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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 북경 4일 기행문
보은군 문화관광 해설사 김헌수
충북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관광을 최일선에서 홍보하고 유적지에 대한 재미있고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하는 충북문화관광 해설사 32명은 집에서 각자 출발하여 27일 오후 1시 청주공항 로비에 모여 해외에 갈려면 제일 중요 한것이 여권이므로 여권을 안내자에게 주고 15시 이륙한다는 아시아나 항공편을 이용하기위하여 짐을 붙이는대 액체류는 반입이 안된다 손톱각기나 받대리 종류 액체로 된 화장품이나 물 일절 기내 가지고 탑승은 못한다. 무개 부피도 조정한다는 등의 요건을 갖춘 준비를 하여 북경에서 갈아입을 옷가지가든 가방을 부치고 나서 출국 수속을 끝내면 비행기를 타는 게이트 즉 탐승구에서 검표를 하고 이륙 30분전에 비행기에 탐승을 하였다.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5분전에 활주로까지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를 인도 한 다음 굉음을 내면서 비행기는 하늘로 날라 올랐다. 고도에 오를적에는 긴장감이 이루말할 수 없고 아주 불안하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으면 귀도 멍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귀울림만 울려 마치 이대로 들리지않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도 기체가 흔들리면 이제 더 하늘의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닐지 아주 불안한 심정이다.
의자는 좁지 낮선 사람과 같이 타면 아주 어색하고 마음은 답답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바같을 보니 구름이 자아래 이불을 깔아놓은 듯 뛰어 내려 포근히 잠들고 싶은 느낌이 온다 그래도 왜 이리도 시간은 안가는지 이륙하고 30여분이 지나니 간식을 나누어 주고 차 맥주등 서비스가 시작이 되니 승무원이 바쁘게 움직이고 긴장감은 잠시 가시고 꽉 매워놓았던 안전 밸트도 풀고 바쁜 용무는 보러 다니고 승무원 아가씨도 면세품 판매에 열정을 다하는 느낌이다.
북경까지 2시간 비행을 하니 북경 시간으로 16시 5분에 도착을 하고 또한 까다로운 입국 심사을 거치면 다시 우리를 마중나온 관광버스에 올라 관광이 시작 된다. 현지의 가이드에게 북경을 이륙하는 공항 로비까지 현지 가이드에게 먹고 자고 구경등 모든 것이 현지 안내자에게 인도되고 국내 여행사 직원은 보조 역할을 하게 된다.
북경관광
북경은 현대 문명과 옛 문화가 잘 점목 되어있다.
봄과 가을은 15일 증도로 언제 왔다 가는지 잘 모를 정도로 짧고 여름이 길다고 가이든 말한다. 기온은 한국의 대구지방과 비슷하고 평균 기온이 19에서 30도로 우리나라 기온과 비슷하여 한국 관광객이 적응 하기와 옷가지 준비히는 편하다. 배이징은 산악이 70%로 양대산맥으로 되어있고 자금성을 중앙으로 엽전모양으로 대강나무를 주로 많이 심어 방풍림도 되고 젓가락 만드는 재료로 쓰인단다.
북경시내는 트럭은 시간대별로 진입이 안된다고 한다.
같은 중국 땅이라도 시차가 4시간 차이가 나고 산이많고 한국의 왕십리 지역과 같은 지방이 반 이상이고 땅은 나라 땅으로 임대해서 쓴다. 근대 10년사이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고 대한민국과는 1992년에 수교 했다. 그의 10년동안 반세기의 변화를 가져온 북경이다.
관광은 90년 초에 자유롭게 되였고 현재는 아주 자유롭다. 식사문화는 올소택식(둥근 태이블이 돌아가는 식) 양부전은 서울의 명동과 같은 거리이고 시가지는 차가 많이 막힌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소지품 특히 휴대폰 같은 것은 조심해야 한다.
간단한 중국어
1. 니하오 ; 안녕하세요
2. 세 세 ; 감사합니다
3. 신콜라 ; 수고하세요
만리장성
야담 ; 장성에 빠지면 안된다
장성에 남편 찾으러 갔다가 장성이 무너졌다
하룻밤에 만리 장성을 쌓는 다
장성을 쌓는데 국가의 명령으로 삼았다
(장성을 쌓는데 국가의 명령을 받고 장성 쌍기에 가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만리장성과 행랑자 이야기
☆ * 萬里長城 야담 * ☆
흔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 역사를 시작했을 때이죠.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있는 외딴 집에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해 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기 시작 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 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열이나서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 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고.
여인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해질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 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 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 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 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 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 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 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남정네들이여 괜히 기웃거리다 평생 남의 만리장성 쌓지마시고......
만리장성의 거용관코스 관광이다(여러곳 중 제일 선호하는 코스)
춘추전국시대에 건물 1000년에 걸쳐 축조한 세계에서 가장 큰 인조물, 세계에서 가장 긴 축조물이다.
세계7대불가사리는
세계 7대 불가사리의 하나로 명나라때 북방민족(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동서로 산악에 장성을 쌓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미끼않는 축조물로 만리나 된다고 하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300m 증도의 가파른 게단을 올라가는데 마침 날이 개여 했빛은 없으도 땀이 비오듯 하고 워낙 계단이 가파른 75도 경사라 손수건을 꺼내기도 힘들 지경 어찌 난간에 사람이 없어 틈이나면 몸을 기대고 큰 한숨을 내쉬고 내려다 보니 아찔하여 현기증이 납니다. 쉬는 동안 또 몃카드 카메라에 담고 또다시 한계단식 난간에 의지하여 올라가니 일행은 10메타 앞으로 가고 50여계단만 가면 마지막인대 조금 쉬면서 또 사진찰영을 하다보니 일행은 벌서 몃계단 아래로 내려가 나도 내려가기로 ,,,
(특히 조심할 것은 짤은 치마는 안입고 가는 것이 더 좋을 듯 여자들 미니펜티도 다 노출돠어 뭇남자들 시선에 팔려 서고나 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라.)
정능
지하무덤으로 (주익균)11번째 황제로 6년에 걸쳐 지었다. 도정봉분은 27m 지하무덤으로 명나라의 황제무덤8살에 책봉 글이 없는 비석 ---무자비를 세움 당시에는 무관 출신이 왕에 많이 올랐고 모택동은 문관이다. 천문이라고 하는 영상문은 왕들이 죽으서 마지막으로 들으가는 문이다.
중국의 4대 미인
㉮서시, ㉯초시, ㉰양귀비, ㉱ 양소굼
삼초금연 이란 꽃도 울고간 미인 이라는 말도 있다
왜 미인들은 귀걸이를 하는 이유`~ 긴 귀걸이가 있으면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어 임금님께 아뢰라면 천천히 걸어아 한다는 이야기이이고 양목환은 양귀비의 애칭이다.
이화원과 서태후
청나라 황제의 가든겸 행궁이다.
습지공원을 1750년대에 건륭황제가 모친의 생신을 축하 하 기위하여 만들었는데 그후 서태후가 해군 경비 3000만양의 국비를 남용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인공호수로 못을 파낸 것이 산을 만들었고 배를 타고 다니는 호수는 사람이 만들어 어마어마한 공사와 경비가 들어간 인공호수로 중국 천녀의 역사를 무너지게한 여인 서태후의 별장이다.
세명의 황제를 거느린 서태후는 함풍제 청나라 9대황제의 후실인 다섯째 부인으로 발탁 되었을때 그녀는 꽃다운 나이 17살 이였다. 입궁해서 아들(통치황제) 조카(광제황제)등을 황제로 등극 시켜 47년동안 실권을 통치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비는 40양으로 얼마만한 돈이냐 하면 중국 사람 만명이 하루 호위 호식 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하니
또한 매번 다른 음식을 먹고 야참은 꼭 먹었다고 하고 서태후는 과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은 손톱을 길게해서 독을 찾았다고하고 상상초월에 이야기로는 출산한 애기모를 목욕 대기하여 모유 먹었다니 믿을수 있겠습니까?
천안문 과 자금성
천안문 광장은 북경에서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44만 평방미터이고 100만명이 동시에 집회를 할 수 있다.
자금성 앞에있고 인민대회장, 역사박물관, 모택동 기념관, 등이있고 천안문 사태등 문화운동의 발생지이고 중국의 상징입니다.
자금성은 1420년에 만들어져 황제들이 머물었던 궁전으로 명, 청 시대의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던 자금성은 궁녀의 방이 9000칸으로 하루밤씩 자더라도 27년이 된다니 세계에서 제일 큰 황궁이다.
2014년 9월 3일
보은군 문화관광해설사 김헌수
내가본 북경 4일 기행문
보은군 문화관광 해설사 김헌수
충북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관광을 최일선에서 홍보하고 유적지에 대한 재미있고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하는 충북문화관광 해설사 32명은 집에서 각자 출발하여 27일 오후 1시 청주공항 로비에 모여 해외에 갈려면 제일 중요 한것이 여권이므로 여권을 안내자에게 주고 15시 이륙한다는 아시아나 항공편을 이용하기위하여 짐을 붙이는대 액체류는 반입이 안된다 손톱각기나 받대리 종류 액체로 된 화장품이나 물 일절 기내 가지고 탑승은 못한다. 무개 부피도 조정한다는 등의 요건을 갖춘 준비를 하여 북경에서 갈아입을 옷가지가든 가방을 부치고 나서 출국 수속을 끝내면 비행기를 타는 게이트 즉 탐승구에서 검표를 하고 이륙 30분전에 비행기에 탐승을 하였다.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5분전에 활주로까지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를 인도 한 다음 굉음을 내면서 비행기는 하늘로 날라 올랐다. 고도에 오를적에는 긴장감이 이루말할 수 없고 아주 불안하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으면 귀도 멍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귀울림만 울려 마치 이대로 들리지않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도 기체가 흔들리면 이제 더 하늘의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닐지 아주 불안한 심정이다.
의자는 좁지 낮선 사람과 같이 타면 아주 어색하고 마음은 답답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바같을 보니 구름이 자아래 이불을 깔아놓은 듯 뛰어 내려 포근히 잠들고 싶은 느낌이 온다 그래도 왜 이리도 시간은 안가는지 이륙하고 30여분이 지나니 간식을 나누어 주고 차 맥주등 서비스가 시작이 되니 승무원이 바쁘게 움직이고 긴장감은 잠시 가시고 꽉 매워놓았던 안전 밸트도 풀고 바쁜 용무는 보러 다니고 승무원 아가씨도 면세품 판매에 열정을 다하는 느낌이다.
북경까지 2시간 비행을 하니 북경 시간으로 16시 5분에 도착을 하고 또한 까다로운 입국 심사을 거치면 다시 우리를 마중나온 관광버스에 올라 관광이 시작 된다. 현지의 가이드에게 북경을 이륙하는 공항 로비까지 현지 가이드에게 먹고 자고 구경등 모든 것이 현지 안내자에게 인도되고 국내 여행사 직원은 보조 역할을 하게 된다.
북경관광
북경은 현대 문명과 옛 문화가 잘 점목 되어있다.
봄과 가을은 15일 증도로 언제 왔다 가는지 잘 모를 정도로 짧고 여름이 길다고 가이든 말한다. 기온은 한국의 대구지방과 비슷하고 평균 기온이 19에서 30도로 우리나라 기온과 비슷하여 한국 관광객이 적응 하기와 옷가지 준비히는 편하다. 배이징은 산악이 70%로 양대산맥으로 되어있고 자금성을 중앙으로 엽전모양으로 대강나무를 주로 많이 심어 방풍림도 되고 젓가락 만드는 재료로 쓰인단다.
북경시내는 트럭은 시간대별로 진입이 안된다고 한다.
같은 중국 땅이라도 시차가 4시간 차이가 나고 산이많고 한국의 왕십리 지역과 같은 지방이 반 이상이고 땅은 나라 땅으로 임대해서 쓴다. 근대 10년사이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고 대한민국과는 1992년에 수교 했다. 그의 10년동안 반세기의 변화를 가져온 북경이다.
관광은 90년 초에 자유롭게 되였고 현재는 아주 자유롭다. 식사문화는 올소택식(둥근 태이블이 돌아가는 식) 양부전은 서울의 명동과 같은 거리이고 시가지는 차가 많이 막힌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소지품 특히 휴대폰 같은 것은 조심해야 한다.
간단한 중국어
1. 니하오 ; 안녕하세요
2. 세 세 ; 감사합니다
3. 신콜라 ; 수고하세요
만리장성
야담 ; 장성에 빠지면 안된다
장성에 남편 찾으러 갔다가 장성이 무너졌다
하룻밤에 만리 장성을 쌓는 다
장성을 쌓는데 국가의 명령으로 삼았다
(장성을 쌓는데 국가의 명령을 받고 장성 쌍기에 가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만리장성과 행랑자 이야기
☆ * 萬里長城 야담 * ☆
흔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 역사를 시작했을 때이죠.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있는 외딴 집에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해 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기 시작 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 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열이나서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 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고.
여인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해질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 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 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 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 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 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 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 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남정네들이여 괜히 기웃거리다 평생 남의 만리장성 쌓지마시고......
만리장성의 거용관코스 관광이다(여러곳 중 제일 선호하는 코스)
춘추전국시대에 건물 1000년에 걸쳐 축조한 세계에서 가장 큰 인조물, 세계에서 가장 긴 축조물이다.
세계7대불가사리는
세계 7대 불가사리의 하나로 명나라때 북방민족(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동서로 산악에 장성을 쌓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미끼않는 축조물로 만리나 된다고 하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300m 증도의 가파른 게단을 올라가는데 마침 날이 개여 했빛은 없으도 땀이 비오듯 하고 워낙 계단이 가파른 75도 경사라 손수건을 꺼내기도 힘들 지경 어찌 난간에 사람이 없어 틈이나면 몸을 기대고 큰 한숨을 내쉬고 내려다 보니 아찔하여 현기증이 납니다. 쉬는 동안 또 몃카드 카메라에 담고 또다시 한계단식 난간에 의지하여 올라가니 일행은 10메타 앞으로 가고 50여계단만 가면 마지막인대 조금 쉬면서 또 사진찰영을 하다보니 일행은 벌서 몃계단 아래로 내려가 나도 내려가기로 ,,,
(특히 조심할 것은 짤은 치마는 안입고 가는 것이 더 좋을 듯 여자들 미니펜티도 다 노출돠어 뭇남자들 시선에 팔려 서고나 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라.)
정능
지하무덤으로 (주익균)11번째 황제로 6년에 걸쳐 지었다. 도정봉분은 27m 지하무덤으로 명나라의 황제무덤8살에 책봉 글이 없는 비석 ---무자비를 세움 당시에는 무관 출신이 왕에 많이 올랐고 모택동은 문관이다. 천문이라고 하는 영상문은 왕들이 죽으서 마지막으로 들으가는 문이다.
중국의 4대 미인
㉮서시, ㉯초시, ㉰양귀비, ㉱ 양소굼
삼초금연 이란 꽃도 울고간 미인 이라는 말도 있다
왜 미인들은 귀걸이를 하는 이유`~ 긴 귀걸이가 있으면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어 임금님께 아뢰라면 천천히 걸어아 한다는 이야기이이고 양목환은 양귀비의 애칭이다.
이화원과 서태후
청나라 황제의 가든겸 행궁이다.
습지공원을 1750년대에 건륭황제가 모친의 생신을 축하 하 기위하여 만들었는데 그후 서태후가 해군 경비 3000만양의 국비를 남용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인공호수로 못을 파낸 것이 산을 만들었고 배를 타고 다니는 호수는 사람이 만들어 어마어마한 공사와 경비가 들어간 인공호수로 중국 천녀의 역사를 무너지게한 여인 서태후의 별장이다.
세명의 황제를 거느린 서태후는 함풍제 청나라 9대황제의 후실인 다섯째 부인으로 발탁 되었을때 그녀는 꽃다운 나이 17살 이였다. 입궁해서 아들(통치황제) 조카(광제황제)등을 황제로 등극 시켜 47년동안 실권을 통치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비는 40양으로 얼마만한 돈이냐 하면 중국 사람 만명이 하루 호위 호식 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하니
또한 매번 다른 음식을 먹고 야참은 꼭 먹었다고 하고 서태후는 과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은 손톱을 길게해서 독을 찾았다고하고 상상초월에 이야기로는 출산한 애기모를 목욕 대기하여 모유 먹었다니 믿을수 있겠습니까?
천안문 과 자금성
천안문 광장은 북경에서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44만 평방미터이고 100만명이 동시에 집회를 할 수 있다.
자금성 앞에있고 인민대회장, 역사박물관, 모택동 기념관, 등이있고 천안문 사태등 문화운동의 발생지이고 중국의 상징입니다.
자금성은 1420년에 만들어져 황제들이 머물었던 궁전으로 명, 청 시대의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살았던 자금성은 궁녀의 방이 9000칸으로 하루밤씩 자더라도 27년이 된다니 세계에서 제일 큰 황궁이다.
2014년 9월 3일
보은군 문화관광해설사 김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