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겨울이 봄으로 바뀌고, 봄이 여름으로 바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봄은 봄으로서 절대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봄인 것이다. 여름은 여름으로서 절대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름이다. 생(生)과 사(死)도 마찬가지이다. 생은 생으로서 절대이고 사는 사로서 궁극이다. 생이 변해서 사가 되고, 사가 변해서 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자면 궁극적으로 윤회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바로 지금 여기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업식이 있는 자에게는 윤회가 있다. 하지만 업식이 없는 이에게 더 이상 윤회는 없다. 윤회의 주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떤 불자가 큰스님을 찾아왔다. 윤회에 대해서 질문하기 위해서였다.
“스님, 어떤 분은 윤회가 있다고 설하고, 어떤 분은 윤회가 없다고 설하는데,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것입니까?”
“하하하, 윤회가 없다고 설하는 그 스님에게는 부인이 있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대에게는 부인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이니라. 윤회도 있는 이에게는 있는 것이고, 없는 이에게는 없는 것이니라.”
“??”
불교라 하면 먼저 윤회사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불교는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설하는 종교이다. 궁극적으로 해탈을 설하기 위해서 먼저 윤회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윤회를 설한다 해도, 예컨대 힌두교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입각점이 다르다.
힌두교의 윤회설은 다분히 과거지향적이다. 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해 현재 이러한 모습,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어쨌든 수긍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사성계급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불교의 윤회설은 다분히 현재지향적이다. 현재의 이 모습은 과거 나 자신의 작품이다. 그런 만큼 미래의 내 모습은 현재의 나 자신의 작품이 될 것이다. 과거보다 중요하고 미래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출신에 의해서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귀천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윤회는 없지만, 해탈하기 전까지는 있다. 그러므로 꾸준히 닦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중생제도를 위해서 일부러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있다. 닮아야 하지 않을까.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