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장개석이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습니다. 대일 개전전부터 장개석은 중국 단독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는 이상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들이 전쟁에 개입하여 다 함께 일본을 다구리 치는 것만이 중국이 살길이요,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드디어 그것이 실현된 것이죠.(39년 5월 노몬한전투때도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할 줄 알았으나 곧 일소불가침조약을 맺는 바람에 급실망했죠)
1941년 12월 31일, 중국전선은 연합군의 한 전장이 되었고 장개석은 정식으로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포함하는 중국전구의 총사령관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연합국 26개국 공동선언에 의해 중국은 미, 영, 소와 함께 연합국 4대 주요 강국이 됩니다. 루즈벨트는 이 새로운 친구를 위해 통크게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5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죠. 이는 그전에 송미령과 재중인사들이 그토록 미국정재계에게 로비를 했음에도 고작해야 2500만달러를 모금한 것에 불과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였죠.
42년 6월 7일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해군의 대참패와 43년초 남태평양에서 과달카날, 대소전에서스탈린그라드,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전역 등 추축군은 이 3대 전역에서 완전히 패배함으로서 전세는 점차 연합국측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런 국제적 여건하에 1943년 11월 장개석 역시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동부전선에 대한 대규모 반격작전을 계획합니다. 이른바 "국군총반공지도계획대강"에 의하면, "우선 제5, 제6, 제9전구에서 호북 무한을 중심으로 한 화중일대의 일본군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으로 연합군과 협력하여 단계적으로 장강, 황화 유역과 동부연안의 적을 일소하고 나아가 동북을 회복한다"라고 합니다.
44년 2월 제4차 남악 군사회의에서 장개석은 제3전구, 제4전구, 제6전구, 제7전구, 제9전구의주요 지휘관들에게 "항일전쟁은 현재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하였다. 제2기 항전은 이제 끝났으며, 제3기 항전 즉 아군의 적에 대한 반공결전의 시기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에 따라 중국 군사위원회 군령부에서는 44년 3월 두가지 반격계획을 수립합니다. 하나는 "의사(의창-장사)반격계획"과 "총반공계획"이었습니다. 의사반격계획은 5월 15일까지 공격준비를 마친후 호북성 의창-장사 일대에서 제3전구, 제5전구, 제9전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여 무한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중국군 전구별 사령관 및 담당구역(출처 : 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군의 대일군사전략, 기세찬)
또한 44년 3월 7일에는 "국군총반공지도계획대강" 乙안을 상정하여 "각 전구의 주력이 전전선에 걸쳐 반격하여 최일선의 적을 섬멸한후 진격하여 동북까지 회복"하며 그 시기는 "일본군의 붕괴 조짐이 보일때, 호북성 탈환후 각 전구가 보충, 훈련을 마치고 연합군이 필리핀, 대만을 공략하고 동남연안을 탈환하여 외부로부터 충분한 보급과 지원을 획득할 수 있을때"라고 전제합니다. 즉, 보시다시피 내용이 구체적인 반격계획이라기보다 단지 향후에 이렇게 하겠다는 원론적인 차원의 일종의 방침에 불과한 것입니다만, 어쨌든 중국군이 태평양에서 미군의 공세를 강건너 불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동참하여 적극적으로 반격하여 영토를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점에서 장개석의 의지결여와 소극성을 지적하는 로이드 이스트만(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등 여러 서구 학자들의 기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44년 당시 중국군의 여건상 이런 공세작전은 당장은 실현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는 44년 4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던 일본의 "이치고작전(一号作戦, 대륙타통작전)"과 중국군의 파멸적인 패배가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조차 버거운 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일본 중국파견군은 남방철도 관통을 통한 병참 확보와 미공군이 주둔한 계림, 유주 장악, 중국군 주력의 격멸을 목표로 43년 12월부터 근 반년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철저히 마친후에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는 아무 준비도 없이 어설프게 공격을 시도했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졸전을 펼친(심지어 고단수의 반일론자라는 소리까지 듣게된) 무다구찌의 우호작전(ウ号作戦, 인팔작전)과는 철저하게 대비되는 것이었죠.
일본군의 공세로 하남성과 호남성, 광서성에서 중국군은 문자그대로 붕괴되었습니다. 제1전구와 제9전구는 전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타 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일전쟁기간 3번이나 방어해냈던 장사도 4일만에 함락되었으며, 단지 방선각의 제10군이 방어한 형양에서만 40여일간 수차례의 일본군을 막아내며 훌륭한 방어전을 펼쳤을뿐 11월 중순 계림과 유주가 손쉽게 함락되고 11월 24일에는 중월국경의 남녕을 재점령함으로서(38년말 일본군이 점령했다가 39년 12월 중국군의 동계공세 당시 탈환) 12월 10일 인도차이나와 연결함으로서 만주부터 베트남까지 철도가 개통됩니다. 중국은 화중과 화남의 100여개의 도시와 50만명이 넘는 최일선 병력, 공군기지 7개, 36개의 비행장을 상실합니다. 이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치명타였지만 장개석의 정치적 위상을 흔들었고 연합군들은 중국군의 전투력은 물론 전쟁 의지 자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인도-버마에서 스틸웰의 승리는 물론 도처에서 패퇴하는 일본군에게 유일하게 패배한 군대로서 낙인이 찍히죠.
이전과 달리, 이치고작전에서 중국군의 무기력한 패배에 대해 라이프 2차대전사나 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등 서방측(주로 미국쪽의) 서적들에서는 장개석의 소극성과 무능함, 국민정부의 부패함에 대해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장개석은 미국의 대여무기를 설악의 제9전구에 분배하는 것을 반대했다. 장개석은 설악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p169
"센놀트는 제14공군의 보급물자 일부를 설악의 중국군에게 제공하려 했으나 장개석이 반대하였다. 원조물자가 자기에 대한 공격에 사용될 것을 두려워한 장개석은 무기나 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라이프 제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181
또한, 태평양전쟁기간 타임지 재중 프리랜서 기자로서 당시 전투 현장에 있었던 데오도어 화이트 역시 중국군의 허약함과 무기력한 반격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특파원이 본 역사의 현장", p100)
그러나 이런 시각은 매우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시각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이치고작전을 시작하기 전인 43년 11월에 있었던 호남 상덕전투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빼앗겼던 상덕을 탈환했으나 이로 인해 설악의 제9전구는 파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반년후의 이치고작전이 시작되었을때까지도 거의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남성에 주둔한 탕은백의 제1전구 역시 마찬가지였는데다, 하남성은 43년의 심각한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지어 식인이 만연할 정도로 엉망인 상태였습니다. 도저히 일본군의 공격에 맞설 상황이 아니었죠.
또한, 장개석이 50만에 달하는 호종남의 최정예 중앙군을 일본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연안의 공산군을 봉쇄하기 위해 깊숙히 숨겨두고 팬더 먹이나 주고 있었다는 스틸웰의 주장 역시 왜곡된 것입니다. 당시 연안 주변을 통치하던 모택동은 서안과 태원을 점령하고 섬서성과 산서성으로 세력을 확장 하기 위해 여러차례 염석산의 제2전구를 공격했으며 중앙군을 포함한 상당한 병력으로 이들을 견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역시 다른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보급문제에 직면하여 각 사단에서 매달 적어도 600명 이상이 전염병과 기아로 사망하거나 탈영, 실종되고 있는 실태였습니다.(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p186)
근본적으로 44년 당시 동부전선에서의 중국군의 상황은 어느 곳이나 다를바가 없는 실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화에 뒤져있었고 30년대 중반까지 내전을 겪었던 중국은 국내 생산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 자체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30년대 기간동안 국민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동남연안과 화중, 화남에 건설한 공업시설과 발전소, 병기창 대부분을 전쟁 초반에 빼앗긴데다 주요 세원이었던 관세, 염세, 통세(전체 세원의 90%)도 대부분 상실함으로서 항전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해 41년 독소전쟁 초반 소련이 그러했듯, 국민정부 역시 경제통제정책과 함께 사천, 운남, 귀주 등 서북, 서남지역을 후방근거지로 선포하는 한편 연안지역의 공장설비와 자본의 이전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철저한 청야전술과 강제 이전을 실시할 수 있었던 스탈린의 소련과 달리 철권통치를 할 수 없었던 장개석정권은 기업들에 대해 이전에 따른 각종 특혜(수출세, 원료세 경감 및 면제, 운수비 면제, 장려금 교부 등)를 약속했음에도 기업들은 이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해 조계에 있던 기업들은 당장의 안전을 보장받은 데다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 훨씬 이윤을 보장받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강제 이전된 공장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전하지 않은채(최대 경제권이었던 상해의 경우 겨우 2.75%에 불과) 그대로 남는 쪽을 택합니다. 이전한 공장들조차도 실상 3, 4급에 불과한 소규모였습니다. 물론 전쟁기간동안 중경을 비롯한 내륙지역에 발전시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장과 자본이 유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총력전을 하기에는 택도 없었다는 것이죠.
여기다 38년 10월부터 일본은 상해를 비롯해 점령지역에 대한 물자 유출을 차단하고 동부해안의 항구를 봉쇄하고 변경의 감시를 강화하여 내륙지역에 대한 경제 봉쇄를 단행합니다. 이로 인해 점차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죠. 여기다 42년초 홍콩과 인도차이나, 버마의 함락으로 중국은 외부와의 모든 루트가 차단됩니다. 신강성을 통해 소련으로부터 유입되었던 물자는 꽤 짭짤한 것이었지만 39년 노몬한전투이후 일소불가침조약 체결이후 중단되었죠. 이런 점에서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영-미와 일본의 전쟁은 중국에게 도움이 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악영향만 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재고가 바닥나고 철도가 차단되어 물자가 유입되지 않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물가가 폭등하는 것은 당연하였죠. 특히 식량난이 가장 심각했는데 40년 이후 심한 가뭄으로 도처에서 기근이 든데다 40년에는 곡창지대인 호남의 의창을 빼앗기는 바람에 더욱 상황이 악화됩니다. 44년에 이르면 하루 아침 저녁으로 가격이 달라질 정도였죠.
1937
1939
1941
1943
1945
110
300
2,147
24,927
256,469
중일전쟁기간 전국 소비자 물가 지수(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이렇게 물가가 급등하자 정부에서는 물가 상한선을 정하고 투기와 매점매석 금지 등 여러 조치를 취합니다. 43년 1월 15일부터는 전국에 대해 물가 통제를 선포하죠. 장개석은 이를 어기고 폭리를 취한 부패 관료들을 본보기로 총살형에 처했는데 이중에는 사천시장 양전우같은 거물급 관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물가 통제정책은 장개석의 생각과 달리 역효과만 났는데, 생산원가가 판매가보다 더 높다보니 되려 공장들이 스스로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중일전쟁기간 중경국민정부의 물가통제정책(한국중국학회, 김지환)"에 따르면, 43년 하반기에 오면 중경의 철강공장 18개중 14개가 문을 닫았고 324개 기계공장중 73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44년 말에는 가동률이 1/3이하가 되죠.
레이황의 "장제스 일기"를 보면 당시 장개석의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여실하게 알 수 있는데, 중국의 철강생산은 전전의 1/10도 되지 않았고 소총탄은 매월 생산량이 고작 중국군 1인당 4발을 지급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였습니다. 유일한 외부와의 통로는 인도의 아삼에서 수송기를 통해 히말라야를 거쳐 곤명까지 날라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워낙 험하여 이른바 "험비루트"라고 불리었던 이 루트로 통해 들어오는 물자는 형편없이 적은데다 대부분이 버마에 있는 스틸웰의 X군과 Y군에게 가고 그 나머지는 센놀트의 제14공군에게 지급되었을뿐, 정작 중국군에게 들어오는 것은 단 한자루의 소총도 없었고 44년 6월에야 처음으로 겨우 야포 60문, 대공포 320문, 바주카포 500정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당초 스틸웰의 요구대로 버마에 병력을 파견하는 대신 공중수송으로 매월 5천톤의 군수물자와 중국공군 재건을 위해 500대의 전투기를 제공키로 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장개석이 의도적으로 군수 물자를 자기 임의로 빼돌렸다느니따위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죠.
당시 버마에 파견되어 있던 스틸웰휘하 버마원정군이야말로 당시 중국이 가진 최정예부대이자 전략예비대였습니다. 또한 스틸웰에 의해 버마탈환이 추진되자 센놀트의 제14공군의 대부분도 버마전선으로 전환되어 약 500여대의 항공기중 일본군의 이치고작전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은 겨우 150대에 불과하여 약 200여대의 일본기에 대해 열세했습니다.
"나는 중국군이 그들이 할 수 있는한 강력한 저항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전력이 버마에 집중되어 싸우고 있기 때문에 중국 육군에 대해서는 거의 전력을 증원할 수 없다" - 이치고작전초반인 4월 19일 센놀트가 루즈벨트에게 보낸 편지
스틸웰은 자신의 일기에서 중국군의 무능함에 대해 매우 성토했고 심지어 모든 고위 장교들을 총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도주둔 영국군을 지휘하는 슬림장군은 오히려 "중국군은 매우 용감했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스틸웰은 전술가로서 매우 유능한 지휘관임에 틀림없었으나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자로서 자신의 개인적 편견에 따라 일본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고 장개석과 중국군 지휘부를 멸시하고 미국의 괴뢰쯤으로 취급함으로서 양국간의 신뢰를 스스로 악화시킵니다. 게다가 매우 독선적인 성격때문에 센놀트는 물론 영국군과도 사이가 악화되고 서로 협조가 결여되어 초반에 대참패를 당하죠. 버마에서 그의 승리는 실상 그의 능력이라기보다 무다구찌의 무모한 작전으로 인팔작전에서 대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스스로 약화됨에 따라 손쉽게 굴러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은 북부 버마진공을 주장하는 스틸웰에게 호남과 하남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를 경고했고 운남에 주둔한 예비대를 버마로 보낼 수 없다고 했으나 스틸웰의 고집으로 제5군과 제6군이 파견(2개군 6개 사단 5만명)됨으로서 장개석의 경고대로 일본군이 실제로 공격했을때 여기에 대항할 수 있는 예비전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형양 구원을 위해 장개석이 파견할 수 있는 전력은 보병만으로 구성되고 화력도 기동력도 없는 제62군과 제79군이었으나 이들은 형양부근까지 진격했다가 일본군에게 간단히 격퇴당하고 말았습니다.
장개석은 스틸웰에게 "일본군 1개 사단은 중국군 3개 사단에 필적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일본군은 1개 대대만으로 중국군 1개 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만큼 일선의 중국군은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 1개 사단은 약 18천명에서 많게는 25천명에 달했으나 중국군 사단은 정수가 9천~1만이었고 대부분은 5~6천명인데다 심지어 2천명이하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통상 3~4개 사단으로 구성되는 1개 야전군(당시 중국군은 군단편제가 없고 사단위에 바로 군이 있었음)이 1개 사단병력인 2만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화력과 기동력에서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죠.
어쨌든 버마에서 승리한 대신, 중국은 그야말로 아작이 났고 전면적인 붕괴에 직면합니다. 중경과 곤명 마저 위협을 받게 되죠. 스틸웰은 영웅이 되었지만 결국 루즈벨트에 의해 소환되었고 보다 친중국적인 인사인 웨드마이어중장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이치고작전은 전술적으로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전략적으로 본다면 가뜩이나 병력과 물자도 부족한데 전선이 턱없이 늘어나 병력만 더욱 분산된 격이었습니다. 만주에서 중국대륙을 거쳐 베트남까지 철도로 연결하겠다는 거창한 계획도 이에 필요한 수송기자재의 부족으로 한낱 잠꼬대같은 소리일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중국군 몇개군을 아작냈다는 것과 장개석의 위신이 잠시 실추되었다는 것말고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스틸웰이 소환된후 스틸웰이 쥐고 있었던 중국-인도-버마전역을 중국과 인도-버마 2개 전역으로 나누고 또 역할도 3명에게 분담시킴으로서 지휘계통을 효율적으로 정리합니다. 새로이 장개석의 참모장이자 주중 미군 총사령관이 된 웨드마이어중장은 장개석과 중국에 대해 훨씬 유연하고 우호적으로 행동하여 경색되었던 양국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 양반이 웨드마이어중장(1897~1989). 첫인상부터 깐깐해 보이는 스틸웰과는 달리 사람 좋아보이는군요.. 전쟁끝나고 참모총장대리까지 했다가 퇴역한후 민간항공회사를 운영합니다.
45년 1월 12일, 드디어 인도 북동부 아쌈주의 레도와 운남 곤명을 연결하는 레도공도(이른바 "스틸웰공도")가 개통되어 113대의 트럭이 최초의 물자를 실고 출발합니다. 1800km의 장거리를 한달이나 걸려 곤명에 도착하죠. 이 도로를 통해 전쟁 끝날때까지 약 3만 4천톤의 물자가 중국으로 전달됩니다. 웨드마이어는 물자를 독점했던 스틸웰과 달리 중국군에게도 분배하였고 중국군의 개편과 재훈련, 미제 무기로 무장시켜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에 따라 장개석은 육군부장인 하응흠을 중국육군총사령에 임명하고 45년 1월 29일 4개 방면군 12개군 36개 사단을 미국식으로 편성하여 반격계획의 주력으로 활용하는 중국군 재건계획을 수립합니다. 또한 기존에 자질이 좋지 못한 문맹 농민출신을 징집하는 대신 일정 학력과 자질을 갖춘 청년군을 모병하여 약 8만 6천명을 모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