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패밀리스트의 휴먼 스토리
정창원 수필집 <아버지의 뒷모습>에 부쳐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주목나무 허리는 1년에 1mm 정도 굵어지는데, 100년 동안 자라도 키는 고작 10m 정도, 허리둘레는 약 60cm 정도 남짓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전열을 정비하는 데 초기 100년을 사용하는 것이다. 정창원 작가의 성장사는 주목나무를 닮았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는 천 년을 사는 주목나무처럼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법이다.
나는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라 여긴다. 바로 삶의 이법에 따르려는 겸허한 생의 자세가 중요하다. 정창원 수필가가 이 수필집 <아버지의 뒷모습>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수필집의 감상포인트는 그 지점을 잘 파악해내는 데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아버지의 뒷모습’으로부터 얻은 세상은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저자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집을 읽고 나면, 거친 주름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순리의 삶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창원 수필가의 첫수필집 <아버지의 뒷모습>의 최고 장점은 가족의 숨소리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진솔한 글맛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정창원은 며느리를 통해, 아내를 거쳐, 아버지의 성실한 삶을 존경한다는 아들들의 소리를 들어왔다. 작은아들은 대기업 인턴 자기소개서에서 “아버지는 저의 롤모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한 회사에 30년 넘게 근무하셨는데, 성실함을 꾸준하게 유지하셨고 자기발전을 위해 항상 집에 오시면 공부를 하셨습니다.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 몸소 행동으로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두 아들은 인정받는 자신들의 모습은 사실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 역시 수필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을 퍼올린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의 삶 모습은 나를 통해 어느결에 두 아들에게까지 이어져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이런 아버지의 뒷모습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빛나는 유산이다. 장맛비가 멎은 청명한 하늘 아래서, 아버지를 목타게 부르고 싶다는 정창원의 수필은 한마디로 백지 위에 쓴 내출혈의 독백같이 붉고 처연하다.
정창원 수필가는 한일장신대학교 문학동아리 ‘어두문학회’ 지도교수인 시인이자 수필가인 최재선 지도교수와의 인연으로 유네스코부산 우수잡지로 선정된 바 있는 계간 <에세이문예>를 통해 등단한 바 있다. 등단한 지도 얼마되지 않는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수필집은 수많은 사연이 점철된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가 되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평범한 작가가 일상에서 체험한 아픔과 슬픔, 몸부림과 굶주림을 진솔하게 쓴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창작의 원료는 작가의 아픔과 슬픔이다. 위대한 시작은 본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도 분명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오늘도 유년시절의 암울했던 가족사와 함께하면서 겪은 좌절의 눈물을 원료로 글을 쓴 수필이기에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수필다운 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부로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풀어놓은 글을 읽으면, 본격수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수필시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이 수필 한 편의 문학적 성취를 살펴보면, 그의 문재와 역량을 파악할 수 있고, 이 작품집의 품격도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부부가 일하다 보면, 괜한 일로 감정이 날 설 때가 가끔 있다고 한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나 보다. 때맞춰 비까지 내렸다니. 까치울 마을 담벼락에 고개를 삐죽이 내민 장미가 작가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줬을까. 비닐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오선지에 그리며 마음을 다독였다니 다행이다. 카페에서 마주 앉은 친구 같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남편에게 문자를 먼저 했다는 대목에 이르러 마음이 놓였다. 해납백천海納百川의 마음일 것이다. 해납백천海納百川은 중국 진晉나라 원굉의 『삼국명신송』에서 나온 말이다. “모든 물줄기는 바다를 향하고, 바다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와 여러 가지로 갈등을 겪었다. 젊었을 때는 얕은 시냇물처럼 조그마한 돌멩이를 지날 때도 날 시퍼런 소리가 요란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서로의 강물도 깊어지고 이런저런 돌멩이도 둥글둥글해져 평안하게 흐른다. 가끔 아내가 던지는 일상의 대화가 날 선 돌멩이로 날아와 마음의 강에 파문을 일으킨다. 애써 숨기려 해도 말투와 표정에서 표시가 난다. 내 감정이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 아내가 쫌생이라고 놀린다. 아직 내 마음의 깊이가 부족한 것 같다. 깊은 강물은 어떤 돌멩이가 던져져도 소리 없이 제 갈 길을 간다. 최재선 시인은 「노부부」라는 시에서 “몰아쉰 가뿐 숨결 / 오로지 한몸으로써/ 엮여 걷는 연리지”라고 했다.
정창원 <부부로 사는 것> 중에서
한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다 보니 생기는 부부가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고전에서 찾고, 최재선 시인의 시 <노부부>에서 찾아 앞으로 남은 길을 두 손 꼭 잡고 가야 할 이상적 부부상을 펼쳐내고 있는 이 수필에서 그는 ‘어떤 날카로운 삶의 돌멩이가 날아와도 너그럽게 품는 마음의 평수를 넓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주방에서 아내가 마디마디 갈라진 손으로 설거지한다. 아내를 살며시 안아주고 싶다.’로 마무리한 이 수필 한 편만 보더라도 그의 수필이 보여주는 삶의 무늬가 얼마나 멋진지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수필에 대한열정과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려는 작가정신은 어떤 다른 수필가들보다 깊고 더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평자는 그가 힘든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체험의 기록이자 성장서인 <아버지의 뒷모습>이 독자들에게 접근성은 물론이거니와 효용성과 감동성에 있어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진솔한 자기 고백과 휴머니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우리 삶을 즐겁게 변주해 나가는 독자들의 가슴 따뜻한 내면 풍경을 들여다보는 데 있을 것이다. 애정을 가지고 읽어가면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의 존재 당위를 더욱 뚜렷이 해야 한다는 각오가 문맥 곳곳에 담겨있는 듯해서 좋다. 정씨는 지독한 패밀리스트다. 그의 어머니, 아버지, 아내, 아들의 이야기가 수필 안에 가득 차고 넘친다. 첫 수필집에 담아 놓은 유년시절, 달려온 역사, 성장사를 가득 채운 이들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은 현실 극복의 역사와 성장사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체험사를 높은 감성의 언어미학으로 빚어내었다. 다양한 읽을거리가 구수한 입담을 통과하면서 서늘한 감동을 자아내기에 한마디로 이 책은 영혼의 분비물이다. 수필집 출간을 계기로 해서 큰 작가로 성장해나가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