 관점자체는
어차피 가짜 수준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비교해보면
악을 옹호하는 것은
결국 그 악과 일치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짓과 정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거짓에 동정심을 표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한 방식이다.
물론 정상에서 벗어난 범죄자들이 어쩔수 없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해서, 그 범죄자들에게 동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영적 실재를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된 것은
상당부분 미디어가
끈질기에 선전하고
프로그래밍한 결과다.
미디어는
평범한 사람들의
순진한 정신속에 파고든다.
가짜가
최신 유행의 관점인 것처럼 왜곡되고
부풀려진 인간의 정신은
쉽게 윤색되어
미리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생존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되는
미국 인구 55%가
대중적 비 진실성의 맹공격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지만 미국전체 인구의 의식수준은 현재 421이다(2006년 가을에는 426이었는데, 2007년 소폭 하락했다). 지수가 이렇게 확실히 차이가 나는데는 이유가 있다. 200이하 수준에서는 지수비교에서 알 수 있듯, 진실한 사람들의 높은 측정수준이 상징하는 힘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가 가진 매우 높은 수준의 힘으로 사실상 전체 인구의 생존에 필요한 능력과 부정적 영향을 맞대응 할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령, 미국인구에서 최상위 의식수준을 가진 100명을 제거하면 전체 평균의식수준은 320으로 떨어지고, 1천명을 제거하면 현재 의식수준 421에서 무려 220까지 하락한다).
영적 실재, 도덕, 진정성
그리고 진실을 반박하는 것은
문명을 고갈시키는 행위다.
인류 전체의 의식수준은
2007년 11월 현재 204이지만,
전세계 상위 1천명을 제거한다면
결정적 수치를 벗어나 198로 떨어진다.
상대적으로
진화가 덜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은
사회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교정하려는 노력을 다하고
보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자극한다.
따라서
동정심, 연민, 수용, 관용은
실용적으로 사회적 균형과
효용성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하다.
여기에는 이슬람의 묵시론적 승리근본주의 같은 사회/정치/종교적 실재에 대한 인식도 포함된다. 이슬람 승리주의는 2007년 11월 현재 의식수준이 60밖에 되지 않는다.
무신론, 불가지론, 무신앙
진정한 지적의심은
진실한 것이다.
적어도 그런 태도는
개인의 결정과 신념을 중요하고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유추나 가설을
지적으로 처리하는데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들어간 정보는
정신적 처리를 통해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이성은
성숙이라는 선형적 경험과
지혜가 등장하면서
발생하는 이분법과
양면성을 참아낼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성만으로는
가설을 내세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믿음은
모든 수준의 진화에 수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믿음은
정신의 상수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믿음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 성향은
올바른/선한 것과 일치한다.
단 이때,
올바른 것은
지혜와 일치한 상태일 수 있고,
그 지혜를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거부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
아무리 교육을 받았더라도
인간의 정신만으로
진실을 확인하고
입증할 방법에 관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는 없다.
겸손함을 갖추고
진실을 탐색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진실은
객관적이고 입증가능한 기준뿐만 아니라
주관적 경험을 통한 확인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권위에 의지하는 것이
영적실재와 진실을 찾는
대다수 진실한 구도자들에게는
충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정신은
자꾸만 미련을 두면서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는
내면의 영적 진화라는
주관적 경험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영적 진화를
이루려면 의식수준을 초월하고,
더불어 의식측정 방법론을 통해
오늘날 세상 속의 영적실재를 확인해야 한다.
이 두가지 조합과 더불어
신을 향하는
하나의 경로로서 진실에 헌신한다면
결국 전형적인 "의심의 장벽"을
극복하게 된다.
동시에
그 장벽 반대편에서
깨달음과 계시가 등장한다.
온갖 의심은
자아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참나의 압도적 실재안에서
녹아 없어진다.
이로써
인간은
마침내 확실성의 산물인
평화와 더불어 제자리를 찾는다.
정신이
어떤 명제를 입증할 수 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 명제가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는
무신론자의
함정이다.
정신은
진실을 알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똑같은 이치로
정신은 진실을 반박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 반대를 입증해야 하는
역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에고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전능함을 순진하게 가정한다. 그 결과 에고에게는 더 높은 진실에 닿기 위해 필요한 겸손함이 없다.
흥미로운 점은
무신론자는
의식측정 기술(truth reflex)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의식수준 190,
불가지론은 이보다 조금 높은
200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불가지론이
무신론보다 조금 더 정교하며
실재와 조금 더 정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가지론에서는
지적능력이
본질적으로
신의 실체적 존재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불가지론은
진실에 대해
부정적 적대감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측정된다.
불가지론은
그저 지성은
만족할 만한 대답에 도달할 수 없다고
겸손하게 진술한다.
허나
불가지론의 한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적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바로 그 지적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불가지론과 무신론은
역연령이 일치할 수 있으며,
지혜의 경로를 통해
정서적으로 성숙해지면
점차 약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되면
내용이라는 선형적 차원이 아니라
맥락이라는 비선형적 범위안에서
진실을 추구하게 된다.
맥락은
진실을 이해하는 능력을
확장시킨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사변적 추측이 물러나고
확신이 자리잡으며
더 높은 차원을 인식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확장한다.
더 높은 차원은
선형적인 지적 처리과정이 아니라
계시라는 기제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난다.
의심과 불신은
흔히 의식이 크게 도약할 때
나타나는 전조다.
의식의 도약은
좌절이나 재앙, 또는
성숙을 통한 지혜가 나타나면서
일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기적과 같은 중대한 전환과 개종을 겪었던 사람과 하물며 성인들까지 이미 언급한 것이다. 간혹 매우 험난한 환경때문에 어린시절 종교적 믿음을 상실했다가 이후 오랜 세월 확증가능한 진실을 찾아나서는 예외적 경로를 밟는 사람도 있다.
그와 같은
내면의 탐색은
연관된 믿음체계없이
명상수련만으로도
속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실용적이고
매력적인 종교가 될 수 있다.
붓다는
신에 대한 믿음없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인
팔정도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팔정도의 여덟 구성요소 또는 여덟 개의 길은 다음과 같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 또 하나의 길은
고대 "베다"와
"우파니샤드"에서 찾을 수 있다.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양자역학의 여러 발견을 예상한 경전으로서
절대 원리의 궁극적 실재를 언급하고
개념과 정신작용이 환상을 넘어선
선험적 실재로서 의식의 무한한 장을 이야기 한다.
모든 신념체계를 배제한 채
절대 진리를 진실하게 탐색해가는
아드바이타(현상계는 무지에 기초한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베단타 학파에서 말하는 비이원성)의 경로는
오염되지 않은 길이다.
이 내용도 이미 앞서 저작들에서 자세히 기술하였다.
당연히
비이원성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만
'베단타"연구를 하다가
자칫 인도의 다양한 철학학파에
과도하게 연루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되면
그 철학은
산만한 신념체계가 될 수 있으니
늘 경계해야 한다.
회의론자/무신앙자들에게
의식자체의 본질을 탐색하는 물음은
가장 오염되지 않은 길이자 방법이다.
그 길은
모든 신념체계를 우회하면서
오직 진실한 호기심과
성실함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적/종교적 진실에 대한
모든 정신적(선형적) 묘사는
논쟁과 논란이 되어
틀렸다고 반박을 받거나
무효화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비선형적 의식자체는
언어적 규정이나 묘사를 넘어서며
그 결과 회의론이나 의심,
또는 불신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의식의 본질에 대한 조사는
곧바로 빛비춤의 근원으로 이어진다.
절대 의식의 빛은
깨달음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절대인식 주체와 절대인식 대상은
신의 편재라는 참나의 깨우침안에서 통합된다.
첫댓글 의식의 본질에 대한 조사는
곧바로 빛비춤의 근원으로 이어진다.
절대 의식의 빛은
깨달음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절대인식 주체와 절대인식 대상은
신의 편재라는 참나의 깨우침안에서 통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