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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히브리서 제10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히11:23-40
요절/히11: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오늘 말씀은 ‘믿음장’으로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의 후반부입니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박해를 많이 받아 계속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지 갈등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성도들을 위해 11장을 기록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낸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이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한 것이 믿음임을 말해줍니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모세가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살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애굽의 왕이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식을 낳을 때 그 아이가 아들이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무서운 명령을 내렸을 때였습니다. 모세는 정말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슬픈 운명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을 숨겼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아이’라는 의미는 영어성경을 보면 “he was no ordinary child” 아무리 보아도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부모가 아이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세의 부모는 태어난 한 생명을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겼습니다. 결코 죽임당하기 위해 태어난 슬픈 운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어 주신 생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아이가 태어난 사실을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으로 발각되는 즉시 아이와 함께 처형당할 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인간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부모의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긴 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 내려보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더 이상 한 생명을 지킬 수 없었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랬을 때 모세는 강가에 나와 있던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후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부모의 신앙은 자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신앙 유산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믿음으로 키우는 것은 크리스천 부모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기도하고 섬기는 양육의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날마다 성경을 읽어주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말씀을 마음에 늘 새기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녀들이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을 깊이 영접하고 붙들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장성하여 자신이 애굽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안 이상 무엇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났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머물면 부귀영화와 특권이 보장됩니다. 항상 시종들과 시녀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섬겨주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진귀한 궁중코스요리를 먹으며 황금마차를 타고 나일강변을 드라이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하면 졸지에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세에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은 잠시 세상의 죄악을 누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내다보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받는 수모요, 이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세상의 특권과 안락함을 누리기보다는 믿음으로 구원역사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는 모세가 애굽 병사를 쳐죽인 후, 미디안 광야로 떠난 사건을 말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이 무서워 애굽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오래 참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애굽을 떠났고 광야에서 양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40년 동안이나 외로운 광야에서의 싸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장장 긴 세월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옆에 계신 것처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 전역을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장자 재앙은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 심판의 사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날 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리지 않은 집의 모든 장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만이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 이단들이 자기 모임에서만 구원이 있고 그 모임에서 이탈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 주장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피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주고 살리는 능력의 피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모세의 삶을 정리하면,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산 삶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볼 때 모세는 절망적인 세상을 타고났고, 너무나 좋아 보이는 세상에서의 기회를 차버린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의 선택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에서 실패하지 않고 위대한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안락함과 재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세상에서 주어지는 이런저런 특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대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하는 또 다른 신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할 때, 세상 사람들과의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갈등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위해 양들을 섬기고 함께하는 희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의 잔재미를 부인하고, 양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사건입니다.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출애굽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장자 재앙으로 넉다운되었던 애굽의 왕이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이스라엘을 맹추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었습니다. 열 재앙을 내려 애굽을 심판하고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위대한 전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밤새도록 바닷물이 물러가게 하사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홍해를 가로질러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습니다.
애굽 군대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노예 백성도 건너갔는데 신식 무기를 가진 우리가 못 건너가겠느냐 하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홍해는 사람의 힘으로 건널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건널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며 뛰어들었을 때 바다에 수장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리들의 비참한 최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가 있습니까? 홍해는 우리 인생길을 순탄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요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 속에서 꼭 건너가야만 하는 장애물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고통과 고난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각종 시험이나 취업, 장래 방향 앞에서 두려워할 수 있고,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 막막할 수 있습니다. 또 건강이나 물질 문제, 인간 갈등도 우리 인생길을 순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목자로서 제자양성도 어렵게만 보입니다. 꺾이지 않는 죄의 세력이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우리를 때로는 두렵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때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여기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고, 추격하는 애굽 군대가 가까이 못 하도록 구름 기둥을 옮기셔서 애굽 군대 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게 하시고, 이스라엘 쪽에는 밤일지라도 아주 밝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다시 흐르게 하시므로 애굽 군대를 모조리 수장시켜버리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도록 하나님이 모든 일을 친히 이루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홍해를 시련으로만 볼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길을 가로막는 홍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볼 수도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말씀대로 역사하실 것을 믿고 순종할 때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히 도우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우리 인생길의 모든 시련과 두려움들을 뛰어넘고 승리의 인생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한 사건입니다. 여리고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의 첫 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언덕 위에 있어서 천연의 요새에 폭 2m, 4m의 이중벽으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성안에는 충분한 물과 식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기 작전을 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빼면 시체였습니다. 마땅한 군사력도 없고 이제는 하늘에서 매일같이 내리던 만나도 그쳤습니다. 식량 조달도 급했습니다. 그들은 하루빨리 여리고성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칠일 동안 여리고성 주위를 조용히 행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육일 동안은 한 바퀴씩, 칠일째 되는 날은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면 여리고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말 같지도 않은 말씀 같습니다. 돌기만 한다고 해서, 함성을 지른다고 해서 2m, 4m 이중의 견고한 성벽이 무너져 내릴까요? 아무리 봐도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에게 여리고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들에게 얼마의 군사력이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한 분이면 됐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과연 성벽이 무너질까 회의가 들 수도 있었습니다. 성 주위를 돌 때 성벽 위에서 누군가 화살을 쏜다거나 바위를 굴린다면 어떻게 될까? 두려움이 들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회의와 두려움과 싸우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다 돌고 나서 믿음으로 함성을 질렀습니다. “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여호수아서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무너뜨려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불가능해보일 것만 같은 인생의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칠때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면 우리는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는 문제들이 있구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신실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첫 성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믿음을 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과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사건입니다. 무너진 여리고성 안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여리고성 주민인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라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들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라합 입장에서 보면, 적장의 부하들을 숨겨준 것입니다.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목숨 걸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서기로 결단했습니다. 자기네 나라 군사들이 첩보를 듣고 들이닥쳤을 때 라합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숨겨준 것이 발각되는 날엔 자기는 물론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극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31절을 보십시오. 놀라운 것은 그가 믿음으로 그 위기의 때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기록합니다. 라합은 기지를 발휘해 군사들을 따돌리고 정탐꾼들을 평안히 대접했습니다.
이런 라합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상천하지의 하나님, 즉 위로는 하늘을 다스리고 아래로는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가나안 땅을 심판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정탐꾼들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고, 후에 라합은 유다의 살몬과 결혼해 보아스를 낳고, 그의 후손에서 다윗 왕과 예수님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이방 여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써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믿음은 내 생각의 틀을 깨고 내 생각을 버리는 싸움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붙잡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인생길의 모든 상황 형편 속에서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의 이런 믿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대로 일해 나가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까지 믿음의 예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례들이 있어 그거 다 말하려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며칠 낮밤을 지새워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 믿음의 역사는 너무도 다양하고 많아서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했습니다. 엘리야 때, 사르밧 과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엘리사 때, 수넴 여인도 죽었던 아들이 되살아났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몽둥이로 맞아 죽을 것 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석방되기 위해 타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온갖 고통 가운데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즐거움이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죽음 후에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활의 더 좋은 삶을 소망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모든 시련과 역경들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와 잘못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들을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힘들어 보입니다. 이들의 인생은 표면적으로는 믿음으로 살다가 패배한 인생들처럼 보입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과 타협했더라면 얼마든지 더 편안하고 안락하게, 잘 누리면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삶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간 믿음의 용장들이었습니다.
저자는 38절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무가치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믿음을 져버리고서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그런 곳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인생길의 시련과 역경을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을까요? 악으로 깡으로 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실 약속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증언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았지만 약속된 그리스도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 새 언약을 통한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로 보내주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리라 약속해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 인생길의 어떤 시련과 역경 앞에서도 담대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일하심과,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며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는 훗날 우리의 신앙이 한 줄로 정리될 때 어떻게 기록되고 싶습니까? 믿음으로 성찬은..., 믿음으로 민우는..., 믿음으로 아라는..., 믿음으로 OOO는...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세상을 이긴 믿음의 사람들로 기록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