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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개관 3단계 (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재반격)
[ '50.10.25~51.6.23]
이 3단계에서는 주로 중공군과 전투가 소개된다. 따라서 어떤 과정속에서 중공이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느지 격변의 시기에 조.소, 조.중 회담과 전쟁 승인, 스탈린.모택동의 동서 냉전시기에 서로 역할분담 및 세계공산화를 위한 위성국을 만드는데 인도차이나 혁명 주춧돌이 베트남이 된 배경을 알아보고 본론에 들어가려 한다.
이미 세상문제가 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미국의 거만주의와 그린란드 문제와 나토의 기싸음, 미국과 캐나다 갈등, 미국과 남미의 좌파 국가들 길들이기(쿠바, 볼리비아 멕시코 등), 아시아로 오면 중국과 일본의 데스매치, 남중국 국변의 베트남과 캄보디다. 태국과 탐보디아 갈등, 서남아시아의 거푸짐이 가득한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 국면, 시리아의 내전 위험, 파키스탄과 인도의 감정전쟁 위기, 아프리카 제3세계국가들의 빈곤과 민족문제 갈등, 발칸반도의 민족주의와 종교 강등 등 도처에 많은 전쟁의 불씨가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하나 주요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모두가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 그리고 극단적인 종교신념의 문제와 민족주의 등이 문제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세력들의 자기 집단주의에 빠져 국민의 안정과 행복추구는 뒷전이고 자기 세력 살리기와 권력 독점으로 민중을 위한다며 독재로서 탄압과 빈곤으로 몰고 가고 파생되는 문제점들을 외부로 돌리려 전쟁이란 수단이 도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 주변의 한.중.북.일의 역학관계, 한.미.일과 조.중.소의 역학관계, 미.일 및 미.중의 관계, 일.중 및 일.소의 괸계 등이 주변국 정세와 맞물려 절대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되는 숨막히는 열전드라마 속에 우리는 버티고 있다고 봐야 한다.
역사를 알면 준비하는 것이 유비무한이다. 두려워서 아니 눈치보느라 총을 내려 목검을 들고, 법이 두려워 순치자를 없애고 역치자를 시대에 맞는 순행자라 치켜 세우는 나라는 망한다. 바로 조선 말이 그랬고, 고려 말이 그랬고, 신라. 고구려. 백제가 그랬다.
3국시대 당나라 군대의 유입이 빚어낸 3국 통일에 관한 우리 역사학들의 반응은 대다수가 우리 5천년 역사의 가장 큰 변화로 여럿의 부족국가에서 한반도 단일 국가를 형성했다는 칭찬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건 영남학파 사실은 신라학파들이 근세기의 우리역사 비판을 독식하면서 너무 치우친 가설이라 본다.
당시 어디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도 아니였다 평양-원산선 이북은 통제력도 없었고 우라 내부도 도호부를 설치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통일신라 시대에 우리 만주 일원에 세워진 발해의 역사는 무엇이며 그 부족들의 성장이 결국은 거란의 고려침입과 이후 금나라의 무도한 요구및 청태종의 한강 변 삼전도에서 조선 인조의 이마에 피가 흐르며 주종관계의 역사가 이루어 졌다.
고려시대 원나라에 받치던 여자들의 비극은 조선시대로 연결되어 환향녀 역사가 탄생하고 일제시대 위안부, 현대사에서는 양공주 양색시라는 비조어까지 난무하게 되며, 그 아픈 역사의 장소가 지금도 홍제천 주변 대학가 거리와 미아리, 남대문의 양동, 장안에 이어 6.25전쟁 중에 비공식으로 있었던 여성으로 집단 전방지원과 그후 각 전쟁터에 남겨진 사방거리, 사창리, 전곡, 법원리,용주골, 금촌, 동두천 등 국군과 미군에 얽힌 사연이 많이 남아 있으며 얼마전까지도 마장동이나 청량리에 남겨진 흔적이 있었던 역사는 뭐란 말인가?
바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과 뒤이어 찾아온 그 천박하다고 했던 청나라 전투에서 벌어진 병자호란과 정묘재란의 비참한 전국토 초토화와 끌려간 민초들, 그리고 환향녀의 아픔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말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조정 실세들의 눈치보기에 청일전쟁이 발생하여 일본이 진입하고, 대원군과 민비의 증오 싸움이 결국은 일본의 "여우사냥"에서 빚어진 국모 민비의 살해와 고종의 러시아 공관으로의 도피로부터 이땅에서 러.일전쟁의 암운이 드리워져 결국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36년 그리고 대동아 전쟁터로 끌려간 강제 징용된 남자와 광부들, 강제로 끌려간 여인들이 남긴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6.25전쟁은 이승만과 김일성이 벌인 전쟁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비극의 전쟁이었다면 잘못된 평가인가? 물론 김일성과 그 조종자인 스탈린과 모택동이 당시 동구라파에 불었던 민중혁명으로 공산화가 만들어지는 동서냉전의 시대적 산물이라 말할 수도 있다. 동아시에서의 혁명의 주춧돌을 심어 인도차이나로 그 불씨를 옮기고 중공 입장에서는 베트남의 호지명을 지원하여 공산국가를 만드는 것 등 중국 남방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대만을 삼키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과정이고,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의 부동한을 얻고, 그동안 일본에 당한 치욕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김일성이가 승리하기를 꼭 바랬다고 할 수 있다.
5000년 역사의 숭모는 중국땅이요 수많은 볼모들이 붙잡혀 팔려간 곳이 중국땅이며 조공을 받치고 국왕이 장가들 원나라 여인에게 갔던 그 수모를 모르는체 하고 지난 36년 만이 마치 반민족 시대인것 처럼 미화하는 사화 역사학자는 이제 각색해야 하고, 그것을 인용하는 세력 또한 이제 시대상황에 맞게 국민을 선동하고 나라를 살려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과 소련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북한을 지원하게 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요즘 국제정세의 판도라마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며 우리의 이정표는 무엇인지 그 해답의 시초가 되리라 본다. 당시 거물(스.모.김)들이 비록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국가를 지키며 그들 권력을 유지하고 살아남는 지혜의 번득임이 있다.
권력과 돈 앞에서는 신념도 동지도 친구도 버리는, 썩어빠진 자유방임의 탈을 쓴 이리들의 구호에 결국 목장의 양떼들은 현혹되어 목숨까지 잃는 것이 어제 오늘의 현실이 아니다.
하물며 국가대 국가의 운명을 건 소리없는 총성에 고민없이 방아쇠를 당기어 무너지는 비책을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당기고 때로는 밀고, 때로는 참아야 하는 것이 관계다. 일방적인 요구나 억눌림은 분명 시간과 공간속에서 도전을 받게 된다.
지금 세계사의 각종 현안 문제들이 어디 개인만의 욕구나 바램으로 이루어 지겠는가?
트럼프의 미국제일주의를 비판하려거든 미국을 알고 그들이 인류사에 끼친 과오를 분석해 봐야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잘못한 과오도 있지만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우리를 일본에 넘긴 것, 일부 친 중국정책이나 친소적인 나라를 침공이나 경제적 제제로 억눌러 버리는 것 등)분명 미국이 많은 희생과 도움으로 믾은 자유 우방이 살아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념과 종교를 넘어 그들은 조금 거칠어도 근대사에 가장 존경받을 만한 과업이 있다고 봐야 한다.
반면 러시아나 중국의 기본 정책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공산당 독재 국가 또는 1인 독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그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 농민)이 자유가 구속되고, 가난 속에서 통제받는 나라를 유지하고, 독립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눈을 부릅뜨고 감정을 다스리며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은 선동이다.
분명 "영원한 우방을 유지하는 것도 힘이고 영원한 적을 포용하는 것도 힘이다"
중공군의 참전결정 과정
1. 중공의 남침 전쟁계획의 공모
이 3단계에서는 주로 중공군과 전투가 소개된다. 따라서 어떤 과정속에서 중공이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느지 격변의 시기에 조.소, 조.중 회담과 전쟁 승인, 스탈린.모택동의 동서 냉전시기에 서로 역할분담 및 세계공산화를 위한 위성국을 만드는데 인도차이나 혁명 주춧돌이 베트남이 된 배경을 알아보고 본론에 들어가려 한다.
가. 스탈린-김일성-모택동의 전쟁 공모
[반공격 남침계획에 대한 합의]
1949년 3월 5일에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해, 김일성과 스탈린이 "선제공격" 방식이 아닌 남한의 공격을 되받아 친다는 "반공격" 남침계획에 합의를 보고 모택동과 협의를 통해 확정짓기로 한다.
1949년 4~5월에 인민군 정치국장인 김일이 대표로 중공 북경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회담을 갖고, 스탈린-김일성 회담내요, 북한의 무력통일 방안, 중공군 소속 한인부대의 북한으로의 인도무제 등에 의견교환을 한다.
[모택동의 의견 : 모든것은 스탈린과 합의를 본 후에 시작될 것이며, 시기는'50년 초가 유리한다]
이 자리에서모택동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해야 한다. 지구전이 되면 일본이 끼여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도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을 격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직 국공내전이 진행 중이므로 가까운 시일에 남한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트탈린의 의도와 같이 남한의 도발에 반격을 가하는 형식을 빌려 남침할 것을 조언하고 1950년 초가 유리한 시기라고 했다.
북한이 요청한 한인사단에 대하여 모택동은 만주의 목단과 장춘지역에 배치된 2개 사단은 언제든지 북으로 인도할 준비가 되었고, 나머지 1개 사단은 중국 남부에서 국민당 군대과 전투 중에 있으므로 빨라야 1개월 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당시 중공은 탄약을 제작할 수 잇어 북한측이 우너하는 대로 지원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스탈린에게 통보되었다.
나. 모택동-스탈린의 모스크바 밀약 ※동맹국이 공격을 받거나 전쟁상태로 돌어갈 경우 모든 수단을 다하여 즉각적으로 군사 및 기타원조를 취한다
모택동은 중공정권을 수립( 1949년 10월 1일)한 후 그 해 12월 16일 소련의 모스크바를 약 2개웛 동안 방문한다. 여기서 세게 및 아시아 곤산주의 세력의 확장 방안과 쌍방간의 현안문제를 협의한다.
이듬해인 1950년 2월 14일에는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 장춘철도, 여순 및 대련에 관한 협정 등 양국간의 정치.경제.군사적 유대를 강화하였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 동맹국이 공격을 받거나 전쟁상태로 돌어갈 경우 모든 수단을 다하여 즉각적으로 군사 및 기타원조를 취한다" 였다.
여기서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1,000여 대의 항공기 주문하며 회담종료 직후인 1950년 2월 16일부터 3월 5일까지 소련의 혼성 방공사단이 상해. 남경. 서주 등에 전개하여 이 지역 방공을 담당한다.
다. 흐르시초프의 회고록에 밝혀진 진실[1970년 초에 간행됨]
"한국전쟁은 남한에 의한 북침이 아니라 김일성이 주도한 것이며 김의 제의를 받은 스탈린이 특히 미국의 에상되는 대응과 관련하여 모택동의 의견을 들어 최종적으로 승인하였다'
다.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전쟁계획 합의
[1950.4월 조.소 회담]
모스크바에서 스-모의 회담후 195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다시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이 열렸으며, 여기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김일성의 수정제의한 선제남침 공격계획에 동의하며, 모택동의 동의를 요구한다.
[1950.5.13 조.중 회담]
이에 김일성은 5월 13일 박헌영을 대동하고 직접 모택동을 방문하여 조.중 북경회담이 개최된다. 여기서 모택동은 김일성의 계획을 들은 다음 직접 주중 소련 대사 로신을 통하여 스탈린의 공식 답변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에 동의하였으며, 모택동과 김일성 동지간에도 사전 합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5월 14일, 모택동은 주중 소련대사로부터 김일성-스탈린 회담결과를 받았으며, 중소 조약을 모델로 조중우호 동맹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한다.
1950.5월 15일 속계된 회담에서 일본군이나 미군의 전쟁 개입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을 도울 것이라고 하고 스-모-김의 의견이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2. 중공군의 참전을 위한 동북변방군 편성
가. 대만 점령작전의 연기
중공운 본토를 석권하고, 장개석 정부가 석권하고 있는 금문도와 팽호도 등 근해도서의 지배를 최우선 목표로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진전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한국젅쟁으 ㄹ 맞았다. 전쟁 발발후 미국이 한국을 지원 하면서 동시에 대만해협에 미 제7함대를 파견하자 중공은 자신들이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의 세 방향으로부터 미국의 위협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대만은 1894년 중일 전쟁이래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제2차세계대전 후에 중국으로 반환된다. 국궁내전에서 본토에서 패한ㄴ 국민당 정부가 1949년 5월 이곳으로 철수하여 군사적 요새를 구축하고 본토수복 의지를 천명함으로서 대만해해협이 양측간의 전장이 되었다.
중공지도부는 "대만해방"을 중국내전의 마지막 전투로 보고, 1949년 6월에 제3야전군과 화동국에 그 임무를 부여했다.
반면 대만에 들어온 장개석과 국민당은 곧 자신들의 해군으로 하여금 중공의 항구를 봉쇄한다고 선언하고 공군으로서 해안도시 특히 상해의 상공업지대를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해.공군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모택동은 국민당군대를 투항시킬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기 위헤 1949년 여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상륙작전 능력을 강화한다.
1949년 10~11월 금문도와 주산군도의 뎅부공격을 실시하여 목표는 점령했지만 미국제 함장과 항공기로 무장한 국민당 군의 ㅈ제해. 제공원을 제압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한다. 여기에서 중공군이 전 해방전쟁 기간을 통해 최악의 인명손실을 입어 중공의 "대만 해방작전"은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는 와중에 한국전쟁이 1950년 6월에 발발하고 미 제7함대가 대만해협에 들어오게 되자, 결국 대만침공계획은 연기된다.
나. 베트남 접경의 안보 강화 "베트남을 인도차이나 공산화의 혁명 모델로 활용"
중공 정권은 "대만 수복작전" 과 남쪽에 접경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은 제2차 세게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곧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한 호지명과 일본군 점령 이전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재진주한 프랑스군 간에 이른바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1950년 1월에 중공은 베트남 공화국을 공식 승인하고 대불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을 지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앉전에 유리함은 물론 국제적 의무라고 주장하며 호지명과 그 공산당을 지원하게 된다.
[호지명의 '50.1월 중국 방문과, 50.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진행 중인 모-스회담에 직접 방문 지원요청]
당시 동서 냉전구조하의 국제적 정세에 편승한 호지명은 '50년 1월 말 비밀리에 중공은 방문하며, 2월 초에는스탈린. 모택동을 직접 만나 군사. 정치.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모-스가 회담중인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한다.
스탈린은 호지명에게 모택동과 협의를 요구하고, 모택동은 대불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고 약속한다.
모택동의 이러한 지원 약속은 무엇보다 공산 베트남의 존재가 남부국경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의미와, 특히 1949!1950년에 국민당의 잔존세력들이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으로 은신함에 이 지역 관심이 고조되었다.
중국은 호지명에게 1950년 3월부터 군사고문단을 설치하여 대대급까지 배치하고, 군사학교도 개설하였다. 이와같은 속에서 1950년 9월16~10월12일 프랑스군과 전투에서 대파하여 프랑스 군대는 방어체계가 붕괴되어 호지명 군대는 남부로 반격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공 공산당은 정권수립과 동싱에 중소협저으로 세계공산화의 역할분담과 아울러 만주 철도 및 여순 지역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한다.
대만 문제는 잠정 연기하고 베트남 지원으로 남부 국경의 안보 강화와 인도차이나 공산혁명의 주춧돌을 심게되고, 한국전쟁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참전준비
중국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 동북변방군이란 이름의 파병할 중공군을 별도로 조직하게 된다.
중공은 당시에 대일전쟁과 국공내전 등 장기간의 전쟁 속에서 피폐할 대로 피폐된 국가경제를 복구하는"평화건설사업"이 추진된다. 이에 군도 그동안 전쟁으로 비대해진 군의 인력을 절약하여 산업역군으로 전환시킥고 국방비를 줄여 경제개발에 전환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를 위해 1950년 4월 중공군은 전군 총병력을 540명에서 400만으로 축소하며 사단 병력은 10,000명선으로 하고 소련의 지원속에 공군과 해군도 조직화되어 간다.
이와 같이 중공은 내부적으로 경제력 복원과, 군의 현대화 조직으로의 개편을 추진하는 과도기였다. 그러함에도 모택동과 공산당 지도부는 김일성과 연쇄회담후 중앙 기동에비대를 동북지방인 만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 부대를"동북변방군"이라는 부대로 편성하고 참전 준비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김.모.스가 전망했던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당시 김일성은 북한이 공격하면 남한 내부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정부를 전북시킬 것이며 이를 이용해 신속히 남해안까지 전개하면 미군의 개입을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여 모.스가 승인하고 모는 미국 개입시 중공이 개입한다고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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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기록하였지만 다시 한번 모의 행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모택동은 중공정권을 수립( 1949년 10월 1일)한 후 그 해 12월 16일 소련의 모스크바를 약 2개웛 동안 방문한다. 여기서 세게 및 아시아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 방안과 쌍방간의 현안문제를 협의한다.
● 이듬해인 1950년 2월 14일에는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 장춘철도, 여순 및 대련에 관한 협정 등 양국간의 정치.경제.군사적 유대를 강화하였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 동맹국이 공격을 받거나 전쟁상태로 돌어갈 경우 모든 수단을 다하여 즉각적으로 군사 및 기타원조를 취한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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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민중봉기도 없고(일부 인공기 들고 설치는 지역별 친북론자들, 쯕 빨갱이란 집단은 있었고 실ㅈ제 행동도 했지만 소규모였다) 미국과 유엔이 신속히 결정하여 미군 공군은 6월 27일부터 행동하고 미 육군은 주일 주둔군에서 바러 선발대가 결정되고 7월1일 부산항에 들어와 7월 5일에는 수원 죽미령에서 첫번재 북한군과 전투를 하게된다. 그리고 7월 7일에는 유엔군 사량부가 저직된다.
모택동은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 되고 확대될 것으로 판단하고 전략기동에비대인 제13병단을 동북으로 옮겨 그 곳의 방어를 하면서 북한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제4야전군 부대원들 중에 동북인이 많았다]
이에 중공은 중앙 군사위원회를 7월 7일과 10일 두 차례 열어 7월 13일에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인 제38. 제39. 제40. 제42군(군단급)을 중심으로 동부지구로 옮겨 동북변방군으 조직하기로 하였다. 특히 이들 부대가 해방전쟁시 동북지방에서 전투했으며, 과 항일전쟁 등 전투경험이 많고 동북인이 많았다.
이밖에 8월 하순에는 상해지역의 제9병단과 서북지역의 제19병단을 각각 진포. 용해의 철도 중심지로 전개시켜 중앙 예비로서 동북변방군을 지원하도록 하였으며 8월 하순에는 압록강 연안 요지를 방어하고 있던 고사포병을 전투에 투입하였다.
[중공군의 동북변방군 편성 명령 시점의 한국전쟁 상황]
여기서 중공이 동북변방군 편성 명령을 내린 7월 13일은 북한군이 금강-소배간맥 선까지 진출한 상황이고, 8월 중순은 북한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고 국군과 미군을 밀어붙여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이는 중공군의 지원은 단순한 유엔군과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해서가 아니라 사전 이미 계획적으로 참전준비가 진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3. 외교적 책략(북한지원과 참전명분 추구)
중공은 북한이 전면적 남침 개시 전훙에 안보상 가장 주요한 소련, 대만, 베트남 문제를 정리하면서 동북변방군을 편성하여 전쟁 개입 준비를 동시에 추진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을 지원하여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가 어려웠을 시기(만주 군 장학량과 장개석의 압박에 밀려 포위되었던 시기에 중공군 북부군을 북한 압록강 하구를 통하여 산둥반도로 탈출하도록 김일성이 지원함)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과 소련으로부터 받아야할 각종 군사적 경제적 지원에 대한 보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미국과 유엔의 대처]
한국의 지원요청을 받은 미국과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북한 남침 불과 24~72시간 사이에 북한 남침을 응징하고 대한민국에 군사원조를 권고하는"6.26일과 6.28"결의를 채택한다.
이에 근거하여 미국은 6월 27일에 미 해.공군을 지원함과 아울러 미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전개한다는 대통령의 성명과 이에 6월 30일에는 지상군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7월 1일에는 미 지상군 선발대 스미스부대가 가 부산에 상륙하여 7월 5일에는 천안을 거쳐 오산 죽미령에 도착하여 북한군과 최초의 지상군 대결을 하게 된다. 이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발표를 하였다.
[중공과 소련의 반응]
미국과 유엔의 대응에 종공의 첫 외교적 반응은 6월 28일, 모택동은 중앙인민정부 제8차 회의 석상에서 "미국의 한국전쟁 간섭과 중국 영토인 대만점령 사실에 대해 강격한 반대의사를 표묭하고 전세계 각국의 일은 자국 인민 스스로가 주관해야 핝다..., 미국이 관여해서는 안된다. 중국인민은 제국주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며 전세계 인민은 단결하여 미제국주의의 어떠한 도발도 타파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어 주은래수상은 6.28유엔결의에 대해 중국과 소련 양개 상임이사국이 참가하지 않은 상태에 통과되었으므로 분명히 불법이며 따라서 중국인민은 결연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당시 안전보상이사화 상임이사국에 중공은 없었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상임이사국 대표권을 보유하여 행사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49.11월 15일에 소련이 이 문제를 안보리에 상정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이사국의 반대로 자싡들의 주장이 관철도지 않았다고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퇴장을 선언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써 소련 대표는 안보리회의에 스스로 불참하고 있었다.
[소련의 노력] ※ 대만제외, 중공의 유엔 대표와 외국군의 철수 주장
그러다 '50. 8월 1일에 소련의 대표가 복귀하고 순서에 의거 안보리 의장직을 수행을 게기로 공산측의 외교 공세가 모습을 들어낸다. 소련 대표는 8월 4일자로 한반도에서 적대행위의 중지와 외국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결의안을 상정하게 되고 토의에 중공대표의 참석을 요구하고 나선다
8월 26일자 세계지식지에 실린 내용을 보면, 그 이전에는 주 목적이 유엔군의 지원을 저지하여 북한군의 작전 성공을 보장하려 했다면 , 이번에는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되, 그 방편으로 유엔군의 철수와 중공대표의 참여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압력수단으로 매스컴을 통해 중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며 대중을 선동하고 외교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당시 중공과 소련은 전장 상황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협상을 벌여 시간을 획득하면 북한군이 유리한 상화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9월 6일 안보리 회의에서 소련의 제안과 중공의 대표 참가 요구는 표결로서 부결되어 그들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은 유엔군의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28서울 수복과 10워 1일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두만강으로 진출하는 북진작전이 전개된다.
9월 30일에는 영국이 주도하는 8개국이 "유엔은 한국전에서 안정상태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는 북한지역에서 유엔군의 군사작전 실시 근거를 쟇확인하뫄 동시에 그후 유엔주도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이른바 "한국통일 결의안"이었다.
반면 중공과 소련은 "미 제국주의가 더 큰 군사모험, 즉 38선 돌파를 결심하여 전략적 속전속결로 전조선의 점령을 기도고 있다고 판단하고 , 소련과 더불어 외교전략의 촛점을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저지에 두고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만약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공군이 참전할것이라고 위협하고 나섰다.
4. 조.중.소 작전협의 및 전황판단
[중공의 7인 "군사관찰 소조"편성 7월 10일 평양 파견]
중공의 인민해방군 총 참모부는 전쟁발발 3일째인 '50. 6월 27일, 미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 참전 성명발표 후, "군사관찰 소조"의 평양파견을 계획한다. 이어 동북변방군 편성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7월7일에 7명의 대표단이 7월 10일 급거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성과 만나 업무를 시작했다.
모택동은 이들로부터 들어오는 전황파악에서 북한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종결지을 경우와 중공이 참여해할 상황으로 발전될 경의 장단기 두 방향으로 에상하고 후자의 상황이 전개될 경우 참전의지를 재천명하였다.
그는 8월 19일 소련의 막스주의 학자 "유진"과의 대담에서 참전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이러한 자료는 모두 구소련의 몰락과정에서 밖으로 나온 문건들 속에 있는 사실기록이다)
[모택동의 제3차 세계대전 희망 피력]
그는 이 대담에서 지금의 전력수준이라면 미군은 가가운 시일에 패퇴할 것이고, 이것이 상황 전개에 가장 바림직하다고 하며, 만약 미국이 조선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총 30~40개 사단이 필요한데 이경우에는 북한 자체의 힘으로 이를 물리칠 수 없고 직접적인 중고의 힘이 필요하고 중공과 북한의 협동전력이 미군을 궤멸시키는 상황이 오면 소련과 중고에 유리하에 제3차세계대전을 발발시킬 수 있는 기회가 조성될 것이다 라고 했다
이후 8월 후반에 "군사관찰 소조'에서 전선이 상황이 북한군의 공세가 좌절되도 교착상태로 접어들며 유엔군의 증가와 미군의 전력증강과 해군력의 집굘 드을 미루어 유엔군이 북한군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시킨 다음 후방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보고된다.
상륙지역으로 가장 유력한 곳이 인천 원산. 군산. 남포, 함흥 등이 있으나 인천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고된다.
[모택동의 "동북변방군 출동준비 9월 말까지 끝낼 것 명령]
이에 모택동은 동북변방군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9월 말가지 모든 적전 준비를 끝내도록 지시하고, 북한과 소련에도 대비하도록 통보하기로 한다.
이어 북경을 찾아온 북한 군사사절단장 이상조를 만나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며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인천이니 우발계획을 준비하도록 제의한다.
[모택동의 북한 사절단 접견 발언록]
그 후에도 8월 말과 9월 초에 북한의 대표단을 접견하며 전쟁 경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때에도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한 북한군의 준비상황을 물어보고, 충분한 예비전력을 확보하고 상륙가능 지역에 대한 경계 문제에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모택동은 북한군이 전격전을 수행할 군사력이나 예비전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유엔군이 적절한시기에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그 결과 미군은 대구-부산 지역으로 후퇴하여 방어마응ㄹ 구축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은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1개월 이상 뚜렷한 성과 없이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일보의 전진도 못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 싯점에서 북한군의 모든 군사력을 낙동강 전투에 투입하지 말아야 하는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향후가능한 경우 병력 재편성을검토해 새로눈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신속한 후퇴 가능성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주은래의 소련 대사 로신 초치 당부]
중공의 한국전쟁 전황 파악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더욱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인천상륙 3일 후인 9월 18일에, 주은래는 주중 소련 대사 로신과 군사고문관 코트브코노프를 초치하여 전황파악에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주은래는 중국지도부는 인천상륙적전에 관해 평양의 라디오 및 신문 보도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다고 언급하고, 소련은 정보가 있는지 문의 하였다. 그는 중국이 국경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 야전상황을 관찰하려고 시도했으나 평양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하였다. 주은래는 모택동의 판단과 충고가 북한측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2일 후(9월20일) 주은래의 언급에 대한 모스크바의 회답이 북경의 소련대사관에 도착하였다. 소련은 우선 북한이 한반동에서 치러지고 있는 전쟁과정에 대해 중국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치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그러나 이는 전선에서 혼란때문이며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또한 모스크바도 평양주재 대사로부터 전황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만을 뒤늦게 제공받고 있으며, 이것은 북한군의 경험 부족, 통신장비의 미비, 전황분석 능력 부족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고, 모택동의 견해에 인정하며 특히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인천지역 상륙전으로 전쟁상황이 복잡해짐에 따라 더욱 어려워졌다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주은래는 9우러 21일 로신대사로부터 위와같은 모스크바 입장ㅇ을 전달받고 자신들과 상황판단이 틀리지 않음에 만족해 하였다. 이 자리에서 소련 대사는 모스크바의 입장이 북한에도 통보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은래도 중국도 북한에 의견을 전달했다고 응수하였다.
5. 조.소의 지원요청과 파병결정
가. 스탈린의 파병 요청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사령관의김일성에 보내는 항복 권유문 발표와 때를 같이하여, 국군의 선두부대가 38선을 돌파했고 유엔군도 역시 부긴작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유엔총회에서는 통일문제에 관련하여 이른바 "한국통일결의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전환점에서 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티코프 대사를 만나 스탈린에게 보낼 서안작성에 관련하여 조언을 구하였다. 스티코프는 38도선의 신속한 방어주치를 취하도록 강조하였지만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으로 남침부대의 대부분이 포위격멸되었고 후방신편 부대의 남쪽으로 이동도 늦어져 자체로서 방위능력을 상실한 상태이었다. 김일성은 이날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하고, 김일성 .박헌영 공동 명의로 파병요청서를 작성하였다.
[김일성. 박헌영 공동명의 스탈린에게 보내는 파병건의서]
주내용은스탈린에게 각 방면에서 원조를 해주어 감사한다는 내용과, 상륙하기 전에는 남조선의최후결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많았으나 미군이 9월 15일에 대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싱에 침입하여 시가전이 진행하고 있다는 상황보고를 한다.
그러나 전황이 참으로 긴박하게 되었으며, 미군이 약 1,000여대의 항공기를 주야로 출동시켜 전후방 없이 마음대로 폭격을 감행하고 있으나 북한인민군은 기동력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서 부대들이 여러 토막으로 차단되고, 남부전선에 투입된 부대들은 식량과 탄약 공급을 받지 못학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포위될 형편에 처하였다고 하였다.
유엔군은 서울시가 점령되고 나면 38도선을 넘어 북조선을 침공할 것이고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유엔군의 침공은 성공할 것으로 보이며 하지만 군수 공급문제를 해결하고 공군력이 있어 기동력을 보장하게 될텐데 준비된 비행사가 없다고도 하였다.
그러면서 북한인민군은 최후의 피한방울까지도 아끼지 않고 싸울 것이라 다짐한다. 전력을 다하여 장기전을 게속하려면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밀어붙이면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소려늬 특별한 원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대는 소련군이 직접적으로 출동하여 충돌이 절대로 요구된다고 하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중국과 기타 국가들의 국제 의용군을 조직하여 출동하도록 원조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멀리덜어진 휴양지에서 이 요청을 받고, 미국과 소련이 직접적 대결이란 모험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의용군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중공과 협의할 문제라고 생각하여 모택동에게 중공군의 팝병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애고, 이를 주 부한 소련대사 스티코프와 군사대표 마트베에프에게도 통보한다
그 전문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모택동이나 주은래에게 신속히 전달 바람]
본인은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져 휴가중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사태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 오늘모스크방에서 전달된 소식으로 보아 북한동지들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았음.
모스크바는 이미 지난 9월 16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북한동징들에게 경고한 바 있음. 모스크바는 북한에게 남쪽의 4개 사단을 신속히 이동시켜 서울 북쪽과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점차 남쪽에 있는 군의 주력을 이동시켜 38선을 지키도록 권고 하였음. 그런데 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키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고, 이로인해 부대가 차단되고 포위당하게 된 것임. 북한 동지들에게는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부대가 없으며 38선을 향한 길은 열려 있다고 생각해야 함.
만일 귀하께서 현재의 상황에서 북한에 병력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북한동지들이 귀군의 엄호하에 38도선 이북에서 예비부대를 편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본인은 생각함. 중국 사단은 물론 중국인을 사령관으로 하며 의용군의 형태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임. 본인은이에 대해 북한동지들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으며, 알리려고도 생각하지 않음. 그러나 본인은 그들이 이를 알게 되면 기뻘할 것임을 의심치 않음.
회신을 기다리겠음. 스탈린 1950. 10. 1
이 점에 관해 흐루시초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 당시 스탈린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의 직접적 충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피하기 위하여 "비록 김일성이 패배한다 할지라도 소련은 병력을 파견하여 참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직접적 파병은 원치 안고 있었으나 현재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단한 군사력을 가직고 있지 않다고 보고, 만약 일본이 군국주의가 부활한다면 문제가 되니 세계대전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전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 김일성의 중공군 지원 요청
스탈린이 김일성의 파병요청을 받고 모택동에게 중공군을 지원하도록 요청한 날인 10월 1일에 김일성은 외상 박헌영을 위시한 그들의 대펴단을 북경으로 급파하여 모택동에게 파병해 주도록 간청하였다.
그 내요은 스탈린에게 보낸 것과 유사한 내용으로 절박한 군사상황을 설명하고 장기 항전결의를 다짐하며 중공군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간단한 요청서 내용 요약]
한반도 해방전쟁의 전황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북한군에게 유리하여 상대는 연전연패의 상황에서 한반도 남단의 소지구내에 갇힌 꼴이 되었는데, 최후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미군이 9월 중순 인천에 상륙한 후 이어서 서울을 점령하였음.
북한군은 완강한 저항을 하였으나 상륙군이 남부전선 부대와 이미 연결되어 부한구늬 허리를 잘라 버렸고 남부전선의 북한군은 차단되어 분할의 상황에 빠져 버린 상태임. 상대는 서울 점령 후 계속 진격할 듯함.
우리들은 한방울의 피가 흐를 때까지 독립해방 민주투쟁을 끝까지 쟁취하려고 할 것임. 지금 다시금 새로이 사단편성에 착수하고 있으며 남부전선의 10여만 부대들도 작전에 유리한 지역으로 집결시키고 있으며 전인민을 장기작전에 동원하고 있음.
현재 상댁 우리가 처한 위난을 이용하여 우리들에게 시간을 주지않고 게속 38선 이북 지구로 진격해 온다면 우리들로서는 우리 자신만의 역량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임
따라서 우리는 부득불 당신에게 특별한 원조를 간청함. 상대들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 오는 이 상하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하여 우리 군의 작전을 도와 주시기를 급한 가운데 바라마지 않음.
김일성은 박헌영의 북경파견과는 별도로 같은 날인 10워 1일 저녁, 평양 중공대사관 지하실에서 열린 "중공 건국 1주년 기념 연회"에 나타나 중국대사 에지량과 정무참찬 시성문을 만나 "중공이 가장 바른 시간 내에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군의 작전을 지원해 주도록 간청하였다.
압록강변에 대기 중인 중공군 제13병단이 도하하여 주시기를 요망하고 대사는 요청사항을 가능한 한 빨리 북경에 전하겠다고 확약하였다.
6. 모택동의 중공군 파병 결정
가. [10월 1일,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임위원회의]
모택동이 지원군의 파병을 요청받은 날이 정부가 들어선 ('49.10.1)날로붙터 정확히 1주년이다. 이날 천안문 ㄱ광장에서 모택동 임석하에 건국 1주년 기념행사가 요란하게 진행되었다. 저녁 늦게 행사에서 돌아온 모택도응ㄴ 소련과 북한이 요청한 중공군 파병건을 다루기 위하여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임위원 회의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은 이날 밤 이 문제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여,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군사상황의 위험, 중고이 참전시 직면할 제문제, 그리고 세계가 공미병에 걸려 있을 정도의 강대국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초래될 결과 등을 숙고한 끝에중공군 파병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첫째 ; 국제공산주의의 전체 이익을 고려하고 미국의 세계제패에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반드시 출정항여 북한 인민군을 도와야 한다
둘째 : 미국이 전쟁을 확대하게 되면 이는 비단 북한의 생존 위험에 국한되지 않고 곧바로 중공으로 직결된다. 미국은 장개석 집단을 지지하고 중공을 적으로 삼는 정책을 오랫동안 유지해 오고 있다.
셋째 : 중공이 미국과 한번의 사움을 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이 경제와 기술 장비면에서 우세한 것은 사실이나 그곳에도 약점이 있기에 싸워서 이길 수도 있다.
결국 모택동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식요청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고 끝에, 이날 10월 2일 02:00시에 그 스스로 이 국가적 대사인 참전을 결정하였다. 그는 이 결정 후 곧 동북변방군 관할 책임자인 고강과 제13병단 사령관 등화에게 원래의 계획일정보다 앞당겨 준비를 완료하고 새로운 적과 사울 작전명령을 대기하도록 명령하였다.
따라서 이날 회의는 모택동의 결정을 기정사실로 하고 파병일자와 지휘관의 결정이 중심의제가 된다.
먼저 지휘관 선정은 국공내전시 동북지역에서 활동 중인 제4야전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날린 임표가 적격이었다. 그러나 임표는 한국전 참전에 현재 중공의 입장이 어렵다고 대변하고 또한 신병 치료를 이유로 소련에 체류 중이었으며 파병에 유보적 입장이었다.
[파병군 사령관 : 팽덕회로 결정]
따라서 그 대안으로 국공내전시 제1야전사령관으로 서북지역에서 전투를 한 팽덕회를 본인이 수락한다는 조건으로 사령관으로 결정한다. 당시 팽덕회는 중공군 창시자의 한사람이고 1920년대부터 모택동과 더불어 많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중공정부가 수립될 때는 서북국 제1서기. 서북군구 사령관겸 정치위원이며 그후 중앙정부 인민군사위원회 부주석겸 부총사령관의 직위에 올라 있었다.
[파병시기 :10월 15일경으로 결정]
이에 대한 대답은 기본적으로 동북뱐방군이 최종준비를 얼마나 빨리 완료하느냐와 한반도의 상황발전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용해 주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이 두 요소를 고려하여 투입일자를 10월 15일 경으로 결정하였다.
나. [모택동의 스탈린에게 보낸 파병의 엉뚱한 답변서]
누구나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파병을 결정하였다고 답신하리라 보았다., 그러나 모택동은 전혀 반대의 답변서를 스탈린에게 보낸다
귀하의 50.10.1일자 전문을 접수하였음. 우리는 처음에는 적군이 38도선을 넘어설 때에 북한에 수개 사단의 의용군을 지원할 게획이었음. 그러나 지금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바, 그러한 행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임.
첫째 : 수개 사단을 가지고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움(우리 군의 장비는 취약하며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음)
적군은 우리의 퇴로를 차단할 수도 있음
둘째 : 이는 중국과 미국과의 직접적 충돌을 야기시킬 것이며, 소련도 개입될 수가 있는바,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상당히 확대될 것임
우리 중공공산당의 많은 인사들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 물론 우리 군대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현재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북한 동지들은 매우 곤란하게 될 것이나 이를 견디어 내야 함. 만일 우리가 수개사단을 파견하여 미군과 직접적인 충돌한다면 우리의 평화적인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며 우리 인민들은 크게 불만스러워하 ㄹ것임(인민들은 전쟁의 상처로부터 치유대지 못하였으며 평화가 필요함)
따라서 지금은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차후의 전투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는것이 좋을 것으로 봄. 북한은 패배를 겪는 당분간 투쟁방식을 빨치산 전투로 전환할 수 있을 것임. 우리는 중앙위원회를 소집했으며...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님, 이는 우리의 예비적인 회신이며 귀하와 계속 협의 하기를 바람. 귀하가 동의한다면 우리는 곧 주은래와 임표동지를 귀하의 휴양지로 파견하여 귀하와 이 문제에 관하여 협의하고 북한과 중국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겠음. 모택동 1950. 10.2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침전인 '49. 4월과 '50. 5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또는 미군 개입시 중공군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했고, 남침후인 '50.7월 2일에는 주은래가 로신대사와 한반도 전황을 평가하면서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어 온다면 중국군은 북한을로 가장하여 전투에 참가, 미군에 대항할 것"이라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중국지도부는 이미 심양에 3개군 12만명을 집결시켜 놓앗음을 상기시키며 출병지원방침을 재확인 하였다.
그리고 8월 19일과 28일에는 두 차레에 걸쳐 유진과의 대담에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30~40개 사단을 필요로 할 것이고, 이 경우 북한은 자체의 힘으로 이를 물리칠 수 없으므로 중국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한바 중국과 북한의 합동전력은 미국의 사단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파병의지를 재천명한 바 있다. 또한 이미 동북변방군에 9월 말까지 참전준비를 끝내도록 명령이 주어졌다.
[당시 주중대사 로신의 10월 3일자 모택동의 회신문을 모스크바로 타진 : "중국지도부의 당초 입장이 변화했습니다']
모택동의 회신은 한국문제에 관한 중국지도부의 당초 입장이 변화햇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회신은 모택동이 유진. 코트브코노프와의 면담에서 여러번 이야기했던 내용 및 본인이 유소기와 가진 면담 등 이미 보고되었던 이전의 평가와 상충ㄷ되고 있습니다. 도 ㅇ면담에서 중국인민과 인민군의 도움이 필요할 시 북한인민을 도와 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미군이 일본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타도할 능력이 있다고 한바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조선에 5~6개 사단만이 아니라 더 이상을 파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 군대는 대전차용 장비 및 대포 등 기술적인 보완이 필요합니다. 중국의 입장변화 원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모택동은 미군이 참전시 중공군의 파병을 사전에 소련과 북한에 확약하고 잉에 대비한 준비로 동북변방군의 출전태세를 가추고 있엇다. 그러나 그가 전쟁 음모과정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유엔군의 기세로 보아 공중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전투장비도 열세한 지상군 위주로 대적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의 신중한 의사표현은 이 파병결정의 통보에 앞서 소련공군의지원보장을 받고 그밖의 전투장비의 추가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발상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주은래는 10월 3일, 이른 아침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와 면담을 갖고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미국행정붕에 전달하도록 요청한다
"미국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전쟁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들이 진정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함이 없이 그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
주은래의 경고 메시지는 앞에서 열거되었듯이 이미 파병을 결정하고, 그 대상 부대를 동붑방면으로 이동시키고 지휘관을 임명하고 출병준비를 명령한 상태에서 보낸 메시지다.
과거에는 이를 두고 여러 학자들이 중국과 미군이 직접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며, 이르르신중히 대응해 유엔군이 38도선 돌파를 하달하지 않았다면 중공의 군사개입은 피할 수 있엇을 것이라는 주장의 뒷받침에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미 파병결정을 해놓고 이를 보냈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진 이상 위의 논리는 근거르르상실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주은래는 늦게 미 행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다.
그 답은 이렇게 추정하고 있다.
첫재 : 군사적으로 유엔군의 북진을 지연시키기 위한 아주 계획적인 것이다. 당시 중공은 참전준비를 해왔고 참전결정을 해였지만 부대를 투입하기에는 준비기간이 더 필요하였다. 유엔군이 진출속도가 빨라 자신들이 행동하기 전에 한만국경선까지 유엔군이 도달하게 되면 개입하 ㄹ기회를 상실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돌째 : 정치적으로, 참전의 정당화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고도의 정략적인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국내적으로 항미원조운동을 촉진하여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노력중이었고, 국제적으로 참전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재고함으로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하였다. 적대행위에 대한 정당성의 확보가 자신들의 이러한 기도의 추진에 직면하고 있는 국내외으 만흥 어려움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다.
북경에서는 이 외교적 조치를 취한 다음 날인 10월 4일에 정치국 중앙위원회가 열렸으며 주 의제는 한국전쟁 파병 건이었다. 여기에는 정치국 요원과 팽덕회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거의 참석하였다.
이에 다른 논의에서 임표와 고강을 비롯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중국군의 단독파병에 대해 유보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첫째 : 중국은 수십년간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거대한 경제적, 제정적 문제를 안고 있다. 경제를 회복하고 재건하기 위하여 중국은 평화적 회복기간을 필요로 한다. 파병은 국내의 불만을 야기하 ㄹ수도 있다.
돌째 : 중국은 어려운 정치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국가가 아직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였고 대만과 일부 근해도서가 여전히 국민당 잔존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더욱이 해방구역의 토지개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참전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약화시킨다.
셋재: 중국군은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작전하게 되고, 제공권과 군수지원의 보장이 없는 가운데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중국군은 우세한 미군의 화기와 장비에 많은 손실을 입을 수 있다.
다. [모택동의 답변 : 순망치한 호파당위]
모택동은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회의의 폐회에 앞서 "당신들의 발언은 잉유가 되지 못한ㄷ, 이웃 인민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어떻게 우리가 수수방관만 할 수가 있는냐? 이는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라고 우회적으로 그 발언에 대한 부동의 함을 표명한다.
다음날 10월 5일, 속개된 회의에서 사령관에 지명된 팽덕획가 주도하여 "한국저쟁 참전으로 중국은 "미국의 방자함과 국내 반동세력의 거센 바람" 양자를 한꺼번에 칠 수 있는 기회라며 참전을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분위가 반전되어 의견의 일치를 이루게 ㄷ된다.
첫째 : 조선문제는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시아, 아미도 세계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 대결의 촛점이 되었다. 파병은 단순한 조선 구하기라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아시아와 세계의 혁명을 옹호하고 촉진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돌재 : 조선의 안전은 중국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다. 만일 미군이 압록강에 도달하게 된다면 중국은 주요한 전략적 완충지대를 상실하게 되고, 동북국경 방아에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된다.
셋째 : 중국과 미국의 상황을 볼 때, 중국은 인력, 정신력, 인민의 지원면에서 미국보다 우세하며 이는 화기와 장비면에서 열세를 보상하여 상호 균형을 이루게 한다.
회의 말미에 모택동은 "우리들의 출병하여 참전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의 이웃 우방 국가이며 중국 인민으로서는 미국이 자행하는 일들을 모르는체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순망치한 호파당위"입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참전하여야 하며 반드시 참전하여야 합니다. 참전하게 되면 그로써 발생되는 이익은 대단히 크며 참전하지 않으면 그로써 발생되는 손해는 엄청납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어려움과 위험에 직면하더라도 우리는 참전해야 합니다. 그것도 평양이 적에게 점령하기 전에 긴급히 파병해야 합니다.라고 참전 필요성을 역설한다.
동 회의의 폐막연설에서 모택동은 "조선을 중국의 문턱으로 간주한다고 말하고 과거 일본이 조선 강점후 조선을 중국 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하였음을 언급하면서 중국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야기할 미국의 조선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소련에 대해서는 "소련은 조선의 사태에 개입할 당위성이 없다고 본다고 말하고 중국과 소련 간에는 우호 및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어 있으며 양국간의 관계는 긴밀하다"라고 언급하였다. 특히 그는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경우 소련은 조약상 중국에 ㄷ대한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후 모택동은 주은래, 고강, 팽덕회를 별도로 불러 10월 15일 까지는 조선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항미원조 , 보가위국"의 중대한 전략결정이라는 것이다.
중앙군사위원회는 한반도에서 미군의 섬멸을 위한 수행방안으로, 병력운용면에서는 먼저 동북변방군 4개 군(군단규모) 12개 사단이 참전한 후에 7개 군(24개 사단을 재2, 제3차로 축차 투입하기로 결정란다. 이렇게 될 경우 사단 수는 국군 및 유엔군의 배가 되는 규모였다.
작전지도면에서는 그들이 입북하여 평양-원산선 이북,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형성한 후 이 선의 북쪽과 덕천-영원선 남부 지구에 2~3개의 방어선을 구축하여 제 1단계에서는 방어전, 제2단계에서는 반격으로 전환하여 미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방어단계에서는 방어선 전방에서 적을 분할하여 소규모 단위로 섬멸하며, 만일 적이 평양-원산선에서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6개월 이내에는 현 방어선을 고수하며 나아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구매한 장비가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그 장비에 대한 훈련이 완료되고 지상과 공중에서 상대에 대한 압도적인 우세한 조건을 갖출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말해 6개월 준비기간을 가진 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중공은 전국방공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국토 방공업무에 박차를 가하여 미국의 공군이 그들의 대도시와 공업기지를 폭굑하는 것을 방호하도록 조치하였다. 또 복건성과 광동성 방면에 4개 군을 배치하여 미국의 해군이나 장개석이 군ㄷ대로부터의 연해지역 공격을 방어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들은 미국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하고, 전선은 길고 후방은 멀며 병력은 부족하고 사기 도한 높지 않다고 보고, 원자 무기는 혽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전쟁 승부를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모택동은 당시 핵무기에 대해 "원자탄은 대량파과 무기의 하나이지만 전쟁의결과는 인민에 의해 결정되지 한두 개의 새로운 무기에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시각으로 평가 절하하고 있엇다.
7. " 항미원조" 중공군의 편성과 출병준비
가. 동북변방군, "인민지원군"으로 개편, 10월 8일 출병결정 사실을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
모택동은 중공군의 파병을 추인하고 명분을 세운 다음, 10월 8일에 중국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장 이름으로 그동안 출전태세를 갖추어 온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이란 이름으로 개편하고 한반도로의 진입 명령을 하달하였다.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한 것은 중공정부가 정식으로 파견하는 군대가 아니라 인민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조직된 군이라는 의미를부여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와 같은 파병결정에 따라 지원군 편성 및 출병 명령을 하달한 모택동은 같은 날 10월 8일 스탈린에게 이 사실을 통보함과 아울러 출병에 따른 소련의 지원을 보장받기 위해 주은래를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급파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전문을 보내어 파병을 통보하고, 김일성으로 하여금 내무상 박일우를 심양으로 파견하여 팽덕회와 고강과 만나 입북에 관련되는 작전을 협의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고1주간의 자체 논의를 거쳐 지원군의 파병결정을 정식통보 하였다.
나. 인민지원군(중공군)의 출병준비
10월 12일에 북한의 내무상 박일우가 안동으로 건너와 입북작전을 협의하였다. 박일우를 통해 상황을 ㅈ청취한 팽덕회는 평양-원산선 이북의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장악한다는 목표를 두고, 입북 후 부대가 전개할 최초 배치선을 결정하였다. 즉 1개 군은 평양 동북 100KM 덕천산악지대로 전진하고, 남지 3개 군과 3개 포병사단은 희천. 강계지역으로 전개하여 국군과 미군의 더 이상 전진을 못하도록 게획하엿다.
그러나 모택도은 10월 12일 모든 부대에 작전을 중지하고 현위칭에서 대기 명령을 내린다. 이는 중공군의 출병을 앞두고 열린 중.소 간의 막판협상이 난항에 봉착한 데기인된 것으로서, 이에 따라 지원군의 출병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북한은 더욱 초조하게 되엇다.
8. 중.소의 최후담판과 출병 재확인
가. 주은래와 스탈린의 최종담판 " 지금은 엄호하기 곤란함"
모택동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10월 8일 비밀리에 주은래를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10월 10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주은래는 요양차 소련에 온 임표와 함께 흑해의 별장에서 휴양중인 스탈린을 방문하여 다음날 05:00시까지 회담을 가졌다. 주은래는 신생 중공이 대내적으로 여러 장애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출병하기로 확정하였음을 통보하고 군사웑와 공군지원을 요망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소련이 북한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다시 출병한다는 것은 미국과의 입자을 고려시 어렵다고 설명하고, 대신 중공이 출병하되 소련이 충분한 전쟁 물자를 공급해 주고, 공군은 출동하되 동북지역과 부경, 천진, 상해 등 해안지역을 방호하고 북한지역 압록강 연안에 전개하는 중공군을 엄호하겠다고 약속을 햇다.
여기서 촛점은 소련 공군의 한국전 참전여부와 그 시기 문제에 집중되었다. 스탈린은 "소련 공군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므로적어도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작전하는 중공군을 엄호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에 크게 실망한 주은래는 이것은 중공인민지원군의 사기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임으 고려하여 , 종공군이 압록강을 넘기전에 반드시 소련의 지원확답을 얻기 위한 계책으로 ,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으면 중공군의 출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강수를 스기도 하지만 이 회담에서 공군지원 문제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중공측에서 볼 때 이러한 스탈린의자세는 8개월 전('50.2월) 전에 체겷란 중소렵정상 소련의 약속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되엇다. 동 협정에는 중공이 제국주의 국가들과 군사적 대결 상황으로 돌아가면 소련은 모든 지원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스탈린의 결정은 실제의 위기에서 중공지도자들에게 일종의 배반으로 비추어졌다. 이 결정적인 믹판 회담ㅇ에서 중공으로서 기장 중요시한 공군지원 문젱에 대하여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나. 모택동의 출병결정 재확인
모택동과 중공군 지도부는 모스크바에서 타전된 10월 12일자 주은래-스탈린의 전문을 받고 격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이날 저녁에 우선 팽덕회에게 지원군의 이동 중지명령을 하달한 다믐, 지도자들과 소련 공군의 지원 없이 출병여부를 토의하기로 한다.
지난 10월 초 모택동과 지도부는 소련으로부터 충분한 공군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고 그후 출병준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13일, 북경의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팽덕회는 소련이 공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가 치솟아 지원군 사령관직을 사임하겠다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모택도은 전쟁초기 단게에서 참전하지는 않지만 스탈린이 중국군에대한 많은 양의 장비보급은 물론 중국 영토의 공중방아를 약속하였다고 강조한다.
찬반 양론을 거쳐 결국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중국은 조선에 출병하여 미국과 사워야 할 입장에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팽덕회는 군단장들에게 출병준비를 가속화 하도록 긴급전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모택동은 모스크바에 잔류하고 있는 주은래에게 참전결정을 통보하는 전문을 보낸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잔류하여 여러 현안으로 남아 있는 다른 미결사항을 매듭짓도록 지시하였다.
모는 소련으로부터 제공받는 군사장비의 상환조건을 차관으로 하느냐 구매로 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차관을 원하였고, 참전초기에 소련 공군이 참여는 못하지만 해안지역 방어문제와 차후 언제 중공군이 소련 공군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확실히 할 것을 원하였다.
결국 이문제는 중공으로서는 아시아의 공산화 목표달성, 자신들의 혁명의 완수에 도움이 되고 안보적 이익과 일치한다는 판단에서 출병이 내려졌다.
다. 최종 장애의 극복과 중공군의 출병
10월 13일, 출병 재확인 결정에 따라 지원군의 투입준비는 가속화 되었고, 모스크바에서의 주은래 활동도 더욱 분주해졌다. 주은래는 스탈ㄹ린에게 모택동의 요망사항에 대한 협조를 구하였다. 스탈린은 중공정부의 결정에 "중국 동지들은 위대하오"라고 감동을 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공군의 지원요청에 대해서는 중공군지원이 작전을 시작할 시 한반도에서의 운용은 할 수 없다고 게속 거부하였고, 중국 영토의 방호는 책임을 지겠으며, 후에 한국전쟁에 투입하겠다고 확인하였으나 이 시기에 대해서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이 무렵(10월 14일) 모택동과 팽덕회는 공군의 엄호없이 참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미군이 공중우세를 이용하여 압록강 교량을 파괴하고 신속히 진격해 온다면 당초계획과 도하작전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판단하여 작전계획을 수정을 한다.
[모택동의 지시 : 한국군 사단 2~3개를 격파하라. 출병은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라]
따라서 축차 투입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4개군을 동시에 압록강 남쪽으로 도하시키기로 하고 모택동에게 승인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어낸다. 그리고 모택동은 전장에서 최초 접촉시 유엔군, 특히 한국군에 대한 승리를 통해 주도권을 획득하도록 희망하였다. 그는 "1~2개 도는 2~3개 한국군사단을 완전히 격파한다면 전세가 대단히 호전ㄷ될 것이다'며 최초 전투에서 한국군을 공격대상으로 삼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날 (10월 14일) 지원군에 10월 19일을 기하여 압록강을 건너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당초 계획보다 4일을 늦춘 것이다. 동시에 산둥반도에 위치한 전략예비인 제3야전군 소속 제19병단(제20.제26. 제27군)도 철로로 이용하여 북동지역으로 게속 이동하라고 지시하였다.
모택동은 10월 15일 유엔군 주력이 북진이 가속화 되고 평양 탈취를 준비 중이라는 보고를 접하고 북경에서 심양으로 복귀 중인 팽덕회에게 선발대를 17일 중으로출발시키고 23일까지 덕천에 도착하여 25일까지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라고 전문지시 하였다.
10월 16일 제432군의 1개 연대가 선발대로서 압록가응ㄹ 도하하여 입북하였다. 그리고 정치국은 최종적으로 지우너구느이 압록강 도하 마감시한을 10월 19일 저녁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초기단계에서는 중공군이 북한인민군의 복장을 착용하도록 명령하고 출발전 병사들이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엄격한 보안조치를 취한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던 날 중공군 본대 12개 사단이 압록강을 건넜다]
마침내 10월 19일 저녁 날이 어두워지자 중공군 대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들 4개군의 도하에 이어, 추가로 제13병단 편성된 제50군과 제66군이 1월 26일에 압록강을 도하함으로써 10월 말까지 중공군 6개군 18개 사단이 한반도에 진입하였다.
모택동은 "순망치한. 호파당위' 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참전을 결정하여 중공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켰다.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 국군.유엔군의 위기
1.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중공군의 최초 배치
집안 만포
압 중42군
강계 장진
중50군 초산 중38군
록
벽동 부전호
구장 중38군 유담리 장진호 중42-136사
40군 전선사령부 국6-7연 중42-125사 부전령
장전하구 삭주 대유동 회목동 소백산 중42-124사
황초령 수도-18연
중 66군 강 중 40군 희천
안동 중39군 북진 온정리 국6-2연 사창리
신의주 구성 운산 국1사 묘향산
태천 국8사 국3-26연
구장동 영원 함흥
청천강 덕천
정주 박천 군우리 맹산
서해 신안주 미24사 북창
가.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중공은 본대의 도하에 앞서 10월 12~16일사이에 정찰대와 선발대를 먼저 도하시켜 주력부대의 도하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중공군의 본대는 안동에서 신의주, 장전하구에서 삭주, 그리고 집안에서 만포진으로 통하는 3개의 통로를 사용하여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지원군이란 미명하에 최초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입한 중공군은 제13병단 예하 제38, 제39, 제40. 제42군의 4개굱 12개 사단과 이들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포병 제1, 제2, 제8사단, 1개 고사포연대, 1개 공병연대, 기타 지원부대로 그 병력은 총 약 26만명에 달하였다.
안동에서 도강한 제40군은 구장. 덕천. 영원으로, 안동과 장전하구에서 도강한 제39군은 구성. 태천으로, 집안에서 도강한 제42군은 사창리. 오로리로, 그리고 제42군을 후속하여 도하한 제38군은 강계를 목표로 각각 이동 개시하였다. 이때 제4, 제6공병대대는 집안,임강, 그리고 삭주와 창성 사이에서 교량건설과 도로를 보수하여 주력 부대의 도하를 지원하였다.
이들은 유엔 항공기의 관측과 폭격을 피해 밤이면 산골바람이 세차게 부는 좁은 도로를 따라 차량을 앞세우고 이동하였다. 이때 차량들은 등화관제를 위해 라이트를 켜지 않았고, 병력은 탄약과 식량을 짊어지고 행군함으로서 전진 속도가 매우 느렸다.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20일 신의주에서 대유동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지원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원래 금광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그는 김일성을 면담하였다.
나. 중공군의 전략과 전개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할 대 평양에서 북진을 실시한 국군 과 유엔군의 진출속독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라, 서부전선에서는 그들이 예상집결지인 구장, 덕천, 영원에서 90~130,km 떨어져 있었고, 동부전선에서는 국군이 이미 그들의 예상 집결지인 오로리로 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예상했던 집결지로 국군및 유엔군보다 먼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에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한 중공군 지도부는국군과 유엔군이 그드르이 참전사실을 모르고 분산된 채 전진함으로서 국군 3개사단의 전선이 돌출되었고, 또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 사이에 배치된 공간이 생긴 취약점을 간파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그들은 기습공격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였다.
[모택동의 작전방침 변경 : 기동하면서 각개격파하라 ]
모택동은 21일 예상 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 방침을 변경하여 진격해 오는 국군 과유엔군을 기동하면서 가개 격파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참전 후 첫 작전인 이번 공세에서 국구 ㄴ3~4개 사단을 섬멸하여 한반도의 전국을 전환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팽덕회는 3개 군을 서부전선에 집중시켜 국군 3개 사단을 섬멸시킬 것을 결심하고 부대배치를 조정하였다. 즉 제39군은 구성, 태천으로, 제38군을 희천으로, 제40군을 덕천. 영원으로 진출하여 조우하는 국군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42군의1개 사단은 장진호로 진출하여 진격하는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저지하도록 하고 주력은 소백산을 점령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양단한 후 의명 맹산 이남으로 진출하도록 한다.
이 무렵(24일) 국군 제1사단의 선두는 영변, 용산동에 제6사단은 초산. 온정리로, 제8사단은 영원 및 덕천을 경유 희천 강계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혀 중공군의 진출을 예상하지 못한 채로 한만국경선을 향하여 진출하고 있었다.
다. 유엔군의 오판과 위험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은 시시를 놓쳐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11월 23일)가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은 맥아더 사령관과 미 트루먼 대통령의 웨이크 섬 회담(10.15일)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주 의제는 중공군의개입 가능성이었다. 미 대통령의 개입가능성 질문에 맥아더는 주저없이 대답한다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일 그들이 지난 6~7월에 개입하였더라면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으나 현 상황에서는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공은 만주에 30만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아마 10만~12만 5천 명이 압록강에 연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 또한 그들 가운에 5~6만명이 압록강을 건널 수 있게 되 ㄹ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하면 우리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육전을 펼칠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당시 미국은 중공군 24개 사단이 압록강 근처에 집결해 있고, 기타 14개 사단이 만주의 다른 지역에 위치한 것도 확인하고 있던 대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들 주력이 참전하리라고는 판단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서 미 트루먼 대통려은 맥아더로부터 전쟁은 곧 종결될 것이라는 것과 ,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는 확언을 들었다.
2. 새로운 적과의 충동
가.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50. 10. 24)
[칠면조 고기는 일본 동경에서 , 그리고 번화가에서 일본여성을 만나야지~~~]
'50. 10월 하순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호나한 유엔군 수뇌부는 마치 전쟁이 곧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엇다. 따라서 한국에 있는 미 제2사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계획을 준비하고, 10월 24일에는 육균성에서는 10월과 11월에 보낼 보충병을 취소하겠다고 극동군사령부에 동보하였다. 또 워커는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으로 반입될 모든 탄약을 일본 보급창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10월 24일 , 제8군사령관 워커와 제10군단장 알몬드에게 명령을 내려 최대한의 속도로 진격하라고 명려한다.지난 17일의 진출한계선을 철폐한 조치였다.
나. 운산의 혼미(국군 제1사단, 미 제1기병사단) : '50.10.25~11.4
운산지구 전투('50.10.25~11.4)
중40군 중116사
삼탄천 263
199
중115사 국15연
조양동
미8기병 구룡강
운산
165 199
남면천 상초동 254 국11연
오봉산 중117사
593
하초동 입석 국1-12연
미 제1군단의 우전방 사단인 국군 제1사단(신임 사단장 최영희 준장 부임)은 10월 23-24일 안주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한 후 25일 운산에 도착하였다. 좌인접 영 제27여단도 박천부근으로 진출했다. 우인접 국군 제6사단도 희천을 경유 벽동.초산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0월 25일 10:30분, 국군 제1사단은 운산에서 수풍호로 진출할 목적으로 좌전방에 제12연대, 우전방에 제15연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선두인 미 지원전차가 삼탄천을 건너려할 때 박격포와 야포 등으로 강력한 포격이 가해져 진격이 정지된다.
[제2군단장에서 다시 복귀한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 생포된 포로 심문결과 한국전쟁 최초로 중공군 판명]
국군 제1-15연대 제3중대에서 포로 1명을 획득항여 제2군단으로 갔다가 다시복귀한 백선엽 사단장이 직접 심문결과 중국군으로 판명되며, 이들은 운산 북방에 10,000명, 희천 부근에 10,000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진술한다.
[국군 제1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수송기 이용한 연료와 탄약 공중 투하]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미 제8군전방지휘소(평양위치)는 중공 거주 한인의 의용군으로 의심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국군 제1사단 주력은 중공군의 포위망 송에 갇히게 되고, 미 제8군은 사다을 구학기 위해 27일 C-119소송기 10대로 운산에 연료와 탄약을 공중투하하였다.
그리고 미 제8군은 진격작전을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기 위해 평양에 대기중인 미 제1기병사단에게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수풍호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국군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이 이동하는 기간인 29~30일까지 탄막가셕과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이 구축한 진지를 공격하였으나 적 진지 돌파에 실패한다. 이 시기에 미 제8기병연대가 운산에 진출하여 미 제8군은 국군 제1사단은 온정리를 경유하여 초산방뱡으로 , 미제1기병은 삭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인해 좌전방 제1-12연대와 미 제1기-8연대가 31일 오전 진지교대를 실시하자,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중공군은 이 당시에 여러 곳에 산불을 질러 그 연기로 유엔공군의 항공관측을 차장한다. 결국 11월 1일 제12연대는 입석으로 빠지고 운산을 중심으로 미 제8기병연대가 좌측에, 우측은 국1-15연대가 조양동. 부흥동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국군 제1사단의 우인접에서 온정리, 희천을 공격한 국군 제2군단이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였고, 좌인접의 미제24사단도 25KM나 간격이 벌어져 사단은 돌출되어 있었다.
[11워 1일, 반격작전 이후 최초로 내려진 방어 명령 : 청천강 교도보를 방어하라]
11월 1일 인접 국군 제2군단의 철수상황을 확인하고 돌아온 미 제1군단장이 진격작전을 중지하고 즉각 방어태세로 전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방어선은 청천강 북쪽의 박천-용산동-영변-운흥리선으로 결정하고, 전방 부대들은 이 지역으로 철수하여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 하도록 지시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 우측 제1-15연대가 중공군의 강력한 집중공격으로 돌파되면서 와해되어 버렸다. 각자 흩어져 탈출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 좌측의 미제8기병지역의 운산-용산동 도로를 중공군이 차단하면서 적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제8기병을 구출하기 위해 들어온 제5기병연대의 공격도 적의 저항으로 돈좌되어 버렸다.
결국 11월 2일 미 제1사단장 게이소장은 구출작전을 포기하고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11월 4일가지 미 제8-3대대는 적과 치열한 혈전을 벌렸으며 결국 대대 주력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다.
당시 미국 언론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8기병연대가 전멸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53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제15연대가 피해가 컸다.
다. 온정리-희천 돌출부의 재앙
온정리-초산 전투
압
신도장 '50.10.26 14:15
초산
록
강 고장 국6-7연 개천으로 10.29 밤
판허동 중125시
회목동
중40군 중38군
동림산 경성령
1165 국7-3대
북진
양수동 희천
국6-2연 국6-19연 국8-16연(10.28)
도리산 841 온정리
중39군
태평동
국군 제2군단은 평양 탈환작전을 미 제1군단에 넘겨준 대신 미 제8군의 선봉이 되어 제일 먼저 청천강을 도하한 후 희천을 향해 진격했다. 좌인접의 미제1군단이 청천강을 도하할 무렵인 23일 군단의 좌전빙 제6사단 제7연대다 희천에, 우전방 제8사단은 험준한 산악지대라 다소 지체되었지만 제16연대가 개천에 , 제10연대는 맹산에서 영원으로 진출하고 있엇다ㅣ.
이날 한만국경선으로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24이 공격으 개시하여 좌전방 제6사단은 초산과ㅑ 벽동을, 우전방 제8사다는 만포진과 중강진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국군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2연대를 자작에서 온정리를 경유 벽동으로, 우전방 제7연대를 희천에서 극성령을 넘어 초산으로 진격토록 명령한다.
[국6-7연대 국군 최초로 압록강 초산 점령 :10.26]
공격을 개시한 제7연대는 26일에 초산을 점령하여 아군 부대중 국경선에 제1착으로 도착하는 영광을 누렸다.
[10.25일, 온정리 북방 도리산.동림산 자략에서 제2연대 공격 돈좌, 제3대대 350여 명 손실, 400명만 빠져나옴]
그러나 온정리-벽동으로 진출하는 제2연대는 감제고지인 도리산(841)과 동림산(1165)으로부터 뻗어내린 능선ㅇ에 무수한 매복진지를 구축한 중공군에 기습을 받아 선두인 제3대대는 700명중에 살아온 병력이 400명에 불과했다. 배속된 105밀리 야포와 대전차포는물론 차량까지도 모두 유기한 채로 빠져나와야 했다.
10월 25일 생포된 포로가, 중공군 10,000여 명이 매복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에 사단장은 초산으로 진출한 제7연대의 퇴로 차단에 대비하여 예비인 제19-1대대를 회목동으로 진출시켜 기동로를 확보토록 하였다.
[10.26~29일, 중공군의 2개사단 : 인해전술로 국6-2연대 공격으로 와해!]
※국6-2연대 병력이 400명에 불과 전투력 상실
※ 국6-19(-), 국8-10연 온정리 투입 실패
10월 26일, 중공군 제40군은 03:30분에 온정리일대에 대대적인 공격을 재개하였다. 중공군은 2개 사단규모가 투입되어 인해전술을 구사하여 제7사단 2연대는 공포에 사로자혀 대응방법을 잃고 분산철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이 퇴로마저 차단하여 온정리 동쪽 5KM지점인 구두령에서 일부 병력이 수습되었지만 제2연대는 와해되었다.
이에 제6사단장은 26일 아침 희천에 대기 중인 제19연대(-)를 온정라로 급파하여 제2연대를 구출하도록 조치하는 한편, 초산으로 진출한 제7연대의 철수토록 한다.
제2군단장은 희천으로 진출하던 제8사단 제10연대를 온정리로 진출시켜 제2연대를 구출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 무렵 제2연대는 각개분산하여 탈출하게 되며 중공군에 포로가 되거나 전사 또는 부상당한 병력이 1,000명에 달하였다. 태평동에서 병력수습 결과 400여 명에 불과하여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
온정라에 제2연대를 구출하러 들어간 제19연대(-)와 제8-10연대 또한 29일까지 격전을 하였으나 3배의 중공군 인해전술에 압도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라. 초산 철수작전 ※ 제6-7연대 첨병소대 '50.10.26일 14:15분에 압록강변에 태극기 꽂다
※ 제6-7연대 11월6일 사선을 넘어 개천으로 집결한 병력은 총 3,552명(대대장 1명 포함) 가운데 875명에 불과
제6-7연대 첨병소대가 '50.10.26일 14:15분에 압록강변에 태극기 꽂았다. 9월 16일 낙동강전선의 신령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 만이다. 그러나 도착 하루 만에 27일 정오 무렵 회목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온정리에서 제2연대가 무력화 되면서 퇴로가 차단되어 28일 공중투하로 휘발유와 탄약을 지원받았다. 제7연대는 29일 07:00시에 차량행군 대형으로 철수를 개시, 연대가 고장을 출발한지 얼마안되어 위험한 상황에 들었다는 전문을 받고 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측방경계를 강화하면서 철수를 개시한다. 그러나 이미 퇴로가 차단되어 결국 중공구늬 함저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량도 버리고 전투장비도 버리고 각자 탈출을 하게 된다.
제6-7연대는 11월6일 사선을 넘어 개천으로 집결한 병력은 총 3,552명(대대장 1명 포함) 가운데 875명에 불과했다.
마. 청천강 교두보 작전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좌절되고, 오히려 국군 제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었으며, 미 제1군단의 운산지역도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11월 2일, 미 제8군은 청천강 및 대령강의 교량과 전차도하지점을 포함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로 작전방침을 결정하였다.
서부에서는 미 제24사단과 영연방 제27여단을 신속히 철수시켜 청천강 북안에 교두보 진지를 편성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군우리 지역에는 국군 제7사단과 미 제24사단 예하 제5연대전투단을 배치하여 동측방을 방호하도록 조치한다.
(1) 청천강 교두보 구축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과 미제1기병사단이 운산 지역에서 작전 중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정거동에서 철수한 미 제24-21연대는 안주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엇고, 또 구성에서 철수한 미 제5연대전투단은 국군 제7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개천으로 이동하는 등 가용병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영연방 제27여단과 미 제19연대병력만으로 박천지역과 반송촌 지역에 교두보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한편 군우리 북족을 맡은 국군 제2군단은 은정리 전투에서 실패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 제10연대가 재편성 중에 있엇고,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 일대에서 군단의 동측방을 엄호하고 있었다.
(2) 비호산 전투(11.3~6)
청천강 교두보 전투('50.11.3~11.6)
태천 온정리 희천
구장동
중38-113사
용산동 영변 청천강
대령강 중40-120사 천불산 고사동
중39-116사 천등산 구룡강 봉천리
원리 998
풍동 국7-3연 덕천
미24-19-1대 비호산 760
국7-5연
반송촌 구운리 미5연대
박천 검각산 신림
영27여 봉명리
검각산 미24-19-3대
청천강
명중리 연풍저수지 용혀리 국7-8연
안주
신안주
당시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운산일대에서 작전을 하고 있을 때, 군단 예비로써 영변일대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 제2군단 상황이 악화되어 10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어 군우리로 이동하였다. 당시 제2군단이 가용한 부대는 제8-16연대, 21연대 뿐이었다.
국군 제2군단장은 제7사단에 구장동-덕천 간의 저지진지를 점령하여 군단의 동측방을 방호하라고 명령하였다.
11월 1일 사단은 좌전방에 제3연대로 구장동 북쪽 백령천을, 중앙의 제8연대는 용문산(1190)을, 우전방 제5연대는 덕천을 목표로 3개 연대 병진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야간기습으로 제3연대는 영변으로, 제8연대는 원리로 철수하였다. 잉에 군단장은 11월 2일 구장동-덕천 지역 점려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우리 북쪽의 비호산(622)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 명령한다.
이렇게하여 국군 제7사단 제3연대는 바호산 일대에, 우전방 제5연대는 비호산 동족 760고지 일대에서 미 제24사단 제5연대전투단과 연결하였다..
11월 3~4일 03:00시경에 중공군 1개 사단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여, 유무선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3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투속에서 고지를 확보하며, 4일에 예비인 제8연대에 인계한다.
11월 5~6일 중공군 제38군은 우전방 제5연대를 공격하고, 이어서 제8연대를 공격하여 비호산 정상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사단장은 다시 제3연대를 투입하여 비호산을 3개 연대가 포위공격하여 탈취하였다.
바. 교두보선 전투(11.4~8) ※ 미 제24-19연대 :중공군 600여 구 사살
※ 미 제61포병 C포대를 기습하지만 포병이 보병전투로 전환하여 중공군 71명을 사살 ※ 11월 8일, 맥아더 원수 압록강 교량을 폭파 명령 , B-29 79대를 출격
교도보선으로 이동한 국군과 유엔군이 신진지를 강화하는 동안 중공군 제38군이 11월 3일 비호삱 국군 제7사단의 비호산을 공격하고, 다음날인 4일에는 중공군 40군이 교두보상의 미 제24사단 제19연대를 공격한데 이어 영국군 제27여단을 공격하여 교두보 전투가 시작되었다.
교도보상 진지 쟁탈전에서 미 제24사단은 진지를 최종 확보하게 되며 중공군은 600여 구를 시신을 남기고 물러난다
한편 좌측 영 제27여단도 4일 밤부터 교전이 시작된다. 박천 남족의 추도리에서 화력지원하는 미 제61포병 C포대를 기습하지만 포병이 보병전투로 전환하여 중공군 71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다. 당시 포대는 2명 전사에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야포 1문과 차량 6대가 파손된다.
5일새벽에는 영 제27여단 미들섹스대대를 돌파, 여단은 호주 대대로 역습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이 박천 동측방으로 우회하여 포위하려 한다는 징후에 따라 청천강 북안으로 철수하게 된다.
11월 6일, 맥아더 원수는 미 합참본부로부터 부대의 안전을 위해 압록강 교량을 폭파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고 11월 8일 1차로 B-29 79대를 출격시켜 교량폭파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7~8일 미 제8군은 교도보지역 회복을 위해 미 제24사단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교두보선 회복
3. 동부전선의 불안한 전진
가. 미군과 국군의 전선 조정
낭림산맥 서쪽의 서부전선에서는 미 제8군이 중공군의 10월공세(1차공세)로 진격작전이 돈좌된 가운데 청천강선 교두보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산맥 동쪽의 국군 제1군단(수도사, 제3사)은 적정이 경미하여 큰 전투는 없었다. 이때 제3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 작전을 지원하러 원산.함흥. 흥남 일대의 교두보를 확보 중에 있었고, 수도사단은 24일 내려진 총공세 명령에 따라 동해안 축선과 내륙축선을 따라 한만 국경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당시 미제10군단은 원산 앞바다의 기뢰제거작전으로 상륙이 지연되어 10월 26일에야 미 제1해병사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장진호 방향으로 진격하게 되고 , 미 제7사단은 3일이 늦은 29일에 함흥 위 이원항으로 상륙하여 혜산진으로 진격하게 된다.
나. 장진호 진격전
미 해병 제1사단은 26일 상륙하여, 장진호로 진격할 제7해병이 31일 함흥으로 이동한다. 연대는 11월 2일 장진호로 이어지는 계곡의 입구인 마전리에 도착하여 국군 제3-26연대로부터 진지를 교대하였다.
동부전선 진출전
중강진 백두산 무산 옹기
청진
관모봉 수도사
신갈파진 혜산진 백암 국3-23연
합수 국3-22연 만탑산 어랑천
삼수 재덕
미7-32연 미7-17연
갑산
강계 웅이강 대신리 길주
풍산 국3-23여 수도사(-)
미17연 임명동
부전호 미31연 성진
신흥리
유담리 장진호 수상리 미7사
국수도-18연
하갈우리 이원
북청
소백산 미7해병 수동
사창리 국3-26연 함흥
원산
==================================
하갈우리
고토리역
황초령
중124사
진흥리
문고개 황초령 역
750
보장역
중370연
초방령 장진강 제2발전소 신흥리
중372연
연대봉 698
장진강제3발전소
노초령
오로리
영광
================================================================================
[황초령 입구 750고지의 중요성]
미 제7해병연대는 2일 국3-26연대가 피탈당한 수동을 확보하기 연대봉(698)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끝에 4일 탈환하고, 수동을 경유하여 진흥리로 진출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진흥리와 북쪽 황초령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750고지로 후퇴하였다. 이 고지는 황초령으로 올라가는 첫 길목이며 삼거역부터 갑자기 금경사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S자형 굴곡이 연속된 도로가 바로 밑으로 통과하고 있어 중공군이 점령시 이 고지를 이용하여 전진 중인 부대의 전후방을 차단하게 되면 "병속에 든 물고기"와 다를바 없게 되는 주요지형으로 장진호 진출시 필히 확보해야만 하는 지형지물이었다.
제7기병연대장은 5일부터 연이틀 동안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연대장은 기필코 탈취하기 위해 6일밤에 포병화력으로 초토화시키게 되는데 81MM박격포 포탄만 무려 1,800발을 사격하였다.
11월 7일 아침 750고지를 수색하게되는데 적은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남겨둔 채 도주하였다. 붙잡힌 포로의 진술이 중공군 제124사단 제372연대로 반신불수가 되어 철수명령에 따라 철수했다는 것이다.
해당 지역은 비록 750고지를 점령했다하더라도 고지정상의 문고개와 그 후방 황초령이 장애물이었다. 이에 연대장은 사전 정찰대를 보내 26시간동안 정찰을 실시하고 9일에 복귀하며, 미약한 적정에 따라 진출을 개시하여 고토리에 10일 10:00시에 무혈입성하여 전면바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 미 제10군단자의 신속한 한만국경선 진출 명령에 하갈우링에 다시 정찰대를 파견하여 소수의 적과 접촉하였으나 진지를 구축한 적은 발견하지 못하고 12일 고토리를 출발하여 14일 13:00시에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이때 사단장과 제7연대장은 군단의 독촉에도 불구하고좌측방의 노출과 후방지역의 적 게릴리 활동을고려하여 사단이 후방의 안전대책이 없이 내륙 오지로 깊숙히 진출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진출을 일시 중지하고 압록강변으로 진출에 앞거 예하부대의 집결완료와 진흥리-고토리간 복브로 확보, 그리고 하갈우리에 동계작전을 위한 작전기지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른 조치로 진흥리-고토리간 돌로보수로 전차통행은 물론 원상항에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하갈우링에 수송되었다. 그리고 18일 고토이와 하갈우리에 비행장 건설공사도 착수하였으며, 제5기병연대도 함흥일대를 미 제3사단에 인계하고 북진하여 진흥리-고토리간을 경계하게되었으며, 제1해병연대도 원산지역을 미 제3사단에 인계하고 북진하여 지경리 일대로 집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미 제1해병사단장은 11월 23일 제7기병은 유담리, 제5해병연대는 유담리 북쪽의 몌물리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의 불확실성에 따라 미 제10군단의 임무는 국경선이 아닌 유담링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무평리를 공격하여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의 정면에 배칟된 중공군 후방을 공격하여 미 제8군의 진출을 지원하게 된다.
다. 혜산진 진격전 ※ 11월 21일 10:00에 미 제7-17연대가 혜산진에 도달
미 제7사단도 원산일대의 기뢰 소해작업이 지연되며 부산외항에서 10일 동안 대기하다 27일 이동을 개시하여 미 해병사단보다 3일 늦은 29일 저긔 저항없이 이원항에 상류하였다.
미 제7사단장은 미 제17연대는 북청-풍산-헤산진으로, 제31연대는 북청-함흥-오노리-신흥축선을 따라 부전호-신갈파진으로 진격하고, 제32연대는 예비로 후방경계에 임하도록 하였다.
동부전선 진출전
중강진 백두산 무산 옹기
청진
관모봉 수도사
신갈파진 혜산진 백암 국3-23연
합수 국3-22연 만탑산 어랑천
삼수 재덕
미7-32연 미7-17연
갑산
강계 웅이강 대신리 길주
풍산 국3-23여 수도사(-)
미17연 임명동
부전호 미31연 성진
신흥리
유담리 장진호 수상리 미7사
국수도-18연
하갈우리 이원
북청
소백산 미7해병 수동
사창리 국3-26연 함흥
원산
미 제7-17연대는 10월 30일 1335M의 후치령을 넘어 풍산에 도착한다. 이때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가 풍산 북쪽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미 양군이 합동으로 적을 제압하고 국군 제1연대는 동해안 성진으로 이동한다.
미 제7-31연대는 11월 3일 상륙완료하여 이원-풍산 도로를 거쳐 부전호 방면으로 이동하여 수도사단 제18연대와 교대하고, 미 제32연대는 11월 4일 상륙하여 함흥으로 이동하여 수도사단 지역을 인수받는다.
미 제17연대가 웅이강을 도하할 때, 북한군이 댐을 개방항여 수심이 60CM 올라서면서 부상자와 익사자가 발생한다. 연대는 계속 진격하여 21일 10:00에 혜산진에 도달하여 국군 제6-7연대의 초산점령에 이어 두 번재로 국경에 도달한 부대가 되었다. 제32연대가 이어서 22일 신갈파진을 점령한다.
라. 청진 진격전 ※수도사단이 11월 25일 점령
서부전선 미 제8군이 추수감사절 공세를 시작할 무렵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인 수도사단의 제18연대가 부전호를, 제1연대는 풍산을 , 제1기갑연대는 북청-단천-성진으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선두인 제1기갑연대가 10월 30일 성진을 점령하고 길주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에 북한군 제41사단 및 제507여단 등이 길주.명천.어랑천 일대에서 축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제1연대가 풍산에서 복귀하자, 제1기갑연대는 주공으로 성진-길주 도로를 다라 정면에서, 제1연대는 조공으로 동해안 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적 후방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1월 3~7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적의 저항이 거세어 제1연대가 7일에 명천을 확보한다. 이어서 제18연대는 풍산지역을 미 제7사단에게 넘기고 7일 열차편으로 명천에 도착한다. 제18연대는 8일 주공으로 어랑천 공격에 들어갔다.
11월 10~12일 수도사 제18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병형 소령)는 어랑천 도하를 도하를 감행하여 대안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적이 증원부대를 투입하여 어랑천 북안 용강동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12일은 적 6~7개 대대가 역공을 개시하여 돌파하지 못하였다.
11월 19~25일 이렇게 되자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군단 후방을 엄호 중인 제3사단을 서북방 합수로 투입하고, 합수의 제1기갑연대를 동해안으로 돌려서 19일 3개 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어랑천 일대를 탈취하고 24일에는 나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25일에는 청진을 점령한다.
마. 합수.백암 진격 ※ 제3사단이 11.22일 합수를 탈환하고, 25일에는 백암을 무혈입성
국군 제3사단은 미 제1해병사단의 원산상륙을 지원하고, 작전지역을 미해병사다네 인계하고, 11월 5일 흥원.신포. 북청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2군단의 주력부대인 수도사단이 성진에서 길주로 진격하자, 11월 13일 다시 성진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어랑천 공격에서 수도사단이 돈좌되자 군단장은 16일 제3사단장(이종찬 대령)에게 합수 공격을 명한다 . 이 당시에 제3-26연대는 장진호를 공격하는 미 제7해병연대의 좌측방 엄호를 위해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11.9일부)
사단이 공격할 길주-합수-혜산진 축선은 마천령산맥을 종주하는 통로로서,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가 길주에서 피해를 입고 후퇴ㅐ하는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당시 합수에는 철수중인 적 1,000여 명과 백암에도 신편한 노동여단 병력 약 4,500명이 집결 중에 있었다.
11월 21~25일 제3사단은 21일 10: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22일 합수를 탈환하고, 25일에는 백암을 무혈입성하였다.
4. 후방지역 평정 작전
가. 북한군의 제2전선 형성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탈환작전으로 퇴로거차단된 북한군 주력은 38도선 북쪼긍로 후퇴를 못하고 남한지역에서 지휘체계가 마비된 채 산악지역에 잠입하거나 태백산맥을 따라 부분적으로 월북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빠른 진격에 퇴로를 잃은 북한군은 주로 평강. 철원. 김화지역에 비교적 많은 병력이 집결하게 되는데 , 약 10,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북한군은 이들을 재편성하여 3개 사단으로 나누고 북한군 제2군단에 배속하고 이 군단으로 하여금 비정규전을 전개하게 한다
나. 수복지역 평정작전
(1) 서부지역 평정작전 ※ 미 제25사단 제24연대 1개 중대가 연천에 출동했다가 38명이 전사한다.
※ 국군 제17연대는 11월 10일 철원으로 이동하는데 적 유격대가 포위 공격하여, 이 전투는 13일까지 계속되어 11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한다. 반면 적 141명을 사살하고 20명을 생포
미 제8군은 중공군의 개입이 확인되자, 군 에비로 대전부근에서 공비토벌과 후방지역 경계를 맡고 있던 미 제9군단(배속 : 제2. 제25사)을 청천강 전선에 투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평양 남쪽의 후바에서 적 유격대의 활동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자 사단은 북진을 잠시 보류하고 소탕작전을 하게 된다.
당시 이천. 평강 일대에 거점을 둔 적은 예성강과 임진강 유역까지 침투하여 복브로 기습 및 차단을 획책하였다.
10월 28일 이천의 국군 야전병원을 기습하여 부상자를 학살하고 도주하고,
11월 2일에는 평강 북쪽 16KM지점에서 1,000명의 적이 보급열차를 기습하게 되고 국군 제17연대 200명이 적을 추격하여 40명 사살하고 23명 포로로 하였다.
11월 9일에는 북한군 제4사단 제18연대 1,400명이 철원에서 한국 경찰대 800명을 습격하였고, 동사단 제5연대 소속 500명이 연천에 출몰하여 미 제25사단 제24연대 1개 중대가 출동했다가 38명이 전사한다.
이와 같이 중부 내륙지역에서 적 유격활동이 활발하자, 미 제8군은 미 제25사단에 국군 제17연대와 터키여단을 배속시켜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미 제25사단 제27연대는 이천, 시변리 지역에서, 제24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터키여단은 금천 남쪽에서 소탕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국군 제17연대는 11월 10일 철원으로 이동하는데 적 유격대가 포위 공격하여, 이 전투는 13일까지 계속되어 11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한다. 반면 적 141명을 사살하고 20명을 생포했다
계속된 소탕작전에 적들이 내륙으로 잠입한다. 이에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은 11월 24일부로 청천강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군우리로 이동한다. 국군 제17연대는 사단 주력이 있는 가평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38도선 부근에서는 기평.춘천.화천 일대에서 북으로 보귀하던 패잔병들이 10월 22일 화천저수지를 경비하던 국군과 경찰 60명을 습격한 후 수문을 개방하여 213일에는 북한강 수심이 1.2M나 증가하여 발전소가 심하게 파괴된다. 11월 중에 화천발전소 부근에 국군 제1. 제2. 제3. 제5. 제7유격대대가 투입디며 당시 포로의 진술이 북한군 제10사단 소속이라 진술하였다.
결국 육군은 이 적을 소탕하기 위해 신편된 제2사단 제31연대를 가평에, 제5사단을 춘천 일대로 재배치하게 된다.
(2) 동부지역 평정작전 : ※ 원산 이남 마전리와 동양리, 함흥 서북쪽 사창리 흑수리 일대에서 격전
※ 11.24일, 국3-26연대가 함흥 서북쪽 사창리에서 중공군 포로 26명 생포
언산을 탈환한 국군 제3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원산 상륙을 위해 항만 및 비행장, 그리고 주요 병참선인 동해안 도로와 평원선 도로를 경비하였다. 동시ㅐ에 부강중인 패잔병 소탕작전도 전개하였다.
당시 귀순한 북한군 연대장이 태백산맥 일대에 약 4,000명의 제3. 제4. 제5사단의 북한군 패잔병이 삼척 남서쪽에서 홣동 중이라 진술하였다. 이들 중 선두가 통천과 고저로 북상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하게 된다. 또한 체포된 포로의 진술이 북한군 제15사단장 박성철 소장이 패잔병 1만 명을 원산 남쪽 마전리 일대에서 수습하였다고 진술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26일 원산에 상륙하여 국군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패잔병 소탕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먼저 상륙한 미 제1해병연대가 고저와 평양-원산간 도로, 철원-원산 도로가 교차하는 마전리 일대에서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마전리 북쪽 두류산 일대에서 15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미 제10군단장은 미 해병사단의 장진호 진출을 위해 미 제1해병연대는 함흥으로 이동하고 미 제3사단이 마전리 해병진지를 인수하며, 이때 미 제3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3대대가 11월 14일 적의 차단선을 돌파하고 마전리-양덕 간 도로의 중간지점인 동양리로 진출하였다. 이후 적은 11월 하순 중공군 제2차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동양리와 마전리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되며, 미 제3-15연대와ㅑ 국군 해병이 협조된 공격으로 마전리를 방어하였다.
한편 함흥 서북쪽 낭림산맥에서도 후방침투를 기도하는 유격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미 제3사단 제65연대는 백산(1724) 일대에서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이 고지의 동쪽 국군 제3사단 제26연대와 연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이 험준한 지형은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으로 패잔병 2,500여 명이 유격거점을 구축하고 준동하였다.
미 제3사단장 소울 소장은 백산일대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전투지경선을 조정할 것을 요청하고, 국군 제3-26연대가 사창리와 흑수리 일대를 점령하게 되고 11월 24일 사창리 부근에서 중공군 26명을 생포한다.
다.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 : 38선 이남에 약 15,000명의 패잔병과 지방공비등이 준동
(1) 호남지녁 공비토벌 작전
11월 20~28일, 남원군 대전리 일댕에서 제9연대 제1대대가 공비 사살 532몀, 생포 98명, 제3대대가 산청 남쪽 단성에서 공비 사살 32명, 생포 12명의 전과를 올리지만 28일에는 이동간 열차에서 경계를 소흘히 하여 41명 중에 31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남지역에는 전남도당 유격대 사령부, 전북지역에는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를 설치하고, 약 10,000여 명이 준동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속리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일대에서 산악지대 거점을 형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육본은 경북 영천에서 1950년 8월에 창설하여 대구에 집결한 제11사단에게 소탕임무를 부여했다.
이에 국군 제11사단은 11월 14일 남원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5개 경비대대와 지역경찰, 청년방위대를 배속받아, 제13연대는 전북지역을 제20연대는 전남지역을 담당하고 에비인 제9연대는 경북 상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한다. 그러다 11월 초에 진주로 이동하여 지리산 동부지역을 인수하였다.
당시 공비 4,000여 명이 지리산 북쪽 함양군 마천면 일대를 장악하여 활동 중이었다.
11월 20~28일, 남원군 대전리 일댕에서 제9연대 제1대대가 공비 사살 532몀, 생포 98명, 제3대대가 산청 남쪽 단성에서 공비 사살 32명, 생포 12명의 전과를 올리지만 28일에는 이동간 열차에서 경계를 소흘히 하여 41명 중에 31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2) 영남지역 공비토벌작전
육본은 제5사단을 재창설('50.10.8)하여 제3군단에 배속시키고, 태백산맥 남쪽 영남지역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게하여 '50.10.16~11.22일까지 1개월여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한다.
제5사단은 제27연대를 포항으로, 제35연대를 진주로, 제36연대를 김천으로 각각 이동시켜 작전임무를 수행한다. 제35연대가 담당한 지리산 동부지역에서는 11월 중순경부터 공비출몰이 빈번해지고 , 하동 북쪽과 거창일대에서 소탕작으로 이들은 지리산으로도주하고, 소백산맥을 타고 도주하다 속리산. 보은.상주일대의 차단선에 걸려 일망 타진된다. 제27연대는 11.14-16일까지 문수산. 청량산. 죽령. 구룡산. 선달산 일대에서 공비들을 소탕하였다.
제5사단은 11월 하순까지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한 후 38도선 춘천 일대로 북상하는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해 작전을 제9사단에 인계하고 이동하였다.
한편 제9사단은 '50.10.25일 서울에서 창설되어 11월 20일에 제3군단 작명으로 대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한 후 대둔산 지역 및 제5사단의 경북 내륙지역을 인수받아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 15-20일, 제9-28연대는 대둔산과 부근일대 공비 공격, 20일에는 금산리에서 공비 200여 명 사살한다.
11월 19일 제29연대와 제30연대는 경북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 하던 제5-27,36연대와 임무교대, 당시 소백산맥 일원에 공비 1,700여 명 준동하였으나 모도 일망 타진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의 침략으로 전선이 38도선으로 남하하자, 제9사단은 대둔산과 경북 서부지역 공비토벌 작전 중인 제11사단에게 인계한 후 12워 ㄹ18일 원주를 경유 강릉지역으로 이동하였다.
38도선으로 반전
제1절 동계 대공세 준비
1. 중공군의 전략과 공세준비
가. 중공군의 전략 : 11월 4일 차기 작전 방침으로 유인. 반격전략을 결정
중공군 지도부는 제1차 공세작전이 종료될 무렵인 11월 초에 당시 전황을 "적이 에상치 못하게 은밀히 조손 전장에 침투하여 첫 작전에 승리를 획득하였다. 이는 미국의 기도를 혼란시켯을 뿐만아니라 적 진영에 불안과 사태의 심각성을 일캐워 주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낙후된 장비와 휴대한 탄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유엔군 주력붇대를 섬멸하는데는 실패하였음을 자인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의 재반격을 우려하였다.
당시 중공군은 1차 공세로 많이 지쳐있엇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기사회생한 북한군도 구성, 맹산, 강계 이북지역에서 정비 중에 있었다.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11월 4일 차기 작전 방침으로 유인. 반격전략을 결정하였다. 이 방침에 의거 11월 5일부터 중공군은 부대를 재배치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새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될 중공 제9병단의 3개 군(제20. 제26. 제27군)이 3개 제대로 나뉘어 11월7일, 12일, 19일에 집안. 임강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동부전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나. 공세준비 ※차량지원을 요청하여 1950년 11~12월에 3,000대의 차량을 지원받는다.
※ 차기 공격 개시일로 11월 25일은 서부전선, 26일은 동부전선으로 정했다.
당시 중공군은 30개 사다늘 전방에 배치하였으며, 서부전선에는 18개 사단 23먄 명, 동부전선에 12개 사단 15만명을 배치하여 병력수준은 국군과 유엔군의 2배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철도사단을 투입하여 철도 수송과 보수능력도 햔상시키고,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주공 축선인 희천. 영원. 덕천의 파괴된 도로보수를 완료하였다. 특히 소련에 차량지원을 요청하여 1950년 11~12월에 3,000대의 차량을 지원받는다.
11월 13일, 작전을 위한 당위원회에서 공군과 기갑붇대의 열세를 고려하여 내선작전을 전개하되, 적을 깊숙히 유인하여 격멸하는 작전ㅂ방침을 확정지었다. 전력이 한층 보강된 중공군은 공격개시일로 서부전선은 11월 25일, 동부전선은 하루 늦은 26일로 최종 확정지었다.
2. 소련 공군의 전개 ※소련은 중공 영공을 보호하기 위해 1950년 10~12월에 12개 항공사단을 중공에 배치하여 중공 영공방어를 담담하였다. 이중에 제64항공군단이 김일성의 소련군 지원요청에 의거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계속적인 중공과 소련의 전쟁 관련 합일점을 찾지 못한 소련 공군의 전쟁 참여 문제가 한반도에 직접 개입은 게속적으로 스탈린의 반대에 부딪혀 양국 갈등의 불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중공 영공을 보호하기 위해 1950년 10~12월에 12개 항공사단을 중공에 배치하여 중공 영공방어를 담담하였다. 이중에 제64항공군단이 김일성의 소련군 지원요청에 의거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당시 북한은 개전 초기에 공군력이 괴멸되어, 소련에서 재편성을 위한 조종사를 양성 중이었고, 중공 공군돠 소련군의 지도하에 훈련을 받고 있었다.
소련 전투조종사는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 공군과 전투경험으 가진 우수한 조종사 중에서 최정예 조종사로 선발되었다. 소련 전투기는 '50년 11월부터 한국전쟁 공중전에 참전하기 시작하였다 . 그들은 초기에는 압록강 부근에서 유엔군 B-26푹격기에 대한 요격임무를 수행하였다.
11월 1일, F-80 전투기가 신의주 상공에서 YAK 전투기와 격돌하는데 이 과정에 서 소련 MIG-15들이 압록강을 넘어와 미군 항공기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평양-원산 이남으로 진출하지 앟았고 해상에서는 작전하지 않았다.
3. 유엔군의 최후공세 준비
가. 유엔군측의 적정 오판
※중공군은 유엔군 판단 8만이 아닌, 이미 30만을 넘는 대병력이 북한으로 들어와 있었다
여기에 철저한 기도비닉과 야간행동으로 공중정찰의 실패, 그리고 미군 수뇌부는 재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만심만 믿고 중공군의 능력을 경시하여 적정판단에 크 오류를 가져왔다.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려던 작전계획이 좌절되고, 13일 동안에 걸친 중공군의 1차 공세로 청천겅 선으로 물러나게 되자 중공군에 대한 적정판단을 수정하게 된다.
당시에 중공군 주력은 11월 6일을 고비로 하여 전전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무렵 유엔군은 중공군이 만주지역에 40만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 중공군이 어떤 목적으로 한국전에 개입하고 있는지 의문점을 풀지 놋했고, 침투병력도 8만 명선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다 11월 중순에 접어들며 중공 제42군이 새롭게 출현한 사실을 포착하여, 이를 기초로 제2차 진격작전(크리스마스 공세)를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오판으로 중공군은 유엔군 판단 8만이 아닌, 이미 30만을 넘는 대병력이 북한으로 들어와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작전에 대비하였다.
여기에 철저한 기도비닉과 야간행동으로 공중정찰의 실패, 그리고 미군 수뇌부는 재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만심만 믿고 중공군의 능력을 경시하여 적정판단에 크 오류를 가져왔다.
나. 유엔군의 최후공세 준비
[맥아더 원수의 견해와 계획]
북한 공산당이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전쟁이ㅏ 종식되는 시기에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침입하여 대학살을 꾀함으로서 인류 역사상 다시 없는 죄악을 범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적절한 감시와 기도응로 피해를 최소한 주리고 위기를 극복하였다. 또한 본인의 임무는 북한지역에서 공산군으 격멸하여 한국의 통일과 평화를 회복하여는 유엔의 사며응ㄹ 달성하는데 있으므로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재공격을 실시하 ㄹ것이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미 제9군단을 북상시켜 3개 군단으로 공격작전을 실시하되, 미 제1군단을 서, 미 제9군단을 중앙, 국군 제2군단을 동으로 하여 상호 협조된 공격으로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려 한다. 공격개시일은 준비가 완료되는 시간이다.
이 계획으로 군단ㅅ가령부를 대전에 두고 미 제2, 제25사단으로 삼남지역의 주보급로 확보 및 인민군 유격대 소탕임무를 신편된 국군 제3군에 인계하고 11월 3일 평양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 서부지역 작전계획
좌전방 미 제1군단(배속 국군 제1사, 미 제24사. 영 제27여) :평양-신의주 도로 중심으로 서해안 따라 진출
중앙 미 제9군단(배속 미 제2사. 미 제25사. 터키여단) : 군우리-희천 도로 좌측으로 진출
(미 제2사 : 구장동, 미 제25사 영변지역을 진출)
우전방 국군 제2군단 : 군우리-희천 도로 우측의 산악지역에서 우인접 미 제10군단과 협조하면서 진출
(국7사:덕천지역, 제8사 : 영원지역 확보)
◆ 동부지역 작전계획
이 시기까지 미 제10군단은 중공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지않아 피해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 제7해병연대가 하갈우리로 진출하는 과정에 황초령을 넘는 과정에 연대봉과 750고지에서 일부 적의 침투부대를 격멸하면서 하갈우리-유담리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편 이원으로 상륙한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11월 21일 혜산진을 점령한다.
동해안로상으로 진출하는 수도사단이11월 25일청진까지 진출하고, 좌전방에서 합수ㅡ백암으로 진출하는 제3사단이 같은 날 25일 백암을 점령하였다.
◆ 동부지역 미 제10군단의 공격방향 수정(하갈우리-장진호 북쪽이 아닌, 하갈우리-무평리로 진출)
이 무렵 유엔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장에게 미 제1해병사단의 진출로를 수정하여 장진호로 진출 후에 서쪽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하여 적 후방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인 강계를 공격하여 미 제8군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이 경우 병참선이 신장되어 적의 위협이 가중되므로, 유담리에서 바로 서쪼긍로 강계남쪽 무평리를 공격하겠다고 수정제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4. 유엔군측 전쟁지도노선의 갈등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미 행정부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갈등]
첫째 : 압록강상의 교량폭격을 둘러싼 갈둥
맥아더 : 11월 7일부터 2주간에 걸쳐 압록강상 교량을 폭파하겠다.
미 행정부 : 참전한 다른 나라의 관계를 고려 폭격을 연기하라
맥아더 : 늦어지면 대규모 병력과 물자가 유입되어 유엔군은 피값을 비사게 지불하게 된다.
미 대통령 : 중공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하에 승인한다
따라서 11월 8일부터 12월 5일까지 압록강상 모든 철교와 교량 폭격시작, 12개의 철로와 육로교량 4개 절단, 그러나 그 후 결빙으로 효과는 적었다.
둘째 : 유엔의 군사목표인 한국을 통일된 자유국가로 만들겠다는 정책목표의 변경이냐, 고수되어야 하는냐를 놓고 유엔군사령부와 한국정부, 미국정부간의 상반된 의견이 노출되었다.
미국수뇌부 : 중공군이 없는 상황에서 설정된 군사목표, 즉 "북한인민군 격멸"이라는 임무는 재검토 되어야 한다. 즉 맥아더의 공격계획을 포기하고 일정선의 방어진지로 후퇴해야 한다
맥아더 : 중공군 개입이 상황의변화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만주 폭격을 강력히 제의한다. 그 어떠한 임무 변경을 거부한다.
한국정부 : 중공 침략지에 대하여 온 국민이 총궐기하여 국경선 밖으로 추방하자
결국 미 행정부는 맥아더의 재량대로 임무를 수행하되, 만주폭격을 허용하지 않으며 동시에 중공과의 협상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한다.
이와같이 모처럼 주어진 적과의 단절된 기간에 적절한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유유부단, 주저, 그리고 오판으로 일관하여 미국은 한국에서 재앙으로 향한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높치게 되었다.
제2절 동토의 대결전
1.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1950년 11월 24일 오전 한만국경선까지 진출하도록 게획된 크리스마스공세가 개시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국1. 미24.)은 납청정과 태천을, 미 제9군단(미2. 미25)는 온정리와 희천을, 국군 제2군단(제7. 제8)은 히천-유원진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유엔군 최종공세 상황도
온정리 희천 원참
중39군 중40군 중38군 중42군
운산 묘향산 인처리
중66군 미2사 국8사
태천 미25사 구장동
영변 국7사 영원
중50군 국1사 덕천
박천 군우리 터키여
남청정 미24사 맹산
영27여
청천강 안주 북창 국6사집 / 국2군단
가. 서부전선 : 11월 24일~25일, 유엔군 최종 공세 바로 다음날 중공군 제2차공세 시작됨
국군과 유엔군은 접적이 경미하여 공격 첫날 10~15KM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나 11월 25일부터 중공군이 전 전선에서 완강히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11월 25일, 중공군의 제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나. 동부전선 : 서부전선보다 3일 늦은 11월 27일 공격개시, 미 해병 제1사단이 하갈우리에서 무평리로 공격, 미 제7사단은 장진호 동안으로 진출
그러나 중공군이 진출로상에 모든 고지에 침투하여 철수로 차단, 따라서 미 해병사단은 진출을 포기하고 현진지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고, 혜산진으로 진출한 미 제7사단과 동해안에서 두만강으로 진출하는 국군 제1군단은 진출 공격을 중지하고 급편방어로 전환한다.
2. 청천강 교도보 붕괴
가. 태천 전투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국군 제1사단은 미 제24사단의 대령강-용산동의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의 우전방 사단이 되어 태천-삭주-신의주로 진출하게 되며, 미제24사단은 해안을 따라 정주로, 우인접 미 제9군단의 미 제25사단은 운산으로 진출하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24일 10:00시에 태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부터 중공군의 공격으로 태천 남쪽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적의 공격으로 공격이 돈좌 된다.
적은 27일에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구군 제1사단은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나. 구장동 전투
미 제9군단은 좌전방 미 제25사단이 운산을, 우전방 미 제2사단이 희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11. 24일 이번 공격작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부여받은 미 제2사단은 우전방에 제38연대가 백령천 넘어 묘향산 서쪽 능선의 형제봉으로, 좌전방 제9연대는 청천강 연안도로 축선으로 전진하게 된다.
11월 26일 02:00시 그러나 사단의 공격작전은 백령천 북쪽 도로변의 감제고지인 219고지(중공군의 모자고지)에서 저지된다. 묘향산과 청천강 계곡 및 태평지역에 은거해 있던 중공군 제40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미 제2사단은 전 전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장에게 구장동을 중심으로 저지진지를 급편하여 청천강 통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하였다.
한편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이 구장동일대에서 혼전을 거듭할 때에 우인접 국군 제2군단이 돌파되었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이에 군단장은 군우리에 집결 중인 터키여단을 덕천으로 출발시켜 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토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7사단의 제3연대가 중공군에 돌파당하여 미 제2사단 지역으로 철수함에 따라 미 제2사단이 통제하도록 조치하였다.
11월27~28일 중공군은 사단의 배치공간인 산악지역으로 기동하여 전방연대의 후방으로 진출하였다. 전방 연대들은 소규모로 분산하여 적진을 돌파해야 했다. 사단은 원리-비호산 일대에 저지선을 구축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밀려드는 중공군의 압력에 얼마나 버틸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다. 덕천 전투
덕천 전투('50.11.25~11.26)
중7사 중38군
1531 가마봉(1304) 백애산91524)
성불참 우현
국7-3연 국7-5연
백령천 국7-8연 내창천
국7-수색중대
구장동으로
탁고개 풍덕산 추동리
영원
덕천
군우리
북창
국군 제7사단은 미 제9군단의 작전지역 중앙 투입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군단의 좌전방이 된다.
이에 국군 제7사단은 22일 공격을 개시하여 경미한 적을 격퇴하며, 좌전방 제3연대는 용연동-우현을 , 우전방 제8연대는 사항산-하령곡산 을 점령하고 예비인 제5연대는 덕천으로 진출하였다.
11월 24일, 사단은 제3연대가 묘향산 서쪽의 1531고지를, 제8연대가 묘향산 남쪽의 가마봉과 백애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묘향산 줄기는 산이 깊고 험준하며 이미 중공군 제38군 주력이 들어와 진지를 구축하여 처음부터 진출이 난관에 부딪친다.
사단장 신상철 준장은 덕천에 위치하고 있는, 예비인 제5연대의 2개 대대를 탁고개로 추진배치하여 전방 연대의 간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묘향산에 들어온 중공군 제38군의 저항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적이 후방으로 침투하여 포위가 되었지만 전방 연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전방 사단 수색중대 지역으로 적 1개 연대가 밀어 붙이면서 돌파되어 사단 우측이 완전 노출되었다.
이에 군단은 제7사단을 증언하기 위해 북창(덕천 남쪽 20km지점)에 머물고 있는 , 지난 10월의 온정리 전투에서 무력화되어 재편성 중인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를 급하게 하령곡산 남쪽의 풍전리로 이동시킨다. 하지마 도착도 하기전에 중공군 선두는 이곳을 통과하여 후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1.25~26일, 국7-5.8연대 마비, 사단사령부 지휘소 기습, 제7사단 무력화, 각자도생의 분산 철수]
11월 25~26일, 중공군 제38군이 구장동의 미 제2사단을 강타하고, 국군 제7사단 우전방 사항산의 제8연대 지역도 강타하여 대혼란이 야기된다. 국군7-8연대 지휘체계 마비, 각자도생의 길에 들어섰다.
이렇게 되자 사단 중앙으로 진출하고 있던 제5연대 2개 대대도 사워보지도 못하고 덕천방면으로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이 무렵 덕천의 사단사령부에 적 대대규모가 기습하여 기느잉 마비되면서 북창으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전방에서 철수하는 제5, 제8연대 철수병력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내려오다 적의 포위공격에 속수무첵으로 무너져 통제기능이 마비되;었다.
다만 좌측의 제3연대는 사단과의 통신두절과 덕천으로 퇴로가 막혀 큰 피해없이 좌전방 미 제2사단 지역으로 들어가 미 제2사단의 통제를 받으며 구장동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국군 제7사단은 덕천에서 북창으 ㄹ경유하여 순천으로 남하 하여 부대를 정비하고, 11월 30일에 강동을 거쳐 승호리로 이동하여 대동강 방어작전에 대비하였다.
라. 영원-맹산 전투
국국 제8사단이 점령하려던 묘향산 우측의 소쾌산이나 백암산은 이미 중공군이 주요 고지군을 점령하고, 우회부대로 전투지경선으로 은밀침투하여 연대 및 사단 지휘소를 기습하고, 전방연대를 압박하는 전술로 마비를 달성하여 제8사단은 제대로 전투한번 못하고, 제7사단(제3연대 제외)처럼 무력화 되어 버리고 철수하게 된다.
영원-맹산 전투('50.11.24-27)
백애산
고성산
1139
신기산
하령곡산
덕인봉
국8-10연 국8-21연
덕천 영원 국8-50포병
국8-16-2개 대대
두류령
상화리 에창천
맹산 국8사/ 국8-16연-1개 대대
북창 매재령
11. 24일 국군 제8사단은 제2군단 우전방 사단으로 서부전서 가장 동측에서 공격작전을 개시한다. 사단은 제7사단과 같이 24일 좌전방에 제10연대가 소쾌산을 , 우전방에 제21연대가 백암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6연대는 동측방 방호를 위해 2개 대대를 맹산 동측방에 배치하고 사단지휘소에가 있는 맹산지역에는 1대대가 남아 지휘소 경계를 한다.
사단은 공격당일 제10연대는 영원북방 하령곡령을 넘어 용흥동에, 제21연대는 영원 북동쪽 12km의 양감령으로 진출 야간방어에 들어갔다.
11. 25일 사단의 계획대로 소쾌산과 백암산을 목표로 공격하지만 적의 강력한 저하으로 동좌하게 된다. 사단 정면ㄴ의 적은 중공군 제42군으로 그들은 맹산지역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의 선두는 동측방 제16-2개 대대가 있는 애창천 계곡에 출현하였다.
사단 정면의 2개 연대는 공격이 돈좌되고 후방이 적에게 포위되었으며 동측방의 제16-2개개는 적에게 돌파되어 예비인 국군 제6사단의 잔여 부대인 제7, 제19연대로 덕천-북창간 도로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들은 제7사단과 제8사단의 간격으로 대부대가 진입하여 영원지역을 점령항여 전방 연대들의 퇴로를 차단함에 따라 혼란속에 빠져들어 소집단으로 분산 탈출하게 된다.
제7사단이 덕천에서 당했던 그 전술대로 중공군은 지휘소를 기습하여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고, 돌파를 시도하여 각개격파하여 진지를 유린하는 공격방식에 또 제8사단마저 무너진다
11. 26일 국군 제8사단은 맹산으로 몰려오는 중공군의 상황에 대해 26일 12:00시가 지난 후에야 알게된다. 그리고 제16연대장에게 매재령을 신속히 점령하도록 하지민 이미 적은 매재령을 점령하고 북창으로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11월 27일 결국 사단은 11월 27일 01:00시부로 국군 제7사단은 순천으로, 제8사단은 가창으로 집결하는 명령을 남기고 더나서 가창에서 다시 강동으로 이동하여 평양-원산선 방어작전에 대비한다.
마. 북창 전투
유엔군 최후공세 시 군우리-북창 전도
희천
온정 묘향산
운산
태천 북원 중40군 구장동
영변 미2-23연 비호산 중42군
박천 국7-3연 중38군 덕천 영원
군우리 미2-38연 국8사
조통강 미2-28연 건지산 맹산
안주 개천강 개천 터키여
미2-38연
북창
인천참
갈고개
용원리 갈현동
국군 제2군단은 111월 25일 제2차 중공군 공세를 받아 덕천-영원 성에서 방어로 전환한다. 이때 중공군 제38군은 국군 제7사와 제8사 전투지경선을 집중공격하였고, 중공군 제42군의 일부는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의 배치공간으로 침투하여 군단의 노출된 우측방에 투입되는 국군 제8사단 제16연대를 공격하였다.
25일, 이에 군단은 예비로 재편성 중인 국군 제6사단의 제2연대를 군단 후방을 경계하기 위하여 덕천-신창 도로변 가창으로 이동시켰다.
26일, 이에 국군 제6-2연대는 이동을 개시하여 7사단과 8사단의 전투지경선인 신하리로 이동하였으나 적 1개 사단 규모와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설상가상으로 26일 새벽에 연대지휘소가 적에게 피습되어 순천으로 분산철수 하게 된다.
이를 복받은 제8군사령관은 노출된 우측바을 보강하기 위해 미 제1기병사단의 예비인 제7기병연대를 북창리로 이동하도록 명령하였다.
29일, 해가 뜨기전 공중정찰에서 4개 연대 규모가 제6사단 정면으로 진출하고 있는 것이 관측된다. 제7기병연대가 도착하기 전에 국군 제6사단은 결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으로 철수하게 되고 미 제7기병과 연견결하여 순천-신창리-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미 제8군의 최후공세는 중공군 제2차공세로 무산되고 평양으로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3. 평양-함흥으로 철수 결정
유엔군의 최종공세(크리스마스 공세)에서 미 제8군의 동측방 공격제대인 국군 제2군단(제6.제7.제8)의 공겨은 자전 초일부터 중공군의 사전 준비된 진지에서 강력한 저항 및 전투지경선으로 사전 침투를 개시한 우회부대의 포위에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전방부대들이 혼비백산하여 각개분산하여 남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동측방이 무너진다.
반면 서측방 미 제1군단(국1.미24.영27)과 중앙의미 제9군단(미2.미25.터키여)은 이튼날(25일) 저녁까지는 적정이 경미하여 순조롭게 진행되다 저녁부터 중공군이 공세로 전환하여 이들 부대의 공격도 돈좌되고 말앗다.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대병력으로 개입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는데 지금의 전선상황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결국 맥아더 원수는미 합동참모부에 "우리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가까운 장래에 취할 자신의 전략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한는 것"이라 보고한다.
28일 밤, 유엔군사령부에서는 긴급작전회의가 전 참모진과, 제8군사령관, 제10군단장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당시 서부전선은 미 제8군이 덕천-맹산 일대가 돌파됨에 따라 적의 포위위협에 직면하여 청천강 교두보마저 포기하고 군우리로 집결 중에 있었다. 그리고 동부전선은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무평이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의강력한 저항과 후방지역 차단 위협에 직면하여방어로 전환하여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맥아더 우너수는전방상황을 청취한 후에 "서부전선 부대는 중공군에게 우측방이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만큼 후퇴하도록 허용하였고, 동부전선부대에는 중공군과 접적을 유지하면서 함흥과 흥남의 교두보로 지역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이렇게 하여 미 제10군단이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면 남하하는 적의 좌측방을 위협하여 서부전선의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미 제8군도 평양-원산 서을 무난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한번쯤 생각해 볼 유엔사 작전참모의 제안 : 태백산맥을 넘어 덕천의 준공군을 공격하자]
여기서 유엔사의 작전참모는 미 제10군단의 원산에 보유중인 미 제3사단을 테백산맥을 횡단하는, 덕천-원산 간의 산악도로를 이용하여 미 제8군의 우측방을 위협하고 있는 중공군을 공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지도상 도로는 노폭이 협소하여 주기동로가 되지 못한다며 반대한다. 여기에 혹독한 기후와 공간지역에서 자칫하면 미 제3사단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들어 반대하였다.
4. 서부전선의 대재앙
미 제9군단의 미제25사단 제24연대가 우인접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철수로 측방이 노출되어 적중에 고립되어 혼란에 빠졌다. 탈출과정에 부상 30명, 실종 104명의 피해를 입고 탈출
미 제8군사령관이 28일 도쿄로 출발시 청천강 하구-박천-북원-태을리를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가 됴쿄에서 29일 오후 평양에 복귀하였을 시는 , 미 제1기병사단이 신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의 증원에 실패하고, 터키여단의 와원리 철수, 그리고 미 제25사단과 미 제2사단이 청천강 계곡 전투에서 입은 손실 등으로 최초 계획한 방어선의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무렵 서측방 미 제1군단(국1.미24.미25)은 청천강 북쪽의 박천 일대를 확보하였으나, 우전방 미 제9군단(국6.국7-3연. 미2. 터키여단)인 중공군의 집중공격으로 군우리 일대를 줌심으로 방어정면이 축소되고 있었다. 특히 미 제2사단은 북동쪽 묘향산의 지맥인 산악능선을 따라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 제38군에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상황 직면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은 청천강 남쪽에 신방어선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하고, 미 제1군단은 숙천-순천, 미 제9군단은 순천-성천간을 방어하게 하였으며 ,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과 제7사단 제3연대를 미 제9군단에 배속하고 군단 주력(제7(-), 8사. 직할부대)은 강동 남족에서 신속히 부대정비를 하도록 하였다.
(가) 숙천-순천 방어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지 닷새째인 11월28일,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은 태천외곽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박천 남쪽 동이동으로 철수한다.미 제25사단은 영변 남쪽으로 진출항여 접적 중에 있었다.
한편 중공군은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인 청천강변의 구장동-개천 도로를 방어 중인 미 제2사단의 제23연대의 진지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만약 미 제2사단을 돌파한 중공군이 군우리-신안주 도로로 진출하면 청천강 북쪽에 진출 중인 미 제1군단의 주력부대들은 퇴로가 차단되어 적중에 고립될 징후가 농후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25사단의 청천강 남쪽으로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다라 국군 제1사단이 숙천에, 미 제25사단은 순천에 집결학게 되고. 안주교를 포함한 청천강 상의 모든 교량이 폭파된다.
그러나 군단의 우전방 미 제9군단의 미제25사단 제24연대가 우인접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철수로 측방이 노출되어 적중에 고립되어 혼란에 빠졌다. 탈출과정에 부상 30명, 실종 104명의 피해를 입고 탈출하게 된다.
(나) 군우리의 대혈전 ※
유엔군 최후공세 시 군우리-북창 전도
희천
온정 묘향산
운산
태천 북원 중40군 구장동
영변 미2-23연 비호산 중42군
박천 국7-3연 중38군 덕천 영원
군우리 미2-38연 국8사
조통강 미2-28연 건지산 알링령 맹산
안주 개천강 개천 터키여
미2-38연
북창
청룡참
갈고개
용원리 갈현동
미 제9군단은 28일 제8군 명령에 따라 방어로 전환하여 구장동 남쪽의 북원에서 북동쪽의 태을리 간의 청천강 교두보 선을 방어하게 된다. 군단은 좌전방 미 제2사단에 국군 제7-3연대와 터키여단을 배속하여 군우리 북동쪽의 북원-와원을, 우전방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덕천 남쪽의 북창일대를 바어하도록 하였다, 군단예비인 터여단은 전방사단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 남쪽의 자산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 시각 , 중공군도 제38군에 덕천 전투를 종료 후, 주력부대를 신속히 군우리로 진격하도록 하고, 그 일부는 군우리 -순천간 도로의 중간자점인 삼소리를 점령하여 미 제2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중공군 제38군이 전방 터키여단의 와원을, 제40군은 군우리의 미 제2사단 주력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1) 터키여단의 지연전
※미 제9군단의 덕천 진출을 중지하고 알링령 동쪽 용덕리에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용덕리 서쭉 와원에 진지를 구축
※미 제2사단의 개천강 남쪽에 저지진지를 구축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지쳐있다는 이유로 개천시내를 중심으로 저지진지 구축
※11.29-30일, 개천에서 군우리로 철수간 미 제38연대의 병역과 차량이 혼재, 30일 군우리 남서쪽으로 진출
11월 20~26일 터키여단은 경기도 장단 일대에서 북한군 유격대를 소탕하다, 11월 20일 미 제9군단의 예비가 되어 군우리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처음엔 중공군이 공격하여 덕천의 국군 제7사단이 무력화되며, 개천으로 돌파구 확대를 기도하자 이를 저지하기위해 덕천탈환 임무를 받고 26일일 개천-덕천 도로 상의 와원으로 진출하였다.
터키군이 와원-덕천 도로 중간의 험준한 알릴령 고개를 넘고 있을 무렵인 14:30분경 , 군단으로부터 덕천진출을 중지하고 알링령 동쪽의 용덕리에 저지선을 구축하라는 명령과 북쪽 10km 지점에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출현했다는 첩보도 받았다.
여단장 야지시 준장은 알랄렬리 험준하고 도로폭이 좁아 좁아 부대 투입이 불리하다고 보고 용덕리보다 서쪽의 와원이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군단의 지시와는 달리 와원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한다.
11월 29일, 야음을 이용하여 알릴령을 넘어온 중공군의 기습이 시작되고 여단장은 험준한 산악이 둘러싸여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5km후방의 신립리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영하 20도의 혹한속에서 병사들의 사기는 배고품, 추위, 그리고 첫 경험한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대한 두려움에 극도로 저하되었다.,
여기에 통신이 두절되어 좌우인접부대의 상황은 물론 상급부대와의 교신이 먹통이 되어, 28일 자정부로 군단예비에서 미 제2사단 뱃속으로 전환된 사실도 모르는체 지원화력없이 단독으로 사단규모의 중공군과 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개천에 위치한 여단본부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포병대대가 철수해 옴으로서 상황을 인지한 여단은 1개 중대와 전차 1개 소대를 추진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하게 한다.
11월 29일다행히도 전방대대들은 포위된 상황에서 중공군과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근접전투를 펼치고 있엇고, 29일 오전에 출격한 우군 항공기 8대의 지원속에 철수하여 개천에 저지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지친 상태라며 개천강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을 어기고, 개천시내에 저지진지를 구축하였다.
얼마 후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개천일대에 지중되면서 중공군 제38군의 일부가 개천에서 군우리로 가는 도로 중간지점인 용복리로 진출하였다. 터키여단장 야지시 준장은 퇴로차단으로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하여 중대 단위 이하 소부대로 분산하여 군우리로 철수하도록 한다.
11월 30일 그러나 이과정에 설상가상 여단의 좌인접에서 방어중인 미 제38연대마저 개천으로 집결하여 이 통로로 철수를 개시함으로써 도로에는 미군과 터키군의 병력과 차량이 대혼잡을 이루며 30일 새벽에 군우리 남서쪽에 집결한다
2) 군우리 철수
중공구 제2차 공세시 (11월 공세) 군우리 지역은 미 제2사단이 방어하고 있엇다. 군우리는 희천에서 안주로 흐르는 청천겅 하류의 평야지대가 끝나고 여기서 부터 동쪽으로는 묘향산의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연결ㄷ되는 교통의 중심지다.
11.28일 미 제2사단장은 청천강 계곡으로 진출한 중공군와 혈전을 벌이다 다수의 피해를 입은 제9연대를 군우리 남쪽으로 철수시켜 재편성에 들어가고, 제23연대를 구장동-군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북원에, 국군 제7-3연대와 미 제38연대를 비호산 남쪽에 배치하였다. 이 당시에 사단의 좌인접에는 청천강 서족에 미 제25사단이, 우인접 와원에는 터키여단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11.29일, 터키여단이 와원과 신립리에 이어 봉명리에서 결전시 , 29일 중공군 제40군과 제38군이 공격하여 군우리 전투는 시작되었다.
군우리에서 적의 기습으로 퇴로가 차단될 위협에 처하자, 미 제5공군은 야음과 악천후에도 근접항공지원을 하여 개천을 빠져나오는 병력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철수하는 제38연대와 터키여단, 그리고 국7-3연대가 군우리로 철수한다.
미 제9군단장은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이 위기에 몰리자 미 제2사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일대로 철수하여 성천일대를 방어중인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중공군의 군우리-순천도로 차단]
11. 29일 미 제2사단이 수색중대를 투입하여 철수로를 수색하는 과정에 이미 중공군이 은밀침투하여 철수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제9군단장은 영 제27여단의 미들섹스 대대를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갈고개 남쪽 11km 지점으로 이동하여 갈고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남쪽의 용원리로 철수한다.그러자 다음날 다시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11. 30일 한편 사단사령부지역에 포탄이 낙하 하는 가운데, 사단장은 예비인 제9연대가 절반 수준의 병력으로 30일 기동로 돌파를 위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한편 중공군도 새로운 증원부대를 용흥리와 싸용리에 투입하였지만 미군은 그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
[국군 제7-3연대의 돌파작전 실패] '인디언의 태형장"
※ 11.30일 미군 제72전차가 공격중인 국군 제3연대를 적으로 오인하여 오탄을 2회에 걸쳐 사격하는 바람에 돌파작전이 실패
국군 제3연대는 묘향산을 공격중에 중공군의 역습으로 철수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우인접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구장동, 군우리 북쪽의 비호산을겇쳐 철수한다. 군우리디 동족을 점령하여 미 제38여대와 터키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군울이 남쪽으로 집결하여 미 제23연대와 연결하여 건지산에서 개천강 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11. 30일 한편 공격명령을 받은 미 제9연대 2개 대대는 1개 전차소대를 앞세우고 청룡참보다 1.5km를 내려갔을때에 집중사격을 받는다. 공격 대대는 돈좌되고 전차만 돌파하여 용원리 부근의 영국군과 합류하였다. 이후에바로 미 제9연대의 돌파가 진행 되지만 실패하게 되자, 국군 제3연대가 돌파작전에 투입되어 진출학게 되는데 미군 제72전차가 공격주인 국군을 적으로 오인하여 오탄을 2회에 걸쳐 사격하는 바람에 돌파작전이 실패하였다.
[미 제2사단의 강력돌파 작전의 피해] "인디언의 태형장"
※12월 1일 집게된 미 제2사단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4,940명이고 이중 90%인 4,500명이 25일 이후 군우리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이 손실은 사단 병력의 1/3수준이다
장비 피해는 수백대의 차량과 야포 64문, 제2전투공병대대 공병장비 대부분, 예하부대가 휴대하던 통신장비 20-40%가 손실되었다.
※엄청난 피해는 연합작전의 어려움으로영 제27여단이 앞으로 조금만 더 진출하여 갈고개를 점령하고 있었다면 사단 철수를 엄호할 수 있었다. 또한 구군 제3연대의 돌파공격시미군 전차의 오폭이 없엇다면 돌파구는 열리어 상화응ㄴ 달라졌을 것이다
계속하여 중공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주변과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신안주로의 역행군도 중공군이 차단하여 사용불가능 하였다. 따라서 사단장은 강력돌파마이 해법이라 판단한다
사단은 제38연대를 선두로 사단사령부, 각종 포병부대, 공병부대, 제9연대, 국군 제3연대, 터키여단 순으로 철수부대를 편성하여 기용한 차량을 이용하여 최대한 탑승하여 정지하지 말고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도록 강조하였다.
돌파작전간 중공군은 고장난 차량 등을 잉용한 도로장애물을 설치하여 기동속도를 줄이면서 강력한 화력, 30-40정의 기괁총과 10여 문의박격포로 응사하였고 돌파부대는 가다 서다를 멈추며 돌파해 나갔다. 결국 포병들만 갈고개부근에서 포윋되어 많은 장비를 유기하고 각개로 순천지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후방을 엄호하던 미 제23연대는 현재의 돌파로로는 기동이 불과 하다고 판단하여 좌인접 미 제1군단의신안주-숙천도로로 철수할 것을 건의하여 승인바고 20분만에 휴대한 전 탄약을 사격하고, 야포는 파괴한 채 일몰전에 엄호부대인 제5연대의 지지를 경유하ㅣ여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피로 얼룩진 미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 작전을 일단락 되었다.
12월 1일 집게된 미 제2사단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4,940명이고 이중 90%인 4,500명이 25일 이후 군우리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이 손실은 사단 병력의 1/3수준이다
장비 피해는 수백대의 차량과 야포 64문, 제2전투공병대대 공병장비 대부분, 예하부대가 휴대하던 통신장비 20-40%가 손실되었다.
이후 미 제2사단은 전투력 복원을 위해 개성으로 집결하고 터키여단도 개서응로 향했다. 국구 ㄴ제3연대는 구군 제7사단을 찾아 본대로 복귀한다.
5. 동부전선 철수작전
서부전선의 미제8군이 청천겅 교두보에서 철수를 할 무렵, 도부전선에서 국경선을 햐앟여 진격하던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도 유엔사의 결정에 따라 공격개사 사흘째인 11월 29일 공격을 중지하고 함흥, 흥남일대의 해안교두보지역으로 철수하게 된다.
가. 장진호 설한지 전투(11.27~12.11)
※ 중공군 제9병단 예하 3개 군단 12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투입되어 미 제1해병사단을 장진호 부근에서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투손실을 입게 되는데, 제24군단의 경우 90%가 동상환자였고, 제27군단은 10,000명의 비전투손실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더이상 군사작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제9병단을 3개월간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여, 1951년 3월 중순에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 이번 전투에서 중공군은 전사 15,000~37,500명과 부상 7,500명으로 항공폭격으로 전사 10,000명과 부상 5,000명이 발생한다.
※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미 제21해병사단은 전사 463명, 후송 후의 전사자 98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이었고, 비전투손실이3,659명이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미 제1해병사단이 만포진-강계-희천을 연하는 중공군의 복브로를 차단하여 제8군의 진격작전을 지원하며서 만포진을ㄹ 목표로 진격하도록 한 계획을 수정하여, 서측의 미 제8군과 연결하기 위해 유담리에서 무평리(희천과 강계 중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공격개시일은 서부전선보다 3일 느린 11월 27일 이었다.
11월 25일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를 별 저항없이 점령하고, 제5해병연대도 장진호 동쪽지역을 미 제7사단 제32연대에게 인계하고 유담리에 집결하여 공격준비를 하였다.
당시 미 해병은 황초령 넘어 진흥리에서 유담리까지 신장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전선 진출전
중강진 백두산 무산 옹기
청진
관모봉 수도사
신갈파진 혜산진 백암 국3-23연
합수 국3-22연 만탑산 어랑천
삼수 재덕
미7-32연 미7-17연
갑산
강계 웅이강 대신리 길주
풍산 국3-23여 수도사(-)
미17연 임명동
부전호 미31연 성진
신흥리
유담리 장진호 수상리 미7사
국수도-18연
하갈우리 이원
북청
소백산 미7해병 수동
사창리 국3-26연 함흥
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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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
고토리역
황초령
중124사
진흥리
문고개 황초령 역
750
보장역
중370연
초방령 장진강 제2발전소 신흥리
중372연
연대봉 698
장진강제3발전소
노초령
오로리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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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담리 방어전
1384
1403 한국유격중대
미5연-1중
1282
미5연-E중 미5연-3대 미7연-E중
미5연-F중 유담리 장진호
미5연/미7연 미7연-C중
미5연-D중
미7연-G중 미7연-1중 미7연-A중 미5연-1중
1246
미7연-E중 1446
1276
1419
미7연-C중
덕동고개 미7연-F중
1520
명령에 따라 기동에 들어간 미 제1해병사단은 제1연대전투단이 흑수리에서 지경-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를 따라 북상 중이었고, 제5연대전투단도 장진호 동쪽에서 유담리로 향하였으며, 제7연대전투단은 이이 유담리로 이동하였다. 또한 미 제7사단의 1개 혼성연대는 장진호 동쪽에서 전진하여 제5연대 전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장진호 동쪽의 풍류리강 부근에는 미 제7사단의 훼이스 특수임무부대가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의 하갈우리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진호 남쪽 끝에 위치한 하갈우리는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간이활주로 시설이 만들어 지고 해병사단의 전술지휘소와 보급기지가 설치된 중추지역이 되었다. 이곳은 제1-3해병대대와 제7-2해병대대가 기지방어를 하고 있었으며, 고토리는 사단의 주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제1해병연대 지휘소, 제2대대, 화력지원부대들이 배치되고, 그 남쪽의 진흥리에는 제1해병연대 제1대대와 화력지원부대가 배치되어 사단의 후방지역을 엄호하였다.
[중공군 포로 3인의 진술을 무시해 버린 낭패]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제7해병연대가 3명의 중공군 포로르르 획득하여 포로심문관이 심문결과 "중공군 제60군 제20사단 소속이며, 해병사단이 공격을 개시하면 2개군으로 공격할 것이다"라고 상세한 진술을 하였지만 별 대책을 수립하지 않는다
[
(1) 유담리 전투(11.27~12.4)
※ 북쪽의 1282고지와 1240고지일대는 중공군 제79사단의 공격이 진행되고 제7연대 제2대대가 진지를 방어중에 중공군 200여 명을 사살
※ 덕동고개의 F중대는 11월 30일 02:00시부터 개시된 대규모 중공군 연대 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사수한다
※ 12월 1~2일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한 유담리 부대들은 무려 5일동안의 혈전 속에서 덕동통로의 F중대와 연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공군 제59사단의 차단 부대를 격파하고 덕동고지 일대를 장악하여 확보한다. 이 전투에서 제7-3대대는 437명의 병력이 194명으로 줄었다.
※ 유담리 철수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전사 164명과 실종 55명, 부상 921명 등 1,140명의 인명손실이 있었으며, 이 중 동상에의한 비전투 손실은 1,194명이었다.
※ 12월2일, 새벽까지 미 제7사단의 생존자 중 670명이 하갈우리에 복귀한다. 아침 일찍 생존자구출작전에 나선 수색부대는 저녁까지 장진호 부근 전투에투입된 3개 대대 2,500명 중 1,050명을 구출하였는데, 전투 가능한 병사는 365명이 뿐이고 전사자는 300명만이 확인하였을 뿐 나머지는 실종되었다.
11월 27일,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속에 08:00시에 제7-3대대가 무평리를 향하는 도로 입구의 양 고지를 점령하자, 선두인 제5-2대대가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하자 얼마 진출하지 않아 1251고지의 중공군 공격으로 진출이 돈좌된다. 이에 제7-3대대가 지원하여 1251고지를 탈취하였고, 서쪽도로 남서쪽이 1426고지와 북서쪽의 1403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군이 유담리를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일시 야간 방어로 전환한다. 해가 지자 영하 32도로 곤두박칠쳐 활동에 제한을 받는 가운데 중공군이 21:00시가 지나자 사방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유담리가 화염에 싸이게 된다.
11월 28일, 아군의 항공폭격이 진행되면서 중공군의 공격이 일단 멈추게 되지만 야간 전투에서 1403고지가 적에게 피탈되어 전선유지가 어렵게 된다. 한편 북쪽의 1282고지와 1240고지일대는 중공군 제79사단의 공격이 진행되고 제7연대 제2대대가 진지를 방어중에 중공군 200여 명을 사살하며 버티었으나 중과부족으로 새벽에 밑의 고지로 철수한다. 한편 제5연대는 1384고지가 피탈되자 03:00시에 역습으로 탈환하고 제7연대 제2대대와 합세하여 피탈된 1282고지를 재점령하였다.
덕동통로는 제7연대 제2대대(-)가 점령하고 북쪽의 1419고지는 제7연대 제1대대(-)가 방어중에 28일 02:30분에 중공군 제20군 예하 제59사단이 공격을 감행해 왔으나 미군이 방어하게 되지만 덕동고개의 F중대가 사면 포위된 상황에서 덕동통로가 중공군에 통제하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양 연대장은 무평리 공격은 커녕 유담리 방어도 어렵다고 판단하여 제5연대가 유담리 서쪽과 북쪽에, 제7연대가 동쪽과 남쪽의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에 앞서 사단으로부터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개척하라는 명령에 제7연대는 제1대대로 1419고지 남쪽의 "C"중대를 구출하고 덕동통로의 보급로를 재확보하도록 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C"중대를 구출하지만 중공군의 포위기도에 덕동통로 개척은 포기하고 부상자 40명과 유담리로 돌아왔다.
11월 29일 복귀한 제7-1대대는 덕동통로와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29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바로 연대로부터 대규모 중공군의 집결에 따른 복귀 명령이 주어지는데 그때는 이미 중공군과 격전이 시작된 상태였으며 결국 복귀에 다른 F중대의구출은 실패한다.
하지만 "F"중대는 11월 30일 02:00시의 중공군 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11월 30일 이때 유엔사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와 해병사단장은 양개 연대와 풍류리강 부근의 미 제7사단 훼이스 특수임무부대를 하갈우리로 철수하도록 한다. 이 당시에 사단장은 철수에 지장이 되는 장비 및 물자는 파괴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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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기도 및 전개]
중공 제9병단 송시륜은 제13병단을 증원하기 위해 11월 초순에 제20, 제26. 제27군을 이끌고 임강과 집안에서 압록강을 도하한 후 낭림산맥을 따라 남하하여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다.
그들은 빈번한 차량 이동, 보급품의 공중투하, 헬리곱터의 환자 수송 등을 관찰하며, 미 해병사단의 철수징후를 간파하고 이동 중인 부대의 취약점을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제9병단장 송시륜은 제27군(4개 사단)을 장진호 북쪽에 전개하여 동서 양방향에서 공격하고, 제20군(4개사단)은 장진호 서쪽 으로 진출시켜 제7군보다 남쪽에서 유담리-함흥간의 산악도로를 분할 점령하여 포위공격으로 미 해병을 섬멸할 방침으로 부대를 전개하였다. 장진에 집결한 제26군(4개사단)은 예비로 일단 보유한다.
특히 중공군 제27군은 제81사단을 부전호 서쪽 진출시켜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의 연결을 차단하게 하고, 제20군은 제59사단을 신흥리를 점령하여 유담리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차단하고, 제58사단은 하갈우리 퐁뒤 공격, 제60사단은 남쪽으로 보내 부성리 일대를 점령하여 미 해벼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 하도록 한다. 제890사단은 사창리로 우회하여 일부는 고토리를 확보하여 해병사단의 철수를 차단하고, 주력은 함흥을 공격토록 하였다.
11월 27 이렇게 하여 중공군은 27일 공격을 개시하며, 하지만 강인한 해병사단의 저항과 우세한 화력에 압도되어 도리어 막심한 병력 손실만 입고 결정적안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여기에 눈이 많이 내리고 혹심한 추위는 이에 대비한 물자부족과 탄약이 부족하여 중공군의 작전은 차질을 빚기 시작한다.
더 중요한 것은 미 해병대의 긴 주 기동로에도 불구하고 기동로상 주요 고지군에 여지없이 잔류경계조가 중공군보다 먼저 점령하여 실질적인 포위공격은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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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의 철수명령에 따라 포위망 돌파준비에 착수한 양개 여내는 '일부 부대는 산악을 따라 공격하여 덕동통로의 제7-2-F중대를 구출한 후 주력이 통과하기 전에 이 지역을 확보하며, 부상자를 포함한 차량제대는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는 기본계획을 작성하여 사단장의 승인을 받았다.
12월 1~2일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한 유담리 부대들은 무려 5일동안의 혈전 속에서덕동통로의 F중대와 연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공군 제59사단의 차단 부대를 격파하고 덕동고지 일대를 장악하여 확보한다. 이 전투에서 제7-3대대는 437명의 병력이 194명으로 줄었다.
유담리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영 해병 제41특공대가 하갈우리로 출동하여 북쪽의 도로를 점령한 후 철수부대를 엄호하면서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부대들이 하갈우리에 입성한다.
유담리 철수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전사 164명과 실종 55명, 부상 921명 등 1,140명의 인명손실이 있었으며, 이 중 동상에의한 비전투 손실은 1,194명이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제31연대 제1대대장이 부대를 지휘하여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격전끝에 대대장이 부상당하고, 부대는 소규모로 분산된채 어어붙은 장진호를 건너 생존자들은 하갈우리로 도착하기 시작한다.
12월2일, 새벽까지 미 제7사단의 생존자 중 670명이 하갈우리에 복귀한다. 아침 일찍 생존자 구출작전에 나선 수색부대는 저녁까지 장진호 부근 전투에투입된 3개 대대 2,500명 중 1,050명을 구출하였는데, 전투 가능한 병사는 365명이 뿐이고 전사자는 300명만이 확인하였을 뿐 나머지는 실종되었다.
(2) 하갈우리 전투('50.11.27~12.7)
하갈우리는 미 제1해병사단 제7연대 제2대대(-2)가 점령하고 있었다. 바로 이 부대에서 덕동고개에 F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11월 26일에 제1연대 제3대대가 하갈우리 방어임무를 인수하고, 제7-2대대는 F중대 구출작전에 투입되었지만 실패하고 28일 하갈우리에 복귀한다
이 시기에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돠어 하갈우리를 집중공격하기 시작했다.
하갈우리전투
중89사 중79사 연화산 중80사
설한령 미 제7-32연
신흥리 개마고원
유담리 장진호
중59사
덕동령 하갈우리 중76사
중58사
부성리
중60사 고토리 중77사
1081
진흥리 미 제1해병제1연대1대대
[하갈우리 동쪽고지 전투] 미 제1-3대대 : 전사 43명, 실종 2명, 부상 270명 , 영 제41특공대 투입 재탈환 성공
하갈우리 남쪽의 미 제1-3대대(-)는 중공군 제172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방어한다. 반면 동쪽고지에 배치된 제10전투공병대대는 11월 29일 01:30분에게 적에게 진지가 피탈된다. 당시 이 고지는 감제고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형지물이었다. 이에 대대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역습을 감행하지만 적의 저항으로 계속 피탈된 상황에서 제1-3대대장은 예비인 영 제41특공대를 투입하여 탈환하였다.
12월2일, 새벽까지 미 제7사단의 생존자 중 670명이 하갈우리에 복귀한다. 아침 일찍 생존자구출작전에 나선 수색부대는 저녁까지 장진호 부근 전투에투입된 3개 대대 2,500명 중 1,050명을 구출하였는데, 전투 가능한 병사는 365명이 뿐이고 전사자는 300명만이 확인하였을 뿐 나머지는 실종되었다
[하갈우리-고토리 철수작전 : 불지옥의 계곡 돌파작전]
※ 불지옥의 계곡 돌파간 전사 103명과 실종 7명, 그리고 부상 506명이었다.
※ 12월2~5일 부상자 4,312명 비행기로 후송
※ 한편 후방지역 방어를 맡고 있는 제5연대 제2대대는 동쪽 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220명의 중공군 포로를 획득하고, 다음날인 12월 8일에 새벽에 고지를 다시 중공군에 내어주고 하단부로 내려온다. 여기서 지원부대와 침투하는 중공군을 1,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한편 12월 3일, 미 제10군단장은 부상자 후송준비 완료와 동시에 하갈우리-함흥 축선으로 철수하라 명령하였다. 이제 미해병사단은 돌파개시일을 12월 6일로 결정하고 12월 2일부터 5일까지 4,312명 의 부상자는 물론 병기와 대량의 병참물자를 항공기로 후송하였다. 후송이 불가한 것은 파기가 이루어 진다.
12월 5일, 제15연대와 제7연대 3대대를 투입하여 하갈우리 방어진지를 점령한다. 이날 밤에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 간 보급로를 따라 7개 사단을 전개하였다.
12월 6~7일, 미 제1해병사단 제7연대(미 제7-31연대 배속)가 선두에서 12월 6일 고토리를 향해 돌파작전을 개시하였다.그러나 "하갈우리 남쪽 5KM, 지점의 일명 불지옥의 계곡"으로 돌진했을 때 제3대대장의 전사 등 ,더 이상의 진출이 불가능한 상태까지 도달했으나 12월 7일 02:00에 적을 돌파하고 새벽에 고토리에 진입한다
한편 후방지역 방어를 맡고 있는 제5연대 제2대대는 07:00시에 동쪽 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일몰과 동시에 중공군의 역습에 시달리며 220명의 중공군 포로를 획득하고, 다음날인 12월 8일에 새벽에 고지를 다시 중공군에 내어주고 하단부로 내려온다. 여기서 지원부대와 침투하는 중공군을 1,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하갈우리 후방을 차단하돈 제5연대는 8일 새벽에 이동을 개시하여 고토리에 도착함으로서 10,000명의 병력과 1,000대의 차량이 이동한 하갈우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작전기간에 사단은 전사 103명과 실종 7명, 그리고 부상 506명이었다.
(3) 고토리 전투('50.11.28~12.11)
※ 11월28~11.30 하갈우리 보급로를 개척하기 위해 진출하는 영 제41특공대대장 드라이스데일 중령 특수임무부대가 진출간 중공군 포위공격으로 단위부대로 분산되면서 하갈우리에 진출하게 된다. 이과정에 입은 손실이 전사 및 실종이 162명과 부상 159명이었다.이들이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11월29~30일의 중공군 대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 여기서 미 제7사단 제31대대는 맥로린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였으며 더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없음을 인식한 맥로린 소령은 중상자는 후송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함으로서 불지옥의 계곡전투는 종료된다.
※ 고토리 돌파작전에서 전사 75명과 살종 16명, 부상 256명이 발생했다.
미 해병 제1연대는 고토리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하고 진흥리-고토리간 보급로를 방어 중에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 제60사단이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허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11월 28일, 사단장은 일부 병력으로 하갈우리 보급로를 확보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연대장 풀러 대령이 일부병력을 진출시켰으나 중공군 제60사단 제179연대의 기습으로 고토리로 복귀하게 된다.
[드라이스데일 중령 특수임무부대와 항복하는 맥로린 부대]
11월 28~30일 이렇게 되자 연대장은 영 제41특공대장인 드리이스데일 중령에게 제7사단 제31대대 B중대, 전차 2개 중대 등을 통제하여 보급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고토리 북쪽 6,KM 지점에서 중공군의 협동공격에 행군제대는 각 단위로 분산되어 보급로 양측에서 야간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된다. 다음날 새벽에 중공군이 포위망을 압축한 후, 아군 포로를 이용해 항복을 요구하게된다. 당시 맥로린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는미 제31연대 B중대 위주로 편성된 부대였으며 더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없음을 인식한 맥로린 소령은 중상자는 후송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함으로서 불지옥의 계곡전투는 종료된다.
반면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전위부대인 전차부대와 제1연대 3대대 G중대 , 영 해병 41특공대대는 드라이스데일 대대장이 부상을 입으며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이때 입은 손실이 전사 및 실종이 162명과 부상 159명이었다.이들이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11월29~30일의 중공군 대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12월 7일, 미 제1해병사단은 진흥리에 배치된 제1연대 제1대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병력이 고토리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바로 고토리 돌파작전에 돌입한다. 이 당시에 중공군은 제9병단 예하 제20군단과 제26군단이 고토리 일대를 점령하고 고토리-진흥리간 보급로 차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돌파작전의 성공여부는 고토리-진흥리간 도로 중간에 있는1081고지 확보에 달려있었다. 사단장은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고토리ㅐ에 있는 제1연대 제1대대를 투입하기로 한다. 그리고 고토리 남족 3.5마일의 파괴된 교량은 부품을 공수하여 수리하게 된다.
사단은 기동로 상에 4개의 주요 지형을 선정하여 각 부대에 공격목표를 부여한다.
12월 8일 ~9일 제7연대는 목표 A,B를 제1대대와 제7사단 제31대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점령하며 기동로를 확보한다. 이에 선두인 제7연대 제1대대가 12월 9일 02:45분에 진흥리를 통과하였다.
여기서 9일 아침 황초령을 무사히 통과한 제7해병연대가 수문교를 확보하게 되는데 이 당시 중공군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전의를 상실한 듯 엄체호 속에서 저항을 포기하고 있었다. 이어 공병대대가 작업개시 3시간 만에 수문교 가교를 설치하고 유도병의 안내에 따라 밤새도록 교량을 통과하였다.
한편 12:00시에 공격을 개시한 제5연대는 제1대대가 목표 D인 1457고지를 점령하고 서쪽의 제7-제31대대와 연결하였다. 그러나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한 진흥리의 제1-1대대는 1081고지의 문턱에서 돈좌되면서 12월 9일에 이르러 몇번의 돌격으로 15:00시에 확보하면서 기동로가 개통되어 12월 10일 08:30분에 진흥리를 통과하여 사단 지휘부가 10:30분에 흥남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흥리를 통과한 후에는 미제3사단의 엄호를 받으며 12월 11일 21:00시에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한다. 그러나 고토리 돌파작전에서 전사 75명과 살종 16명, 부상 256명이 발생했다.
(4) 전투 결과
함흥으로 이동한 미 제1해병사단은 연포비행장일대에서 정찰활동을 전개하였고, 12월 15일 흥남하응ㄹ 출발하여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중공군 제9병단 예하 3개 군단 12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투입되어 미 제1해병사단을 장진호 부근에서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투손실을 입게 되는데, 제24군단의 경우 90%가 동상환자였고, 제27군단은 10,000명의 비전투손실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더이상 군사작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제9병단을 3개월간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여, 1951년 3월 중순에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이번 전투에서 중공군은 전사 15,000~37,500명과 부상 7,500명으로 항공폭격으로 전사 110,000명과 부상 5,000명이 발생한다.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미 제21해병사단은 전사 463명, 후송 후의 전사자 98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이었고, 비전투손실이3,659명이었다.
나. 합수. 청진-흥남 철수 작전('50.12.1~12.16)
※이 철수작전간 전사 142명, 부상 448명, 행방불명 340명이었다.
국군 제1군단은 미 제10군단의 주력부대들이 압록강ㅇ 상류지역(장진호-혜산진)으로 진출할 무렵 11월 하순경 백암-청진 선으로 진출하여 두만강 진출을 목전에 두었다. 이 무렵 11월 27일 제1군단장은 유엔군의 총공세 작전 방침에의거 두만강 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동부전선 진출전
중강진 백두산 무산 옹기
청진
관모봉 수도사
신갈파진 혜산진 백암 국3-23연
합수 국3-22연 만탑산 어랑천
삼수 재덕
미7-32연 미7-17연
갑산
강계 웅이강 대신리 길주
풍산 국3-23여 수도사(-)
미17연 임명동
부전호 미31연 성진
신흥리
유담리 장진호 수상리 미7사
국수도-18연
하갈우리 이원
북청
소백산 미7해병 수동
사창리 국3-26연 함흥
원산
(1) 수도사단은 회령, 옹기를 점령하고, 특공대대로 길주에 주둔시켜라
(2) 제3사단은 나남-무산가도를 따라 무산을 점령하라
이에 27일 국군 제3사단은 합수에서 무산을 공격하기 위해 제22연대가 백암일대로, 제23연대가 청진 남쪽 나남으로 공격준지를 하였다. 그리고 제26연대는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삼수.합수.혜산진으로 진출하였다.
수도사단은 청진에서 제18연대가 회령을 목표로 공격하여 부령에, 제1기갑연대가 옹기를 목표로 공격하여부거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30일, 미 제10군단으로부터 함흥-흥남으로 철수명령을 받았다. 이에 군단장은 수도사단은 12월 1일 제3사단의 엄호하에 북청-이원으로 철수하고, 제3사단은 수도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후 성진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따라 수도사단은 주을.명천. 길주를 거쳐 4일 성진에 집결하였고, 이어서 3사단 주력도 길주에 집결하였다. 제3사단이 길주에서 엄호하는 동안 수도사단의 제1기갑연대와 제1연대, 그리고 제3사단의 일부는 북청-이원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12월 7일, 수도사단 본부와 제18연대는 미 함정편으로 성진에서 흥남(서호진)으로 철수하였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되었던 제3-26연대는 복귀하여 북청에 머물렀다. 육로로 이동한 수도-제1연대와 함정으로 이동한 제18연대는 함흥에서 경계 임무에 들어갔다.
12월 9~10일 그동안 철수를 엄호하던 제3사단(-)은 길주에서 성진으로집결하여 9일 미 함정편으로 흥남으로 이동하였고, 제3-26연대는10일 흥남항 동쪽의 마전리로 이동하여 제3사단 주력도 서호진으로 상륙할 준비를 함으로서 국군 제1군다늬 철수작전을 일단락되었다.
이 철수작전간 전사 142명, 부상 448명, 행방불명 340명이었다.
제 3 절 38도선으로 반전
1. 유엔군의 새로운 전략 결정
가. 맥아더 원수와 미 합참의 의견 출동
● 맥아더 : 공산군에 비하여 병력이 열세하므로 현상황에서 추가적인 병력증원없이 강요에의한 철수는 불가피하다
● 미 합참 : 바어전략의 채택은 승인하지만 일정한 선에서의 방어가 불가하다는데는 동의하지 않고 제8군과 제10군단을 통합하여 평양-원산을 연하는 선을 점령하도록 제안한다.
당시 맥아더는 미 제8군과 제10군단의 양개 부대를 통합하더라도 평양-원산 간 250km에 달하는 전선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종심이 얕아 종공군에게 돌파위험이 높으며, 태백산맥으로 인하여 양개 군의 협동작전이나 군수지원에 문제가 잇다며 반대한다. 이에 맥아더는 제10군단을 함흥에 계속 둠으로서 적의 측방을 위협함은 물론 이 간격을 통한 대부대의 후방진출을 저지할 수 있어 더 좋은 선택이나 이러한 상황도 근본적인 병력의 증강 없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미 합참은 산악기동에 우수함이 입증된 중공군에게 도리어 넓은 기동공간만 제공할 따름이라며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유엔군사령붕가 미 합참에 보고한 전황보고에는 "이틀간(11.30~12,1)의 미군 사상자가 최초 판단에 의하면 11,000명ㅇㄹ 초과하였다. 미 제2사단은 사다늬 절반인 6,380명의손실을 입었고, 터키여단은 5,000명 중 1,000명이 손실을 입었다. 현재 아군의 병력은 겨우 110,000명인데, 반면 중공군은 256,000명과 북한군 100,000명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전선에 투이하고 있다"라고 상대적 전투력의 열세를 지적함으로서 미 합참을 당황하게 하였다.
[12.4 맥아더와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의 1차 회담]
이에 12월 4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이도쿄를 급히 방문하여 맥아더와 전략회담을 가졌다.
●콜린스 : 현재로서는 가까운 장래에 부대의 증원은 불가하다. 현상황에서 유엔군의 병력보존이 최우선이므로 유엔군을 해인교두보로 이동하려는 맥아더 원수의 전략에 동의한다
[12.7일 맥아더와 콜린스의 2차 회담]
12월4~6일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도쿄에 돌아온 콜린스는 , 최종적으로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을 통합한 후 단게별 방어선을 설정하여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계획에 합의한다. 이 계획에는 9개의 방어선이 설정되고, 서울을 중심으로 서울 북쪽에 4개의 방어선이 설정되고, 최종 방어선은 개전 초기의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이에 따라 12월 8일 , 유엔사령부는 미 제8군은 평양에서 38도선으로,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10군단은 흥남에서 남동해안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서부전선 철수상황(12.1~12.23)
숙천 순천 12.1
성천 12.3 양덕 원산
평양 대동강
중화 율리
진남포 12.5 곡산
겸이포
사리원 신계 이천
평강 간성
임진강 김화
시변리 A선 철원
예성강 B선 화천 양양
해주 개성 포천 12.23 춘천
문산
의정부 홍천
서울 횡성
2. 평양 철수작전
12월 1일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청천겅 교두보 남쪼긍로 32km 떨어진 숙천-순천-성천 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군우리를 확보한 중공군은 적극적인 추격을 하지 않고 소규모 정찰대만 운용한다.
이 이유는 차후에 밝혀졌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에서 12월 2일 05:00시에 지원군사령관에게 서부전선의 주력부대는 숙천-순천선 이북에서 4~5일간 휴식하도록 명령하였다. 아울러 이 기간에 탄약. 식량의 재보급과 부대 정비를 하여 차기작전에 준비하도록 하였다.
12우러 2일 이 무렵 하ㅏㅇ공정찰결과 중공군이 성천 동쪽으로 이동 중이며 , 중공군 유격대 또는 북한군 유격댁가 성천-양덕 간의 도로를 점령하여 평양-원산 도로를 차단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바로 평양 이북에서 유엔군 부대를 포위 섬멸할 징후라 판단한 유엔군은 평양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개성-평양 도로를 방호하기 위해 미 제24사단을 율리에, 국군 제2군단을 신게에 배치한다. 당시 신계 동남쪽의 시변리와 연천. 포천. 춘천 일대는 이미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게릴라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미 제187공정단(배속 영29여)이 평양 시내 4개의 부교를 엄호하도록 하고 군우리에서 철수하는 미 제2사단은 문산으로, 터키여단은 개성으로 이동하도고 하였다.
가. 평양 철수 12.4일 미 제25사단을 선두로 평양 철수시작
임진강과 서울로 철수하기전 미 제8군이 점령할 제1단계 바어서능ㄴ 평양 남쪽의 겸이포-중화-율리-곡산을 연하는 선이며, 제2단계는 해주-신막-신계-이천을 연하는 선이었다.
[12월 4일 평양 철수 명령]
12월 4일 이날 미 제군단 공병부대들은 평양에 산제한 일부 산업시설과 군사시설을 파괴함으로써 평양시내는 도처에 화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의 엄호하에 미 제25사단을 선두로 1번도로를 따라 평양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2.5일 저녁까지 진남포에서 후송작저능ㄹ 게속되엇다. 가용한 선ㅂ막을 총 동원하여 부상병, 포로, 각종 군수물자 그리고 피난민 3망명이 수송된다. 수송하지 못하는 보급물자 2,000톤은 파기 되었다.
[중공군의 평양 포위섬멸 작전을 실패한다]
이 당시에 중공군은 유엔군이 평양을 고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3개 사단을 평양 전방에서 고착견제부대로 운용하고, 중공군과 인민군으로 구성된 4~5개 사단을 측방으로 공격하고, 그리고 주력 군 5개 군으로 집중 공격하는 양익 포위공격을 계획했으나 미 제8군이 조깅에 철수해버림으로서 실패한다.
12월 6일 평양에서 철수한 미 제8군은 6일, 국군 제6사단, 제 제24, 미 제25사단으로 송림-중화-수안-곡산 남쪽을 연하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군 제7사와 제8사는 시변릴로 이동시켰다.
이 무렵 미 제1병사단에서 소규모정찰대를 운용하여 확인하고 항공 정찰 결과 적의 부대가 진남퐁에서 선박으로 대동강 어귀로 도하하여 평야지대로 남하 중인 것이 학인된다.
[12월 8일 38도선 철수 명령]
12월 8일 미제8군사령관은 8일 전선부대에 제2방어선인 해주-신계-이천-김화선으로 철수하도록 하고, 다름 철수는 서해안 예성강 입ㅈ구로부터 시변리-철원-화천을 경유 동해안의 양양에 이르는 38도선 북방의 방어선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주력부대들이 제2방어선으로 이동을 개시하고 있을 무렵인 8일 38도선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12월 8일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
이 당시에 중공군은평양에서 포위섬멸이 실패하자,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12월 17일, 중화. 상원. 수안 지역을 집중공격하여 유엔군 주력을 격멸하면 기회를 보아 38도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재탈환할 것이며, 만약 적 주력을 격멸치 못하면 38도선 북쪽에서 추격을 중지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점령하도록 유인하고, 내년에 새로운 공격으로 유엔군을 격멸하겠다고 보고한다.
3. 흥남 철수작전
미 제10군단은 12월 8일 흥남철수지시를 받았다. 이에 11일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작전이 일단락되자 철수계획을 구체화하게 된다. 당시 미 제10군단이 철수시켜야할 물동량은 먼저 원산과 성진에서 병력 105,000명, 차량 14,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5,000톤이며 미 물동량을 해사응로 이동시키기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하였으나 선박이 부족하였다.
[국군 제3사단, 12. 10일 제일먼저 부산항으로 출발, 15일 미 제1해병사단(미 제7사. 미 제10군단 본부) 출발]
12월 10일 가장 먼저 철수하는 부대는 국군 제3사단이었다. 당시 사단은 성진에서 해상으로 읻오하여 10일 서호진에 상륙할 계획이었으나 상륙하지 않고 서호진을 방어중인 수도사단 제18연대를 승선시킨 후 부산항으로 출항하였다. 다음은 미 제1해병사단으로 12일 탑재가 시작되어 15일 부산으로 출항하였다.
국군 수도사단은 17일 야음을 이용하여 미 제7사단 주력부댕에 방어지역을 인계하고 미 해군 LST에 승선하여 18일 새벽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다.
이때 국군 제1군단은 부산상륙계획을 바꾸어 해상이동 도중에 제8군의 작전을 지우너하기 위해 삼척으로 상륙하게 된다.
[12월 24일 흥남항 폭파]
마지막으로 미 제7사단 제17연대와 제31연대(-)가 승선하여 20~21일 출항하자, 미 제3사단이 24일 승선하여 떠나자, 미 제10전투공대대와 해군 수중폭파대가 항만을 14:30분에 폭파하게 된다.
국군 해병대는 제1.제3대대는 9일 함정편으로 철수하게 되고, 해병대(-)는 연포비행장에서 15일 항공기편으로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4. 38도선 확보
가. 서부전선 상황
'50.12. 7~14일 국군 제1사단은 12.7일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이동하였는데 사단 수색중대가 구월산 일대에서 적 1개 대대 규모 패잔병 소탕하며 미 제1군단 주력부대 철수 엄호 후 14일 11연대 고랑포, 15연대 법원리, 제12연대 신산리에 배치된다.
미 제1군단은 김포반도에 터키여단, 개성-문산 도로를 가로지르는 임진강 하류에 미 제25사단을 , 고랑포-적성에 국군 제1사단, 고양 신둔리에 영29여단을 집결시킨다
신계에서 철수하는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을 연천-의정부 축선상에 전곡에, 미 제24사단을 김화-의정부 축선상의 영평일대에, 영 27여단을 덕정에 위치 시킨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은 7연대를 한탄강 남쪽에, 제19연대를 백이리에, 제2연대는 예비로 동두천에 집결시켰다.
미 제8군사령관은 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퇴계원에 위치시켜 춘천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적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대 군우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미 제2사단은 충주로 이동시켜 중앙이나 동쪽에서 적이 국군 담당지역을 돌파하면 이를 저지하고, 미 제1.9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나. 중부전선 상황
국군 제3군단(제9, 제11사)은 12우러 10일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종료한 후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육군본부에 원대복귀시키고, 제2. 제5. 제8사단을 배속받아 창설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다
당시 제2사와 제5사는 11월 27일부터 철의 삼각지대 일대에 집결한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있었다.
국군 제2사(제31연 결)는 제17연대를 철원부근에, 제32연대를 의정부 부근에 배치하고, 배속된 제5-35연대를 구하리에, 국군 제5사(제35연 결)는 제27연대를 청평 동쪽 호명산 일대에, 제36연대를 가평 북쪽 지암리 일대에, 배속된 국 제2-31연대를 홍천에 배치하여 연대별로 병참선을 확보하고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12.13일 제3군단사령부가 양평에 도착한 13일을 전후하여 타부대에 배속된 연대들이 원복되고, 이대 군단장 이형근 소장은 제2사단을 가평, 제5사단을 춘천 복쪽에, 제8사단을 춘천 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8사단장의 이상한 지휘]
그러나 우전방을 담당할 제8사단이 철수하는 괴정에 신계를 경유 12우러 5일 시변리에 도착한 다음 장병들의 체력회복을 위해 4일동안 휴식과 부대정비를 실시한다.
이 무렵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사단본부와 중장비, 환자, 보급품을 싣은 차량제대를 이끌고 시변리-개성도로를 따라 먼저 철수하였다. 이후에 이동하는 보병연대가 신장리 도섭장에 진출할 때 인민군 패잔병 2개 대대규모가 기습을 감행하여 다수의 피해를 입고, 연천으로 철수한 후 제3군단에 배속되어 화천저수지 남족으로 이동하여 다시 전선에 투입된다.
육본은 제7사단을 12월 15일 군예비로 하여 정비 중인 홍천에서 춘천으로 이동시켰다.
다. 동부전선 상황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 국군 제2군단은 미 제8군이 청천강에서 철수할 무렵인 11월 28일 그동안 덕천에서 지연전을 펼친 국구 ㄴ제6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전환하고, 군단 주력은 강동일대에서 재편성을 한 후 평양 동측방을 엄호한다.
이후 군단은 신계-곡산-으로 이동하여 미 제8군 우측방 방어와 미 제10군과의 배채 공간을 통한 적의 후방진출을 차단하던 중, 육본 명에 의하여 이천-평강-김화 선을 방어하기 위해 12월 5일 시변리로 집결한다. 그러나 12월 8일 38도선 철수명령에 따라 화천 동쪽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무렵 인민군 제2, 제5군단의 패잔병들이 평강-금화-화천도로를 차단하고 연천을 경유하여 철수하게 된다.
한편 제2군단이 38도선으로 철수하는 동안 동부전선에는 대구에서 공비토벌작전을 하던 제9사단이 12월 8일 긴급히 원주, 강릉으로 이동하여 춘천 동북쪽의 내평리에서 동해안의 인구리까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12월 14일 이때 제28연대는 소양강 남쪽에, 제29연대는 현리일대에, 제30연대는 인구리일대에 배치돼어 1개 연대 방어정면이 30km를 넘었다. 제2군단은 철수를 서둘러 12월 14일에 원주에 도착하여, 제7사단을 육본직활로, 제8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대신 동부전선의 광정면을 방어 중인 제9사단과, 함흥에서 구룡포로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받았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육본은 흥남에서 철수하는 국군제1군단을 묵호에 상륙시켜 동해안지역을 담당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제9사단은 다시 국군 제1군단에 배속이 전환되었다. 이렇게 되자 국군 제2군단은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만으로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게 된다.
이 당시에 국군 제3사단(최석 준장)는 제18연대는 제8사단 제16연대가 방어하던 홍천고개와 하수내리-상수내리 지역을, 제22연대는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하던 음양리-수리봉 지역을 방어하게 되며, 예비인 제23연대는 홍천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전투경찰과 경비대대로 측방경계를 강화하였다.
라. 국군 제1군단의 동부전선 투입
'50.12월 18일, 흥남에서 철수한 제1군단은 묵호로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 중인 관대리-현리-서림-양양을 연하는 방어선을 인수받았다.
제1군단의 임무는 38도선을 점령한 후 태백산맥에서 준동하는 인민군 유격대를 격멸하고, 이들이 38선 이남으로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좌전방 관대리-서림에 제9사단을(제30연대가 방어하던 서림-인구리 지역은 수도사단에, 제28연대가 방어하던 부평리-관대리는 제3사단에 인계), 우전방 서림-양양에 수도사단을 배치하고, 군단 후방지역에 3개 경비대대를 영월, 정선, 하진부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당시 제9사단은 우인접 수도사단과는 1073-방대산-구룡덕봉이, 좌인접 국군 제3사단과는 길향산-대암산-부봉-가득봉 드의 고산준령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사단장 오덕준 준장은 제28연대를 원대리-현리에, 제29연대를 현리-하치전에, 제30연대를 에비로 창촌에 집결시켜 후방지역 경계를 담당토록 한다.
그리고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오대산 일대의 적 유격대와 인민군과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양양과 주문진 사이에 제1연대, 제1기갑, 제26여내 순으로 종심깊게 운용하다, 제1연대는 남대천 남쪽의 하왕도리에, 제1기갑연대는 상광정리에, 제26연대는 주문진 남쪽 방내리에 집결시켜 오대산 부근의 패잔병 준동에 대비한다.
당시 이 지역일대에 준동하는 적 제69여단은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을 완료하였고,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패잔병 2,000여 명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38도선 배치현황(12.26)
시변리
임진강 철원 김화 북한강
중40군 중42군
연천 화천 화천저수지 양구
중50군 중39군 중38군 중66군 북5군단 인제 북2군단
국6사 미24 수도사
개성 고랑포 국1사 국2 국5 국8 국3 소양강 양양
문산 덕정 가평 춘천 "C"방어선
북1군단 미25 국9사
터 봉일천 의정부 "C"방어선 홍천강 홍천
"C"방어선
서울 양평 "C"방어선 횡성
인천
경안리 원주
수원
5. 동부전선의 불안
아군이 12월 23일경 38도선 방어선을 점령하고 진지 강화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신정공세를 계획한 중공군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전선에 배치된 국군 사단ㄷ을의 퇴로를 차단시킬 목적으로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을 국군 제1. 2군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시켜 전술적 요충인 홍천. 춘천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가. 인민군의 선제공격
(1) 홍천부근 돌파기도
[양구-인제 소양강 변의 위기]
화천-양구-인제 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 제8사단 정면의 오항리, 제3사단 정면의 관대리, 그리고 제9사단 정면의 인제를 공격한다.
12. 23~26일 국군 제8사단의 저항선을 돌파한 적이 홍천고개 부근으로 진출하여 자은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제3사단 제18-1대대는 자은리로 긴급히 진출한 제8-10연대와 협동작전으로 714고지 부근에서 소양강쪽으로 격퇴시켰다. 이대 제3사단은 제10연대를 배속받아 제8사단이 피탈당한 소양강 남쪽의 내평리 일대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적이 홍천고개를 진출하게 되면서 정자동-샘천-매봉을 경유하여 어론리 부근으로 침투하여 퇴로차단을 기도하였다. 이에 제3사단장은 예하 연대들에게 홍천고개-장남리-부봉울 연하는 선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12. 27 이에 군단은 피탈된 주저항선을 회복토록 명령하여 27일 09:00시에 제3-18연대와 좌인접에서 제8사단의 증원부대로 투입된 제7-8연대와 병진공격으로 공격하여 정자동일대를, 우전방 제22연대는 어론리 북쪽의 하다물리를 확보한다.
12.27~29 계속된 전투에서 제3-18연대는 매봉일대에서 격전을 거쳐 721고지로 진출하였으나 좌인접에서 가리산 북쪽으로 진출 중인 제7-8연대가 진출 중에 인민군 2개 연대 규모가 공격을 감행하여 잠시 돈좌되었으나 유엔공군의 지원하에 결국 돌파하여, 매봉-정자동-어론리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당시에 인민군 제10사단이 제2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상수내리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엇고, 후방인 창봉리에도 2개 대대규모의 패잔병이 활동하고 있어 양구-인제 남쪽의 소양강변에는 불안한 대치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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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리부근 전투
자은리 북방의 소양강변에서 제3사단과 제8사단이 인민군과 접전을 벌이는 동안 현리 북방의 제9사단은 제28연대가 원대리-현리, 제29연대가 현리-하치전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30연대는 예비로 창촌에서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한다.
12. 24~26일, 오대산으로 진출을 기대하던 인민군 제2군단 및 유격부대들이 국군의 부대이동의 취약시기에 서림리 등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설악산맥으로 침투한 적이 하치전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에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우측의 수도사단장에게 서림리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한다.
12. 26~27일 현리와 하치전으로 진출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는데, 의외로 적이 좌측 후방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3개 연대의 적이 전투지경선닌 매봉산-길향산-대암산을 연하는 산악을 따라 은밀침투로 상남리 남쪽의 가득봉으로 진출하여 사단의 후방지역을 위협한다. 27일 현리를 재탈환하고 주저항선을회복하기 위해 공격작전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미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한 적이 광원리. 창촌을 경유하여 오대산으로 진출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2. 28~30일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에게 제9사단을 증원하도록 하여 29일 하치전과 갈마곡봉으로 증원부대를 배치한다
하지만 제9사단은 30일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항선에서 철수하여 제28연대를 부봉-침교에, 제29연대를 상남리 일대에 재배치하게 되는데 이미 적은 오대산으로 진출하였다.
나. 미 제10군단의 재배치
이와같이 전선은 12월 23일까지는 38도선을 연하여 방어선은 점령했지만 종심이 잛고, 방어정면이 광정면으로 동부징녁 전선은 취약점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부는 충주에서 정비 중인 미 제2사단은 홍천-원주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흥남에서 철수한 미 제10군단을 부대정비가 완료되지 않아 전선 투입이 불가한 상황에서 우선 집결이 완료된 미 제7사단을 제천방면으로 투입시켜 원주 방면의 미 제2사단과 협조하여 춘천.인제 방면에서 횡성. 원주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원주-제천-단양-안동보급로를 경계하도록 한다.
도한 부산에서 마산으로 집결 중인 미 제1해병사단을 포항으로 이동시키고, 경주 남쪽의 미 제3사단은 평택-안성으로 이동시켜 미 제1, 제9군단지역으로 투입될 준비를 갖추었다.
6. 미 제8군사령관 교체 '50. 12. 26일 "워커에서 리지웨이 장군으로"
'50년 12월 23일, 영국군 제27여단을 표창하기 위해 지프차로 서울을 떠너 덕정부근을 통과하던 중에 에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전사하였다. 그리고 미 육군성 작전참모 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26일 제8군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이 대통령 : 우리 국군과 더불어 진심으로 장군을 환영합니다
리지웨이 :저는 한국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
이승만 :지금 중공군의 대부대가 서울 문턱까지 진출하고 있는데 장군은 어떻게 싸울겁니까?
리지웨이 : 준비가 끝나는대로 곡 공격하게 될 겁니다.
이승만 :장군의 가슴 양쪽에 수류탄을 달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든든한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리지웨이 : 저는 공수부대 출신이며, 항상 이런 복장으로 전투에 임해 왔습니다.
이승만 : 우리 지휘관들도 리지웨이 장군처럼 수류탄을 달도록 하라고 하라고 웃으면서 정 총참모장에게 말했다.
제 4 절 공산군의 38도선 전개
1. 북한군의 재건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으로 붕괴직전에 몰린 김일성은 10월 중순, 일부 부대로 지연전을 펴면서 일부병려과 후방 부대들을 한만국경선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북한군 부대들은 유엔군의 맹추격을 받으며 신의주와 강계로 철수하여 갔다.
북한군은 '50. 10~11월에 6개군단과 15개 사단을 신편하여 11월 14일에는 총 8개군단, 25개 보병사단 등 총 25만~27만 병력 수준을 유지한다. 이중 신편된 제3. 제4. 제5군단의 6개 사단은 북한지역 내에서 재편성한 후 훈련시켜 전투에 투입하고, 예비부대인 제6. 제7. 제8군단의 9개 사단을 중공과 협력하여 간도와 길림 일대에서 주로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으로 편성하여 군예비로 활용하고, 그 밖에 군관학교. 정치학교. 전차훈련연대. 항공훈련연대 등도 중공군과 협조하여 만주에서 편성하여 훈련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소련 스탈린에게 강력히 요청하여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군 군관 800명 규모의 교육긱관을 창설하고, 1월 중순경에는 소련에서 훈련 중인 119명의 북한조종사로 2개 전투비행연대와 1개폭격기연대를 편성해 줄 것을 요청하고, 소련에 유학 중인 북한 대학생 200명을 선발하여 비행사로 양성토록 하며, 전차병 1,000명 톤신병 500명, 공병군관 500명 등을 양성해 줄 것을 요구한다.
2. 주중 연합작전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평양에서 강계로 물러난 김일성은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협의하에 북한군과 중공군의 작전을 통합하기 위하여 양군의 장교들로 구성돈 연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50. 11월 30일 북한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연합사령부에 중공군은 중국인민지원사령부 예하에 중국군 지원부대를, 북한인민군사령부 예하에 북한인민지원부대를 통제하도록 하여, 12월 상순에 연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초대 사령관은 팽덕회가 되고, 인민군측에서는 부사령관 1명과 다른 1명의 정치위원을 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연합사령부를 대외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3. 공산군의 38도선 진출
중공군 제2차공세(11워 ㄹ공세)로 미 제8군이 군ㄴ우리에서 평양 북쪽으로 철수함으로서 중공군 제13병단이 청천강 교두보지역을 확보한다. 하지만 그들도 인적피해와 탄약과 식량이 소진되어 ㄷㅓ이상 추격작전잉 불가능하였다.
이때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일부 부대간 유엔구능ㄹ 추격하고, 주력부대는 안주-개천-신창리-북창리를 연하선에서 4~5일간 휴식과 부대정비를 명하였다.
중공군은 12월 4일, 아군의 평양철수를 간파하고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들은 중공군 1개 군과 북한군 1~2개 삭단으로 정면에서 아군을 고착 견제하고, 5개 군이 평양을 우회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아군이 자발적인 철수로 무산되자, 이번에는 평양 남쪽에서 17일 중화-상원-수안지역으로 공격을 재개토록 하였으니 이마저도 유엔군이 38선 으로 철수함에 따라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된다.
이렇게 되자 상대적으로 그들의 병참선이 신장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자 38도선 북족에서 추격을 중지한다.
중공군은 다음해에 새로운 공격작전을 작전을 개시하여 38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북한군 제1군단을 개성, 제13병단 예하 중공군 제50군을 금천, 제39군을 구화리, 제40군을 삭령, 제38군을 연천, 제42군은 철원, 제66군을 화천, 그리고 인민군 제2. 제5군단을 양구-인제로 진출 시켰다.
제5절 자유의 선택과 투쟁
1. 실향민의 월남
가 평안도 지역의 피난
12월 4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를 개시하자, 철교는 복구되지 않았고 이 다리앞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은 발만 구르고 있었다. 일부는 물에 뛰어들어 익사하기도 하고, 일부는 철교난간을 붙잡고 곡에사처럼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이에 군인들이 부서진 철교에 임시로 나무를 갈아 응급조치로 넘기도 하는데 4일부터 5일 낮까지 5만여 명이 넘었다. 이외에도 뗏목을 만들어 넘기도 하고 미 제8군의 도하장비와 교량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이 추가 남하한다.
진남포에 도착한 피난민은 한.미 해군의 철수작전에 3만 명은 해상으로, 2만 명은 육롤로 철수하게 된다.
당시 철수작전은 군사작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도로이동에 지장을 초래하고, 또 피난민으로 위장한 오열들이 아군 전선으로 침투해 들ㅇ어오게 되어 군은 12월 28일부터 피난민의 전선 접근을 차단하였다.
나. 황해도민의 피난
황해도는 평안도와 평양에서 남하한 피난민이 합류되면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다. 12월 중순 유엔구늬 철수에 잉어 공산군이 개성으로 진입하면서 육로피난길이 차단되었다.
이에 피난민들은 소형선박으로 해상으로 탈출을 하게 되며, 당시에 황해도의 애국청년이 향토방위대를 조직하여 이님군 제26해안경비여다늬 접근을 저지함은 물론 피난민들의 해안지역 집결을 지원하였다.
해군 함정에 의한 구출작전은 12월 7일부터 시작하여 '51.1월 말까지 계속되어 62,000명이 탈출하여 덕적도. 백령도. 연평도. 대처오. 무도 등 서해안 조서지역에 부산 수용되었다.
다. 홤경도 지방의 피난
12월 10일을 전후하여 성진. 함흥. 흥남. 원산 등의 항구에는 피난민들로큰 혼잡을 이루었다. 이에 미 제10군단자응ㄴ 최초 군인ㄴ, 경찰, 공무원 드의 가족 2만 5천을 수송하려 했으나 피난민을 54만명으로 늘렸다.
12월 15일 국군 해병대가 미 공군기편으로 연포비행장을 떠날 때, 비행장 주변에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 있었고, 12월 24일 흥남 철수작전이 완료되는 날에는 흥남부두에 배를 기다리른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기간 중에 후송한 피난민은 91,000~9,8000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와같이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서 12월 24일 마지막 38도선을 넘을 때까지 피난민은 총 100만을 상회하였다.
2. 반공 유격대의 투쟁
해방이 되면서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각 지방에서는 반공 민주인사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크고 작은 단체를 조직하여 공산정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전쟁 이전에 북한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대부분 와해 되어 버렸다.
그러다 '50. 10월 국군이 북진해 오자, 이들은 다시 조직을 재건하여 향토치안유지와 지역내 인민군 패잔병 소탕작전은 물론 각종 첩보를 수집하여 국군에 지원하였다. 그러던 중에 중공군의 침략으로 상황이 역전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이들도 진퇴양란에 봉착하였다.
이때 공산군의 보복을 우려한 대부분의 무장단체들은 국군을 따라 남하하였으나, 해안 일대에서 활동한 일부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을 확신하며 무장유격대로 전환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황해도 지역에 집중되어 내륙 구월산 일대는 송화치안대. 연풍부대. 백호부대 등이 활동했고, 은율. 장연. 옹진 등으ㅢ 서해안 지역에는 신천무장치안대. 송림부대. 옹진학도유격대 등이 활동했다. 동해안에는 활동 근거지가 부족하여 고원 청년유격대가 원산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피난민의 해안집결을 엄호하고, 때로는 적에게 노출되어 밤낮으로 도피 및 탈출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분전에도 유격대들은 결국 인민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대부분 1951년 1월 말 백령도, 초도 등으로 철수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재반격을 기다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