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돈방석에 앉아있는 프랑스의 음악가가 있다. 볼레로(bolero)로 매년 220만
달러 이상을 벌고 있는 모리스 라벨이 그 주인공이다. 1937년 사망 이후부터 2001년까지 그가 벌어들인
총 수익은 6300만 달러에 이른다. 모두 "볼레로" 한 작품으로 번 금액이다.
작곡가들은 물론이요. 어느 누구도 이 독특한 구조의 관현악곡이 이토록 큰 인기를 모을 줄 예측하지 못했다.
라벨은 "볼레로" 에 음악이라고 할만할 것이 들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볼레로는 라벨의 최후의 역작이다.
모리스 라벨은 스위스 발명가 조제프 라벨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벨이 어렸을때 그의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다.
일찍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푸가, 캐논 등의 형식적인 훈련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몇년동안 로마대상에 도전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그는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를 작곡했다.
1905년 라벨은 서른살의 나이로 로마대상에 다시 도전했다. 그의 다섯번째 도전은 프랑스 언론에 기사화되었지만 그는 다시 예선에서 떨어졌다.
라벨은 항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키가 150센티미터 조금 넘는 단신이었지만 항상 말쑥한 차림의 멋쟁이였으며 예술 애호가다운 점잖고 세련된 매너를 갖추고 아파치라는 그룹의 지식인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아파치란 사실 이 그룹의 성격과는 분명히 다른 거리의 불량배를 가리키는 파리의 속어이다.
길에서 라벨의 동료들과 부딪힌 한 노점상이 그들을 향해 "조심해. 이 건달들아!" 라고 외친이후로 이러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라벨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그가 동성애자라는 증거는 모두 일화와 상황에 근거한 주장일 뿐이다.
라벨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타이즈와 발레복을 입고 동료들앞에서 춤을 추는 그의 습관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수 밖에 없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후 라벨은 마흔의 나이로 부대트럭 기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베르됭 전투같은 전쟁의 공포앞에서 그도 예외일수 없었다. 라벨은 대학살의 현장에 던져진 젊은 병사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쿠프랭의 무덤이라는 피아노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 라벨은 17세기의 우아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했으며 여섯개의 섹션을 전쟁에서 죽어간 친구에게 헌정했다. 곡이 슬프다기보다 가볍고 유쾌하다는 말을 들을떄마다 라벨은 "죽은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슬퍼했거든요"라고 답했다.
전쟁이 끝나갈무렵 라벨은 이미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1920년 1월 레종 도뇌르 훈장 수여자로 결정된 라벨은 수상을 거부하여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훈장 수여자들 대부분이 그 상을 받을려고 용의주도하게 계획해왔다고 생각했고 그들과 한패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1928년에 라벨은 그의 대표작 볼레로를 완성시켰다. 오늘날 이작품의 인기를 생각해보면 발표당시 청중들의 당혹감을 짐작하기란 쉽지않다. 15분동안 한가지 선율이 아홉번 반복되는 이곡은 중간에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가 바뀌는것 말고는 별다른 음악적인 변화도 없다. 하지만 라벨은 이작품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다.
1930년대 초부터 라벨은 기억착오 증세를 겪기 시작했다. 언젠가 바닷가를 찾는 그는 갑자기 수영하는 법이 떠오르지 않아 크게 당황했다. 게다가 머릿속에 들어있던 사람들의 이름까지 잊어버린 나머지 어떻게 설명할지 매번 궁리해야 했다. 1937년 마침내 한 의사의 제안으로 뇌엽을 체액으로 팽창시키는 실험적 수술을 받은 라벨은 곧 깨어나 동생을 찾았지만 바로 다시 의식불명상태에 빠져 그로부터 9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그의 병명을 전두측두 치매로 진단하고 있다. 뇌의 앞부분에 이상이 생기면서 뒷부분이 활성화되는 증상인데 이병의 초기 단계에서는 창의성이 급속도로 발달한다. 또한 구조 체계에 대한 감각과 반복 형태를 구사하는 능력이 놀라울정도로 발달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신경학자가 볼레로 의 반복적인 구조가 라벨이 이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력을 인정받아 한때 베를린필도 지휘했던 첼리비다케의 광기어린 모습도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