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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풍성히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누도록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함께 외쳐보실까요?
믿음으로 이기자.
우리 서로 격려합시다.
믿음으로 살아냅시다.
네 감사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믿음으로 살아낸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외침이 그냥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가운데 고스란히 살아내는 멋지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는 때로 예상치 못한 시험과 시련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질병으로 찾아오기도 하고요. 어떤 분들에게는 재정의 어려움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자녀의 문제로 또 어떤 분들은 관계의 문제로 사실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흔든다는 거죠. 이게 우리의 삶의 현실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 앞에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가장 귀한 것을 놓칠까 봐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더 자주 발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요. 가장 귀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정말로 지켜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 기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요 일반적이지 않았던 거예요. 바로 이 비상식적인 선택을 그가 했다는 것이죠. 사실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잔인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 좋아 순종이지 여러분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판단, 우리의 생각에 상식적입니까?
도저히 상식할 수 없는 것이고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청한 것이죠. 여러분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물론 귀하지 않은 아들이 어디 있겠어요? 다 자녀들 귀하죠. 하지만 이삭은요. 아브라함 100세에 얻은 기적의 산 증거잖아요.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증거이기도 한 자녀가 이삭이란 말이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현재이자 미래와도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또 특별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유일한 통로가 누구냐 바로 이삭이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축복을 주시고 그 축복의 통로를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이삭에게 허락했던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너 전부 다 포기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이 상황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을 한번 좀 진단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에 도저히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을 만한 나만의 이삭이 여러분들에게는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데 하나님 이거는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걸 어떻게 드리라고 하십니까라고 하는 나만의 이삭이 있냐는 것이죠. 만약 그 가장 귀한 것을 오늘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달라고 요구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시겠어요?
지금 표정으로 다 반응하시는 걸 제가 봅니다. 어떻게 반응을 하시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야라고 넘기실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요. 재차 묻겠죠. 하나님 그게 사실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야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각기 다르겠지만 각자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도 하고요. 불순종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던 삶의 모습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저도 그래요. 저도 저도 뭐 100% 순종하면 살겠어요 하나님 말씀하시면 괜히 딴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거 해라 말씀하시면 하나님 아니죠라고 묻기도 하고요.
애써 부정하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저도 그런데 여러분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여러분들은 더 특별하신가요?
사람은 다 비슷할 거예요. 다 그런 마음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순종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의 반응이었다는 거예요. 누가 들어도 순종하기 불가능한 이러한 명령 앞에 아브라함은 단 1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단 1초도 머무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순종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한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아브라함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왜 아브라함은 이 시험 앞에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의심 없이 기꺼이 드릴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에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비밀을 함께 좀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아셔서 저와 여러분들도 이왕 예수 믿는 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아주 존귀하고 멋진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요. 시험 전에 이미 약속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붙잡았던 것은 시험 문제였던 독자 이삭이 아니라 이미 해답을 알려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내내 이삭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라는 시험 문제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누가 하셨고 무엇을 어떻게 약속하셨는지에 대한 해답지를 보고 걸어갔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중간고사를 보는데 아니 각자의 시험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지가 있습니다. 문제지만 푸는 사람은요. 그 첫 문제부터 고민합니다.
그런데 문제지 옆에 답안지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답 보고 그냥 써요. 일도 고민하지 않아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세요?
답안지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 맞은 거예요. 100점짜리라는 거예요. 그러니 답안지를 들고 있는 이 아브라함은 이삭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거기에 의심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해답을 보고 그 문제를 풀었던 것 여러분 오늘 본문 17절에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17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 되 그 외아들을 들렸느니라.
여기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뭐라고 소개합니까?
약속들을 받은 자다 그렇게 말합니다. 왜 성경은 단수인 약속이라고 하지 않고 복수 약속들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위로 차원으로 딱 한 번 말씀하셨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겹겹이로 쌓여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말씀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옛날 저 어렸을 때만 해도요. 화장지가 두 겹 화장지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세 겹 화장지 내겹 화장지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더 주로 쓰죠. 그런데 제가 화장지를 우연치 않게 야 그럼 몇 끝까지 나왔나 한번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프랑스에서 수입된 5겹 화장지가 있더라고요.
그렇구나 5겹 화장지 아직 저는 써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수입한 5겹 화장지가 있대요.
저거 한번 써보면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생기긴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겹겹이 쌓일수록 더 단단한 것이죠.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당해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겹으로 쌓이면 훨씬 튼튼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마치 여러 겹으로 포개진 두꺼운 언약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는 존재했다는 거예요.
그의 삶을 얼마나 든든하게 쌓였는가 그 약속들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가장 먼저 하나님은요. 아브라함 100세 또 생리가 끊어진 사람 90세 때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잖아요. 능치 못하실 일이 있겠느냐 여호와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주고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것만이 아니죠. 인간의 생각으로 낳았던 이스마엘. 그 이스마엘로 인해서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야 되는데 이스마엘을 남으로 인해서 그 하나님의 계획이 막 엉망진창이 된 거잖아요.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요. 아주 분명하고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1장 12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창세기 21장 12절 안 띄워지나요? 제가 읽어드릴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 아이나 내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내게 잃은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내 씨라 부를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 가운데 사라가 여종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토로할 때 하나님께서
야 사람 말 들어야 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그대로 이삭이라야 내 씨가 될 것이다.
그렇게 선포한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약속이 얼마나 단단했던 것인지 창세기 15장의 횃불 언약을 보면 그것을 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언약은요. 동물을 쪼개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그게 언약 시기예요.
그리고 그 언약을 파괴한 사람은 이 동물이 쪼개진 것처럼 쪼개지는 징벌을 받는 거예요.
그게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횃불 언약 가운데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만 횃불로 지나가셨다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생명 걸고 이 약속을 지키겠다는 약속인 것이죠. 생명을 담보로 보증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셨어요. 히브리서 6장 17절에서 18절인데 세 번역으로 읽어보시면 정말 이해하기가 쉬워요.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시작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환히 나타내 보이시려고 맹세로서 보증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예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상속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이 약속과 맹세는요. 결국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보여주셨다는 것이죠. 결국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눈앞에 놓인 현실, 즉 이삭을 들여야 하는 근심이 아니라 거짓말하실 수 없으신 변치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다라는 거예요.
이것이 그가 믿음으로 살았던 중요한 요인인 것이죠. 신실하신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었다.
여러분 이것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믿음으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삶의 시작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머리아산에서 칼을 빼들고 자녀를 위해서 내려 찍으려는 그 모습 얼마나 무모합니까?
우리는 할 수도 없고 그 현장에서 그것을 본다는 것도 끔찍한 일이죠. 그러나 여러분 그가 그렇게 담력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뭐 때문이에요?
이삭을 드리는 그 자체가 아니라 먼저 약속하신 약속을 굳게 믿고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요. 이 약속이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죠.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1장 12절 시작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약속의 말씀이죠. 여러분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떠한 계약서보다 어쩌면 우리 눈에 확실히 보이는 통장 잔고보다 더 확실한 보증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는 거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약속을 통해서 미래를 봤다면 우리는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미래를 약속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것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보증이며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것이 확실하다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달라 해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이거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어릴 때 놀잖아요. 이렇게 두꺼비 집을 짓잖아요. 두꺼비 집을 지으면서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두꺼비가 근데 헌 집을 가져가고 새 집을 준다면 여러분 헌 집 드리겠어요? 안 드리겠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요?
저 같으면 헌 집 주고 세 집 받습니다. 바로 그런 관계예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내가 드리는 가장 귀한 것보다 훨씬 아니 비교할 수조차 없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축복을 마음껏 부여잡고 살아가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 약속을 겹겹이 붙잡는 거예요. 그래 하나님의 말씀에 이곳에서도 나를 아들이라 말씀하시고 이곳에서도 보증해 주셨으니 겹겹이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그 말씀을 붙잡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요. 이런 고백을 할 것입니다.
난 지금 죽어도 천국 간다.
할렐루야 구원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구원의 약속을 믿을 때 우리도 가장 귀한 어쩌면 나만의 이삭을 하나님이 들려봐라 시험했을 때 하나님 마음껏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약속을 붙잡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온전한 예배자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칼을 빼어 들을 때 어떠한 마음을 주셨느냐라는 것이죠. 아브라함 마음 두 번째는 아브라함에게는 부활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던 그것도 있지만 두 번째는 바로 부활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빼들었을 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요?
그냥 말씀이니까 순종해야지 그리고 칼을 빼들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부활 신앙 때문에 그 칼을 빼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은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내면을 이렇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19절인데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생각한지라는 이 표현은 감정에 휩싸인다는 것이 아니라 계산해서 결론을 내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 있고요. 계산해서 대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은 감정에 따라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확실한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죠. 즉 감정의 파도에 밀리지 않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한 거룩한 부활의 계산이 그에게는 끝나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특별했던 이 거룩한 부활의 계산법이 무엇인지 한번 좀 들여다보실까요?
이 부활 계산법이 있는데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요. 먼저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근거예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말씀했잖아요. 그래서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신실함 그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죠.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즉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하신 말씀이 있어요. 믿으니 의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믿음은 무엇입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이 확실히 하신다라는 믿음. 그래서 여러분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전제를 깔아놓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위에다가 사실을 올립니다. 사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오늘 창세기 21장 12절인데요. 우리 같이 한번 12절 말씀도 읽어봅니다. 시작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 아이나 내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내게 잃은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내 씨라 부를 것이니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즉 구원의 약속은 이삭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확실한 약속 이 사실을 붙잡은 것이죠. 이삭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전제라는 판 위에 이 이상만이 그 씨가 될 것이라는 축을 쌓아갔던 그러니 그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까?
조금 전에 읽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을 것이다라는 그 확신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믿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아무리 리듬이 좋다 해도 야 이삭을 내가 죽였을 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쉽습니까?
이 죽여도 하나님께서 도로 이삭을 어떻게든 회복시키실 거야라는 믿음을 갖기가 쉽습니까?
어려워요. 그런데 그에게는 경험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로마서는 그것을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로마서 4장 19절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읽어보십니다. 시작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무슨 말입니까?
잉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삭이라는 생명을 주셨잖아요. 이것을 몸소 경함한 그러니까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이삭을 낳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낳게 하셨는데 지금 이 이삭을 드려도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 이삭을 더러 살려야 된다.
왜요?
이삭을 통해서 그 씨가 흘러갈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했기 때문에 이것을 믿은 거예요. 그러니
이 순간에 야 내가 그래 믿음으로 이 아이를 죽여도 하나님은 부활시킬 거야.
다시 살린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아브라함의 시험이라는 이 중요한 사건의 말씀을 남겨주셨을까요?
저와 여러분들에게 확실한 부활의 메시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사건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4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제3일간 바라보면서 걸어갑니다. 성경의 셋째 날은요. 바로 회복과 부활의 서사이기도 하죠.
아브라함에게 3일 길이 궁금하지 않아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사육기 그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한번 파헤쳐보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3일 기일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아들을 죽이고 하나님께 내어줌과 동시에 부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를 이미 받고 누리고 간 거죠.
내가 이 아들을 데리고 가지만 하나님은 이 아이들을 살려야 돼요. 분명히 부활시킬 거야. 내가 지금 이 31개월 동안 하나님께 내어드립니다. 하나님 받으십시오. 내어드립니다.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 아들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십시오.
그 부활의 은혜를 소망하면서 걸어간 것이죠.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아브라함은요. 그 순종의 삶 그 끝에 걸린 수디양을 보게 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들을 때 어떤 은혜를 경험했느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라는 인정의 말씀도 받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 드려야 했던 이삭 대신 준비된 어린 양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삭을 드렸지만 이삭을 드린 것이 아니라 양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하나님의 인정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었던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요 머뭇거리는 자리가 아니라 순종의 자리 결단의 한 걸음 뒤편에서 예비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순종하지 못해서 뒤편에 있는 수량을 못 볼 때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계산이 이음이 끝난 사람 여러분 그 사람에게는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온전한 순종이 내가 이것 주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준다라는 확실한 믿음, 내 생명을 다 바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주신다라는 그 확실한 약속이 있는 사람의 생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겹겹이 겹겹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부활 신앙이 있을 때에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염려 걱정이 아니라 그 무슨 일과 무슨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삭을 드릴 수 있음 이의 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여러분 좀 기억하시고 우리도 이런 계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만약에 저에게 귀한 것을 요구하신다면 부활의 계산법이 없다면 손해로 여길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나에게 이걸 요구하시는 손해로 봅니다.
그런데 그 2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사람은요. 이게 손해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부활의 은혜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을 붙잡고 놀라운 그 기쁨과 감사의 고백을 가지고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하나님께 영화롭게 드릴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인데요. 세 번째 이유는 더 좋은 것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순종을 할 때에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라는 확신 바로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칼이 이삭에게 떨어지려는 그 찰나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눈에 보였던 것은 숯불에 걸려 있던 수량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례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이 자리는 사실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이죠. 바로 희생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삭 대신 숯 양이 재단에 오르는 놀라운 사건.
여러분 이것은요. 요한복음 1장 29절에 기록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이 말씀을 이미 보여주신 예표임과도 같은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가 마음 가운데 분명히 새겨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이니까 여러분 잘 듣고 좀 마음에 새기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갈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시험이라고 말씀하셨어.
시험 시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 이 시험이 왜 있었던가를 분명하게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사건이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달라고 얘기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야 너 가장 귀한 것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내가 예비한 독생자 예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를 살리기 위해서 이것을 준비했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이 일로 인해서 여호와의 이례가 완성된 것이죠. 로마서 8장 32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 우리 큰소리로 읽어볼까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 다 주시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 그래서 히브리서를 잘 읽어보시면 믿음의 사람들이요. 세상의 것들보다 더 나은 것을 사모했다라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어요. 제가 말씀을 띄우지는 않았지만 히브리서 11장 16절에 보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는 말씀이 있고요. 35절에 보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더 좋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삶을 믿음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요 순종의 자리에서 우리의 상상하는 것 이상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마음껏 내 몸도 마음도 생명도 드릴 수 있는데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못 드립니까?
문제는 그것을 믿지 못하 의심하는 거죠. 정말 정말 그럴까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얼마나 더 큰 좋은 것을 주시려고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여러분 부족함이 없으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부족함이 없으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양으로서 선하신 목자를 따라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게 시편 23편의 말씀이죠. 여러분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과실을 많이 맺을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시냇가에 숨겨진 자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사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것을 채우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마음 편하게 드릴 수 있는 그러한 신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해답을 보고 길을 가면요 쉽습니다. 문제는 해답을 보지 않고 내가 자꾸 시험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 여기에서 막혀 안 돼 저기서 막혀 안 돼 막히는 것만 수두룩한 것이죠. 대답지를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와 여러분들이 이기는 자 승리하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입니다. 첫 번째 약속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약속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부활의 능력을 신뢰합시다. 세 번째 예비하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이라고 별다르겠어요? 똑같은 사람이죠.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이번 한 주간 멋지게 승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