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입니다.설날은 가족이 함께 한자리에 모여 지난 한 해를 반성하고 우리에게 생명과 삶을 베풀어주신 조상님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또 한 해 동안을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생각과 길과 말씀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는 나이를 먹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부모님들의 생각이 자식들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깨달으며 부모님의 깊은 생각을 어렴풋이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조상님들의 차례상 앞에 모여 앉아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자식으로서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저버리고 허용과 위선과 자기기만 속에서 멀리 멀리 떨어져 살아온 불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내 비록 멀리 떨어져 살아도 하느님과 조상님들은 나의 숨소리와 함께 나의 살과 피와 함께 항상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온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비록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생각하지 않고 잊으려 해도 하느님과 조상님들은 나를 항상 생각하시고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설을 맞이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고 있습니다.깨어 있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는 우리말에서 “깨”로 시작한 낱말들을 곰곰이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하다, 깨다, 깨뜨리다, 깨닫다, 깨우치다 등등 이러한 낱말들의 공통점은 깨라는 말이 무언가 부수거나 치워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그렇다면 신앙의 의미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과거의 묵은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일 수도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온갖 허물을 깨끗이 치우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그렇게 지난 한 해의 낡은 삶에서 깨어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그렇다면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언제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며 자신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그러할 때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기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래서 언젠가 여러분에게 강론을 드린 대로 내적인 반듯함과 외적인 깔끔함을 여러분에게 드려서 반듯반듯, 깔끔깔끔 이런 삶을 살자고 말씀을 드린 적도 있습니다.따라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재림을 기다리며 제 신앙의 처지를 점검하고 가꾸어 왔습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사는 것이 참된 교회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참된 교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표현 중에 깨어 있음은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깨어 있는 것은 무엇보다 제 삶의 본질에 대한 본분을 다하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듯,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위험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며 집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듯, 신앙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듯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에 대한 온전한 투신과 삶의 본디 모습을 추구하는 일상의 열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가끔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절망은 희망을 남는다, 성공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라는 말들은 전혀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그럼에도 순탄하고 평온한 삶만을 꿈꾸기보다는 고통을 믿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신앙인다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초대 교회가 그러하였으니까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과 십자가에게는 힘들고 아프지만 신앙인에게는 뜻 깊고 보람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아픈 삶을 이겨내고 나면 장밋빛 미래가 있다는 가사도 아니고, 후손들에게 영웅적인 삶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힘겹게 사는 지금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그 시간을 먼저 가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하나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그 곁에는 함께 아파하고 울어준 형제자매들이 있었습니다.깨어 있음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그 삶이 어떻든 서로 다독이며 오늘을 살자고 다짐하는 것입니다.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설입니다. 언제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명절입니다.추운 날씨로 얼어붙은 마음도 조금씩 온기를 찾고 어렵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이 처지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신앙인으로서 설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연말연시에 바쁜 분위기에 휩쓸려 제대로 하지 못한 신앙생활의 다짐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마치 한 해의 시작을 또다시 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고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의 신앙생활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언젠가 사제 연례 피정을 지도하신 신부님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그 신부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표상인 소금과 누룩의 공통점을 지적해 주셨는데, 그것은 선을 이루고 난 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라질 줄 안다는 사실이었습니다.소금은 맛깔스러운 젓갈을 가능하게 하지만 거기에서 더 이상 흰 소금의 형체를 볼 수 없습니다. 먹음직한 빵과 떡을 위해 사용된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선 자체를 보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시련을 보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신학생 시절에 어떤 책을 읽다가 꽃이 아니라 뿌리와 거름이 되어주는 삶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꽃이 되어 느끼는 흐뭇함에 많이 젖어 있는 게 사실이었습니다.이러한 저희에게 채찍을 가하는 게 있습니다.
이 명절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들을 기쁘게 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의 덕이 곳곳에 묻어 있는 모습입니다.그러한 분들에게서 기운을 얻어 보이지 않는 소금과 누룩과 거름의 삶을 배우는 것을 대희년인 올해의 결심으로 삼아보고 싶습니다.교우님들도 넉넉한 명절을 보내시는 가운데 나름대로 좋은 결심을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제가 이 본당에 올 때 출발하면서 머슴의 모습으로 출발하면서 마침은 거름으로 끝내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머슴이 되었다는 것은 이 몸은 당신의 종이라는 것이고, 거름이 된다는 것은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사설에 가위로 오려서 붙여놓은 것이 있어서 오늘 함께 설 명절에 읽어드리고 싶습니다.그 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카이에 우려가지고 오늘 읽어드리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외가 동네로 머슴살이 갔던 큰 아들은 세경을 짊어지고 와서, 지게를 받쳐놓고 더 말라버린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공장으로 돈 벌러 가던 누이도 벌써 도착했고, 객지에 나간 작은 아들은 빈손이라 못 온다더니, 섣달그믐 한밤중에서야 사립문을 들어섰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초라한 가방에서 버선과 고무신을 내어놓고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흐르고 있다. 모두 모였다. 그래 고생들 많았다. 몸성히 돌아왔으니 더 바랄 것이 뭐 있겠어.
설날 아침이다.
차례 지내러 가자 문중 어른들께 세배하고, 친척들과 함께 여기저기 조상들의 산소를 순회한다. 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기러기 때처럼 외줄로 밭길을 걸어간다. 까만 교복의 까까머리, 색동 치마저고리 차림, 재잘거리는 아이들까지 모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찾아가는 착한 이들이라, 평화의 주님께서 축복의 한 해를 열어주시리라, 명절이 참 좋구나. 산 넘어 보이는 마른 나뭇가지를 오가며 까욱거리는 까치가 평화롭다.
사람들은 한 달을 나누고, 한 주를 나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의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변함없는 사랑의 메시지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손을 맞잡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는 인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될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