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가장 위험해질 때 >
인간은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이 되었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 유발 하라리가 바라본 관점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유사 종들을 멸종시키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진화생물학이나 문화인류학적 이해가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며 종교적 성찰에 가깝다. 인간은 파멸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세계를 혼돈과 무질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종말론적 인식이 내재돼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유발 하라리가 말한 사피엔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보다 집단적 결집을 통해 타자를 혐오하고 배제하려는 인간 정신의 특징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벨탑은 파시즘의 원형이다. 파시즘(Fascism)이란 말은 하나의 ‘묶음’이라는 데서 연원한다. 국가를 전체주의적 시스템으로 묶는 것은 외부의 타자를 적대시하기 위해서다. 나치 역시 러시아의 볼셰비키 좌파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한 우파 사회주의 집단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바발텝은 인간의 역사 속에 끊잊 않고 건축되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분열적이고 파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아주 독특한 종교가 2천 년 전에 인류사에 등장한다. 타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넘쳐나는 제국과 식민지 구도 속에서 한 사람의 시골 청년이 등장하여 신의 통치와 자기희생의 역설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였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고통받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 인간성 안에 있는 사피엔스의 유전자를 불태웠다. 그럼으로 그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타자를 배제하고 파멸시킴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인간 본성에 불을 지르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분명히 말한다. ‘네 인간의 파멸적 본성에 불을 지르고 다시 태어나라.’
기독교는 그렇게 탄생한 종교였다. 아니, 종교가 아니라 가르침이며 깨달음이며 존재에 대한 혁명적 전환(Paradigm shift)이었다. 그런데 그런 종교가 언젠가부터 폭력적이고 파멸적인 집단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사피엔스의 본성을 그대로 따르며 배제와 혐오의 파시즘과 하나가 됐다. 예수의 이름으로 바벨탑을 쌓은 것이다.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예수를 가장 파렴치하고 폭력적인 집단에 팔아먹은 것이다. 교회는 지금 빌라도의 법정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자기 확신에 빠질 때, 인간은 스스로가 완전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인간이 가장 위험해질 때다. 특히 기독교가 예수의 자기희생에 대해 모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 지금은 한국 개신교회 가장 위험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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