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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꿈을 꾸고 도전을 해야 할 자격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3 가지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비전(vision)에 모험(adventure)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도전(challenge)해야 합니다.
셋째는 도전하는 자는 분명한 대가를 지불(sacrifice)해야 합니다.
신앙의 젊은이는 자신의 상황에서 안주하거나 장애에 주저 앉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합니다. 부딪혀 봅니다. 그러다가 원하는 대로 안되고 실패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젊은이에게 아직 실패는 없습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성공을 향한 도전이며 또 하나의 경험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 교회 부흥의 나라 청년들이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축복합니다.
저는 어둠이 걷힌 새벽마다 산책을 합니다. 길가의 풀밭에 맺어 있는 이슬을 봅니다. 나무에 맺힌 이슬을 봅니다. 특별히 거미줄에 맺어 있는 아침 이슬을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마치 보석이 걸려 있는 것처럼 영롱하게 빛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슬은 은혜의 상징입니다. 어두운 밤 사이에 소리 없이 살며시 내려온 이슬은 은혜와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새벽입니다. 아무도 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묵상할 수 있는 새벽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호세아 14:5에는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하나님은 이슬과 같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무덥고 비가 오지 않는 여름날의 텃밭에 가보면 온갖 채소들이 힘을 잃고 축 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이 지나고 아침에 가서 보면 싱싱하게 활짝 피어 있습니다. 푸름을 자랑합니다. 왠줄 아시지요? 밤사이에 내린 이슬을 머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새벽 이슬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청년은 새벽 이슬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청년들은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살아야 합니다. 청년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행히도 청년들이 가장 왕성합니다. 열심이 있고, 바르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우리 모든 교우들이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은 어떠할까요?
1. 첫째,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옷입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옷을 구별하여 세마포를 입고 거룩하게 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 모두의 옷이 거룩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겉옷을 잘 갈아입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형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검소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별로 흠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지저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모르지만 정신적인 흠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도서 9:8에 말합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성경에서 흰 것은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하늘나라의 색입니다. 흰 옷은 그만큼 단정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성도는 흰색 옷을 선호하고 입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 13:14에 보면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성도는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보이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맥스 루케이도이라는 기독교 작가는 ‘옷은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이 입어야 할 옷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입니다.
우리 성도가 입어야 할 그리스도의 옷이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고, 그리스도로 힘 입어 살면 그리스도인이 입는 거룩의 옷,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서 입어야 할 옷보다 죽어서 입게 될 옷(수의)에 관심을 가집니다. 죽은 후의 옷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옷이 필요 없습니다.
옷은 살아 있는 사람의 장식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세마포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백만 원, 수천만 원짜리의 수의가 죽은 몸에는 사치일 뿐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어떤 수의로 나의 죽은 몸에 두르는 것보다 평소에 제가 입던, 예배를 드릴 때에 즐겨 입었던 옷을 잘 정돈해 두었다가 입혀 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은 살아있을 때의 옷을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저는 자동차 기름을 넣을 때에 주로 봄베이 와이토모 주유소에서 넣습니다. 와이토모 맞은 편에 Z주유소가 있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회사의 주유소이었는데, Z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로 기름값이 다른 주유소보다 놓는데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주유하는 차들이 예전보다 많아서 아내와 함께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이상하다. 신기하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지난 주간에 제가 주유를 잘못해서 해결하기 위해서 Z 주유소가 가서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그 비결을 알 것 같았습니다. 자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지 않았는데,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 직원들이 하나 같이 친절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했습니다. Z주유소가 번창하는 이유는 직원들이 진심으로 대하는 친절의 옷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의 청년이 입어야 할 옷이 무엇입니까?
시편 119:8에는 말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주의 말씀만 있으면 청년이 깨끗해집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모두가 거룩한 옷을 입게 됩니다. 매일 묵상을 하면서 서로 나누고, 서로를 세워 가는 부흥의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청년이 말씀으로 무장하면 살아납니다. 거룩해집니다. 부흥합니다.
2.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은 헌신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 까닭은 즐거이 헌신하기 위해서 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할 게 뭐가 있습니까? 거룩한옷을 입고 할 일은 거룩한 일 밖에 없습니다. 즐겁게 헌신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님이 서울역 옆에서 노숙자들에게 밥을 먹이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에 양복을 입고 역 주변의 사창가를 지나가다가 몸을 파는 여자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데, ‘놀고 가라. 쉬고 가라’고 하면서 접근을 합니다.
피해서 빨리 가는데, 한 여자가 양복의 넥타이를 잡고 늘어지는데,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천주교의 신부들처럼 ‘클러지 칼라’라고 하는 성직자복을 입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사창가 앞을 지나가고 예전과 같은 그런 곤욕을 치루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창가에서도 불행한 사람들을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라고 칭찬을 받았던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그 열망으로 모든 준비도 다 했습니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손이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청년 여러분, 헌신하십시오.
문자 그대로 몸 신(身)을 드리세요. 우리의 몸과 시간과 물질,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헌신의 기초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헌신입니다.
로마서 12:1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저는 이 말을 조금 바꾸어서 권합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권하노니 너의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진정한 예물이니라.”
몸을 드리는 자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헌신하는 자입니다. 예배가 곧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헌신입니다. 저는 제 평생에 예배에 실패하는 자가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자를 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 장로님이 계시는데, 버스 운전을 하시는 기사입니다. 버스는 시내를 365일 쉬지 않고 운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사님들이 주말이나 일요일에 쉴 수가 없습니다. 그 장로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이모저모로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비결은 그의 삶의 우선 순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를 사수하고, 주일 성수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취미와 물질에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 장로님은 주일성수를 위해서 주말이나 공휴일에 다른 동료들의 당번을 대신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은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로, 어른로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청년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헌신하려고 하지만 바칠 게 없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8:12에는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할 마음만 있으면 할 것도, 바칠 것도 많습니다.
“나는 헌신할 것이 없다, 바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하더라, 내가 없어도 되더라” 이런 말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드림이 은혜이며 영광입니다.
헌신하려고 하지만 능력이 없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헌신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없다고 할 청년이 있습니까?
“다음에 하지, 차차 하지 뭐”
“여건이 되면, 다음에 …”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전도서 11:10을 유심히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는 잠깐입니다. 청년의 때가 마냥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잘 못 사는 것도 다 사치입니다.
“있을때잘해”라는유행가가있습니다. 이렇게패러디해서노래해보세요. “젊을때잘해.”
찬송 575장에 보십시오.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젊을 때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힘입니다. 시간입니다. 몸입니다. 그리고 생명입니다. 젊은 생명이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는 청년들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 주께 나아와야 합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오늘날 청년들이 어디를 가고 있습니까? 밤이 깊도록, 새벽이 되도록 2차 3차 하면서 술집을 헤매고 있습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은 의식적으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무의식 중에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바로 주께 나오십시오. 주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주께 나오면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주께 나오면 새벽이슬이 됩니다.
전도서 11:9에는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어디를 가십니까?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가 가는 그곳 때문에 미래의 길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의 길이 있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가끔 넋두리 같은 말을 합니다. 결혼 전에 잘 놀던 여자들이 이상하게 결혼도 잘한다는 그런 말을 합니다. 저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실수와 잘못 살았던 삶에 대한 열매는 알게 모르게 평생에 맛볼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청년들이 주께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입니다. 젊은이들이 갈 데가 많아집니다. 혼자서도 너무 재미가 있는 시절입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상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께 나오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성공 비결입니다.
시편 기자의 행복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시 84:1)
우리 성도의 삶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입니다. 이것으로 모여야 합니다. 원심력을 가지고 돌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청년들은 다음 세대의 희망입니다. 부흥의 나라 청년들은 우리 호산나새순교회의 미래입니다. 여러분들이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1) 구별된 삶, 거룩해야 합니다.
(2) 즐거이 헌신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3) 주님께로 나아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가득하고 생명을 살고 생명을 나누고 생명을 살리는 청년과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