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에서도 개봉된 우크라이나 전쟁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2022년 개전 초기의 첫 최대 격전지였던 도네츠크주(州)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담았다. 뺏고 빼앗기는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숱한 파괴와 죽음, 절망, 고통, 슬픔.. 그 어떤 극영화보다도 강력한 반전(反戰)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처참했다. 마리우폴은 바닷가 산업 단지를 포함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민간인 사상자가 최대 6만명에 이른다는 추정까지 나왔다. 전후 유럽에서 가장 큰 인도주의적 재난이 발생한 도시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다큐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포스터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우크라이나 출신의 므스티슬라프 체르노프(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는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이 영화를 만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전쟁 발발 당시 그는 미국 AP통신의 (프리랜서) 카메라 기자로 일했다.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유혈충돌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한 무장단체(이후 우크라이나 정규군에 편입/편집자)인 '아조프(아조우) 연대'가 전쟁 발발 직후 이 곳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했고, 러시아는 초반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마리우폴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가장 추악한 전쟁의 얼굴을 보여주는 '마리우폴에서의 20일'로 남았다.
2022년 5월 '아조프 연대'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지하 요새에서 손을 들고 밖으로 나오면서 '마리우폴의 비극'은 끝났다. 그리고 마리우폴에는 '복구및 재건의 시간'이 찾아왔다.
독일 공영 ZDF 방송은 전쟁 발발 2주년(2024년 2월)을 즈음해 마리우폴 현지 르포 기사를 내보냈다. 당연히(?) 서방 중심의 국제사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마리우폴의 산업단지는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폐허로 변했다/텔레그램 캡처
마리우폴의 도시 재건축 작업 모습/러시아 SNS ok 영상 캡처
마리우폴을 찾은 ZDF의 아르민 쾨르퍼 특파원은 파괴된 도시를 보여준 뒤 "이제는 거리와 학교, 주거용 건물, 또는 동네 전체가 빠르게 복구되고 있다. 마리우폴은 더 이상 유령 도시가 아니다"고 전했다. 또 "이전에는 극장에서 러시아어로 공연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가 도시를 점령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현지 주민의 발언을 소개하가도 했다. 마리우폴 인구를 구성했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거의 우크라이나 통제 지역으로 피란하고, 러시아계 주민들만 남았으니, 그들에게 러시아군의 도시 점령은 기쁠 수 밖에 없다.
그로부터 또 6개월여가 지난 마리우폴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을까?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전쟁 중 마리우폴을 떠난 주민들의 3분의 1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우크라이나 임명) 마리우폴 시장의 고문 표트르 안드류셴코가 14일 TV 채널 '미-우크라이나'(Ми-Україна)에서 고백했다. 안드류셴코 고문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피란민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마리우폴 피란민들도 러시아 점령지(마리우폴)로 돌아갔다"며 "그들은 지금이라도 돌아가지 않을 경우, 러시아가 그들의 재산을 국유화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고도 했다.
러시아 당국은 마리우폴 등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현지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군 공병부대를 동원해 주변 지역에서 지뢰 제거 작업을 벌이고, 파손된 주택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의 보상금을 지원한다. 그러나 러시아 통제 당국에 협조하지 않는(또는 러시아 시민권을 획득하지 않은) 주민들에게는 일자리도 차별하는 등 불이익을 준다. 주택 등 재산을 러시아 법률에 맞춰 재등록하지 않을 경우, 국유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피란민의 돈바스 '귀환'은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표부 대표(대사)는 지난 10월 말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와 그의 측근들은 피란한 우크라이나인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며 피란민들의 귀환을 반겼다. 나아가 "그들이 돌아온 곳은 이제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 연방으로 편입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의 '컴백'은 마리우폴 등 과거의 주요 격전지가 안정되고 있다는 신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전쟁 직후 독일 등 서방 국가로 피란한 수백만명의 주민들(주로 우크라이나계)이 3년 가까이 난민으로 지내면서 겪은 설움이야 직접 보거나 듣지 않아도 상상 가능하다. 전쟁 초기의 정부 지원도 3년째에 접어들면서 팍팍해졌고, 향수병은 갈수록 커져간다. 게다가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재산을 러시아 당국에 재신고하지 않을 경우, 국유화하겠다는 경고가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의 동원강화법 도입이후, 여권 갱신에 실패한 폴란드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이 지난 8월 바르샤바에서 '여권 발급'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영상 캡처
다른 한편으로는 국적을 러시아로 바꿀 경우, 당국으로부터 부서진 집을 수리하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이후 지내는데 큰 불편이 없다는 소식에 안도감도 생긴다. 일반 서민들이야 과거 소비예트 시절 처럼 국적이 러시아든, 우크라이나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러시아의 실효적 지배 정책에 우크라이나계 피란민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실효 지배 정책을 앞으로 더욱 단단히 죌 작정이다.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 내무부는 15일 러시아 (점령지역 포함) 체류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거주및 취업 등에 관한 규제 방안을 발표했다. 일단 내년 3월 말까지는 지금처럼 별도의 제한없이 살면서 일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체류및 취업 허가를 정식으로 받아야 한다는 게 요지다. 다만, 돈바스 지역 등 우크라이나 점령지는 내년 말까지 실행을 유예했다.
점령지의 러시아화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는 마리우폴에서 본토의 로스토프주(州) 로스토프나도누에 이르는 새로운 철도를 지난 8월 개통했다. 새 철도는 단기적으로는 러시아군의 군사 물류 공급망으로 주로 사용되겠지만, 마리우폴 등과 러시아 간의 인적·물적 교류에 크게 기여할 게 분명하다. 지난 5월에는 마리우폴을 거쳐 도네츠크주(州) 주도인 도네츠크시(市)로 향하는 새 철도의 건설 현장이 인공위성에 의해 포착되기도 했다.
마리우폴에서 러시아로 출발하는 열차의 모습/영상 캡처
철도 연결은 마리우폴 등 우크라이나 점령지가 급속도로 러시아 경제권 하에 편입되고, 주민들의 생활 여건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임을 약속한다.
마리우폴의 피해복구및 재건 작업은 벌써 3년째다. 격전 끝에 마리우폴을 장악한 러시아는 2022년 5월 곧바로 후스눌린 공공시설및 주택 담당 부총리를 현지로 보내 도시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스트라나.ua는 2023년 3월 개전 1주년을 맞아 마리우폴 주민들과 접촉한 뒤 "러시아가 지난 1년간 이 도시를 '돈바스 복원'의 시범 지역으로 지정해 재건에 나섰으나, (워낙 많이 부서진 탓으로) 도시가 정상으로 되돌아올려면 아직 멀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즈음 푸틴 대통령이 야밤에 직접 마리우폴을 방문해 복구 진행 상황을 둘러보고 주민들을 위로하는 등 복구 작업을 독려했다.
마리우폴의 방문해 현지 관계자로부터 복구 사업 보고를 받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 제공 영상 캡처
이에 비하면 우크라이나의 피란민 정책은 거의 낙제점이다. 오죽했으면 집권 '인민의 종' 엘레나 슈랴크 의원도 "피란민 지원 문제에 관한 국가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주장했을까?
드미트리 루비네츠 우크라이나 옴부즈맨(인권보호 담당자)도 지난 10월 23일 "국내 피란민들도 점점 더 많이 러시아 점령지나 최전선 지역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피란한 곳에서 계속 사는 게 사회·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는 개인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어떤 종류의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직접 알려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를 돈도 모라자는 우크라이나는 내년(2025년)에는 피란민들에 대한 국가 지원을 늘릴 계획이 없다고 데니스 슈미갈 총리가 지난 9월 밝혔다. 피란민들은 올들어 3월부터 월 2,000흐리브나의 지원금도 끊겼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 인플루언스(언론인) 다이아나 판첸코는 엑스(X, 옛 트위트)를 통해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럽은 물론, 러시아와 러시아 점령지로 향하고 있다"며 "거기에는 군 강제 동원도, 강요된 우크라이나화도 없고, 러시아 당국은 파괴된 주택에 대해 평방미터(㎡)당 500달러의 보상금을 제공한다"고 썼다.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생활하는데 불편할 것도 없다고 했다.
마피우폴 함락 전쟁 1년 뒤인 2023년 5월 마리우폴의 생활을 보여주는 텔레그램 영상들/캡처
오랜 전쟁에 지친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제는 '포성이 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로 '전쟁의 끝'이 어슴프레 보이기 시작한 지금,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은 고향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 주거지에서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다시 돌아갈 것인지 결정할 날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다.
러시아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은 2014년 동부지역 유혈사태 이후 약 50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크림반도와 돈바스 등 러시아 연방 편입 지역의 주민들은 뺀 수치다.
우크라이나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에서 살다가 10년전 러시아로 간 사회 운동가 타티아나 포프도 그 중의 하나다. 그녀는 최근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을 다룬 다큐 영화 '신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Новые украинские русские)을 제작,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이 끝나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