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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0일 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제1독서 : 창세 3,9-15.20
복 음 : 요한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 무엇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낱말은 “어머니”입니다.
독서는 “하와”라는 이름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전하고,
복음은 성모님의 ‘모성’에 대한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합니다.
복음의 전반부는 이 어머니의 특징을 아들의 죽음 앞에 묵묵히 ‘서 계셨음’으로 제시합니다.
죽어 가는 아들 곁에 서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성모 성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두 번째로 강조된 내용은 새로운 모성의 시작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당부로써,
성모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특별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음은 복음의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
곧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라는 문장과 연결됩니다.
교부들은 이를 교회의 탄생으로 이해하였는데,
아담의 옆구리(갈빗대)에서 하와가 나왔듯,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물을 통하여 세례성사/피를 통하여 성체성사)가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모성’은 죽을 만큼의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내놓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낳으신 ‘육신의 모성’은 이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사도들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영적 모성’까지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듯, 이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소외되고 버려져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묵묵히, 그 누구보다 굳건히 서 계십니다.
모성은 사랑하는 이들 곁에 서 있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파우스티나 성녀가 남긴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천사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수 있다면, 그들은 두 가지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나는 영성체를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이다.”
많은 이가 영성체에 대해 무관심하고, 또 고통과 무관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바로 천사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은 영이기에 성체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 육체가 없기에 고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성체와 고통은 모두 예수님과 결합할 수 있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과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성체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고통을 없어져야 할 악(惡)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은총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이 점을 성모님께서도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여라. 죄인들을 위해 희생을 바쳐라.
많은 영혼이 지옥에 가는데, 아무도 희생으로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성모님께서 어떻게 보면 하늘나라의 신비라고 할 수 있는
이 점을 알려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직전,
우리 교회의 어머니로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께서는 온전히 예수님과 함께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해 메시지를 남기시고,
또 우리 곁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께 전구 해 주십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도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큰 기도라고 하는 미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성모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그리고 너무 자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에,
가장 큰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성모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성모님을 늘 떠올리면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어머니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버림받은 유다인의 임금이 되셨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떨어져 나가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십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끝까지 따른 이들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과의 모자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이십니다.
요한 사가는 예수께서 구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카나 혼인 잔치에서와
구원 사업의 완성을 이루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어머니를‘여인’으로 부르심으로써
성모님이 신약 백성의 어머니, 곧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와는 뱀의 속임에 넘어가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했으나,
성모님은 천사의 말을 믿고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뉴먼 추기경).
예수님을 통해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은 큰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어머니를 집에 모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자에 의해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관계를 새롭게 하여
고귀한 어머니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 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하고 이행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누굴까?
우리는 요한이라고 생각하지만, 드러내 놓지 않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데
그 세상은 ‘믿음의 세상’입니다.
성모님을 나의 어머니로, 교회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영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선물로 주셨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기억하는 만큼 자신도 이웃을 위한 사랑의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 헌신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보여 주신 성모님의 태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귀감입니다.
교부 암브로시오는 말합니다.
“나는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는 구절은 읽었지만,
어디에서도 통곡했다는 구절을 읽지 못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풍파를 겪을 때,
십자가 아래 꿋꿋이 서서 고통을 견디어 낸 성모님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은 온유함과 강인함의 어머니이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제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는 새롭게 탄생 된 첫 교회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맡기신 까닭입니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대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이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보호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 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27)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공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복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되신 일이 벌어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4)
주님!
당신께서는 휘장을 찢으시고 가로막힌 모든 것을 치우셨습니다.
남김없이 쏟아부은 물과 피로 우리의 영혼을 씻으셨습니다.
온 누리를 새로 지으시고 아버지의 향기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사랑의 옥함인 당신 몸을 부수어 사랑의 향유로 온 세상을 기름칠하셨습니다.
오늘,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 사랑에
제 영혼이 뛰놀며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고사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 맹자를 위해서 3번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간 곳은 ‘장의사’ 옆이었습니다. 아들 맹자는 망자를 위해서 ‘곡’을 하면서 놀았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상가가 즐비한 ‘시장’ 옆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맹자는 물건을 파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글공부하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맹자는 글공부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그제야 맹자의 어머니는 만족하였다고 합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3번이나 이사 하였다는
맹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두고 ‘맹모삼천’이라고 합니다.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맹모삼천에 절대로 뒤지지 않습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태평양을 건너서 기러기 엄마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온갖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른 지출을 줄일지라도, 자녀의 교육비에 대한 지출은 줄이지 않습니다.
지하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가난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정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배우자의 외모, 재력, 능력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머니는 많이 배운 배우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범학교를 나온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난도 참아 낼 수 있었습니다. 사상의 검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능력만 있다면 모두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쌀장사, 밥장사, 파출부 일도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야학에 다니면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성서를 필사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구역장들에게 선물로 주신 ‘신발’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많은 예비자를 입교 권면하였고, 기꺼이 대모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3년 동안 식사 준비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잠시 헤어지는 슬픔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말없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이제 천국에서 아들 사제와 동생 수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에서 길을 찾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찾기 전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구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제도와 전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입니다.
우리는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하고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 전구 하시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동정의 몸에 잉태하시고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교회의 시작을 도우셨나이다.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곁에서 아드님의 유언에 따라 모든 사람을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들은 천상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났나이다.
비오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잘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로 지내는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은
2018년 처음 축일로 지내기 시작한 축일이고 이동 축일입니다.
곧 어느 한 날로 축일이 정해져 있지 않고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날 지내게 되어있는 축일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은 성령과 마리아 사이에,
또는 성령 강림과 마리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관계일까요?
이 축일 독서로 창세기 뱀과 하와 얘기를 우리는 듣습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자손인 우리에게 원죄를 안긴 어머니입니다.
여기서 뱀은 성령과 반대되는 악령이지요.
이에 비해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으심으로써
그 영적 자녀인 우리에게 구원을 안긴 우리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라는
얘기를 오늘 독서 창세기를 통해 교회 전례는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며
제자 요한과 당신 어머니를 영적 모자 관계로 맺어주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모두의 어머니로 내어주신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런 당부에 따라 마리아는 제자들과 떨어지지 않고,
성령 강림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십니다.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행전 1, 14)
그래서 오늘 감사송도 이런 마리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또한 사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의 간구를 제자들의 기도에 결합시켜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가 되셨나이다.”
저는 요즘 우리 공동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자주 권고합니다.
공동체의 누구를 특히 공동체 봉사자들을 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들을 욕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고,
실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에 대해서도 욕하기보다 기도하자고 합니다.
지금까지 실컷 욕했으면 이제는 기도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나라를 이끄는 분이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잘못했어도 이제는 우리나라를 위해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니 실은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 성숙한 것뿐 아니라
마리아처럼 공동체를 위해 같이 기도하는 영적 성숙입니다.
우리는 영적 성숙 특히 기도와 관련한 영적 성숙을,
자기가 기도의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만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영적 탐욕이요 이기주의이기 쉽습니다.
영적이고 진정 높은 경지의 기도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임을
그 본보기이신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공경하는 날이다.
마리아께서는 성령강림 때에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으며, 늘 교회와 함께하셨다.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며
2018년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로운 자녀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담고 있다.
우선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기도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아들의 영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아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며,
그 아들의 영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라고 하시며
우리를 마리아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표상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계속 낳아주고 있다.
교회는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습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 교회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시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셨던 마리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목마르다.”(28절)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목말라하셨다.
목말라하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신 포도주를 드리고 있지나 않은지?
“다 이루어졌다.”(30절)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십자가의 신비가 모두 이루어졌고, 고개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심으로써
사흗날에 다시 일어날 당신의 육신에 평화로운 잠이라는 휴식을 주셨다.
착한 목자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절)
인간이 죽으면 피는 엉기고 흘러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의 몸에서는 피와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는 죽었지만, 생명의 원천을 쏟아부어 줄 수 있는,
그 육신 안에 있는 위대한 생명의 힘을 알도록 일어난 일이었다.
첫째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와가 그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둘째 아담이 십자가에서 잠드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
교회는 새 아담의 신부이다.
우리가 모두 마리아를 닮아 참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며 이끌어 주시는 신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신비를 사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나 신랑과 일치하려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뽑으실 때도 목숨을 거신다.
전삼용 요셉 신부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는 미국의 노예 해방과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본명은 이사벨라 바움프리(Isabella Baumfree)였으며, 1797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소저너 트루스는 신앙심이 깊었던 인물로,
그녀의 삶과 활동에 있어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Sojourner Truth’로 바꾸었는데,
이는 ‘진리를 위한 여행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결정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소저너는 하느님께서 그녀를 부르시어, 진리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설교하라는 영감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소저너 트루스는 뉴욕주의 한 노예 가정에서 태어나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 자랐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노예로서의 가혹한 대우와 노동에 시달렸고,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노예 생활했지만, 1826년에 뉴욕주의 노예제도가 점차 폐지되면서
그녀는 두 자녀와 함께 도망쳐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트루스는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법정에서 자기 아들을 주인에게서 되찾기 위해 싸웠으며,
이는 뉴욕주에서 흑인이 백인에게서 법적으로 아이를 되찾아 온 첫 사례였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투쟁은 자녀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위한 강한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자유를 찾은 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노예 해방 운동과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며,
연설과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유명한 연설 “나도 똑같은 여자가 아닙니까?”는
여성의 권리와 인종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한 연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소저너 트루스의 자유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투쟁은 그녀의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자유의 중요성과 인권을 위한 싸움의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녀의 아들 피터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유를 찾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자녀가 자유인이 되려면 당연히 엄마도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트루스가 독립시킨 자녀들은 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트루스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중요했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믿음은 그녀가 노예제도에서 벗어나
인권 운동을 위해 싸우는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하와는 자유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권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을 어머니로 믿는 이들 또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하와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와는 존재한다, 생존한다는 뜻의 ‘하야’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하와는 바로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고 옛 하와는 죽은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성모님을 여인이라 부르십니다.
두 번째 하와이고 당신이 두 번째 아담이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나는 오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 그리스도를 아버지로 모시게 됩니다.
그렇게 두 자유인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우리가 이미 하느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어머니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까지 믿었는데,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그냥 인간에 불과하다면
성모님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스스로 하느님처럼 될 필요가 없는
이미 하느님처럼 된 존재임을 믿었기에 참 자유인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자녀도 당연히 그렇게 믿어야만 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부활시기가 막 끝나고 연중시기로 들어서자마자 제1독서는 인류의 첫 범죄를,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현장을 다룹니다.
부활 축제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고, 또 어제 받은 성령의 은사로
여전히 가슴이 뜨거운 우리에게 이 전례적 흐름의 급격한 전환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날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마리아께 부여된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전례 안에서 공적으로 기념하도록 제정하신 날이니만큼,
미사의 모든 말씀들이 교회와 마리아를 향하고 있습니다.
독서와 복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수님의 탄생부터 첫 기적의 순간,
십자가 죽음, 교회의 탄생 순간에 함께 하신 마리아의 자취를
입당송, 복음 환호송, 영성체송이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화답송은 성자를 잉태하고 품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도성, 거룩한 산 위에 세운 그 터전”이라 아름답게 묘사하며 칭송하지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우리가 사도 요한이라 알고 있는, 하지만 요한복음 안에서는
줄곧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언급되는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안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믿는 이들이 잠재되어 있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를 벗님을 포함하여 우리의 어머니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우리는 최후의 만찬상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는 내용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처절한 고통 중에 육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신포도주를 드신 이 순간이,
이제 곧 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백성의 지상 교회가 태동하는 순간이라는 뜻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마리아께 제자 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막 탄생한 지상의 교회 전부를 맡기심으로써
당신의 지상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 됩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3)
교부들과 신학자들에 의하면, 피와 물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 성사(물은 세례성사, 피는 성체성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두 교회를 가리키지요.
또한 첫 창조 때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를 열어 하와를 탄생시키신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신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흘러나온 예수님의 몸은,
공동번역 성서에서 “맑은 물이 솟는 샘 야훼”라고,
또 현재 성경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예레 17,13)이라 표현하는
모든 생명의 은총의 원천이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처절한 죽음의 현장에서도
“나의 샘이 모두 네 안에 있네.”(화답송)라고 노래하는 시편 저자와 함께
우리의 생명과 은총의 원천이 오직 주님이심을 나지막히 고백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류 조상의 원죄를 다룹니다.
하느님의 명을 어긴 아담과 하와, 뱀을 바라보며 면구스러움과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 건
이들의 욕망과 일탈이 손가락질하고 끝낼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아니 나의 적나라한 실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첫 하와의 죄의 상처를 둘째 하와인 마리아를 통해 회복시켜 주시지요.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
불순명으로 인류에게 죄를 끌어들인 하와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뱀의 머리를 짓밟아 부수고 순명으로 인류에게 구세주를 선사한 마리아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물론, 죽음의 세력에 잡힌 모든 것의 보호자요 피난처이며 어머니가 되시지요.
이것이 오랜 부활 축제 시기와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 우리를
곧바로 원죄의 현장, 예수님 죽음의 현장으로 안내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로써, 성령의 오심으로 영광과 기쁨 속에 도래한 교회의 탄생이
성부 하느님의 애간장을 끊어낼 듯한 자비와,
성자 예수님의 희생 제사라는 산고를 거쳐 세상에 선사된 귀한 선물임을 일깨우고,
예수님 생애를 동반하신 새로운 하와, 마리아의 협력이 강생구속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교회의 어머니’로서 지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또한 교회(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순결해진 신부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잉태한 성령의 신부 마리아는 세상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이 교회를 자애와 염려와 눈물과 기도로 끝까지 돌보고 보듬고 되살리시어
하느님 앞에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부족하고 왜곡되고 병들고 썩어가는 부분이 있다면
마리아의 모성으로 치유되어 갈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모든 걸 이루는 힘이니까요.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아니 벗님의 어머니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