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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만들어내는 기억의 기능들/송기한
시를 만들어내는 기억의 기능들/송기한
인간의 사고작용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기억의 작용이다. 이것이 있기에 인간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가 있다. 만일 기억이 없다고 하면 어떤 작용이 벌어질까. 우선 곱아볼 수 있는 것이 시간 관념의 무색일 것이다. 시간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계기적 질서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자신에게는매우 중요한 학습효과란 것이 거의 유명무실해질것으로 보인다. 이 효과란 인간의 방향타 역할을 하기에 그러하다.
기억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꼭 좋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대타 효과란 것이 있어서 좋지않은 기억 역시 인간의 삶에 있어 꼭 필요한 기제다. 이러한 기억이 있어야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보다 가치있는 것으로 현현하기 대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지않은 기억을 갖지 않으려고, 가급적 이를 피하려 든다. 삶에 대해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류의 기억은 대부분 병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보면, 거의 억압에 가깝다. 이를 통상 콤프렉스로 치부하거니와대개의 경우 그것은 비생산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콤프렉스들은 철학이나, 정신분석학 혹은 에술학에서 각광을 받아온 것이 사실인데, 이는 이 기제들이 생산적인 예술적 에네르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기억은 순기능도 하고 역기능도 한다. 그리고 모든 기억은 기념비적인 것이어서 순기능적 요소를 갖춘 것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기 훼손적인 것이라서 배제되어야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기억은 그것이 인간에게 기능적 기제로 작용하는 한 의미있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기억의 기능적 가치 가운데 맨 앞자리에 놓고 싶은 것이 인간의 불구화된 인식에 대한 완결로 보고 싶다. 곧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에 대한 올곧은 모색이 그것이 긍긍적 가치일 것이다.
기억이란 개인의 특수한 체험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사회의 제반 여건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전자가 개인적 무의식이라면, 후자는 사회적 무의식에 해당된다. 개인적인 차원의 것들이 신변잡기적인 것으로 한정된다면, 사회적인 차원의 것들은 이를 넘어 좀더 폭넓은 외연을 갖는다. 그러나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기억의 기능적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 인식의 완결이라는 가치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결국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집 뒤엔 미나리꽝이 있고
미나리꽝 뒤엔 기찻길이 있었다.
미나리꽝 미나리가 연초록으로 피어오르던 어느날
화물을 가득 실은 기차가 미나리꽝 근처에 섰던 적이 있다.
화물칸에는 무명천으로 싼 하얀 상자들이 가득 실어 있었다.
전쟁이 멎고, 고향 찾아가는 유골상자들이었다.
미나리꽝 햇미나리 향기 흩어지는 봄날이었다.
-이건청<미나리꽝에 관한 기억 >전문,<시와 정신> 2008 가을
이 시는 전쟁을 바탕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전쟁이 종료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그것은 그 세월의 무게 만큼이나 이제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 전쟁은 잊혀지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시인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전쟁에 대한 이러한 시상은 전쟁을 체험한 세대만의 것이 아니어서 이와 무관한 세대에게는 그저 관념적인 경험으로만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반공주의가 넘쳐나는 시기도 아니고 획일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다. 전쟁을 확기한다는 것 자체가 아웃사이더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왜 전쟁일까 하는 의구심에 시인의 답은 너무 뻔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분단에 대한 자기 확인 정도가 아닐까 하는 대답이 준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스치고 간 시간들은 너무 오래여서 이제 구태의연한 어떤 것이 되었다. 부수되는 이야기로서 분단 극복이라든가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조차 대단히 식상한 일이 되어버린지도 오래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나간 아픔에 대한 기억을 굳이되살리는 것은 낭만적 추억거리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체험 세대로서 전쟁의 의미와 그것인 남긴 유산에 대한 진진한 모색이 매우 돋보이는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미 50여년전에 끝난 것이지만, 그 기억을 다시 한번 환기시킴으로써 분단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끔 하는 것이 이 작품이 의도하는 내포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전쟁으로부터 받은 시인의 상처다. 이는 전자의 경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쟁을 환기하는 시인의 정서는 아련하고 슬픈 것으로 표상되어 있다. 전사자들이 모습이 햇 미나리 향기로 퍼져가면서 그러한 전쟁의 상처들이 매우 감각적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향기가 시인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깨우는 근본 에네르기로 작동케 한다.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아픈 기억을 담고 있는 시라고 하겠다.
아가야/ 둥근 젖병을 움켜쥐고/ 아인슈타인을 쭉쭉 빨아대는 아가야// 어때 맛이 괜잖니/ 배가 쿨렁쿨렁 소리나게 부르니/ 올해 60회갑을 맞은 이 할아버지는/ 너를 등에 업고 먼 산에 올라가 보련다/ /(중략)/ /그래, 60회갑을 맞은 나 또한 슬퍼하느니/600년보다 더 길고 긴 60년, 저 젖을 봐라/ 한반도 허리춤에 내리꽂힌 총칼을 보아라//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땅은 블랙홀/ 서울과 평양사이의 들꽃들도 블랙홀/ 금강산 앞바다에 치솟는 태양도 블랙홀/ 귀신들이 무더기로 우글거리는 블랙홀/ 생목숨마저 빨려들어가버리는 블랙홀//미움과 증오뿐인 저 절벽의 벌벽의 세월/ 머저리와 머저리들의 바보같은 그 세월/남들이 만든 시계 속에서 청춘도 사랑도 /한꺼번에 휩쓸려 가버린 아 코리아 60년!//(중략)/ 아 풀비린내도 없이 온 몸 살결이 향기로운/통일 코리아 텍스트 밤낮으로 굼꾸는 아가야/그래서 나도 너처럼 똥을 바가지로 싸놓고도. 방긋방긋 웃는 벌거숭이 아가가 되고 싶단다.
-김준태 <60년 聖事> 전문, <창작과 비평> 2008,가을
김준태의 <60년 聖事>는 분단을 소재로 슨 시이다. 시인 자신이 맞이한 60이라는 나이가 분단의 시기와 겹쳐지면서 한반도 현실에 대한 감회를 읊은 작품이다. 우선 이 시는 분단과 같은 거대담론을 작품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잇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시의 질료들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의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특히 대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담론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시사에서 분단과 통일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활발히 논의 되던 때는 1980년대이다. 남한의 변혁운동과 더불어 진행된 이 때의 논의들은 통일의 방법이라기보다는 그 주체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통일은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 국가는 어떤 모양새를 띄어야 하는가 등등이 그 주된 관심거리였다. 변혁운동의 주체들에 의해 심도있게 논의되던 이 주제들은 매우 이상적인 것이어서 감성의 영역이 틉입할 여지가 없엇다. 이 논의의 핵심은 막연한 통일지상주의라든가 감상적 동포주의 등등을 경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곧 거대담론이 물러나면서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시단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김준태의 시가 담아내고 있는 소재가 이채롭다는 것은 이렇듯 그 시의성이란 맥락에서다.
80년대의 시각에서 보면, 인용시의 통일론은 감상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왜 통일이 되어야 하고, 그 통일의 실체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구페적, 객관적, 이론적, 접근이 없는 가닭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작품이 지금의 현실에서 오히려 흔하지 않게 되어버린 분단과 같은 거대담론을 다루고 잇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작품은 그러한 독특한 주제를 아주 특이한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기에 어둑 웅숭 깊다. 시인의 상상력은 아이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인" 에너지와 질양은 등가이고 변한가능하다"는 이론을 빌어 "밫도 휘고 청천하늘도 무지개로 휜"다로 자신의 상상력을 글어올린다. 이는 고정된 인간의 변화가능성, 미움과 증오의 사랑으로서의 전화 등 분단의 고착을 유연한 흐름으로 풀어헤쳐서 긍극적으로는 그 분단을 하나로 만드려는 의지로 발전시킨다.
이 작품 역시 자신의 이력과 분단의 상황을 기억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련은 것이 이 작품의 근본 구도인데. 기억이라 이처럼 통합의 상상력을 구현해내는 데 유효한 기제로 기능하고 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기억이란 지속의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형성되어 지금 여기의 의식에서도 생생히 살아있게 된다. 문제는 기억의 질과 양이가. 어떤 것이 긍정적이고 그렇지 않은가, 혹은 매 사람마다 있을 수 잇는 그것의 많고 적음의 문제이다. 이는 개인마다 고유한 것이어서 어떤 것이라고 특정하여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체험의 경우들에 달려 잇는 문제일 것이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그 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다음의작품들은 주로 시인 자신의 체험과 같은 작은 영역에 관계되는 경험들을 시화한 경우이다.
안감이 꼭 저런 옷이 있었다. 안감이 꼭 저렇게 붉은 옷만을 즈력 입던 사람이 있었다/ 일흔일흔 일곱살 죽산댁이었다 우리 할머니였다 돌아가신지 꼭 십년 됏다/ 할머니 무덩마겡 앉아 바라보는/ 앞산 마루 바라보며/ 생각해보는-------//봄날의 안감은 또 얼마나 따뜻한 것이냐//봄날의,//이 무덤의 안감은 또 얼마나 깊고 어두운 것이냐
-유홍준,<할미꽃> 전문 <문학사상> 2008,11월호
유홍준의 <할미꽃>개인의 경험과 그 기억을 토대로 생산된 작품이다. 시인은 어느 따뜻한 봄날 할미꽃을 바라보면서 할머니를 연상해낸다. 그녀는 주로 붉은 색의 안감을 입었고, 죽산댁으로 불려졌으며, 돌아가신지는 10년이 되었는데, 자신의 할머니이다. 시인은 그 할머니가 그리워 무덤가를 찾아간다. 이곳에서 그는 할미곷을 보면서 할머니의 평소 모습을 환기해낸다. 시인은 봄날의 따스함 속에서 할머니의 온정을 느끼기도 하고, 차가운 무덤 속의 깊이를 혜량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의 소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다. 사회적 외상에 의한 것도 아니고, 또 개인적인 외상에서 온 것도 아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드렁진 기억을 토대로 직조된 것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기억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통합에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기억의 기제와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현재를 통합하려 한다거나 인식의 분열을 치유하려들지 않는다. 이 시는 통상적인 그러한 기억의 역능을 넘어선다. 사회적 흠결이나 내부의 외상에 대한 통합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가 직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그림리움의 감수성만이 남아있다. 자신의 일상을 구성하고 잇던 대상의 상실과 그로부터 얻어진 결손의 정서가 이 시에 넘쳐나고 잇는 것이다. 이런 듯에서 보면 기억이란 거의 추억에 가가운 것은 아닐까 한다. 다음의 작품도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이다.
얼마나 떠나기 싫었던가!/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가!// 낡은 옷과 낡은/신발이 기다리는 곳//여기,/바로 여기.
-나태주,<집> 전문, 시집<눈부신 속살>(시학,2008)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대한 희구가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매우 심각한 병으로부터 회복된 시인이기에 이 작품이 주는 함의는 더욱 예사롭지가 않다. "바로 여기"라는 말 속에 함유된 그 힘의 질량을 느껴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이 시는 시인의 외상이 매개된 시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집은 시인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끈끈이 주걱과 같은 것이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 집이 아닌가. 그것은 인간 모두의 고향이고 근원이며 귀착지이다. 인신록적으로 말하자면 통합의 근원이다. 따라서 집은 물질적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그 어떤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주의에의 몰입이 경우에 다라서는 시민사회의 소시민성으로 비판 받을 수도 있고, 보편적 대중주의로부터의 일탈로 폄하될 수도 있다. 가족 내의 테두리가 저질러졌던 그동안의 내포들을 꼼꼼히 살펴보게 되면 이러한 비판들이 결코 과장된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소시민성이야말로 근대 시민사회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삶의 모형으로 인식되어 왓기 대문이다. 그러나<집>을 그러한 거대담론으로재단하기에는 너무 처연하지 않은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 온 시인에게 '낡은 옷'과 '신발'은 어쩌면 한 줄기 빛이 아니었을까. 시인의 의식너머의 세계 속에서도 계속 그 빛을 주시햇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시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혹은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삶의 진정성일 것이다. 이 작품의 예사롭지 않음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빠 지금 한가하지? 나 화끈하게 벗었어/궁금하면 눌러봐,/휴대폰의 액정 화면 속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 문자를, 눌러볼 시간은 넉넉했지만/문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난감했다/문자의, 벗은 몸이 보고 싶지만 /문자에게, 쉽게 속을 보이는 것 같았다/문자의, 눈치를 적당히 보다가/문자를, 눌러보았다/문자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문자를, 보긴 했지만/문자가, 누군인지 모르므로 /문자의, 말을 씹어버렸다/문자는, 날마다 찾아왔다/문자가, 내 속도를 노크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났다/문자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았다/문자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았다/문자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뜨겁게 나를 던져 봐?죽어도 좋아, 정사 신이나 펼쳐 봐?
-강영은, <문자의 세상> 전문, 시집,<녹색비단구렁이> (종려나무, 2008)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휴대폰 없이 살아가기 힘든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 국민의 대부분이 휴대폰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를 되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휴대폰이 없으면 웬지 불안하다. 잠시라도 휴대하지 않으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과 미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휴대폰이란 그만큼 현대인의 필수 불가결한 물품의 하나로 자리잡은지 오래가 되었다. 휴대폰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즈음의 사람들은 이 굴레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용시는 그러한 현대인의 심리와 휴대폰의 문화를 다룬 작품이다. 휴대폰은 필수품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스팸 문자의 홍수를 더올려보면 그것의 폐허 또한 적지않음을 알게 된다. 휴대폰을 필요악으로 만든 주범은 바로 스팸 문자나 넘쳐나는 광고등등에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좋지않은 기억, 곧 스팸 문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이 가장 먼저 시선을 돌리고 있는 부분도 이런 좋지 않는 기억에 있다. 스팸문자를 받는 사람들은 반복되는 그 문자들의 기억때문에, 그리고 그 좋지 않은 내용의 기억 때문에 무심히 넘어가기도 하고 경우에 다라서는 과감히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 문자들은 나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세게와는 전혀 다르고 삶의 순탄한 흐름을 차단하기 대문이다(시인은 그래서 문자 다음에 쉼표를 찍어서 이를 구문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습관화된 일상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궁금함을 미처 떨쳐버리지 못한다. 스팸 문자의 내용이 무엇일가 하는 호기심 혹은 욕망이 머리를 들기 때문이다. 욕망과 습관화된 기억(물론 이 기억은 좋지않은 기억이다)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작품 속의 작용하고 있는 기억은 앞의 시들과는 매우 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적 외연의 것에서 온 것이든 아니면 개인의 체험에서 온 것이든 간에 기억이란 인식의 통합이나 완결성을 지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자의 세상>에서 기억이란 인간의 욕망을 시험하는 잣대 역활을 한다. 휴대전화에 남겨진 문자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를 이 기억은 계속 시험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람과 함게 이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오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눈이 내렸네/오래 서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들/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면 모두는 내일은 기약하고/ 밤에는 별이 뜨리라 말하지 않아도 믿었네/ 집들의 안녕의 문을 닫는 저녁엔/ 꽃의 말로 안부를 전하고/ 분홍신 신고 덜어가 닿을 집이 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네/ 불 켜진 집들의 마음을 나는 다 아네/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네
- 이기철,<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갔네>전문,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갔네>(서정시학, 2008)
이 기철의 시는 매우 아름다운 시이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뜻은 수사적 장치의 현란함이라든가 서정적 풍경의 원근 같은 것은 아니다. 한 인생을 살아온 시인의 모습이,그리고 그와 더불어 살아온 다른 사람의 모습이 이토록 순연한 조화를 만들며 살아왓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할 수 있단 말인가.그런 진솔한 모습이 이기철 시학의 모습이거니와 이 작품에서도 그런 빼어난 솜씨를 읽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작품은 얼마전 정년을 맞이한 시인의 인생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살아온 길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길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삶의 지속적 흐름을 그 바탕에 깔고 있기에 이 시의 구성 역시 기억이 중요한 시적 기제가 되고 있다. "사람과 함게 이 길을 걸었다" 는 것은 온연한 과거의 사실이며 그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도 오늘 낯익은 사람이 되"는 현실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재를 완결시키고 미래의 동력으로 나아가게 만든 과거의 기억이란 시인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시인에게 그 기억은 철저하게 길어올려진다. 관념이나 초월적인 현실에서 직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생생한 일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역경이기도 했고(소낙비가 오고 함박눈이 내리는 현실), 즐거움(꽃이 피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들은 인생에 있어 순기능이었든 혹은 역기능이었든 간에 시인의 현재의 삶에는 필수불가결한 자양소 역활을 했다. "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미래의 동력으로 승화시키기가지 한다. 기억은 시인에게 인생의 길을 안내하는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이런 류의 기억은 앞의 시들에서 보아왔던 기억의 기능적 역활과 비교해보면 예외적 국면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기억들은 인식의 완결과 같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제어하는 기능적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근대의 불안에서 오는 인식의 완결이나 무의식적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기억에의 여행들이 지극히 관념적인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인용시의 상상력은 그러한 초현실적인 동기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이다. 시인의 기억에의 상상력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네서 유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시의 장점이며, 시인의 시적 특성이기도 하다.
--계간비평(2008, 시와정신 겨울호)
송기한 1966, 충남 논산 출생, 1991년 <시와 시학>평론으로 등단, 비평집<문학비평의 욕망과 전제>, <한국 현대시의 서정적 기반>등, 현재 <시와정신> 편집위원,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