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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문화의 전도사
박경자 시집 『프엉꽃이 데려온 여름』
맹문재
1.
박경자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베트남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담아낸 시인으로 평가될 것이다. 시인은 베트남의 음식, 시장, 가족, 혼례, 제례, 직장 생활 등을 관광객처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함께하면서 이해하고 습득하고 있다. 시인이 베트남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라고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문화의 뿌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동질감을 가지고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체험에 의한 시인의 시편들은 구체적이고 진정성을 갖는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에 합의한 이후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산업기술, 관광, 교육, 결혼,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가 증대하고 있다. 베트남에 있는 한국인 수와 한국에 있는 베트남인 수가 각각 10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양국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증명해준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뒤 역사 문제도 개선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양국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데, 국가 차원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동참 역시 요구된다. 베트남을 동남아시아의 한 시장이나 관광지로 여기는 편협되고 표피적인 자세를 극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담은 시인으로는 김태수를 들 수 있다. 그가 간행한 시집 『베트남, 내가 두고 온 나라』는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정직하게 증언하면서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참전했던 자신을 참회하고 있다. 생명을 건 수당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참전한 일이 결국 거대한 제국주의의 폭력에 동조한 것임을 깨닫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김남일, 박영한, 방현석, 오현미, 이대환, 이원규, 조해인, 황석영 등이 쓴 소설과 김준태, 하종오 등이 쓴 시작품이 있지만,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충분히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베트남의 시인이나 소설가로도 반레, 찜짱, 휴틴, 탄타오, 바오닌, 응웬반봉, 응웬옥뜨 정도만 한국에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역사적인 전망을 가지고 베트남의 문화를 구체적으로 담아낸 박경자 시인의 작품들은 주목된다.
2.
박경자 시인의 시집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음식들이다. 베트남의 녹두로 만든 빈대떡, 반까오 거리의 마트에서 사온 막걸리, 쑤언 할머니집 앞에서 삶고 있는 쌀국수, 신들만 먹었다고 전해지는 달고 맛있는 과일인 두리안(durian), 따뜻하고 꽃 모양의 과일인 나(Na), 담장 안에 달린 망고, 두리안처럼 생긴 커다란 과일인 밋(Jackfruit), 대나무 밥, 설 명절에 먹는 전통 떡인 반뗏(Banh Tet), 그리고 분짜((Bun Cha) 등이 시집 속에 풍요롭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재래시장이 가까운 곳이었다
나와 지엠은 노상에 앉아 분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면을 말하는 분과 고기를 말하는 짜가 합쳐져서
이름이 분짜라고 했다
팔꿈치가 닿을 듯이 모여 앉은
우리의 옆자리에도 그 옆자리에도
푸른 향신채와 소스가 담긴 그릇이 먼저 나오는 사이
즐비한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이 채워지고
거리가 주방인 그곳은
마치 커다란 광장 같았다
이마를 맞댄 동료들이 있고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빠가 있다
그릇을 나르는 남자의 표정은 넉넉하고
달콤 짭짤한 양념을 부채질하는 숯불 앞의 여자는
더위 먹은 입맛을 부추겼다
아무리 더워도 먹고 싶다는 눈빛 때문인지
거리를 메운 고기 냄새 때문인지
가로수는 그늘을 늘리고
오토바이는 경적을 멈춘다
나는 옆에 앉은 지엠을 따라
소스가 담긴 그릇에 고기와 고수를 담그고
쌀로 만든 면을 넣었다
젓가락을 휘휘 저어
고기와 면과 고수를 감아올리면
하늘하늘 프엉꽃이 웃고 새들도 떠드는
잊을 수 없는 거리가 된다
―「분짜 거리」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면을 말하는 분과 고기를 말하는 짜가 합쳐져서/이름이 분짜라고” 하는 음식을 먹고 있다. 분짜를 파는 곳은 “재래시장이 가까운 곳이었”는데, “팔꿈치가 닿을 듯이 모여 앉은/우리의 옆자리에도 그 옆자리에도” 사람들이 들어차 “거리가 주방”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마치 커다란 광장 같”은 그곳에 “이마를 맞댄 동료들이 있고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빠가 있”을 만큼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 한국 사람인 “나”와 베트남 사람인 “지엠”이 함께 “분짜”를 즐겨 먹는 장면은 눈길을 끈다. “분짜”를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옆에 앉은 지엠을 따라/소스가 담긴 그릇에 고기와 고수를 담그고/쌀로 만든 면을 넣”고 “젓가락을 휘휘 저어/고기와 면과 고수를 감아올”려 먹는다. 화자는 “분짜”의 이 기막힌 맛을 “하늘하늘 프엉꽃이 웃고 새들도 떠드는/잊을 수 없는 거리”가 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국 사람인 “나”와 베트남 사람인 “지엠”이 함께 “분짜”를 먹는 모습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고 인정을 나누기에 끼니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분짜”를 먹을 줄 모르는 화자가 “지엠”이 친절하게 알려주는 대로 따라 먹기에 의사소통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은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토요일 오전에 미역국을 끓여서 디엡에게 갔다
발간색 내복과 양말을 신은 디엡이 문을 연다
산모의 얼굴이 푸석푸석하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가 미역국을 반긴다
식탁에는 밥과 말려서 갈아놓은 돼지고기가 있다
막 밥을 먹으려던 그녀는 나에게 같이 먹자고 한다
노랗게 쪄진 밥 위에 포슬포슬한 루억을 얹고서
우리는 마주보고 웃는다
미역국과 루억이 만난 식탁에는
야자나무에 꽃이 피는 동안 아들을 낳은 디엡과
말하지 않아도 오가는 다정함이 있다
적도 부근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십이월,
나는 그녀에게 자꾸만 더 먹어라 미역국을 권하고
그녀는 내 앞으로 루억을 밀어놓는다
―「미역국과 루억」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토요일 오전에 미역국을 끓여서 디엡”을 방문했다. “발간색 내복과 양말을 신은 디엡이 문을” 여는데, “산모의 얼굴이 푸석푸석하다”. 그러면서도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가 미역국을 반긴다”.
“밥과 말려서 갈아놓은 돼지고기가 있”는 식탁에서 “막 밥을 먹으려던 그녀는” 화자에게 “같이 먹자고” 인정을 베푼다. 그리하여 “노랗게 쪄진 밥 위에 포슬포슬한 루억을 얹고서”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미역국과 루억이 만난 식탁에는/야자나무에 꽃이 피는 동안 아들을 낳은 디엡과/말하지 않아도 오가는 다정함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모습은 “적도 부근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십이월,/나는 그녀에게 자꾸만 더 먹어라 미역국을 권하고/그녀는 내 앞으로 루억을 밀어놓는” 데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산후조리의 음식으로 “미역국”을 필수적으로 먹는다. 임신했을 때 못지않게 출산한 뒤에도 영양 보충이 필요한데, “미역국” 섭취로 조달하는 것이다. 칼슘과 비타민 등이 풍부한 미역은 몸이 약해진 산모의 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하여 화자는 “미역국”을 끓여 “디엡”을 찾아간 것이다. 물론 “미역국”이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디엡”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져갔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미역국을 반”겼다. 그 결과 “디엡”에게는 돼지고기로 만든 “루억”에다가 “미역국”이 더해져 보양식이 훨씬 풍요로워진 것이다.
화자가 “디엡”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었다. 화자는 여성이 출산할 때 느끼는 고통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국적의 차이와 상관없이 동질감을 가지고 “디엡”에게 “미역국”을 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음식물을 끼니를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빨간색 구두를 신고 오는 “타오”가 “고향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나는 좋아”하고, 그녀는 “내가 만든 김밥과 김치를 좋아”(「빨간 구두 타오」)하듯이 음식물 교류를 통해 연대의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히에우가 가족과 함께 만들었다며/바나나 잎에 찐 떡”인 “반뗏”(「반뗏을 먹다」)을 가지고 와 화자와 나누어 먹는 모습도 그러하다. 화자가 “디엡과 함께 ‘나’라고 하는 이름의 껍질을 벗”기면서 “베트남 8월의 시장에는 온통/너와 함께 ‘나’가 기다리고 있”(「나(Na)」)다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화자는 음식 문화의 교류로써 국적의 차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3.
1.
캄캄한 동네를 돌고 돌아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에
조안이 서 있었다
마당에는 제사를 지낸 친척들이 기다렸다
나는 조안의 아버지를 모신 신주 앞에 향을 올리고 인사했다
큰아버지와 고모와 사촌들이
이방인을 환영했다
술잔을 권하고 악수를 청했다
이방인은 그들과 술잔으로 통했다
2.
식사를 하는 동안 남자들이 주방을 들락거렸다
조안이 내 그릇에 음식들을 놓아주었다
고수와 함께 볶은 조갯살은 조안의 누나가 만들었다
홀로된 어머니를 보살피는 누나가 있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살뜰히 챙기는 큰아버지가 있고
부지런하고 구김 없는 조안이 있었다
발음되지 않는 언어들이
마주보며 목을 타고 흐르는 밤이었다
3.
조안의 어머니가
코코넛이 씹히는 초록색 떡과
녹두 가루가 섞인 달달한 과자를 선물했다
과자통 밑에서 지폐 두 장이 나왔다
오늘 밤, 시간을 거슬러
나는 시골 삼촌 댁을 다녀온 것 같다
작은 손에 차비를 꼭 쥐여주시던 숙모님이 그립다
―「조안의 가족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가깝게 지내는 “조안”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아버지를 모신 신주 앞에 향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화자가 예를 갖추자 그녀의 “큰아버지와 고모와 사촌들이/이방인을 환영”하고 “술잔을 권하고 악수를 청했다”. 그리하여 화자 역시 “그들과 술잔으로 통”할 정도로 기꺼이 함께했다.
화자는 “식사를 하는 동안” “조안” 가족의 공동체 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안의 누나”는 “고수와 함께 볶은 조갯살”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된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살뜰히 챙기는 큰아버지가 있”는 사실도 알았다. 그와 같은 가족의 사랑을 받는 “조안”은 “내 그릇에 음식들을 놓아”줄 정도로 인정이 많았고, “부지런하고 구김 없는” 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화자는 “조안”의 가족들 앞에서 “발음되지 않는 언어들이/마주보며 목을 타고 흐르는” 감동을 느꼈다.
가족들의 인정스러움은 화자가 방문을 마치고 떠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안의 어머니가/코코넛이 씹히는 초록색 떡과/녹두 가루가 섞인 달달한 과자를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과자통 밑에” 몰래 “지폐 두 장”도 넣어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융숭한 대접을 받은 화자는 어렸을 때 “시골 삼촌 댁을 다녀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작은 손에 차비를 꼭 쥐여주시던 숙모님”도 떠올랐다.
베트남 사람들의 가족 공동체 의식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튜”는 “격주로 양쪽 부모님 집을 오가며 매달 생활비를 드리고”, “입원한 할머니의 병원비를 형제들”(「점심시간의 회식」)과 함께 부담하고 있다. “디엡”은 “설날을 기다리고/친척들을 기다렸다가/아끼는 김치를 함께 먹으려”(「김치 있어요?」)고 한다. “월급을 모두 고향의 부모님께 보내는 따오”(「봄날」)나, “조카를 위하여 지난주에 이어 또 잔치를 열”어주는 “뚜안의 큰아버지”(「두 번째 만남」)도 그러하다. 심지어 “버나인”은 아내와 딸을 버리고 네 번이나 결혼한 아버지를 내치지 않고 “안부를 묻고/엄마 몰래 용돈을 드리고/아무리 힘들어도 여전히 가족”(「안녕, 버나인」)이라고 여긴다. “리엔”은 두 번째 부인에서 태어난 “남편과 함께”(「리엔의 시아버지」) 자식이 없어 혼자 바닷가 마을에 사는 아버지의 본처 집에 친자식처럼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
이와 같은 가족 공동체 의식은 “호텔 까멜라에 작은 사당이 있”(「신들의 집」)고, “조상신에게 꽃을”(「잠옷과 꽃 자전거」) 올리려고 잠옷 차림으로 준비하는 후손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조상 숭배는 대단히 중요한 윤리이고 덕목이다. 베트남의 가보(家譜)가 조상이 돌아간 연월일, 즉 기일을 기록한 비망록의 성격이 짙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제사는 저세상으로 떠난 조상들을 편하게 쉬도록 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당에 한 상 가득 차려진 토종닭과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들
집에서 담근 전통주와 노랗게 지은 찰밥으로
잔칫상이 차려졌다
아오자이를 곱게 입은 신부의 어머니와
양복을 갖춘 신부의 아버지가 나란히
하객들 사이를 돌며 술잔을 나눈다
젊은이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 신부에게 선물을 내밀자 즉석에서 열어본다
줄줄이 이어붙인 만 동짜리 지폐가 꼬리를 물고 나온다
신부는 이미 부자다
집 앞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음악이 울리고
화려한 드레스가 조그만 시골 마을을 들썩거린다
신부는 수줍지 않다 활짝 웃고 많이 웃는다
―「피로연에서」 부분
“마당에 한 상 가득 차려진 토종닭과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들/집에서 담근 전통주와 노랗게 지은 찰밥으로/잔칫상이 차려”져 있듯이 결혼식은 그지없이 풍성하다. “아오자이를 곱게 입은 신부의 어머니와/양복을 갖춘 신부의 아버지가 나란히/하객들 사이를 돌며 술잔을 나”누듯이 정겹고 즐겁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하듯이 신랑 신부가 가계를 유지해 조상을 숭배할 수 있기를 기꺼이 축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베트남의 결혼식 풍경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한국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고장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살다가 뼈를 묻으려고 하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언젠가는 돌아와 살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기 마을에 대한 애착심이 크고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마을의 풍습과 관습도 스스로 지키려고 한다. “젊은이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누군가 신부에게 선물을 내밀자 즉석에서 열어”보아 “조그만 시골 마을”이 “들썩거”리는 것이 그 모습이다.
그렇지만 베트남의 결혼 문화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변하고 있다. 아직 인구의 70% 정도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농업국이지만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제조업 국가로 변하게 되어 결혼 문화도 달라질 것이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쑤언도/영어를 잘하는 뚜엔도/한국에서 유학한 롱도/남녀 할 것 없이/출근 시간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수만 평 대지 위에 생산의 깃발이 펄럭이는”(「장쯔에 공단」) 공장으로 몰려드는 장면에서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는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이 4천 개가 넘는다는 사실에서 증명되듯이 한국의 영향이 크다. 국제결혼의 증가도 마찬가지이다.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못한 정식 씨가 리엔 씨와 결혼을 한다
베트남 회사에서 만난 신부는 18살 연하다
정식 씨에게는 꿈도 못 꿀 일이
바다를 건너와 이루어지고 있다
젊은 신부를 위해 화려한 꽃들을 준비하고
젊은 장인 장모의 표정을 읽고 있다
호텔 야외 결혼식장에서
주변의 호기심과 날선 시선들을 한몸에 받고 있다
결혼도 전에 신부네 집에 불려가 힘든 집안일을 했다거나
처갓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추장을 들고 다닌다거나
서로에게 숙제로 남은 언어들이 허공을 떠돌고
우려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따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등장한다
멀리서도 화색이 도는 정식 씨의 얼굴에는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듯
신부를 향한 입꼬리가 올라가고
식장에는 양국의 언어가 화음을 맞춘 음악처럼 흐른다
―「한국 남자 정식 씨」 전문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못한” 한국 남성 “정식 씨”가 베트남 여성 “리엔 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베트남 회사에서 만난 신부는 18살 연하”일 정도로 “정식 씨에게는 꿈도 못 꿀 일이/바다를 건너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신랑 신부는 “호텔 야외 결혼식장에서/주변의 호기심과 날선 시선들을 한몸에 받고 있다”. “결혼도 전에 신부네 집에 불려가 힘든 집안일을 했다거나/처갓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추장을 들고 다닌다거나/서로에게 숙제로 남은 언어들이 허공을 떠돌고/우려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들이 결혼식장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랑과 신부는 주위의 걱정과 우려에 신경 쓰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등장”하자 “멀리서도 화색이 도는 정식 씨의 얼굴에는/내일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듯/신부를 향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다.
어느덧 한국이나 베트남에서 이루어지는 다문화 결혼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17년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결혼 이민자 출신국 중에서 베트남이 377명으로 2위인 중국(39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결혼 이민자의 배우자 관계 만족도도 베트남인 경우는 86.9%(매우 만족 68.3%, 만족 18.6%)이고, 결혼 이민자의 전반적 생활 만족도도 베트남인 경우 83.6%(매우 만족 58.3%, 만족 25.3%)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결합하는 다문화 가정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4.
베트남은 B.C 2879년 반 랑국[文郞國]이라는 독립 왕국으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식민지의 경험 또한 오래되어 214년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침략을 시작으로 천 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13세기에는 몽골로부터 3차례의 침략을 받았고, 1862년부터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1940년부터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같은 해 9월 2월 호치민[胡志明]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1946년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겪었다. 1954년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같은 해 7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분할되었다. 그 후 북베트남을 중심으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이 개입해 소위 베트남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겪었다. 1973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휴전되었고, 1976년 북베트남 주도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에서 보듯이 베트남은 세계 강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해 민족의 자유를 회복한 강한 민족이다. 한국은 1964년 외과병원 파병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에 전투병력을 파병함으로써 베트남 사람들에게 큰 원망과 상처를 주었다. 1992년 두 나라가 수교를 맺은 뒤 지금까지 경제 분야는 물론이고 다양한 교류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
전쟁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탱크에 올라가서 총을 겨누어보기도 하고
탄알 없는 대포를 쏘기도 하고
헬리콥터에 앉아보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미국과 프랑스와 싸웠던 생생한 흔적의 박물관 야외에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수천 대의 살상 무기를 상대로
여자들은 아이를 안고 총을 들었다
산골짜기 위로 무기를 나르고 식량을 제공하는 민간인들이 있었다
적군을 포위한 군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산산조각이 난 미전투기의 잔해를 모아
탑을 세운 국민들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었지만
전쟁은 비극에서 끝나지 않았다
비 오듯 퍼부었을 포탄을 잊지 않고 있는 국민들이 있다
추락한 미국의 폭격기를 끌어내고 있는 소녀의 사진이
끈적한 열대의 바람을 일으킨다
―「하노이 군사 박물관에서」 전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베트남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고 맞섰다. “수천 대의 살상 무기를 상대로/여자들은 아이를 안고 총을 들었”을 뿐 아니라 “산골짜기 위로 무기를 나르고 식량을 제공하는 민간인들”도 있었다. “적군을 포위한 군인들”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산산조각이 난 미전투기의 잔해를 모아/탑을 세”웠다. “비 오듯 퍼부었을 포탄을 잊지 않”으려고 만든 것이다. “전쟁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탱크에 올라가서 총을 겨누어보기도 하고/탄알 없는 대포를 쏘기도 하고/헬리콥터에 앉아보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이처럼 “미국과 프랑스와 싸웠던 생생한 흔적의 박물관 야외에는/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여성 박물관에도 그러하다.
여기 여성들이 있어요
태어나 총을 들고 밭을 일구던 여성들
벽면을 가득 채운 훌륭한 여성들의 얼굴이 있고
독립운동 때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 실제로 사용했던 타자기
여성 군복과 모자가 있어요
전통 혼례복과 출산과 젖을 먹이는 엄마가 있고
여자들이 돌리던 방아가 있고
웃는 얼굴이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와 많이 닮았어요
밖에서 농사를 짓고 집에서 불을 피우고
남편과 자식을 잃고도 어깨에 총을 멨어요
이곳에는 국가가 있고 꽃이 있어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여전히 어깨에 무거운 바구니를 메고
머리에는 논라를 쓰고 있어요
―「하노이 여성 박물관」 전문
“하노이 여성 박물관”에는 “태어나 총을 들고 밭을 일구던 여성들”이 있다. 또한 “벽면을 가득 채운 훌륭한 여성들의 얼굴이 있”는데, 그들이 “독립운동 때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 실제로 사용했던 타자기/여성 군복과 모자” 등도 전시되어 있다.
“여성 박물관”인 만큼 “전통 혼례복과 출산과 젖을 먹이는 엄마가 있고/여자들이 돌리던 방아가 있”다. “밖에서 농사를 짓고 집에서 불을 피우”기도 하는 그 “웃는 얼굴이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그러면서도 “남편과 자식을 잃고도 어깨에 총을” 메고 있는 모습이 색다르다. 그리하여 화자는 “이곳에는 국가가 있고 꽃이 있어요/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있어요, 라고 베트남 여성들의 강인함을 노래한다.
실제로 베트남 여성들은 “전쟁에 나간 남편을 대신하였고/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을 두고도” “여전히 지게를 메고 있다”(「꽝가인」). 베트남 가족은 가부장제로 남편이 가정 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아내는 논을 갈고 추수를 하는 등 농사일을 남편만큼 한다. 또한 상업 활동으로 가족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역할이 제한받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나라가 어려울 때 “밭을 일구던 여성들이” “총을 들”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구체적으로 담아낸 박경자 시인의 작품들은 연대의식을 추구하고 있기에 의미가 크다. 시인은 박항서 감독과 함께 “천 년을 참았던 열기가/한꺼번에 뜨거워져 밤을 흔들어 놓”(「박항서 매직」)는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한다. “한국말을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베트남 여성들이 “방탄소년단의 ‘봄날’을 부”(「봄날」)르자 함께 부른다. “하노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히엔은 교수가 꿈이”고 “경영학을 전공한 흐엉은 한국 회사에 취직하”(「히엔과 흐엉」)는 것이 꿈인데 기꺼이 응원한다. “쓸모없이 버려지던 바나나 잎을/포장지로 사용하는”(「바나나 잎의 변신」) 지혜를 베트남 시민들에게 배우고, 생일 축하 행사를 점심시간에 가져 근무 시간을 아끼는 것은 물론 “초코파이”, “치약과 칫솔”, “샴푸”(「생일 선물」) 등을 선물로 전하는 실용성을 베트남 회사원들에게 배운다. 궁극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지향해야 할 “사랑을”(「COVID-19」) 인식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孟文在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