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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부활" (눅 24:1-12)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 최대의 명절날이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정철어학원이 새 건물을 지어 이전 함에 따라 새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고, 오늘이 부활절이라서 의미가 있다. 더 귀한 것은 이 건물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쓰이기 전에 이렇게 구별되어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을 찬양하는 거룩한 예배 장소로 쓰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21:3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시던 예수님이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는 내용이 나온다. “마을에 들어가 나귀 한 마리를 보거든 내게로 끌고 오너라. 나귀주인이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하라” 이 순간 평생 무거운 짐만 끌고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지극히 평범한 나귀는 이 날 영문도 모르는 채 예루살렘에 왕 중의 왕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태우는 영광스러운 일에 쓰임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건물이 영어를 가르치는 주변의 다른 건물과 다름이 없지만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하겠다.
세상에는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하다 안되면 자살을 하려고 한다. 연애 실패를 해도 자살을 기도하고, 사업에 실패해도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또 다른 세상, 곧 영원한 세상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세계관이다.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다르게 구별짓는 것이 무엇일까? 삼위일체 하나님, 십자가 대속 등 여러가지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주장이다. 천하 모든 인간 가운데 오직 예수님 만이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러면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1. 부활은 죽음(死亡)에 대한 승리이다.
역사이래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인간은 죽음의 노예였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떤 영웅 호걸도, 예외없이 달려드는 죽음의 신 앞에서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형장에 이슬로 사라져 갔던 수없이 많은 살인자, 인간이길 거부한 사람들도 죽음을 앞두고는 벌벌 떨며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던 것이다. 예) 어느 신앙선배, 군에서 사형장면을 보고 인생에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를 믿게 됨. 참으로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지금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렸을까 봐 두려워 아예 병원 근처에 가지 않는다. 그러다 덜컥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면, 절망하여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배우 우디 알렌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일이 일어날 때 거기 있고 싶지 않은 것 뿐이다”
이렇게 모든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승리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할렐루야!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죄의 결과인 죽음의 권세를 이겼다. 사망의 도전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그것을 맞닥뜨려 승리하셨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은 죄라"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초월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예) 중국에 갈 때마다 큰 도전이 되는 것이 있다. 한국 땅엔 진정한 신자를 찾아보기가 너무 어려운데 그들 주변엔 방금 사도행전에서 뛰어나온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지 3개월도 안돼 예수님에 감격하여 복음 전도자로 도처에 다니며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고 죽기를 각오한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가정교회에선 성도의 장례식이 슬픔이 아니라 큰 전도의 기회로 사용하는 것도 보았다. 죽음을 초월한 신앙이었다.
2. 부활은 거짓과 죄(罪)에 대한 승리이다.
원래 모든 인간은 죄의 종들이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을 앞세워 거짓과 불의를 인간에게 강요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세상은 모두 거짓됨으로 오염된 세상이 되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도록 모두 거짓으로 물들여 졌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누구든지.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아이이든 어른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기회만 되면 부패한 심성 때문에 죄짓는 일로 달려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우리 모두가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무능과 죄성을 통렬히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다(롬7:24).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주님 뜻 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 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찬송을 불러도 정말로 주님 뜻대로 살았는가? 반문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가 죄책감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어디에 가서 그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게 하고, 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불의를 행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자들이 한 짓이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승리였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을 얻게 되었다. 옛 사람, 죄의 지배 하에 있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이다.
톨스토이가 쓴 유명한 소설 ‘부활’을 읽어 보았나? 카츄사라는 한 여성의 비극적인 인생을 그린 작품이다. 카츄사는 귀족 네흘류도프의 집에 하녀로 있으면서, 네흘류도프의 강폭으로 몸이 더럽혀지고 결국엔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급기야 나중에는 유형수의 몸으로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가게 된다. 이 작품은 이렇게 끝이 난다.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 들판에서 자기의 죄악을 뉘우치며 찾아온 네훌류도프를 만난 나타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으며 새로운 삶, 부활의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렇다 죄를 지은 영혼엔 쉼이 없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 영혼엔 절대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시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범죄로 인해 쉼없이 살아가는 우리 영혼에 구령의 종소리가 울려올 때 지체말고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한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기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볼 때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주께 나와 자신의 연약함, 죄성을 고백해야 한다. 주님의 부활은 죄의 세력을 부수고 살아나신 승리이시다.
3. 부활은 미움과 증오와 갈등을 이긴 사랑의 승리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무리들은 자신이 승리자 인줄 알았다. 제사장과 로마 군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승리한 줄 알았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채찍질, 저주, 조롱, 빰때림, 가시면류관을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성부께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모든 증오와 미움과 갈등을 조건없는 사랑으로 승리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하던, 그러나 십자가 처형의 순간 줄행랑을 친 못난 제자들에게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여러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아시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한 번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3번에 걸쳐 사랑을 확인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기를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단 한 번의 책임 추궁의 말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만 반복해 물었다. 이 사랑 앞에 그는 녹아졌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우리는 이 베드로의 대답 속에서 통곡하며 한없이 회개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는 모두 남들과 비교된 믿음이었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대로 믿는 인간적인 제 멋대로의 사랑이었지만, 그래서 "남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노라"고 장담했던 신앙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제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여러분! 양을 먹이는 것은 인간적인 열심이나 충성 봉사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뭘 가진 것이 많다고, 성경을 많이 알고, 사람이 좋고, 경험이 있다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부활한 주님 앞에 업드려 자신을 쏟아 놓을 때 영혼의 열매는 얻어지는 것이다.
부활은 승리이다. 미움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다. 원수가 없는, 원수를 모르는 사랑!. 이 사랑 앞에, 모든 증오와 미움과 갈등은 사라진다. 십자가상에서 죽으면서까지 원수를 위하여 용서를 빌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당해 낼 자가 어디 있는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가르침, 그 사랑 앞에 로마제국의 총검도 녹아 버렸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젊은 집사 스데반은 돌 팔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나? 하늘 보좌 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따라 나도 부활할 것을 믿는,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부활을 경험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죽고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이 내 속에서 사시도록 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는 내 성격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매일 아침 주님의 삶을 내 속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내 성격, 내 기질 대로 살면 죽음이 온다. 그렇게 해서는 살리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야 한다. 미움, 상처, 벽, 수군거림, 의심은 주님의 삶이 아니다. 용서, 사랑, 믿음, 소망, 오래참음, 온유, 섬김은 주님께로부터 온 성품이다.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셋째,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목숨의 위협앞에서도 두려움없는 증인이 되었다. 증인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증인되기 위해서는 부활한 그분을 경험해야 한다. 머리로서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인격, 삶, 사역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증인의 삶을 살 수가 있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몸을 입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에 도전하며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너희 쏘는 것은 죄’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날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고 우리는 그 창조의 주역이다.
성경은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아멘!
찬송가 155장 “주님께 영광” 김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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