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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돌아가심
마 27:39-50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마 27:39-50 /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께 욕을 퍼붓고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40) `그래,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였지? 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41)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유대의 지도자들도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42) `남은 구원한다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래, 유대인의 왕이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겠다! 43) 하나님을 믿고 있다니 하나님께 풀어 놓아 그 증거를 보여주시라고 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는가 말이야.' 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강도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욕하였다. 45) [숨을 거두시다;막15:33-41,눅23:44-49,요19:28-32] 그날 낮 12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더니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46) 3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ㄱ. 시22:1) 47)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48) 그들 중의 한사람이 달려가서 신 포도주에 적신 ㄴ) 해면을 갈대 끝에 꿰어 목을 축이라고 예수께 주었다. (ㄴ. 시69:21)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시오. 엘리야가 와서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오롯이 느끼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고 돌아가셨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39-44) 십자가 아래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 두 가지 요구를 하며 조롱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40). 두 번째는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40, 42).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진심으로 원하지 않기에 희롱하며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려가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들의 눈에는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던 겁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구원(σώσον)은 영생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의 구출(rescue)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열두 영의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이러한 요구에 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서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요구했던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기적을 요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가십거리로 여기거나 둘 중의 하나인 듯합니다.
영혼이 떠나시다(45-50)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장면입니다. 45절에는 특별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내용은 사실은 유대 땅에 한정된 어두움이지만 저자인 마태는 아마도 신앙적인 것을 강조하여 세상 전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이 임했다는 사실 역시 십자가 사건이 특별한 상황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낮에 해가 진다는 것은 큰 슬픔과 애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더불어 “주의 날”에 임할 심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소리 지르고는 운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시편 22편은 애도의 시임과 동시에 신뢰의 시라는 사실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셨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적 용 :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내용을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육체적인 아픔을 겪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 가장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바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고통을 겪으셨으므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그런 소외를 겪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 설 교 >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예수님
욥기 1:6-8, 마태복음 27:40-44
서 론
■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24살이던 1997년 12월 10일, 수령 900년 된 65미터 높이의 삼나무(Japanese Cedar) 위에 올라갔습니다. 캘리포니아 험볼트 카운티에 있는 이 나무의 지상 55미터, 가로 180센티미터, 세로 240센티미터의 좁은 공간에서 무려 738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 나무는 온대우림 나무이며 최대수령이 만 년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생물입니다. 줄리아는 벌목회사인 ‘퍼시픽 럼버’에 맞서 나무 위에서 시위하고 있었습니다. 연방정부는 ‘퍼시픽 럼버’ 회사에 4억 8천만 달러를 보상해주고 회사가 벌목하려던 4천 핵트아르 의 삼나무 숲을 보존지역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아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삼나무 숲 전체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올라간 나무는 보호 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환경단체가 회사와 협상하여 나무 둘레 60미터에 있는 숲을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비로소 내려왔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줄리아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은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큰 의미를 시사합니다. 우리의 지구를 살리고, 숲을 살리려고 한 감동적인 환경보호 이야기입니다. 자연을 살리는 지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구촌에 보여 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9에는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고 합니다. 갈대의 길이는 고작 90cm 정도 되므로 십자가는 210cm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인의 키에 비해 볼 때 조금 높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내려오지 못할 만큼 높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내려오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즉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위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라는 표현도 있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는 당시인의 관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시지 않으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려오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끊임없는 역사는 주님을 향해서 계속됩니다. 인간이란 한계를 마귀는 알고 있으므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인간적 시험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마귀는 시험을 합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쉼 없는 시험을 사람들을 통하여 합니다. 사탄의 시험과 유혹은 사탄의 존재이유입니다. 죽이려 하고, 돌로 치려 하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엄청난 시험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들도 욕하더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강도보다 못한, 강도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데 내려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만일에 내려오시면 우리의 구원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를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사흘 후면 부활하실 것이므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40에는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이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9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다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거늘”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에 살아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흘 후의 부활을 백성들도,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히려 빌라도에게 고소거리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61에는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고소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에 지나가는 자들까지 이 말을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사흘 만에 성전을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죽으면 못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흘만 견디면 부활하실 텐데 내려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난 번 수도원에 갔을 때 경험으로는 수도사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삶보다 훨씬 편한 삶입니다. 그분들의 삶을 비하하려는 목적은 전혀 아니지만 그들이 수도사가 될 때 한번 독한마음을 먹으면 수십 년은 견디겠습디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독한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세상과 접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단이 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마태복음 4:3과 6절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사탄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말을 사탄이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6:63에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탄의 끊임없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질문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예수님의 신성은 초대교회의 가장 큰 질문이었고 신학적 과제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지식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기초입니다.
베드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앙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의 시작입니다.
마가복음 1:1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면 성전을 사흘에 일으킨다는 말씀도 이해하고 믿을 것입니다. 그 말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부활도,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자살폭탄 테러라는 것이 있습니다. 테러하는 이들을 ‘무슬림 가미가제’라고 합니다. 어린 소년들을 그들의 교리로 가르쳐 폭탄을 몸에 안은 채 죽게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가미가제였다가 탈출한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죽을 수 있도록 세뇌하는데 천국에 가면 많은 예쁜 처녀들이 반겨 줄 것이라고 한답니다. 이런 그들의 교리가 죽음을 자청하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천국의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확신이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죽으신 죽음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서양격언에는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던 청교도가 자주 쓰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현재적 고난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삶은 장차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현재적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십자가를 절대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사는 삶을 삽니다.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지 말고 절대 이 신앙의 삶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2. 자기를 구원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42에는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의 외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실과 비슷하지만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구원할 필요가 없도다”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므로 구원받을 필요나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중이 자기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만 자기 머리 못 깎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머리는 누구나 못 깎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발사들은 자기 머리를 누가 깎아주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발관에 가서 물어봤더니 자기 친구 이발사한테 가서 깎는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해결하지 못할 자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문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원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롱하는 말로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할 필요가 없어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5:13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는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다른 사람, 친구를 위하여 주셔서 가장 큰 사랑 보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친구를 삼으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 목숨을 버리려는지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도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의도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하려고 오시지 않고, 남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를 구원하라고 하였고, 구원이 필요한 자신이 구원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둘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한 자들은 로마군인, 군중들, 산헤드린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구원에는 등한히 하고, 자신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대하여 무지한 자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를 위하여”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죽음의 속죄는 우리 각자가 받아들일 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어떤 것이 선물로써 받아들여져야 선물이 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을 준 사람에게 답하는 최고의 감사의 인사는 받은 선물을 온전히 즐기는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것을 즐기고 사용하면 준 사람이 가장 기뻐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라는 미국의 저명한 저술가는 골프 치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어느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골프대회에 나갔습니다. 네 사람씩 조를 짜서 단체경기를 하는데 자신의 점수는 엉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팀원들이 잘 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공이 숲으로 날라 갔던 물속에 빠뜨렸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4인조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4인조는 바로 나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루케이도는 말합니다. 이런 것을 신학용어로 ‘위치적 성화’라고 합니다.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내 팀원들 때문에 내가 함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합작하여 나를 승리하고 우승하게 하려고 십자가를 사용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합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오시지 않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모든 삶은 우리를 위한 것들입니다.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일들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결 론
존 스토트는 교회의 ‘이중성’이란 말을 말했습니다. 교회는 성화되었으나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거룩하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는 풍족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불완전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구원받은 삶은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입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그 삶을 본받아 사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삽시다. 예수님과 함께 매 달린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내려오지 말고,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구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