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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우리의부활 원문보기 글쓴이: 미르
-목차-
훈(Hun)족에 대하여
서론 : * . 미지의 민족 훈(Hun)
본론 : 1 . 훈족의 조상 흉노(匈奴)와 서진(西進)
2 . 공포에 떨게된 유럽
3 . 훈족왕 아틸라(Attila)와 훈 제국의 몰락
결론 : * . 훈족에 대한 바른 해석
미지의 민족 훈(Hun)
Frank Frazetta 作. 훈족의 강인한 위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유럽인들에게는 매서운 폭풍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2천 5백년 전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1)는 유라시아 초원민족의 이동과 투쟁에 관해 ‘흑해에 살던 키메리아인은 스키타이에게 쫓기고, 스키타이는 맛사게다이에게 쫓겼으며, 맛사게다이는 외눈 종족 아리마스포이에게 쫓겼다. 아리마스포이의 너머에는 황금을 지키는 괴조 그뤼포스의 무리가 산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민족 그뤼포스의 무리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럽계 유목민들을 아시아의 서쪽 끝으로 밀어냈다. 그리스인들조차 두려워했던 기마민족 스키타이를 서쪽으로 밀어낸 그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그 의문은 몇 백년이 흐른 뒤 그들 바로 훈족이 직접 유럽에 나타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이 나타나자 성서에 예언된 지구의 종말이 온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독일의 ZDF TV의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그 점을 다루기 위해 유목민의 정체와 이동 경로를 추적하여 Q 채널로 방영한 적이 있다. 한 부분을 인용해 보면,“유럽에 폭풍같이 밀려들던 훈족은 서양 역사상 큰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훈족은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도대체 이들은 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미지의 땅으로 진출했을까? 이 원정의 배후에는 어떤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까?"2)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훈족에 관심을 갖고 있는 유럽인들이 궁금한 점인 동시에 내가 궁금한 점이다.
훈족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유럽사에 4세기 말경 갑자기 등장해서 게르만족을 이동하게 했으며, 유럽인들의 생각에 세계 최고 제국인 로마를 유린했고,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당시에 널리 퍼진 성서의 종말론 때문에 훈족을 악마가 보낸 군대라고 믿었다. 그래서 굳이 훈족의 유래에 대해 깊이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훈족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과거 훈족이 있었던 지방의 고고학적 인류학적 성과와 여러 학자들의 연구들을 통해 그 수수께끼가 점차 풀리고 있다.
훈족의 조상 흉노(匈奴)와 서진(西進)
그림 2)) 인위적으로 형태가 길게 변형된(편두) 훈족의 두개골
훈족의 조상 흉노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지금도 학자들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볼 때 흉노는 투르크계, 몽골계 그리고 북방민족들로 구성된 국가이었으며, 언어도 투르크어계의 언어를 사용한 사실이 중국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자료로 판단하면 적어도 흉노의 지배층은 투르크계 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의 무제4)에 의하여 중국에 복속된 흉노는 한나라 성립이전에도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민족이었다. 심지어 흉노의 위협 때문에 진시황은 기원전 215년에 몽염으로 하여금 흉노정벌과 만리장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진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시기에 흉노국도 기원전 209년경에 성립하였다. 중국이 최고통치자를 황제(皇帝)라고 부르는 명칭과 같이 흉노도 자신들의 최고통치자를 선우(單于)라고 하였다. 선우의 의미는 "통치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뜻이었다. 흉노국의 1대 선우인 두만(頭曼)5)은 흉노국을 성립하고 제2대 선우인 모돈(冒頓)6)은 재위기간동안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모돈선우는 막강한 힘을 앞세워 동으로는 동호(東胡), 서로는 월지(月氏)와 오손(烏孫), 북으로는 혼유(渾庾), 굴사(屈射), 정령(丁零), 격곤(隔昆)과 신리(薪犁)7)를 복속시키고 남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오르도스지역8)을 회복하였다. 모돈선우에 의한 국토확장은 동으로는 만주, 북으로는 바이칼호,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9)와 티벳고원까지 미치었다. 모돈선우 이후 제3대 노상선우(老上單于)10), 제4대 군신선우(軍臣單于)11) 재위기에는 전성기를 맞아 한나라를 빈번히 침공하였으며 노상선우 때에는 서쪽으로는 이리강(伊犁江)유역12)까지 진출하여 대월지(對月氏)를 다시 평정하고 남으로는 한의 수도인 장안을 위협하였다. 또한 흉노는 그 세력권을 서역(西域)으로 확장시키면서 타림분지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오아시스 국가를 복속시켰다. 그들의 정복 활동은 한마디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고,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성기를 구가하던 흉노도 수 백년 동안 불안한 정세 속에서 많은 분쟁과 전투가 잇따른 끝에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서기 350년에 극악한 인종 박해를 받고, 벌써 몇 세대를 그 땅에 살았던 흉노는 결국 사라지고 만다. 살아 남은 흉노는 우선 북쪽으로 도망친다. 그들의 이동을 가속화시킨 것은 끔찍한 기후 변화였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만나면 초원은 황폐해진다. 눈이 끊임없이 내리고, 악천후의 적응력이 뛰어난 들소조차도 선 자리에서 동사한다. 유목민은 생사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서기 373년, 유목민들은 북쪽 피난민이 늘어 초원에서의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인구가 최대로 증가한 상태에서 몹시 추운 겨울을 맞고 처참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원 지대의 얼음이 녹을 겨를도 없을 만큼 여름은 짧았고, 양식은 거의 바닥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늦은 봄의 어려운 시기에 어린 가축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중국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바로 여기까지이다. 그 후 흉노는 남쪽은 튼튼한 방어 수단이 된 만리장성과 중국 때문에 내려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길, 즉 서쪽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바로 유목민의 숙명인 생존을 위한 이동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들은 알타이 지역을 지나 아랄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흑해를 지나 유럽의 카르파티아 산맥 분지까지 쭉 뻗어 있는 초원 지대를 따라간다. 그리고 유목민이 그 훈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럽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가 열리는 것이다.
공포에 떨게된 유럽
서기 375년, 광활한 아시아로부터 온 야만적인 기마(騎馬) 집단이 동쪽 국경을 유린하자, 살인과 고문 그리고 불탄 마을에 관한 충격적 소식이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로마 세계권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약탈이나 하는 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이 어떻게 해서 세계 제국인 로마를 유린하고, 군사적으로 초강대국인 찬란한 고대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들 정주민족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럽인들은 기마병과 말이 그렇게 혼연일체가 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로마의 연대사가들은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이라 해도 훈족만큼 자기의 말과 일체가 되어 자라지는 못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훈족의 말들은 강인하고,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까다롭지도 않다. 그 말들은 혹독한 겨울에 눈 속에서도 먹이를 직접 찾는다. 훈족 기병대의 가장 큰 장점이 여기에 있었다. 로마인과는 반대로 훈족 기병대는 과외 비용 없이 일년 내내 출동할 수 있었고, 예비 말도 충분했다. 훈족의 전사 한 명이 말 일곱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훈족 한 사람이 말 여러 필을 동시에 부리는 것을 보면서 아연 숨이 차서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훈족에게는 로마인이 상상도 못했던 신(新)기술이 있었다.
그림 3)) 군장을 갖춘 훈족의 기마병
둘째는 등자였다. 훈족은 아시아에서 올 때 안장 외에도 새로운 전쟁 기술을 풍부하게 가지고 들어왔다. 그때까지 유럽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등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훈족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는,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안장에 부착했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다리를 고정시키는 발판(등자)을 이용하여 달리면서 사방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셋째는 새로운 활이었다. 훈족이 보여준 또 하나의 무기는 특이하게 제작된 활이었다. 탄력 있는 나무로 만들어 진 훈족의 활은 당길 수 있는 중간 부분과 활의 현에 놓인 화살의 끝 사이 폭이 꽤 짧았다. 이 활은 아래쪽보다 위쪽이 더 많이 구부러져 있었는데, 이는 기병이 자유자재로 손을 놀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때문에 이 활은 복합곡궁 혹은 불균형의 반사궁이라 불렸다.
넷째는 삼각 철 화살이었다. 훈족은 아시아에서 낯선 화살도 들여왔다. 손잡이에 특별한 구멍이 뚫려 있는 훈족의 화살은 공중에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때문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 병사들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화살촉은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철이었고 화살의 길이는 대략 60~80센티미터였는데, 그것은 저승사자의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 꽂힌다. 화살의 파괴력은 치명적이었다. 그것이 무서운 소리를 내고 나면 곧 가죽으로 만든 로마의 갑옷을 종이조각처럼 뚫고 큰 상처를 입혔다. 훈족의 활은 60미터 떨어진 거리의 목표물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훌륭했다. 덕택에 훈족의 전사들은 칼, 창으로 싸우는 전통적인 병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공격할 수 있었다. 훈족은 적과 직접적인 접촉없이 공격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림 4)) 훈족 이동로 및 훈 제국도(455년경)
훈족왕 아틸라(Attila)와 훈 제국의 몰락
그림 5)) 파르마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의 외벽에 붙어있는 훈족왕의 대리석 부조. 새겨진 글자는 ‘아틸라, 하느님의 재앙’ 이라는 뜻이다. 이 인물 형상이 아틸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아틸라를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묘사해왔다. 하지만 그 묘사가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에 관해 서기 449년,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정에 머무른 적이 있는 그리스인 프리스쿠스(Priscus)의 관찰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다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아틸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비교적 객관적인 단서이다. 프리스코스에 의하면 훈족은 자신들의 왕 아틸라를 하늘의 아들로 여겼다. 하지만 아틸라와 일반 훈족 사이에는 유럽의 왕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격차의 신분 차이가 없었다. 프리스쿠스의 말을 인용해 보면.
“아틸라는 왕관을 쓰지도 않았고, 옷은 수수했다. 그의 칼, 신발, 마구(馬具)에도 금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나무잔으로 술을 마셨고, 나무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 아틸라는 훈족 내부의 다툼을 듣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아틸라는 수염이 적었다. 아틸라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작았다. 코는 아주 납작했다.”16)
라고 했다. 그의 말에는 그가 유럽인이 아니라는 인종적인 견해도 들어있다. 물론 이같은 관찰만으로 모든 것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아틸라가 그 유목민 왕의 본명인 것도 아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종족적으로 몽골인보다는 터키인을 닮은 이 특이한 민족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 이리저리 추측할 뿐 딱히 확정짓지 못한다. 명백히 알려진 것은 꽤 많은 고유명사뿐이다. 이런 단어도 이민족 언어인 로마어나 고트어, 혹은 그리스어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아틸라라는 이름은 세월이 흐른 후에 붙여졌을 것이다. 아틸라 자신은 고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틸라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럽인들은 훈족의 왕이 실제로 어떻게 불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관한 모든 이름은 아틸라로 통일되어 있고, 지금 인용하는 프리스코스의 기록은 그에 관한 것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와 그 친척들을 매우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인 까닭이다. 그는 아틸라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아틸라 궁정의 생활 방식과 훈족의 관습에 대해서도 관찰했다. 그러면서 훈족들에게서 매우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에 의하면 손님을 집주인의 아내와 동침하도록 배려하는 훈족의 관습도 야만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자기들을 찾아온 손님에게 최대한의 우의와 친절을 베풀려 하는 유목민의 심성이 먼저 느껴진다. 아틸라는 그런 문화권 속에서 유목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유럽인들을 호령했다.
아틸라는 게르만(German)족의 전설, 신화의 내용에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힐데브란트의 노래(Hildebrandslied)17), 발타리우스(Valtarius)18),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lied)19), 영웅서사시집(Das Heldenbuch)20), 위드시드(Widsith) 등에는 아틸라와 훈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나타난다. 아틸라는 아틸라(Attila), 아틀리(Atli), 에첼(Etzel)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게르만족의 각 언어로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신화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아틸라의 훈족은 항상 제 3자 입장에서 나타난다는 점과 절대적인 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림 6)) 젊은 부인 일디코의 팔에 안겨 맞은 아틸라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 Ferenc Paczka 作
“결혼식 후 아틸라는 축하연 자리에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는 등을 대고 침대에 누웠고, 술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그의 코에서 한바탕 피가 쏟아졌다. 그러나 피는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목으로 흘러들어, 그는 질식사했다. 침실에서 전혀 기척이 없자, 다음날 경비병들은 불안해져 침실로 들어갔다. 그때 그들은 피를 잔뜩 흘리고 죽어있는 아틸라를 발견했다. 외상은 없었다. 그리고 베일을 쓴 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신부를 발견했다.”21)
라고 했다. 이날 밤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아틸라의 인생을 둘러싼 뒷말은 이미 무성하다. 453년 혼인 초야에 게르만 아내의 팔에 안겨 맞은 수수께끼 같은 죽음에서 동시대인들은 그가 사랑행위를 한 후 아내에게 단도로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틸라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거대 제국은 그 성립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죽음 이후 훈족은 아틸라에 견줄 어떤 후계자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정권이 와해되었다. 누군가를 조종할 수 있고 매혹할 수 있는 아틸라의 위험하고도 천재적인 재능이 후손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정치적인 노련함과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자질을 갗춘 미래상이 부족했다. 결국 피곤에 지치고 지휘력이 없어진 훈족 전사들 중 몇몇은 러시아의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해 불안한 유목생활을 포기했다. 다른 훈족은 초기 출병 후에 벌써 프랑스와 스위스 혹은 헝가리에 정주했다. 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민족과 융화했고, 유럽의 반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다른 훈족은 그들이 왔던 동쪽의 초원지대, 중앙아시아의 평원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유목민의 숙명 때문에 그들이 유럽에 왔던 것처럼 다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것이므로 정주민족들이 말하는 멸망은 아니었다.
훈족에 대한 바른 해석
훈족이 유럽 진출 때문에 발생하게된 민족대이동은 그들의 서진(西進) 때문에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이동하는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 엄청난 사건은 유럽이 고대로부터 중세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세계사적 의의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로 국가체제(國家體制)의 원리적인 변화이다. 즉 소박한 공동체의식과 화석화된 고대국가형으로부터 중세적인 국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교의 보편화이다. 셋째로 게르만족인 프랑크족의 지배하에 있던 곳에서 초기 봉건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훈족이 아니었다면 유럽의 중세는 그만큼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런 훈족의 역할을 무시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게르만족의 공포의 화신인 드라큘라의 전설을 살펴보면 드라큘라는 훈족의 자손이라 되어 있다. 드라큘라의 전설이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밖에 없다. 훈족의 자손이어야 듣는 사람에게 더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유럽인들이 보는 훈족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실제 훈족을 만나서 경험한 프리스쿠스는 그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이는 그들이 전쟁에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파괴자였으나, 그들의 문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의 풍습에 손님이 밤에 집주인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이 정도로 손님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수공업에 대한 그들의 능력과 지식이 수준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증명된다. 고도의 문명 국가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오리엔트 예술품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분묘 출토품은 그들의 기술이 이미 실용적인 도구들을 넘어 과시벽과 장식 취미를 발휘하는 수준에 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유럽인들과 현대의 사람들이 훈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당시에 성서의 예언 때문에 발생한 종말론에 따라서 그들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문화나 민족적인 면이 밝혀지고 있는 현대에는 그들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훈족은 유목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유럽에 온 이유는 정주민족들의 영토확장이란 의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목민으로서 기후 변화와 식량 부족 등의 생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입각해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봐야 한다. 현대 학자들은 유목이라는 것이 농경에 비해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정주민족은 문명민족, 유목민족은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비(非)문명민족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이제는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때 유목민 훈족의 진정한 면이 보일 것이다.
1) [BC 484 ? - BC 425 ?] 역사의 아버지라 부르며, 저서로는 <역사>가 있다.
2)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2002년 <자우 출판> 65-66p
3) 발굴 결과 그들은 북방계 몽골로이드로 밝혀졌고, 흉노나 스키타이, 신라 등이 행했던 두개골을 변형시키는 편두의 풍습이 밝혀졌다. 이외에도 많은 문화가 흡사하다.
4) 중국 전한(前漢) 제7대 황제(재위 BC 141~BC 87)
8) 중국 내몽고[內蒙古] 자치구 남쪽 끝에 있는 지역
12) 지금의 중국 신강위구르(新疆維吾爾) 자치구 서북지역
15) 프랑스 상트르주(州) 루아레현(縣)의 주도(主都)
16)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2002년 <자우 출판> 70p
17) 800년경 독일 풀다 수도원의 두 사제가 라틴어 기도서의 앞장과 뒷장 여백에 적어 놓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게르만 민족의 영웅서사시
18) 게르만의 영웅 발터에 대한 전설을 800-930년 사이에 라틴어로 기록한 장편 서사시
19) 이 이야기는 북유럽의 뵐숭전설과 같은 계통이지만, 독일 지역에서 중세적 질서에 맞추어 재해석된 것이다. 그전까지 구전되어 오던 전승들이 12세기에 오스트리아의 어느 시인에 의해 하나의 거대한 비극으로 구체화되었다.
20) 13세기 독일의 운문 로망스 모음집. 이 속의 시들은 크게, 볼프 디트리히 전설 권과, 디트리히 폰 베른 전설 권으로 나뉜다.
21)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역사의 비밀] 2000년 <오늘의 책> 260p
-참고 문헌-
1 . 패트릭 하워스 [훈 족의 왕 아틸라]
2002년 8월 10일 발행 <가람기획>
2 .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역사의 비밀]
2000년 9월 10일 발행 <오늘의 책>
3 .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2002년 1월 15일 발행 <자우출판>
4 . 세기출판사 편집부 [세계의 역사]
1978년 1월 5일 발행 <세기출판사>
첫댓글 참...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사라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