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이 환뽕을 맞았기 때문이거나, 요동이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양왕때문이라 봅니다.
(아래 요동에 대한 내용에 심양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
몽고 침략때 고려 전쟁 포로를 멀리 끌고간게 아니라 원나라에서 요동 지방에 정착시켰다고 하죠. 여기에 고려 유민도 지속적으로 요동지방에 넘어가게 되어 요동지방에 고려인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이에 원에서 이 지역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고려인 홍복원(과 그 일족)을 지배자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심양왕이란 직위는 충선왕때 만들어집니다.
당시 충선왕은 1298년 24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몽고의 고려 정치 간섭을 차단하고, 악습을 없애고, 권문세가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에게 나눠주는 등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가, 권문세가의 참언으로 즉위 7개월만에 폐위되고 원에 소환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충선왕의 부친인 충렬왕은 원의 간섭, 권문세족의 횡포, 아들과의 갈등(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것이 충렬왕의 후궁인 무비의 소행이라 생각한 세자 왕장(충선왕)이 무비와 그 시비, 관련자를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냄)으로 정치에 흥미를 잃고 충선왕에게 양위를 합니다. 충선왕이 폐위되자 충렬왕이 다시 복위가 되죠.)
충선왕은 원에 소환당한지 10여년 만인 1307년에 몽고 6대 칸이자 원 2대 황제인 성종이 후계자없이 죽자 원에서 치열한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원 초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이자,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를 왕비로 맞이하고 있던 충선왕은 원 왕실에서도 손꼽히게 가까운 인척(죽은 원 성종이 외사촌형..ㅋㅋ)으로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 힘으로 카이샨 세력을 지지하여 그가 즉위하게 도와주었죠. 이 카이샨과 그 동생이 원 3대 황제 무종과 원 4대 황제인 인종..
이에 대한 보답으로 1308년 원 무종은 충선왕을 심양왕에 봉합니다.
(아마도 자기와 친하고 지지해준 황족 아저씨(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 원 무종은 쿠빌라이칸의 증손자)가 백수로 놀고 있자 고려인 지역에 자리를 마련해준게 아닐까란 생각이..ㅋㅋ)
그런데 공교롭게도 충선왕이 심양왕에 봉해지자 마자 충렬왕이 죽게 되어 충선왕은 다시 고려의 국왕에 즉위하게 됩니다.
충선왕은 고려 국왕이자 요동(과 그 인근 만주 지역)의 심양왕이죠. 요동은 충선왕이 봉해지기 이전에도 안무고려군민총관부라는 고려인에 의해 다스려지던 지역이었습니다.(물론 원 산하 기관..)
이후 충선왕은 복위 5년만인 1313년에 선양을 하여 세자 충숙왕에 고려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리고 몇년 뒤에 조카인 왕고에게 심왕(1310년에 원에서 심양왕을 심왕으로 승격시킴)을 물려줍니다.
(충선왕의 반원(이라기 보다는 부패한 권문세족 때려잡기) 정책으로 고려왕이 심양왕까지 겸임하는건 부당하다는 여론때문이었다고 함.)
이후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심양왕이 고려왕위를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뭔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고려는 고려 세자로 이어져 가고, 심양왕도 자기 라인으로 내려가고..)
충숙왕때 왕이 원에 소환되면서 왕자리가 비자 왕고가 고려왕을 자칭하기도 하고, 고려가 혼란때마다 원에서 고려왕으로 내민 인물이 심양왕..
(물론 한번도 성공한 적은 없음..)
1376년 우왕 2년 심양왕 독타불화(왕고의 손자)가 죽은 뒤로 심양왕은 사라지게 됩니다.
우왕 시절, 최영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요동은 우리땅이란 주장은 완전 허무맹랑한 주장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선왕 시절에 지배하던 지역이기도 하고, 이후에도 고려 왕족이 계속 다스리던 지역이니 고려 왕에게 권리가 있다는거죠.
(여기에 고려 왕족 심양왕은 대가 끊겨 사라짐..)
물론 요동은 한번도 '고려땅'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과거 충선왕이 (심양왕으로써) 다스리고, 이후 고려 왕족이 다스리다가 그 대가 끊긴 영토였다는 것뿐..
p.s. 그러고 보면 원종도 칸 계승 싸움을 벌이던 쿠빌라이에게 항복해서 쿠빌라이가 원 세조가 되는데 큰 공헌을 한 덕분에 '불개토풍'의 약속을 받아냈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고려 풍습은 고치지 않아도 된다라는.. 이는 단순 의복과 예절과 같은 풍습 문제가 아니라 고려 왕실, 국가 제도에 대한 원 간섭에 대해 세조구제(세조 쿠빌라이 칸의 오랜 약속)라 하여 막아내는 역활을 하죠..
(고려왕 2명이 원 황실 싸움에 관여했는데, 둘다 성공(?)해서 한명은 세조구제를, 다른 한명은 요동지역(심양왕)을 받아오네요. 운빨 쩔어..)
p.s. 위 요동 지역의 지배자라는 홍복원은 생소하시겠지만, 몽고 침략 & 원지배 초기 악명을 떨치던 원나라 관리인 홍다구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원 직책이 아비 대를 이어 고려군민총관..
첫댓글 이게 드라마 스토리가 되어야 하는데 대세는 매국노 스타일이니
정리 잘해주셨네요. 알차게 보고 갑니다
한족 반란 세력을 토벌하기위해서 고려군 이천명이 원에 파병되었을때,
요동에 들러서 고려유민을 징발하여 고려군에 편입시킨 결과 병력이 10배로 늘어났죠...2만대군이 되어 원나라 본토로 들어가 한족들과 싸웠죠.
요동은 엄청나게 많은 고려인들이 있어서 오늘날의 연변과 같은지역이었죠... 요동이 고구려와 발해와 연고가 있었고, 공민왕때 일시적으로 점령한 적도 있었고
1374년에 요동에 사는 고려출신 요동 군벌들이 고려에 투항하겠다고 편지를 보낸 점을보면
아예 고려와 요동은 아무런 연고권이 없다고 볼수는 없죠...조선초기만 해도 요동에 사는주민들의 상당수가 조선과 관련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
오늘날의 연변에 조선족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그게 한국 땅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단순히 유민들이 많은게 고려와 연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죠. 공민왕때는 진짜 일시적으로 점령했을 뿐이니 이걸로 연고권 주장도 억지이고.
@데스사이즈 그럴 수도 있죠. 전 또한 요동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그걸 떠나서 고려가 강대국이었다면, 요동을 먹을때,이런 요소들이 좋은 명분을 줄 수 있다는것입니다.
자기 옛땅이라는 역사적인 사실, 고려주민들이 대거 살고 있다는 점, 한때 요동 군벌 일부가 고려에 투항하려고 했던 점, 공민왕때 일시적으로 점령했고 자기네 땅이라고 선포했다는 점, 그외에 심양왕 일도 있으니
고려와 연고 있다는게 명나라가 요동에 연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죠..결국 힘의 논리로 따져서 명나라가 요동을 먹은게 현실인 점이죠..
@튜어니즘. 그렇죠 비슷한 예로 충렬왕부터-공민왕까지의 '혈통'은 중앙아시아에서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썰'을 풀고 폭풍을 일으키고 다녔던 양반이었다면 엄청 부러워 했겠죠.........
딱 크킹2의 클레임 명분이네요 ㅎ
저 같은 경우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대원제국'이라는 중앙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쌓이고 쌓였던 모순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다시 재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 였다고 봅니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도 '명분상' 원의 옛 제도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고, 그에 반발한 고려측에서 '우리가 오히려 요동의 주인이다' 식으로 역대응 한 것이며, 그 안에 심양왕제도가 어느정도 작용을 한 면도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뭐 요즘으로 치면 '독도는 일본꺼! 뭔소리냐 오히려 대마도까지 한국꺼다!'식의 고려말 ver 정도?(자매품으로 센카쿠는 일본영토! 헛소리 즐 류큐도 원래는 우리 중국꺼였음도........)
이에 더해서, 주원장의 '철령위는 원나라 땅이었으니 원나라 계승한 우리꺼'의 클레임 주장과 비슷한 의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철령위에 대응하는 주장으로 요동정벌을 내세운 거겠죠. 실제로 논리구조도 '철령위는 원나라 땅이었으니 원의 정당한 계승자인 우리꺼'와 '요동은 심왕의 것이고 고려왕이 심왕의 정당한 계승자이니 요동은 우리꺼'는 대응되는 식이구요.
원래 클레임은 법적 문제로 해결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제 유럽에서 클레임은 법적인 효력이나 중재보단 국가대 전쟁으로 대결 한 후 결과가 갈렸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에서 진 나라가 그 클레임을 포기했냐 아니죠.. 대대손손 그 클레임을 물려줍니다. 그게 친손 외손 처가 할것없이 서로 클레임을 주장하는 이유가 한편의 전쟁이 일어나지만.. 대게 한번 주장한 클레임을 철회한 나라는 없습니다.
원명 모두 고려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인식했습니다. 1370년 공격 때도 기샤인테무르 토벌 외에, 본래 우리 땅이었는데 원황실과 장서관계가 되어 관할권을 양보한 땅의 범주에 요동도 들어간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심양왕이라는 게 요동 전체를 관할하는 관작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최영의 의도는 심양정벌이 아니라, 무력도발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실제 이 이후 명이 요구를 철회하기도 하구요.
최영은 젊은시절 원나라 반란진압하던 경험이 독이 된듯, "요동공격이면 원나라가 강성(?)한 시절에도 15000으로 성공했는데, 혼란스러운 원명교체기에 50000으로 못할 게 뭐야?" 약간 이런 마인드였던 거라고 생각되네요 ㅋㅋ
우왕의 경우 명의 철령위 요구 이전에도 요동을 공격할 의사가 있었음이 고려사절요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자신의 계승권을 인정해주지 않는 명에 대해 무력시위를 할 의사가 그 이전부터 있었고, 최영이 고려의 전권을 쥐게 되고 명이 직접적으로 영토할양을 요구하자 터져나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요동이 일시적으로 비었다는 보고에 우왕이 기뻐했다는 것도 이 공격이 명과의 전면전-요동정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물론 우왕은 원의 관복을 입으라고 명하거나, 북원과의 협력을 꾀하는 등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성계가 요동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면, 나하추 등 요동의 원나라 군벌들이나 북원정권의 정세 역시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고, 행정-군사적으로 잘 정비된 명나라의 요동권역을 뚫고 들어간 후에 서달이 지휘하는 수십만의 북원 원정군과 싸워야할 거란 점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테니 차라리 지금 말고 나중에 하자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우왕의 고집으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나라가 망할 거 같다고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이해가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