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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는 ‘나라의 으뜸이 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하는 곳이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나라를 세우면 도성의 궁궐 밖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세워야한다
ㅡ주럐 中 ㅡ
주례의 좌묘우사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가 자리 잡았다. 종묘(宗廟)는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나라의 근본을 뜻하고, 사직(社稷)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섬기는 것으로서 백성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을 뜻한다
종묘로 들어가는 입구의 하천인 회동제생동천에 축조돤 다리로 <대동지지>에서 이 다리를 "종묘전교"라
하였다 처음에는 나무다리였으나 세종 1421년 돌다리로 개축하였고 이후 현종 1663년에 개수한 바 있다
역대 왕들이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대제를 비롯한 각종 주요행사 때에 이용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바닥 한가운데가 좌우보다 한단 높은 어도형식이고 다리가 설치된 가장자리 모서리에는
해태상을 새긴 화표주가 마련되어 있었다
천년 사직의 신라는 박.석.김의 세 성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왔고 왕건이 창업한 고려는 34대 왕 475년에
멸앙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도 27대 왕 519년 동안 조선왕조의 대통을
무탈하게 승계했다 한 성씨가 단일 왕조로 500년 남게 나라를 통치한 예는 셰계 역사상 조선왕조가 유일하다
1910 년의 종묘 외대문
일제가 1931년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경궁과 종묘를 나누어
그 가운데로 길을 내고 율곡로를 만들었다
종묘 외곽 담장에 새겨진 일왕의 연호
일제는 조선의 삼천리 금수강산에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만 박은게 아니다
조선 민족의 정신의 근간을 이루던 풍수 사상을 교묘히 이용하여 일제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도로공사를 강행하여 창덕궁 ㅡ창경궁 ㅡ종묘로 이어지는 지맥을 끊는 한편 담장 일부를 수리하며
일왕 히로히토의 연호인 '소화 8년 3월 개축"(昭和 八年 三月 改築)이라 새겨 놓았다
종묘 외대문
중앙ㅡ신이 다니는 (신로)
우측ㅡ왕이 다니는 (어로)
좌측 ㅡ세자가 다니는 (세자로)
공민왕 신당 (고려공민왕영전봉안지당)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과 준마도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태조가 처음 종묘를 지을 때 갑자기 북쪽에서 돌풍이 불더니
그림 하나가 날아와 떨어졌는데 그게 바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었다 이에 놀란 군신들이
논의 끝에 공민왕신당을 지어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사당인 종묘에 고려 왕을 모신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망묘루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재궁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북쪽에 왕이 머무는 어재실이,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각각 어재실과
세자재실에 머물며 기다리다가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 및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어재실
세자실
어목욕청
조선시대에 왕이 하마비 앞에서 내려서 작은 가마로 갈아타고 신로(神路)를 비켜 재궁으로 들어와
어목욕청에서 목욕재계하고 어재실에서 기다렸다가 정전, 영녕전으로 나가 제례를 행하였다
향대청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은 정전과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향대청, 재궁, 전사청, 악공청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등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정전 ㅡ수복방
정전 동문 북쪽에 위치한 수복방은 수복들이 머무는 곳이다
전사청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찬막단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찬막단
성생위(省牲位).
제물인 소․양․돼지를 동물이 병이 들었는지 건강상태는 좋은지, 말랐는지 살이 쪘는지를 . 검사하는 곳이다
..
희생 소는 일반 한우가 아니라 우리나라 토종인 검은 소로 주로 제주도에서 길렀는데 검은 소는 육질이
한우보다 뛰어나 임금님에게 진상하거나 제향에 쓰였다고 한다.희생소를 선택하고 관리하는
기관인 전생서에서 희생 소를 선택하면 이 소를 자연 상태에서 90일 동안 기른 뒤 병이 있는지 없는지 등을
확인하고 간택을 하는데 이 90일 동안은 매질이나 학대를 하지 못하며 잘 보살펴 살을 오르게 해야 했다
제정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고 한다.
신성한 우물이라 하여 신정이라고 하는 제정은 제사 때의 명수와 전사청에서 제수를 만들 때 이 제정의 물을
사용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때 제기를 이 우물 안에 던졌다가 피란에서 돌아와
다시 건지므로 보관상태는 물론 분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이렇게 사용되던 제정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종로에 지하철 1호와 5호 공사를 하면서 수맥을 막아 안타깝게 메말랐다고 한다
정전 악공청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하는 건물이다
종묘제례 때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연습하며 기다리던 악공청이 있다
남문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이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전으로 들어가는 남문(門)은 혼백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이다
동문 (東門)
왕과 세자 왕실가족 제관들이 드나드는 문
.서문(西門)
노래와 연주 춤을 맡았던 악공들이 드나드는 문
종묘 정면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 종묘이다
동시대 단일 건축물로는 동서가 109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로 추정된다.
가장 오른 쪽이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태종, 세종, 세조등이 이어진다
종묘에는 1년내내 어둠이 길데 드리워져 있다
죽은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전에 문이 열리는 것은 일년에 한번 제향의식이 있는 날이다
.
총19칸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1칸에 왕과 왕비가 함께 모셔져 있다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려. 길이가 101 m 로 우리나라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길다
종묘 내부
태조 1394년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태실 7칸 규모로 정전을 세우고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 건국 초기에는 왕이 죽으면 3년 상을 치르고 이후 종묘에 신위를 보관하여
후에 5대조가 지나면 땅에 매장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종묘 신위
하지만 세종대에 와서 정종이 승하하자
태조의 고조인 목조의 신위를 땅에 묻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조상의 신위를 땅에 묻을 수 없다며
방안을 모색한 끝에 세종은 정전 서쪽에 별묘인 영녕전을 짓고 4대조가 지난 신주부터 차례로 영녕전에
모시기로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계속 되면서 정전의 신실은 또다시 부족했고 이것은 왕조의 큰 고민거리였다
신주ㅡ몸을 떠난 영혼이 의지할 수 있도록 밤나무로 만든 상징이다
왕의 신주는 서쪽에 두고 백저건으로 덮고 왕비는 동쪽에 두고 청저건으로 덮는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나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하였으며, 제례 때에 혼을 위하여 향을 피우고, 백을 위하여 잔(술)을 부었다.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에는"엿볼 규"(窺)라는 구멍이 나있다 망자의 혼이 출입하는 통로다
혼구멍을 내준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평소에는 신주안에 있던 혼이
제삿날이 되면 규를 통해 빠져나와 자신의 육신이 묻혀있는 무덤에 와서 혼백이 합체된다고 생각했다
혼이 노닌다는 의미의 혼유석은 종묘에 있던 왕의 혼이 날아와ㅜ 무덤속에 백과 합치기 전에
잠시 쉬던 곳이다 혼과 백이 합쳐진 망자는 살아 생전처럼 후손이 바친 술과 음식을 들며
제사를 통해 소생했다
부족한 신실을 늘리기 위해 내린 결론은 정전 증축이었다 증축은 명종과 영조와 현종 때 이루어졌고
정전은 세차례의 증축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19칸의 거대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가 묘셔져 있다 4대조 이상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 법도지만
태조의 신주는 아직도 정전에 남았다 업적과 공덕을 인정받아 영원토록 정전에 모셔지는 불천위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불천위로 인정받은 왕은 태조ㅡ태종 ㅡ세종 ㅡ정조이다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 정전에서는 사계절의 각 첫 달과
납일(동지 뒤 세번 째 미일)을 합쳐서 일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 가을 두 번 지냈다
현재는 매년 양력 5월 첫 주 일요일과 11월 첫 주 토요일에 제례를 지낸다
왕(王) 이라는 글자는 천(天)지(地)인(人)을 나타내는 3개의 일(ㅡ)이 뚫을 곤( | )으로 연결된 형상이다
즉 국왕이란 덕으로서 우주(천.지.인)을 관통하는 존재이자 하늘의 명을 받는 초월적 존재였다
왕이 살아 있을 때는 이름이 없다 그저 왕이 아주 높다는 "주상"또는 "전하"이고 황제는 "페하"일 뿐이다
죽고 난뒤 치적을 생각하여 시호를 짓고 사당에 모시기 위하여 "묘호"를 짓는다
황제라는 명칭은 중국의 진시황이 처음 시(始)자를 쓰서 왕보다 더 높은 시황제라 제일 먼저 사용하였다
조(祖)나 종(宗)은 황제의 묘호에만 쓸 수 있으나 고려는 원나라의 제후국이었고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
이었으므로 묘호만은 조(祖)와 종(宗)을 쓸 수 있었다 보통 한 왕조를 개창했던 시조나 나라를 위한 공이 크면
"조"와 "종"을 붙인다 그래서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렇다
덕이나 문치로서 나라를 다스린 왕은 <종>을 붙이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다
그렇다면 왕조 중간에 <조>가 붙은 세조나 선조는 왜 그런가
그것은 새로운 공이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뮨이다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다시 나라를 건국했다는
선종인 <선조>가 그렇다
그렇다면 <조>와 <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
계체지군칭종(繼體之君稱宗)이라 하여 선왕의 적자로서 부자간의 왕위를 계승한 임금을 <종>이라 하였고
창업지군칭조(創業之君稱祖) 나라를 연 임금을 <조>라 하였다
묘호는 국왕 승하 후 그 공덕을 기리어 붙이는 이름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선왕의 이름을 높여 왕권강화를 노린 후기의 왕들은 조선 27대 왕 중
<조>의 묘호를 받은 것이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영종).정조(정종).순조(순종) 7명의 왕이다
심지어 세조나 인조 등 왕권을 찬탈한 왕에게도 정당성을 부여하여 <조>의 묘호를 받았다
종묘제례악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 종묘악장을 부르고 문덕과 무광을 칭송한 일무(문무와 무무)를 춘다
공신당
조선왕조 역대 공신들의 83위 위패를 모신 곳이다.
창건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하륜, 한명회, 신숙주, 이원익, 김상헌, 남구만, 김만중,정광필, 성희안 송시열 등. 조선 태조의 공신을 비롯하여
27대 순종까지 정전에 모신 역대왕의 공신의 신주 83위를 배향하고 있다. 종묘대제를 지낼때 공신들 제사도
함께 지낸다 그러나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공신전의 신위는
가족품으로 돌아간다
칠사당
종묘창건 때부터 있던 것으로.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으로서 일곱 신을 모셨으며
왕실과 궁궐 및 만백성의 안녕을 봄 사명 (생명) 사호(집안출입)ㅡ 여름 사조(음식) 중류 (살곳)
가을 국문(나라의 출입주관) 공려 (형벌주관) ㅡ 겨울 국행 (도로주관)
춘하추동 계절에 관계되는 신에게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
12 월에는 모두에게 제사 지냈습니다
영녕전ㅡ 남문
영녕전에는 16개의 신실에 34위가 있다
영녕전(보물)
영녕전이라는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황제15위와 왕비와 황후 17위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은 세종 (1421) 정전에 모셨던 태조의 4대조 목왕, 익왕, 탁왕, 환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실 4칸,
동·서익랑 협실 각 한 칸의 별묘로 처음 지어졌다 세종 때 정종이 승하하여, 정전 감실에 신위를 모실 공간이
모자라 중국 송나라때 따로 별묘를 세웠던 예를 채택하여 짓게 된 것이다. 영녕전은 건물과 묘정의 규모에서도
정전보다 작게 하여 두 건물 상호간의 위계를 보여준다
더욱 특이한 것은 가운데 태조의 4대조를 모신 네 칸을
그 좌우의 협실 여섯 칸보다 높게 하여 위계를 달리하고 있다. 좌우 협실에는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셨다.그리고 문종, 단종 등 비교적 재위기간이 짧은 임금을 모셨다.
처음엔 정전에 모셔졌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월대(月臺)
제사를 지내는 곳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으로 월대는 지상이 아닌 하늘을 상징한다
정전의 월대는 상하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월대는 동서가 109 m 남북이 69 m 로
월대 박석에 햇빛이나 우천시 또는 상서롭지 못한것을 막기 위해 차일 을 맬 둥근 철고리가 박혀있다
부알판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을 부묘례라고 한다
왕이 돌아가신 지 27 개월만에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데 왕의 신주가 종묘 정전 신실로 들어가기 전
신주를 모신 가마를 이곳에 내려놓아 조상들에게 배알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도록 한 판위를 지칭한다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다고 해서 함부로 증축할 수 없다.
당시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종묘에는 7신실에, 제후의 나라인 조선은 5신실에 신주를 모시게 되어 있었다.
신주를 5신실에 모시는 오묘제는 왕조를 일으킨 태조와 현재 왕의 4대 조상을 모시는 제도였다.
논쟁 끝에 송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정전 옆에 영녕전을 지은 것이다
박석은 바깥으로 살짝 경사를 두어 물이 고이는 일이 없다.
종묘에는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10대)과 광해군(15대)의 신주는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영녕전 ㅡ서문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공신전의 신위는 가족품으로 돌아간다
영녕전 ㅡ동문
영녕전 악공청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