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날을 며칠인가 허송세월 보내다가 답답해서 전주에 가보니 사범학교에서 합격 소식을 알려주었다.
입학금 때문에 합격이 되어도 걱정, 안되어도 걱정이었다.
암울한 기분으로 집에 와서 큰형님에게 합격과 입학금 걱정을 하였다.
이 무렵에 화학 비료는 미국에서 제한된 양을 수입하였기 때문에 농가에서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위하여 서울을 왕래하느라고 배급받은 화학비료를 팔아서 경비를 마련하였다.
나 때문에 이 해는 비료 부족으로 농사를 잘 못 지었을 것이다.
이 해 봄에는 내가 서울대에, 둘째 조카(원구)가 군산중학에 동시에 합격하였다.
나의 입학금은 5만 4천 원, 조카의 것은
7만 2천 원. 우리 집의 경제 능력으로는 마련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뒤에 안 일인데 큰형님의 친지 분들이 벼를 2~3 가마니씩 유상으로 또는 무이자 현금으로
빌려주어서 쌀 20 가마니 값으로 두 신입생의 입학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무렵 벼를 빌리면 6개월 후에 곱 장리로 갚아야 하는 각박한 인심이었는데
그 친지 분들은 참으로 많은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들의 성명도 모르고 보답할 길도 찾지 못하였다.
다행히 그 해에는 집에서 수박 농사를 잘 지어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전주사범에서의 기숙사 생활 / 나는 45년 가을부터 50년 봄까지, 방학 기간과 강제 퇴사 당한 때를 제외하고,
4년여 동안 전주사범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이 기숙사를 일제시대에 청명료(淸明寮)라 불렀다고 한다.
일생 중에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성격이 형성되며
전도에 대하여 고민하고 학문의 기초를 닦으며 벗을 사귀던 청소년기를 기숙사에서 지낸 셈이다.
내가 생활한 전주사범의 기숙사는 2층 목조 건물로 남료(南寮)와 북료(北寮)의 두 동으로 되고
동 서쪽에서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 북료의 동쪽은 본관에서 뻗어 나온 복도로 연결되고 그 양 옆에 화장실과 소사실이 이어져 있었다.
기숙사 건물의 서쪽에는 세면장이 남 북료를 연결하고, 그 곳을 지나면 식당,
취사장 및 욕실이 있는 건물이 생울타리를 경계로 하여 대운동장에서 가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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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대에서 60년대까지의 전주사범 정문, 그리고 교기, 교가 등
기숙사의 한 방에는 바닥에 28장의 다다미가 펴있고 그 위에 학생 수만큼의 앉은뱅이 책상이 두 줄로 놓여 있었다. 한 방의 정원은 14 명인데 실제로 우리들은 6~8 명이 생활하였다. 방의 양 편 벽에는 1미터 높이에 벽장이 7개씩 나란하고, 벽장은 각각 두 쪽의 여닫이문으로 닫히며, 그 안에 한 층의 나무 시렁이 걸려 있어 책과 옷을 가지런히 넣도록 되어 있었다. 벽장 밑 가름장에는 하얀 커텐이 쳐 있어 그 안에 이부자리를 넣었다.
창문은 안의 미닫이 종이창과 밖의 유리창으로 된 이중창이어서 찬바람을 막아줬다. 유리창 바깥에는 튼튼한 목재의 가름장이 걸려 있어 별중맞은 학생들의 낙상(落傷)을 막아 주었다. 나는 흔히 가름장에 몸을 기대고 남 북료 사이의 중정(中庭)이나 학교림을 바라보았다. 중정에는 장미, 자목련, 붉은단풍 등 아름다운 정원수가 가꿔져 있었다. 이러한 시설은 40년대의 학생 생활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처음 입사(入舍)했을 때 나는 북료의 제3실에 배치되었다. 실장은 황동의 선배이고, 나와 같은 학년의 정종환 군과 그밖에 몇 사람이 함께 있었다.
45년도의 기숙사 식사는 쌀에 콩을 넣어 지은 밥과 고사리를 넣은 간장국이었다. 해방 전에 학교 건물을 점령한 일본 관동군이 남겨 놓은 쌀과 고사리를 양도받았다고 하였다. 46~48년에는 미국에서 무상원조로 받은 밀가루 수제비와 밀밥을 흔히 먹었다.
기숙사는 학교 구내에 있었으므로 운동장의 행사가 없는 날에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복도를 건너서 교실이나 생물실로 갈 수 있었다. 따라서 등 하교 시간이 2~3 분이면 족하였다. 책보나 가방을 가지는 학생도 없었다. 통학생들은 기숙사를「돼지우리」라고 얕보기 일쑤였지만 기숙사 생활에는 장점이 많았다. 생활비(기숙사비)가 적게 들고 등 하교시간이 절약되며 학교시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기숙사의 장점을 활용하였고 그 생활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46년부터는 기숙사비가 오르기 시작하여 가을에는 두 배로 올랐고, 그 후에도 계속 올랐다. 기숙사비는 쌀로 소두 세 말을 냈고, 쌀을 내지 않는 사람은 돈으로 그 액수만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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