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9) 프리드리히 스팀멜의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
‘보편적 인권’이라는 새로운 길로 교회를 이끌다
- 프리드리히 스팀멜,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1903년), 케벨라 순례성지, 독일.
1800년대 유럽 사회는 ‘혁명’과 ‘발전’이라는 키워드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 여파로 인한 자유와 독립의 움직임도 거세게 일어난 동시에 거기에 편승하지 못한 계층의 비참함도 극명하게 드러난 시대였다. 교회는 영적ㆍ물리적인 박해를 거쳐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고, 교종(敎宗)은 영적 차원의 리더십을 보편적으로 확보하는 가운데 세계를 대상으로 모든 백성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혁명과 발전의 시대, 레오 13세 교황
1878년 2월 로마 인근 카르피네토 로마노 교구 출신의 조아키노 빈첸초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 추기경이 ‘레오 13세’라는 이름으로 교종이 됐다. 로마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고, 인문학을 기반으로 외교와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뒤, 사제품을 받았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특사로 베네벤토, 스폴레토, 페루지아 등 저물어 가는 교황 영지에서 지방 행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부정부패와 끈질기게 싸웠고, 마피아와 내통하며 백성의 피를 빨며 지역 경제를 쇠퇴시키고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또 여러 방식으로 빈민 구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집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주택을 공급하고,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낮은 이율의 대출을 지원하며,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등 사제로서 행정관으로서 할 일을 소신껏 해 나갔다. 그것은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된 뒤에도 계속됐다.
그가 교종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탈리아 통일은 이미 완성됐고 교황령은 모두 사라졌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됐고, 교종은 바티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통일 이탈리아는 이제 수 세기 동안의 지역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어떻게 고취해 나가느냐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고, 그것을 위해 교회가 필요한 만큼 여러 구실을 만들어 교종을 압박했다. 레오 13세는 이탈리아 혁명 세력의 입맛에 맞추기보다는 세계와 인류 앞에서 교회의 길을 내는 데 집중했다.
노동 계층을 향한 관심, 회칙 「새로운 사태」
레오 13세는 임기 초부터 안으로는 훼손된 교회를 복원하고, 밖으로는 이탈리아를 초월해 교회와 현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노력했다. 계몽주의 물결 속에서 일었던 과학과 종교의 대척 관계에 대해 그는 두 세계의 공존을 설파했고, 성경 연구와 토미즘에 관한 연구를 촉진하는 한편 연구자에게만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개방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통한 마리아 신심을 확산시키고, 성 요셉과 미카엘 대천사,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독려했다.
그는 신학에서나 정치에서나 온건주의자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럽인들의 삶의 중심에 두게 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가진 지성과 외교적인 자질을 최대한 발휘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고, 가톨릭 신앙과 교구장 임명에 있어 교회의 권리를 되찾아왔다. 국제 사회에서 교황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었으며, 당시 유럽을 휩쓸던 각종 사조에 어떤 식으로든 응답함으로써 교회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의 이런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노동자 계층을 향한 관심과 처음으로 인간의 보편적 ‘인권’을 언급한 교종이었다는 사실이다. 1891년에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는 당대 유럽 사회의 다양한 문제, 특히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약자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자본주의의 문제점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본주의는 탄생과 함께 부(富)의 분배 문제를 가져왔고, 그 결과 양극화는 필연적이었다. 이에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 원칙으로 기본권과 사회정의, 공동선을 외쳤다. 당시 사회 상황은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사태들’이었고, 교종은 이 모든 일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가 개척한 길은 오늘날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정의 문제, 세계적으로 만연한 각종 빈곤의 양상과 그것의 격차 문제, 인권과 다양한 차별 문제, 폭력과 전쟁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든 문제에서 교회가 가야 할 길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화 전문 예술가
소개하는 작품은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프란즈 마리아 스팀멜(Friedrich Franz Maria Stummel, 1850~1919)이 독일의 케벨라(Kevelaer) 순례 성지에 그린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1903년)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1903년 9월, 예수회에서 출판하는 프라이부르크 인 브리스고비아(Friburgo in Brisgovia)의 월간 「가톨릭 선교(Die katholischen Missionen)」의 도메인으로 소개됐다. 당시 잡지의 편집장은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며 작가 안톤 후온더(Anton Huonder, 1858~1926)였다.
스팀멜은 뮌스터에서 태어나 대성당 부설 학교에 다니며, 인문학을 공부하던 중,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 조기 진학했다. 나자렛 운동을 활발히 했고, 그 바람에 성화 전문 예술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은 성화 외에도 유리화, 조각, 금과 청동 세공 및 직조와 자수 등 장인들이 하던 다양한 분야까지 광범위했다. 이후 12년간 에른스트 디거(Ernst Deger)와 에두아르드 폰 게브하르트(Eduard von Gebhardt) 밑에서 미술 공부에 전념했다. 1879년에는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많은 성당에 작품을 남겼다. 1881년 케벨라를 시작으로 안홀트, 퀼른, 룩셈부르크, 펠플린, 1906년 베를린까지 수많은 성당에 작품을 남겼다.
32살이 되던 1882년에 스팀멜은 순례 도시인 케벨라로 이사해 가장으로 부모 형제들을 돌보다가 거기서 1890년 헬레네 폰 윙클러(Helene von Winkler, 1867~1937)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낳았다. 1919년 스팀멜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간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레오 13세와 단테, 베르길리우스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로, 레오 13세가 가장 좋아한 시인이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였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과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스」를 모두 읽었으리라는 건 당연하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도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의 안내자로 당대에 활동하던 시인이 아니라 베르길리우스를 삼았다. 그가 천국의 안내자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 로마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옥’까지만 안내하고 림보로 돌아가야 했다. 천국의 안내자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한 그가 연모한 여인 베아트리체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모델을 현실에서 찾았다. 실제로 현실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머리에 꽃 꽂고 다니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대부분 사람은 현실을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단테 역시 그랬다. 그가 바라본 현실은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의인을 찾아보기 드문 삭막하고 피폐한 공간이었다. 적나라한 그런 현실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속어로 폭로했고, 그것을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는 그림으로(1822년), 구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는 판화(1861년)로 1800년대 사회상으로 빗대어 남겼다.
그림 속으로
스팀멜은 단테와 관련한 이런 작품들과 레오 13세의 연관성을 이 작품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교회’는 미술사에서 언제나 ‘배’ 혹은 ‘방주’로 표현됐다. 성당의 제단을 표현한 듯 양쪽에 우뚝 세운 기둥 안에는 네 개의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왼쪽부터 첫 번째 칸에는 ‘성 요셉의 작은 배’라고 적힌 갑판 위에 천사가 지키고 있다. 그 앞에 앉은 성녀로 보이는 두 여성은 배 위로 기어 올라오려는 반인반수의 존재들을 보면서 손을 꼭 잡고 있다. ‘교회의 수호성인, 성 베드로’라고 적힌 두 번째 칸에는 교회의 지킴이들이 있다. 작대기 모양의 노를 젓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영성가들로, 배 위로 기어 올라오려는 반인반수의 존재들을 밀어내고 있다. 세 번째 ‘유혹자들을 막는 영적 군대’는 십자가로 무장하고 있다. 유혹자들은 바다로 표현된 세상에서만 오지 않는다. 위에서도 검은 새가 이들을 위협한다. 네 번째 “인류를 지키는 사람”으로 한 손은 배의 키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배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있는 레오 13세 교종이 있다. 그는 왕직, 예언직, 사제직을 표현하는 삼중관을 쓰고 험한 세상을 건너는 교회(방주)를 인도하고 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함께 하고, 바다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동물들이 우글대고 있다. 당시 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스팀멜은 특유의 화법으로 표현했다고 하겠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0) 피에트로 카노니카의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
국경 · 민족 초월해 인류애 선물한 베네딕토 15세 교종
- 피에트로 카노니카,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1928년), 성 베드로 대성전, 바티칸.
본당 사목 경험이 가장 많은 교종으로 알려진 비오 10세에 이어 반 가톨릭주의와 반 성직주의가 만연하던 통일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자코모 델라 키에사가 ‘베네딕토 15세’라는 이름으로 1914년 9월 3일 교종으로 선출됐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제노바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외교 경험이 있었다. 자코모 델라 키에사의 교회 내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자 레오 13세 교종의 최측근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과 비오 10세 교종을 대립 관계에 놓았던 당시 언론의 행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오 10세는 자코모 델라 키에사를 주교로 선임했고 서품식을 직접 집전했다. 비오 10세 교종은 자기가 쓰던 목장(牧杖)과 주교 반지를 그에게 선물로 주고 볼로냐대교구를 맡겼다. 델라 키에사 주교는 사목 방문과 강론에 공을 들였고, 기금을 마련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는 데 앞장섰으며, 신학교 교육에 인문 과학과 고전을 추가해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 반전 메시지 선포
1914년 8월 20일 비오 10세가 선종하자 바로 콘클라베가 소집됐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이어서 추기경단은 이런 위기에 세계를 짊어지고 갈 교종은 외교력이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레오 13세 시절부터 외교 경험이 많은 볼로냐대교구장 델라 키에사 추기경을 10여 차례의 투표 끝에 선출했다.
예상대로, 그는 전쟁을 ‘유럽의 자살 행위’로 단정, 단호하게 반대했다. 교종으로 선출되던 해 그는 교전국들에 성탄 메시지를 보내 종전을 촉구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라 그런지 공감을 표했고, 영국도 그런대로 바티칸과 잘 지내고 있어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부각돼 평화를 중재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교종에 의한 평화는 무조건 거부한다”며 무례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베네딕토 15세는 더욱 균형 있는 외교로 교전국 간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연합국과 동맹국 누구도 베네딕토 15세의 중재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1917년 8월 1일 베네딕토 15세는 다시 한 번 모든 교전국의 수장에게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를 제안했다. △무력ㆍ폭력이 아닌 법적 권리에 의한 평화 수립 △교전국 동시 군비 축소 △국제 문제를 해결할 중재재판소 설치 △항해의 자유와 공공성 보장 △전쟁 배상금 제도 철폐 △점령 지역 반환 △영토권에 대한 우호적인 검토 등이었다.
이런 제안에 영국,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약간 호의적이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을 성의껏 작성해 보내왔다. 독일은 모호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교종의 제안서는 모두 무시된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 전쟁 종결을 위한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으로 된 평화 원칙의 토대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평화를 위한 교종의 외교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류의 영적 지도자로서 교종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활동은 후임 교종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시기, 물밑에서 조용히 외교를 펼친 비오 12세,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핵전쟁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에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반포하며 세계 평화에 큰 힘을 쏟았던 요한 23세, 학생 운동과 베트남 전쟁으로 세계 대변혁 시기 바오로 6세, 이라크 전쟁 시기 요한 바오로 2세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유증 치유에 앞장
전쟁은 종식되고 나서도 큰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교종은 이후 당사국 정부들과 협상을 벌여 포로 교환 및 부상병과 포로들의 귀환을 주도했고, 점령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의 교환, 전사자들의 시신 송환, 전쟁 포로와 가족 간의 상봉,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과 행불자 수색, 망명자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등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완화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유럽이 승자와 패자로 갈려 전쟁의 비극이 계속되는 일이 없도록 염려하고 경고했다.
그는 전쟁을 ‘무익한 대학살’로 규정하고, 세계 각국의 화해를 호소하는 회칙 「평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Pacem, Dei Munus Pulcherrimum, 1920)」를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시에 전사한 군인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무덤 앞에서 베네딕토 15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의 조각상이 전시됐다. 오늘 소개하는 바로 이 작품이다.
이 기념비는 피에트로 카노니카(Pietro Canonica, 1869~1959)의 1928년도 작품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 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마주 보고 있는 ‘세례 경당’을 거쳐 ‘스튜어트 기념비’를 지나면 성 비오 10세 제단이 있는 경당이 있다. 이 경당을 바라보고 왼쪽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교회를 이끌었던 베네딕토 15세 교종의 이 기념비가 있다. 지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무덤 경당(옛 성 세바스티아누스 경당)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사실주의 조각가
카노니카는 피에몬테주 토리노 근처 몬칼리에리에서 태어나 당시 이름난 조각가 오도아르도 타바키의 조수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후에 조각가며 작곡가로 20세기 전반기 이탈리아에 많은 역사적인 작품을 남겼다. 17살에 ‘수련 수녀’라는 작품으로 상을 받으면서 사실주의 조각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땅 파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등은 사실주의 맥락에서 칭송을 받았고, 도나텔로 조각에 영감을 입어 그리스도 연작, 곧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된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는 회화적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작곡가로서 그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고, 몇몇 오페라 작품도 남겼는데 ‘코린토의 신부’, ‘메네아’, ‘거룩한 땅’, ‘미란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20세기의 전위 예술에 편승하지 않고, 낭만주의와 르네상스 미술을 고수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종교 미술에 헌신했다. 잠시 아카데미아 교수를 지냈고,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아 회원이 된 첫 번째 회원 중 한 사람으로 무솔리니에 의해 직접 임명됐지만, 파시즘에 대한 유착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보르게제 공원 내에 있는 작은 빌라를 자비로 수리해 사용 허락을 받아서 살다가 사후 그곳을 그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으로 로마시에 기증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되었다.
인도주의 정신 실천
베네딕토 15세 교종은 계몽주의 시대부터 일어난 ‘신의 외면’과 이성에 대한 맹신을 우려해 왔다. 그리고 그 이성이 결국 자행한 건 유럽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형제들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었다. ‘무익한 대학살’인 전쟁은 그것을 결정한 국가와 정부의 수반들이 직접, 물리적으로 고통을 겪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무고한 백성들의 몫이다. 힘없는 약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도 큰 데 반해, 수반들은 무장 해제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냉소적이었다.
교종은 그런 백성을 돕기 위해 국경, 민족, 종교를 초월해서 기구를 만들고 전문인력을 파견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에는 고통이 경감됐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세속의 군주들과는 달리, 2000년 교회사에서 체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듯, 감동적인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했다.
2005년 라칭거 추기경이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교종으로 선출됐을 때, 그는 베네딕토 15세의 평화 활동을 떠올렸다. 9ㆍ11 사태 이후 세계는 여전히 긴장 국면에 있었고, 여전히 많은 적을 만들어 싸우고 있었다. 그가 ‘베네딕토 16세’로 이름을 선택한 이유였다.
베네딕토 15세의 이런 업적은 그가 선종했을 때 터키의 이슬람교도가 앞장서 기렸다. 이스탄불 시내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이다. 교종의 박애 정신을 기리며 “비극적인 세계에서 국가와 종교를 초월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위대한 교종”이라는 헌시를 새겼다.
작품 속으로
오늘 소개하는 이 작품도 교종의 이런 정신을 잘 담았다. 무고한 희생자와 전사한 어린 군인들을 위해 전 유럽에는 엄청난 공동묘지가 세워졌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밖에 없다. 교종은 선두에 있는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공동묘지로 바뀐 유럽을 상징하는 올리브 나뭇가지로 양쪽을 장식했다. 동상 위에는 화염에 휩싸인 세상을 아기 예수에게 보여주는 마리아가 있다. 교종은 마리아를 처음으로 ‘평화의 모후’라고 부르며, 인류를 의탁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1 · 끝) 페르난도 보테로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
20세기 교회의 변화·쇄신 향해 담대한 발걸음 내딛는 요한 23세
- 페르난도 보테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1972년), 바티칸 박물관 현대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로마.
2000년 교회사의 장면들을 이미지로 기록을 남긴 예술가들 덕분에 시기와 사건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60회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매번 어떤 작품으로 그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었다. 교회는 계몽주의 시대부터 부각된 현대 세계의 새로운 사조와 경향들에 반대와 경고의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인류는 스스로 재앙을 불렀다.
베네딕토 15세 교황 이후 비오 11세와 비오 12세 교황은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세계 평화와 화해를 위해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에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외치며, 유럽의 재건과 일치를 호소했다. 공산 정부로부터 박해받는 교회가 속출했고, 그 지역 성직자와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는 속에서도 교황들은 할 일을 했다.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이끌다
비오 12세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있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재임 1958~1963) 추기경이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됐다. 77세였다. 연로한 상태에서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차기 교황을 위한 징검다리 교황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을 뒤엎고 큰일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자신의 이름을 ‘요한’으로 선택했는데, 1400년대 초, 서구 대이교 논란 속에서 1419년 ‘대립 교황(antipapa)’ 요한 23세(발타사레 코사)가 물러간 뒤 거의 500년간 아무도 그 이름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론칼리가 당당하게 똑같은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발타사레 코사에 대한 교회사의 논란을 종식했다.
그다음은 파란만장한 교회사를 돌아보며, 시선을 미래로 향해 ‘기쁨과 희망’(Gaudio et spes, 사목헌장)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겨우 90여 년이 지났고, 세계는 냉전 상태였다. 하지만 요한 23세 교황은 교회가 더는 세계와 괴리된 채 교회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이제 ‘우리가 바뀐 현대세계에 맞추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자연스럽게 창조주의 뜻에 따르도록 교화’하자고 했다.
지난 세기까지 숱한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른 것은, 교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명령’하던 데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섬기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적응’, ‘쇄신’으로 번역되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로 표현된 교황의 대담한 행보 덕분에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이미지와 사명’을 인식하는 동시에 ‘성덕에 대한 보편적 소명’도 깊이 인식했다. 전례 개혁 및 교회 일치 운동, 현대 세계에서의 적응과 대화, 평신도 사도직, 교회의 내적 성찰과 쇄신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 변화의 측면들이었다.
교황은 1962년 공의회 개막(10월 11일) 주일을 앞두고, 10월 4일 평화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아 기차를 타고 아시시와 로레토를 방문, 공의회 성공을 위해 기도했다. 이것도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처음 로마 밖으로 여행한 사례였다. 세상을 보지 않고는 그 눈높이에 맞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더욱이 공의회를 막 시작한 즈음(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문제로 미국과 소련 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요한 23세는 미국대통령 존 F. 케네디와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서신을 보내 평화를 중재했다. 후에 두 국가의 지도자는 교황의 헌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공의회 중인 1963년 4월 11일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반포했다. 여기서 그는 평화의 범주를 확대하여, 총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의 대척점으로서만이 아니라, 빈부 격차와 노동 문제 등 현대 인류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도 평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고, 그 맥락에서 처음으로 진단했다. 그해(1963년)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뚱뚱함의 미학’ 추구한 화가
소개하는 마지막 작품은 ‘뚱뚱함의 미학’으로 유명한 현대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로 알려진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Angulo, 1932~)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1972년)라는 작품이다. 바티칸 박물관 현대미술관에 있다.
어린 시절, 바로크 건축과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의 단테 「신곡」 판화 시리즈에 반해 그림과 조각을 시작했고, 16세부터 삽화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1952년 20살 때 보고타 국립도서관 주관 콜롬비아 예술가 대상 제9차 살롱전에서 ‘해변’으로 2위 수상을 했고, 그 상금으로 유럽으로 연구 여행을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서 프란치스코 고야와 티치아노를 만났다. 파리에서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하며 전통에 남기로 마음을 굳히고,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최고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조토와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들에 크게 영감을 입어 그들의 작품을 여러 번 모작하기도 했다. 시에나와 토스카나 학파의 많은 예술가도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귀국 후 결혼과 함께 멕시코로 이주한 뒤, 워싱턴과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제10회 보고타 살롱전에서 다시 2위를 수상하며, 고국으로 귀환했다. 1958년 보고타 국립 아카데미아 회화 교수가 되며, 제11회 살롱전에서 드디어 ‘신혼부부의 방’이라는 작품으로 1위 수상을 했다. 이후 남북미와 유럽을 오가며 많은 전시회를 했고, 그의 작품이 이름난 세계 도시들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회화를 이상을 향한 끝없는 탐구에 의한 내적 욕구의 표현으로 보았다. 이런 욕구는 절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색은 언제나 희미하고, 강력하지도 열광적이지도 않다. 대체로 윤곽이 없고 평이하고 균등한 배경에 그림자가 없다. 색이 너무 강하면 전달하려는 내용이 훼손될 수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거의 비현실적으로 뚱뚱하게 표현함으로써 인체의 형태를 새로 제시하고, 다빈치,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형태로 재해석했다. 풍경 속 인물과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배경을 크게 잡음으로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주인공들의 시선을 허공에 가두는 등 그만의 특징이 있다.
당시 콜롬비아의 일상에 깊이 파고든 ‘폭력’에 관한 문제도 그는 회화에 담았다. 비록 자신은 풍자한 것도 사회 비판적인 표현도 아니라며, 단지 큰 형태와 감각적인 볼륨으로 그린 것뿐이라고 하지만,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루벤스의 ‘시인’을 재해석한 것에서, ‘날씬함’만을 추구하는 사회 현상을 풍자하고 부조리를 폭로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표현한 교회는, 성경 속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성화보다는 ‘사라져가는’ 성당, 종탑, 지붕(돔) 등을 ‘모성’과 일치시킴으로써 한때 잘 알려지고 흔했던 ‘아기를 안은 성모’와 동일시하는 특징이 있다.
현대 세계의 변화에 응답한 교회
변화를 거듭하는 세계 속에서 ‘시대의 징표’에 귀 기울이고, 교회의 자원을 모두 가동해 현대 세계의 변화에 응답하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루살렘 공의회, 트렌토 공의회와 함께 교회 자신의 체질을 바꾼 역사상 가장 중요한 3대 공의회의 하나로 평가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3000명가량이었다. 역사상 가장 성대했고, 필요했고, 성공적인 공의회였다. 연로한 주교들은 3년간, 거의 목숨을 걸고 매일같이 교회의 변화를 위해 고단한 작업에 임했다. 공의회 개막 미사를 주례한 요한 23세도 공의회 회기 중간에 세상을 떠났고, 공의회 중간에 콘클라베(교황 선출 투표)를 해야 했다. 이에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를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선출했다. 바오로 6세는 1965년 12월 8일, ‘새로운 성령 강림’으로 규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16개 문헌(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문)을 발표하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3년간의 길고 역동적인 시간을 장엄 미사로 마무리했다.
그림 속으로
세상의 아픔과 슬픔, 기쁨과 희망을 안고 역사의 새로운 행보를, 소개하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모든 피조물과 함께 시대의 다양한 형태에 편승하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아니”라고 말하면서 조용한 걸음을 시작했다. 멀리 배경의 산은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한 과거를 의미한다면, 이제부터 교회가 걸어가는 길은 현실이고, 현대 세계에서 분명하고 확실한 길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든 피조물도 교회의 이 걸음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