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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래디에이터>에서
[ 영화, 글래디에이터 ]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무려 1억 1,000만 달러를 투입한 블록버스터 영화였습니다. 로마시대를 완벽히 재현하기 위하여 2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몰타, 모로코, 영국 등 4개국에서 촬영하였으며, 막대한 제작비와 향상된 기술을 바탕으로 <벤허>를 능가할 만한 웅장한 볼거리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감독 리들리 스콧은 영화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정확한 고증을 위해 역사학자들을 고문으로 두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또한 주어진 배경을 누구보다 밀도 있게 담아내는 리들리 스콧 특유의 영상 스타일과 블록버스터답게 스케일 크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씬들이 관객들에게 보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며, 도입부에 나오는 북방 게르만족과의 10분 동안의 전투장면에서는 실제로 영국의 산 하나를 모두 불태워 촬영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검투사 조련사인 프록시모역의 올리버 리드가 촬영 도중에 숨지자, 2분여 남은 그의 연기 장면을 위하여 320만 달러를 들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의 모습을 완벽히 복원하여 촬영을 마쳤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0년에 전 세계에서 개봉하여 흥행은 물론 비평가들로부터도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국내에서도 그해 6월 3일 개봉하여 서울에서만 13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습니다.
제 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의상상을 비롯해 총 5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특히 주인공 막시무스 역을 맡은 러셀 크로우의 강렬한 연기는 숱한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밖에 2001년 골든글로브상의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 MTV영화상의 최우수영화상, 영국아카데미상의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하였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로마 제국 최고 전성기로 꼽히는 이른바 오현제(五賢帝) 시대의 마지막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습니다. 우리에게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진 바로 그 황제입니다. 그는 철학에 대해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사정은 그를 한가롭게 학문에만 매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이민족이 침입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독서와 사색을 좋아하는 철인(哲人) 황제가 전쟁을 반겼을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직접 전장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바로 이 전쟁터에서 시작합니다. 로마 군대를 이끌고 게르만 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로마 장군 막시무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황제에게는 콤모두스라는 망나니 아들이 있는데, 황제는 자기 아들보다 막시무스를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막시무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로마 공화정의 부활인데, 이를 실현시키는 데에는 탐욕스러운 콤모두스보다 올바른 품성을 가진 막시무스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황제가 자기가 아닌 막시무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콤모두스는 질투와 분노를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황제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황제가 자연사한 것처럼 꾸밉니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직감적으로 황제가 콤모두스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부친의 죽음과 동시에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콤모두스는 황제의 근위대에게 막시무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합니다. 막시무스는 그 즉시 처형장으로 끌려가지만 처형 직전에 근위대와 혈투를 벌이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몇 날 며칠을 달려 에스파냐에 있는 고향집에 도착합니다. 고향집에서 막시무스는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경악합니다. 아들과 아내, 병사들이 모두 불에 타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땅에 묻고 탈진해 정신을 잃은 막시무스는 한 노예 상인에 의해 발견됩니다. 노예 상인은 그를 프록시모라는 사람에게 팔아넘깁니다. 검투사 출신인 프록시모는 노예들을 검투사로 훈련시키고 이들을 시합에 내보내 돈을 벌고 있습니다. 이런 프록시모에게 팔려간 막시무스는 검투사가 됩니다.
검투사 시합에서 막시무스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다진 실력을 바탕으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합니다. 검투사로서 그는 스페인 출신이라는 뜻의 스패냐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승리를 거듭하면서 영웅이 된 스패냐드는 마침내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검투 시합에 참가하게 됩니다. 콜로세움에서의 첫 시합에서 막시무스와 그의 동료 검투사들은 전차를 타고 나타난 병사들을 모두 무찔러 관중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습니다.
시합이 끝나자 황제인 콤모두스가 검투사들 앞에 나타난다. 이 자리에서 막시무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이에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가 그를 죽이려 하지만 막시무스에게 열광하는 관중들 앞에서 그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합니다. 이후 막시무스는 그를 죽이기 위해 콤모두스가 보낸 불패의 검투사 타이그리스와 싸움을 벌여 그를 쓰러뜨립니다.
막시무스의 공격을 받고 바닥에 쓰러진 타이그리스. 황제는 그를 죽이라고 하지만 막시무스는 그를 살려줍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비로운 막시무스'로 통하게 됩니다.
그 후 막시무스는 하인이었던 키케로를 만나 그가 지휘하던 군대가 여전히 그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막시무스는 콤모두스의 누이 루실라, 원로원의 그라쿠스와 공모해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낌새를 알아챈 콤모두스가 루실라를 협박해 계획을 알아내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고, 탈출을 시도하던 막시무스 역시 붙잡힙니다.
콤모두스는 자기가 직접 막시무스와 결투를 벌여 그를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경기에 앞서 막시무스를 찾아간 콤모두스는 칼로 막시무스를 찌릅니다. 그런 다음 상처를 가리고 갑옷을 입혀 경기장에 내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애초부터 공정한 시합이 아닌 셈이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수만 관중이 보는 가운데 시합을 벌입니다.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막시무스는 점점 무너져가는 몸을 추스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콤코모두스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콤모두스의 목을 찔러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황제의 뜻을 전한 후 그 자신도 숨을 거두게 됩니다.
[ 로마의 검투사 ]
ㅇ 검투사의 기원
로마의 장군들은 엄청난 전리품과 포로들을 챙기고 금의환향하여,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하는 개선식을 벌였는데, 로마 시민들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자극적인 볼거리가 바로 전쟁 포로들을 싸움꾼으로 훈련시켜 아레나라는 경기장에 검투사를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의 무공을 선전할 수 있었고, 또 시민들은 신나는 볼거리에 만족하여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곤 했던 겁니다.
로마의 위정자들은 시민들의 지지 없이는 맘 편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수시로 식량을 베풀고 볼거리들을 제공하여,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을 부양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국고에 기대지 않고 자신들의 사비를 쓰면서 공공건물을 짓고 사회에 베풀었던 계층이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가문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유력자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볼거리를 제공하여 하객 특히 로마 시민들을 기쁘게 해주는데, 자신들의 양성한 검투사나 혹은 시장에서 사온 검투사들을 풀어 경기를 치렀던 게 바로 검투사 경기가 시작됐던 효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엔 개인적으로 주최한 검투사 경기가, 시민들의 인기를 모으다 보니까 나중에는 황제들의 전유물이 되고, 간혹 민심 무마용으로 활용되면서 공식 경기로 점차 자리 잡아 나아갔습니다.
ㅇ 검투사의 신분
검투사는 대개 전쟁의 포로들이었습니다. 물론 신체조건이 좋고 경기장에서 제 몫을 다하는 인물들이어야 하니, 전쟁 포로라고 해서 무조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는 잦은 해외정복으로, 국내로 들여오는 노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이들은 군사령관이 시장에 직접 내다팔 수 있어 국고를 늘리는데 유용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로마의 유력자들이 사재를 털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당연한 권리로서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본전을 회수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인간에 대한 평등사상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를 말하는 도구라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경기장에서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또 상금을 엄청 벌어 재산가가 된다고 해도, 검투사는 검투사요, 전쟁포로이자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에겐 검투사는 인간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래서 경기장에서 참혹하게 살륙되어도 로마 시민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경기가 끝나면 대단히 만족하면서 귀가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 시민 쳐놓고, 남자라면 전쟁터에서 적을 죽여본 본 경험이 누구나 있었습니다. 따라서 죽음, 살인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신이 천한 검투사도 경기장에서 인기를 얻고 또 돈도 벌게되고, 나중에 로마의 국운이 기울고 경제사정도 안 좋아지자, 일반 시민들도 하나 둘 씩 검투사를 자원하게 됩니다. 목숨을 걸을 만큼, 생계가 절박해진 결과였습니다.
*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레온 제롬이 그린 최고의 검투사 그림
검투사는 대개 평균 만17세에 시작하여 23세에 경기장에서 싸우다가 죽는데, 운좋게 살아 남아 장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5년간의 계약이 끝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유를 사서 당당하게 로마 시민으로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렇게 숨가쁜 삶을 살았어도 은퇴한 후의 삶은 초라하게 외로웠습니다. 사회에 적응을 못하니, 나중엔 구걸을 하고 노숙을 하다가 행려병자로 쓸쓸하게 여생을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ㅇ 검투사의 종류
대부분의 검투사는 저마다 투구를 써서 머리를 보호하는데, 이중 그물 검투사는 맨 머리였습니다. 아무래도 시야확보가 좋아야 그물을 던져 적을 포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얼굴에 자신 있는 미남 검투사가 주로 그물 검투사로 활약하는데, 검투사는 당대의 스타들이어서 여성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습니다.
그물 검투사의 또 다른 주무기는 삼지창이어서, 거리를 두고 싸우는데 능했습니다. 영화 <스팔타커스>에서 삼지창을 든 그물 검투사와 싸우는 주인공 커크 다글라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로마 군인들의 주무기이기도 했던 글라디우스 검은 뒤엉켜 싸우는 무기여서, 마치 아웃복서와 인파이터의 싸움을 보는 듯합니다. 복서와 유도선수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 글라디우스 검
철갑 검투사는, 로마 군단의 중장보병이 그 모델인데, 투구 전면에 나 있는 두 개의 구멍으로 시야를 확보하기 때문에, 맨 머리의 그물 검투사의 기동성에 비할 바 못됩니다. 더욱이 20~30kg의 무장 때문에 땀 범벅이어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합니다. 그래도 그물만 피하면 승률이 높습니다.
로마인들은 원래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갈리아나 북방으로 원정 가서 잡아온 포로들이 대부분 장신에 금발이어서 이런 사람들을 검투사로 쓰면 로마 시민이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동방원정에선 주로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 지방) 출신의 검투사가 많은데, 가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로서 그들 특유의 희어진 칼이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갈리아 출신의 검투사와 다키아 출신이 한 조를 이루는 경기가 인기가 높았습니다. 전자는 물고기 검투사로 불리웠는데, 투구 정수리에 물고기 조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처럼 마차를 탄 검투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기엔 그럴듯 했지만 돈이 많이 들어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차 검투사보다는 돈이 덜 드는 기사 검투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검투사들이 이렇게 무장의 형태로 물고기 검투사, 그물 검투사, 기사 검투사 등으로 분류되는데, 지역출신별로 갈리아 검투사, 다키아 검투사, 게르만 검투사 등으로도 분류됩니다. 하지만, 인기와 받는 보수 그리고 경력으로 1급에서 4급으로 분류하여 경기장에 내보냅니다.
우선 신참과 선참으로 구분하며, 선참 중 전적에 따라 1급~2급으로 매겨집니다. 신참은 4급으로 주어지며, 만17세에 입문하여, 밥 먹고 하는 일이 훈련에 또 훈련... 훈련에 충실할 수록 경기장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서입니다. 또 신참 중에서도 타고난 싸움꾼이라면 선배들을 제압하고 당당한 1급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평균 나이 23세에 불과할 정도로 검투사들은 단명하는 신세였습니다. 로마 대중의 눈요기를 위해 아주 짧은 인생을 살고 가는 하루살이 같은 저주받은 운명들이었습니다.
ㅇ 검투사의 하루
검투사들은 경기 전날 저녁, 다음날 경기를 위해 성찬을 즐깁니다. 말이 즐긴다는 것이지, 죽음을 눈앞에 둔 경기에 앞선 식사이니 식욕이 날 리가 없습니다.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출신 등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검투사들 소수만이 성찬을 즐길 뿐입니다.
날이 밝으면, 주최측은 노예들을 동원하여 경기 준비에 바쁩니다. 오전에는 맨 처음, 관중들 앞에서 사열식, 즉 검투사들의 행렬이 선보입니다. 그 다음에 코끼리, 낙타, 코뿔소 등 희귀동물도 대열에 참가하여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그런 다음, 나팔수의 신호에 따라 우선 맹수들이 경기장에 풀어집니다. 맹수들은 어둠 속에서 밤을 지내다가, 좁은 통로로 나오면서 갑자기 열려진 문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처음에는 당황해 합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다른 맹수들에 떠밀려서 모래밭 광장에 몰려 나갑니다. 이윽고 관중의 요란 함성에 놀라 포효하면서 경기장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포효와 함성으로 경기장 밖에서도 난리가 아닙니다.
* <글래디에이터>에서
맹수들의 묘기보다는 서로가 물어뜯고 싸우는 것을 즐기려는 것인데, 이후 기독교도인들이 맹수의 제물로 던져지면서 순교에 의한 기독교 세력 확산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검투사들 중 일부는 맹수사냥 검투사들이 있어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정오에는 십자가 등에 의한 죄수들의 처형식이 거행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여지나, 원래는 이렇게 로마의 처형대였던 것입니다. 죄수의 처형엔 십자가형 외에 화형이 있고, 또 맹수에게 잡혀 먹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이나 화형은 당하는 이에겐 지극한 고통이었으나 관중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최측은 관중들이 좋아하는 맹수를 풀어 죄수를 처형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정오의 처형이 진행되는 동안, 관중들은 화장실도 갔다 오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도 까먹고, 오후의 하일라이트인 검투사 경기를 기다립니다. 이윽고 시간이 되면, 우선 급수가 낮은 초보 검투사들이 진짜 싸움이 아닌 흉내내기 싸움을 보여주는데, 일종의 애피타이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코믹한 연기 등으로 관중을 본 경기를 더욱 기다리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초보 검투사들의 공연 검투사의 연기가 끝나면, 드디어 메인 게임이 펼쳐집니다. 바로 위에서 소개한 여러 종류의 검투사들이 2인1조씩 등장하면서 피의 혈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죠.
검투사들 경기는 전쟁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또 인정에 얽매여 살살 싸우면, 심판이나 관중들에게 단번에 비난을 받게됩니다. 또한 내가 살살 한다고 해도 상대가 야비하게 나오면 내 목숨이 날아가는 겁니다.
경기는 대개 15분 내에 결판이 나고, 승산이 없는 검투사는 손을 들어 상대의 처분에 목숨을 맡깁니다. 그러면 이긴 검투사는 심판이나 혹은 관중들에게 칼을 치켜 세우고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일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화에서 보듯이 대개의 경우 관중의 의사가 작용하는데, 엄지 손가락을 올리면 살고 내리면 죽는 것으로 판결납니다. 그렇다고 항상 패자에게 죽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용감하게 싸우고, 싸움기술이 대단하면 관중은 엄지를 올리면서 살려주기도 했습니다.
ㅇ 검투사 경기를 즐기는 로마 시민들의 심리
칼을 사용하는 것이 일상적인 시대였고,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전장에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죽이는 것을 본 일도 거의 없는 오늘날의 잣대로 잔인성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도 같은 로마인끼리의 살해는 금지했습니다.
검투사 경기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잔인성에 대한 기준 자체가 오늘날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철학자이면서 도덕주의자였던 키케로나 세네카도 경기를 관람하러 갔고, 검투사들의 용맹함과 성실성을 칭찬했습니다. 이들이 비난한 것은 즐거움만 추구하고 집단 난투극도 서슴지 않는 로마인들의 태도였지 검투사 경기의 잔인성이나 검투사의 비참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재미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검투사 경기만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경기가 없었겠지만 로마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경기이자 자연스런 놀이일 뿐이었습니다.
< 검투사들의 최대의 경기장 -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
영화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로마의 콜로세움은 AD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80년에 끝났습니다. 이후 100일 축제 기간이 이어졌고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습니다. 대리석으로 건축된 이 대규모 원형 경기장은 처음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 경기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약 5만 명 가량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경기장은 검투사들의 경기뿐만 아니라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콜로세움은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에는 유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 가문과 안니발디 가문에 의해 요새로 이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이 건물은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나 주민들이 돌을 약탈해 가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인한 여흥을 즐겼던 인간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기념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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