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원주 매그너스요양병원 과장···향년 94세, 임종 직전까지 환자들과 함께해
40여 년 전 남편 사망 후 의료봉사의 길로, 2008년부터 요양병원 의사로 새 삶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의업을 펼치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들을 돌봤던 한원주 원장(매그너스요양병원 내과 과장)이 지난달 30일 영면했다.
고(故) 한원주 원장은 지난 1926년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부친 한규상 씨와 교사이자 대한애국부인회 회원이었던 모친 박덕실 씨 사이에서 여섯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시대를 앞서간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한 원장은 현재 고려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해 1949년에 졸업했다. 1959년에는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물리학자인 남편과 결혼 후엔 국비 연수생이 된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을 떠나 시카고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메릴랜드 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쳐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의사가 흔치 않았던 터라 귀국 후 의원을 열자 병원은 늘 환자로 북적였다. 실제로 한 원장은 과거 한 방송 인터뷰에서 "환자들이 많이 와서 돈 좀 벌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故 한원주 원장의 생전 모습 사진=매그너스요양병원 제공
어느 인생이나 굴곡은 있기 마련. 순탄한 줄만 알았던 그의 인생에도 삶의 방향을 바꾸게 만든 위기가 닥쳤다. 한 원장이 53세가 되던 1978년, 그를 늘 지지해 주던 그의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한 원장은 예기치 못한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한동안 방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나고 자라며 받은 가르침을 되새기며 남편의 죽음을 앞으로 평생 봉사의 삶을 사는 계기로 삼기로 했다.
1979년부터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에서 주 1회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1982년에는 ‘전인 치료진료소’를 열어 의료봉사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의 생활비나 장학금 지원에도 나섰다.
이미 팔순을 넘긴 지난 2008년, 고인은 치매·중풍·파킨슨병 등의 환자를 돌보는 노인요양병원인 매그너스요양병원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병원 측은 '명예원장'직을 제안했지만 고인은 "그런 데 관심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공식직함은 내과 과장이다. 매일 오전 9시 출근 원칙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오로지 환자들을 돌보는 데에만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런 그를 환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은 "원장님"이라고 불렀다.
병원에서 받은 월급의 대부분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수많은 사회단체에 기부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7년에는 JW그룹 공익재단 중외학술복지재단이 수여한 제5회 성천상을 받았지만 여기서 받은 상금 1억 원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쾌척했다.
당시 시상식에서 한 원장은 “사랑만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의사가 가야 할 길은 환자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힐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며 “남은 생도 현역 의사로서 노인환자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남은 생을 현역 의사로 살겠다는 약속대로, 한 원장은 영면하기 20여 일 전인 지난 9월 7일까지도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봤다고 한다. 하지만 8일 갑작스럽게 쓰러져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가 “평소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에 따라 입원 이틀 만에 다시 매그너스요양병원으로 돌아와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과 함께 요양했고, 결국 추석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임종을 맞았다.
한 원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였다고 한다. 이 육성은 녹음되어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매그너스요양병원 관계자는 “원장님은 늘 의학 서적을 탐독하셨고, 각종 의학 연수 강좌에도 빠짐없이 참여하시는 등 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며 “임종 직전에도 병상에 누워계시면서 ‘원장님’이라고 불러드리면 인자한 눈을 크게 깜빡이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반듯한 모습을 보이시다가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울먹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