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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백)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말씀의 초대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 동료들이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기도를 마치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23-31
그 무렵 23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24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주님,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25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주님의 종인 저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26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모였구나.’
27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28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
29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0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31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8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최고 의회 의원이자 바리사이로 뛰어난 지식과 명예를 지닌 세상의 시선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는 단순히 방문한 시간이 밤이라는 뜻을 넘어, 아직 그가 영적으로 어둠 속에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율법을 모범적으로 지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아왔지만,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과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물음표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사회생활도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과 영적 목마름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 니코데모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요한 3,3 참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계산법과 논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질서와 논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분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신앙의 빛」, 18항)입니다. 내 지식과 경험의 틀 안에 판단을 가두고, 심지어 신앙마저도 내 방식대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성령의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계획보다 훨씬 더 크신 하느님의 이끄심과 은총에 자신을 맡기는 용기, 바로 그 용기를 통하여 우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또 다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초막절에 열린 유다 최고의회에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까지 치렀던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요한 3,7-8)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유일한 비결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땅에 하강(下降)하시고, 상승(上昇)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 신앙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위인 세례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례로 거듭나야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그 결과 하느님을 뵐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로서 율법이나 지적인 측면에 있어 최고봉에 서있던 니코데모였지만,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의문 부호를 찍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3,9)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재생을 말씀하시는데, 니코데모는 육체적 재생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재생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짤막하게 나마 성령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성령은 마치 바람같다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도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성령도 바람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도 마치 바람 같습니다. 나름 버틴다고 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지상에 서 있지만, 성령의 세찬 바람이 언제, 어디에서 확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더 머물러 있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성령께서 ‘자 때가 되었다! 일어나자!’ 그 한 마디면 그걸로 끝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과 축복은 놀랍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과 육신은 마치도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평소 잘 들리지 않았던 부드러운 주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워진 몸을 성령의 바람에 내맡겨 어디로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멀고 먼 옛 사람, 이 천 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은 왔지만, 그 봄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4년째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봄이 왔지만, 그 봄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중동에도 봄은 왔지만, 그 봄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불사부활(復活不似復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해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뻐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고 했던 토마스처럼 어쩌면 우리도 세상의 것들에 눈이 가려져서 주님 부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평화는 언제나 인류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힘으로 유지된 평화가 있었고, 어떤 시대에는 제도와 질서에 의해 유지된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철학은 또 다른 평화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면 세 가지 평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Pax Romana, Pax Americana, 그리고 Pax Christi입니다.
먼저 Pax Romana, 로마의 평화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은 약 200년 동안 지중해 세계에 비교적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 냈습니다. 로마의 군사력과 행정 체계는 광대한 지역을 통합했고, 도로와 항구는 상업과 문화 교류를 촉진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군사력과 제국의 권위에 의해 유지된 평화였습니다. 힘이 약해지자, 제국의 질서도 서서히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Pax Romana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로마의 도로와 언어, 행정 체계는 지중해 세계를 하나로 연결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그리스도교 복음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군사력으로 유지된 제국의 평화 속에서 사랑과 자비의 복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의 제도와 문화가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면서 중세 천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다음 시대에 등장한 질서는 Pax Americana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협력 체제와 세계 경제 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유엔이 창설되었고 국제 무역과 금융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냉전이 끝난 이후 약 30년 동안 세계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세계화가 확산하였고 정보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인류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긴 평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 역시 완전한 평화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질서는 여전히 힘의 균형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강대국 간 경쟁이 다시 나타나고 국제 질서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또 한 번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은 힘으로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왔지만, 아직 그 봄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가 시작되려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왔지만, 그 부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가 시작되려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활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였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다면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늘 그렇게
빛으로
새로 태어나
빛이 되어가는
빛나는 사람
늘 그렇게
선으로
새로 태어나
선이 되어가는
선한 사람
늘 그렇게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
믿음이 되어가는
믿는 사람
늘 그렇게
기쁨으로
새로 태어나
기쁨이 되어가는
기뻐하는 사람
늘 그렇게
희망으로
새로 태어나
희망이 되어가는
희망하는 사람
늘 그렇게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
사랑이 되어가는
사랑하는 사람
늘 그렇게
평화로
새로 태어나
평화가 되어가는
평화로운 사람
늘 그렇게
사귐으로
새로 태어나
사귐이 되어가는
사귀는 사람
늘 그렇게
품음으로
새로 태어나
품음이 되어가는
품는 사람
늘 그렇게
베풂으로
새로 태어나
베풂이 되어가는
베푸는 사람
늘 그렇게
섬김으로
새로 태어나
섬김이 되어가는
섬기는 사람
늘 그렇게
살림으로
새로 태어나
살림이 되어가는
살리는 사람
오늘의 성인
성 마르티노 1세(Martin I)
신분 : 교황, 순교자
활동연도 : +655년
같은이름 :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토디(Todi) 출신인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로마(Roma)로 온 뒤로부터 그의 학덕과 신심이 널리 알려졌다.
부제 때 그는 교황 테오도루스 1세(Theodorus I)의 교황대사로서 콘스탄티노플에 갔었고, 649년 7월 5일에 그를 승계하여 착좌하였다.
그는 즉위한 해라테라노(Laterano)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이단인 단의설을 단죄하고, 콘스탄스 황제의 칙령 티포스(Typos)를 파문하였다.
자신의 종교 정책에 도전한다고 느낀 단의설주의자이던 콘스탄스 황제는 화가 나서 이탈리아의 총독 올림피우스(Olympius)에게 교황을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하라고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신임 총독 테오도루스 칼리오파스(Theodorus Calliopas)를 로마로 파견하여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끌고 오라고 명하였다. 이때 병중에 있던 교황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은신했으나 653년 6월 17일 황제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그 해 가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독방에 감금되어 3개월 동안 올림피우스의 반역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크림(Kyrm) 반도에 있는 케르소네수스(Chersonesus)로 유배를 가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잔혹한 대우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655년 9월 16일 사망하였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기념했는데, 순교자로 공경되는 마지막 교황이다. 1969년 이후 동방 교회와 함께 4월 13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성 헤르메네질도 (Hermenegild)
활동년도 : +585년
신분 : 왕자,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헤르메네길도, 헤르메네길두스, 헤르메네길드, 헤르메네길트, 헤르메네질두스, 헤르메네질드
성 헤르메네길두스(Hermenegildus, 또는 헤르메네질도)는 에스파냐 서고트족(Visigoths)의 레오비길두스(Leovigildus) 왕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테오도시아(Theodosia)의 아들로서 아리우스(Arius) 이단에 젖어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열렬한 정통파 신앙인인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시제베르트(Sigebert) 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을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준 모든 소유와 지위를 박탈하려 하였다. 그러자 헤르메네길두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아리우스 이단과의 투쟁을 선언하고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차츰차츰 아들의 입장을 이해한 부친이 화해하고 그전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나, 계모로 들어선 고스빈다(Gosvinda)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계략으로 그를 투옥시키고 군인들을 보내어 살해하였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죽음으로 거부하여 정통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는다.
복녀 마르가리타 (Margaret)
활동년도 : +1320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
같은 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말가릿다
1293년경 치타디카스텔로의 몇몇 부인들이 본당으로 기도하러 갔다가 부모로부터 버려진 6-7세 된 여아를 발견했는데 불행하게도 맹인이었다. 이 맹인 소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이집 저집에서 보호받다가 마침내 어느 수녀원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이 수녀원이 그리 성스럽지 못하여 그녀를 학대하자 어느 부부가 제공한 조그마한 집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3세 때 그녀는 도미니코회의 3회원이 되면서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봉헌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치유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녀는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었으며, 부모가 일터로 가고 없는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조그마한 학교를 세우고 그들을 교육했는데, 자신이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게 활약하였다. 마르가리타는 33세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죽은 이후 비범한 인물로서 높은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승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