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재직(在職) 시절“대마도(對馬島) 역사기행”등 대마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한 서적을 무려 4권이나 집필하여 당시 필자가‘대마도 박사형님’으로 불렀던 故황백현 문학박사님(발해투어 대표)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대마도 여행을 다녀왔던 기억을 더듬어 칠순을 기념하는 동창들의 여행에 보탬이 될까하여 여행기를 올려봅니다. 대마도는 황 박사님의 저서“대마도는 한국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제목과 달리 뱃길로 한국과는 49㎞, 일본과는 138㎞ 떨어져있고 일본 본토에서 오는 여행객보다 한국에서 방문하는 여행객이 많아 한국과 가깝지만 일본 땅이며 거주하는 주민들은 일본말을 하는 일본인입니다.
대마도(對馬島)는 히타카쯔 항구가 있는 상도(上島:가미시마)와 이즈하라 항구가 있는 하도(下島:시모시마)에 위치한 산(山)이 한국에서 바라볼 때 두 마리 말(馬)이 마주(對)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한국식 이름이며 일본에서는 행정구역이 나가사키 현(県) 쓰시마 시(市)로 쓰시마 섬으로 불리어집니다. 섬의 크기는 거제도의 1.8배로 거제도와 남해 섬을 합친 크기이며 평균 해발400m이상의 산지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경작지가 적어 대부분의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고 인구밀도가 적어 거주민은 28,000여명으로 거제시 인구 23만 명과는 비교됩니다. 방문당시 대마도 중심가인 하도(下島)의 이즈하라 항구(港口)에 도착해 식당으로 도보로 이동하는 길이 마치 진해 중원로터리 일대를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지금의 중원로터리 일대 일본식 건물과 똑같은 건물들이 즐비하였고 현대식 건물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으며 고층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지난달부터 코로나 이후로 뱃길이 열리면서 하도(下島:시모시마)에 위치한 이즈하라 항구는 공사 중인 관계로 상도(上島:가미시마)에 위치한 히타카쯔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여 이즈하라 항으로 육로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당시 대마도에 대한 선명한 기억은 중심가 이즈하라 시내 모든 하천이 복개(覆蓋)를 하지 않고 바다와 연결하여 하천마다 숭어 때와 도다리 때가 물 반 고기 반 있었지만 낚시하는 사람이나 투망치는 사람을 볼 수 없었고 인적이 없는 깨끗한 거리와 정교하게 꾸며진 돌담장과 고풍스러운 집들 그리고 바닷가 해수욕장과 산의 수목들이 잘 관리되어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으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추구하는 대마도 주민들의 생활철학 때문인지 주거 공간은 좁고 해가지면 필요한 곳만 전등불을 밝혀 60년대 우리나라 시골의 겨울밤과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주거지 골목길을 탐방하던 중 주민들을 볼 수 없어 안내원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골목길 등 시내를 탐방중이니 외출을 자제하라는 관청의 지시로 주민들이 외출을 하지 않아 그렇다는 답변을 듣고 우리와 너무도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일본 본토는 우리의 역사나 필자의 가족사 속에서도 상흔(傷痕)이 많은 땅이지만 대마도 역시 우리역사 속에서 상흔이 많은 땅입니다. 고려(高麗)시대부터 조선조(朝鮮朝)까지 대마도는 경작지 부족으로 인한 식량난 등으로 해적 왜구(倭寇)들의 근거지로 이들이 한반도와 중국해안에 출몰하여 식량 등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여 고려와 조선에서 수차례 대마도 토벌 원정을 한바있으며 그래도 해적 행위가 수그러들지 않아 식량을 지원하는 등 회유책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해적들을 왜구라고 부른데 대해 대마도 주민들은 토벌군을 원구(元寇)라 불렀습니다. '구(寇)'란 때 도둑 구, 사나울 구, 겁탈할 구, 해칠 구라는 뜻의 한자로 해적들의 약탈과 토벌군의 원정으로 인하여 수많은 양민이 학살을 당하고 납치되었으며 부녀자들이 겁탈 당하고 많은 재물을 수탈당하였습니다.
대마도에는 우리역사의 아픈 상흔을 새긴 4개의 비석(碑石)이 있습니다. 첫 번째 비석(碑石)은 조선왕조 최후의 황녀로 고종(高宗)과 후궁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인“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입니다. 덕혜옹주는 일본의 조선왕실 말살책의 일환으로 대마도주(對馬島主) 아들‘소 다케유키’와 정략적으로 결혼하여 딸‘소 마사에(宗正惠)’를 낳고 일본에서 생활하다 극심한 몽유병과 정신질환으로 1955년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한 후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지내던 중 결혼 전 아버지 고종(高宗)이 덕혜옹주의 남편감으로 점 찍어둔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이 조선일보 일본 특파원으로 재직 시 옹주의 근황을 특별 취재하여 박정희 대통령께 알림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37년만인 1962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수강재에서 지내다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당시 동행한 안내원이 시종(始終) 눈물을 흘리며 덕혜옹주의 한 많은 일생을 소개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두 번째 비석(碑石)은“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입니다.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구한말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을사늑약으로 주권이 침탈당하자 지방유생들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되어 대마도 감옥에 수감되어 일본군이 제공하는 일체의 식사를 거부하며 19일간 단식 끝에 옥사하셨습니다. 이후 이즈하라에 있는 수선사(修善寺)에 안치된 시신을 아들이 부산으로 모셔와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으로 운구하여 장례하였다합니다. 정부에서는 74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과감하게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건국훈장 일등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고 충남 예산에 묘역이 있습니다.
세 번째 비석(碑石)은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입니다. 이 비석은 숙종(肅宗)때 조선조(朝鮮朝) 역관(譯官) 한천석 등 108명이 대마도 번주(藩主)의 장례식과 새 번주(藩主)의 취임식에 참가하기 위해 대마도로 오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모두 죽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1년에‘순난비(殉難碑)’를 세웠는데 이후 2003년 수행원 4명을 포함한 112명의 명단이 수록된 책자가 발견되어‘영위비(靈位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네 번째 비석(碑石)은 여행길에 함께한 故황백현 박사께서 대마도 역사탐방과정에서 밝혀낸 비(碑)로 대마도 출신이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역비서였던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의 비석(碑石)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비석의 비문(碑文)이 을사오적 중 한명인 이완용(李完用)이 작성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비문 아래에는‘후작 이완용 서(侯爵 李完用 書)’라고 새겨져있습니다.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을사늑약 조약문 초안과 한일 합병문 초안을 작성하였고 덕혜옹주 정략결혼 추진에도 관여하였으며 총독부 인사국장을 거쳐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인 이왕직(李王職) 차관까지 올라 활동하다 1921년 조선호텔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술을 마시고 구토를 하다 장에 구멍이 뚫려 요절하였는데 명필가로 알려진 이완용이 그를 애도하며 묘비명을 작성하였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닫혔던 뱃길과 진보적 반일정책으로 인해 단절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위드-코로나 정책과 미래지향적 외교로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100명으로 한정되었던 대마도 입국 인원이 200명으로 증가되면서 어렵게 계획한 친구들과의 해외여행이 성사될까하며 반신반의하였는데 이제 현실화되어 초등학교 봄 소풍처럼 기다려집니다. 얼마 전 대마도 주민과 상인들이 일부 한국 여행객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한국여행객의 출입을 반대하는 쪽지가 대마도 곳곳에 나붙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여 자칫 조심스럽다는 생각이지만 우리들의 여행길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7년 전 함께 여행길에 올랐던 황백현 박사님은 지난해 연말 하늘나라로 떠났고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앞에서 시종일관 눈물을 흘리며 여행길을 안내하였던 안내원도 이제는 어디선가 할머니로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하며 복에 겨운 필자는 친구들과의 눈으로 즐기는 즐거운 관광과 마음으로 느끼는 흡족한 여행을 고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