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여성 1호 국회의원’으로 떠오른 이혜훈(40) 한나라당 당선자는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내세운 ‘전문성, 개혁성, 참신성’이란 세 가지 모토에 딱 들어맞는 후보였다. 그는 한나라당 우세지역이었던 서초갑에 ‘여성기획공천 1호’로 공천됐지만 탄핵으로 인해 안전지대만은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이번 총선에서는 ‘인물론’이 열세였지만, 이혜훈 당선자는 ‘민생을 살릴 수 있는 경제전문가’라는 인물론으로 당당히 국회에 입성했다. 지난 13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이혜훈 당선자를 만나 여성정치인으로서의 포부와 정견을 들어봤다.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전문가인데, 경제 살리기에 대한 해법은 있는가.
“우리나라는 지금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8년째 머뭇거리고 있다. 결국 2만달러를 넘지 못하고 여기서 주저앉지 않겠냐는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경제를 살리려면 먼저 기업이 살아야 한다. 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재벌이라는 이유만으로 규제를 가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재벌기업 내의 잘못된 관행을 은폐한다거나 불합리함이 있다면 그것으로 제재를 가해야지 사이즈만으로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성보호비용 분담과 관련해서도 기업 부담이 커서 여성노동자 고용을 기피한다는 문제도 있는데.
“현재 기업이 모성보호비용의 60%를 분담하고 있어 기업 부담이 지나치게 큰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은 원래는 건강보험에서 부담해 사회가 모성보호비용은 전담할 수 있어야 하지만,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분간은 고용보험기금을 늘리는 방향에서 기업 부담을 줄여줄 때 여성고용도 늘어날 것이다.”
-여성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당선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한나라당이 과거와 달리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을 기획 공천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았다. 여성계가 비례대표 50% 여성할당과 여성후보 지역구 공천 등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의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39명의 여성당선자라는 결과는 여성계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도 여성의원들이 국회에서 여성문제를 푸는 데 여성계의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여성의원들의 초당적 연대를 비롯해 여성관련 법안을 발의할 때도 여성계와 여성언론의 절대적인 협조와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한나라당이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제시한 ‘전문성, 개혁성, 참신성’을 갖춘 인재를 요구했는데, 이 부분에서 자신이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근거는?
“개혁이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잘사는 데 장애가 되는 시스템을 바꿔 가는 것이라고 본다. 급진적 혁명과는 다르다. 온건, 보수, 합리적으로 시스템을 고쳐 가는 일을 하고 싶다. 다시 말해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이미 국민 전체가 개혁을 갈망하고 있어 개혁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온건한 합리적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정치신인이면서 현실정치에 대한 경험이 많다고 평가되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선거 경험은 1992년부터 했다. 시아버지인 김태호 전 의원으로부터 현실정치가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때부터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각오를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아버님이 국정감사나 상임위 활동을 할 때 정책적 조언을 하면서 참모 역할을 해왔다. 자연스럽게 아버님의 지역구 관리를 하게 되었고, 집안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기 때문에 정치인들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문역은 언제나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역할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할 수 없을 때의 답답함은 있었다. 우리 사회의 전문가그룹이 정치영역에서 일정 부분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나의 힘을 보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현실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전문성과 열정을 갖춘 정치 후보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아버님의 영향으로 한나라당과 인연을 맺은 것인가.
“전혀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버님과 나의 정견이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특보로 활동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고, 이런 나의 가치와 가장 맞는 후보가 이회창 후보였다. 과거의 한나라당은 공과가 분명하다. 차떼기 당이라는 부정부패의 이미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믿음이 있기에 한나라당이 아직도 나의 가치와 부합되는 당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에서 박근혜 대표의 활약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는데, 박 대표의 지도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식인이 가장 많이 산다고 하는 서초구에서도 ‘뭐 여자가 나왔어’하는 편견이 도사리고 있었다. 박근혜 의원이 당 대표가 되고, 유세지원을 하면서 이런 불신은 많이 걷혔다. ‘노쇠한 기득권 세력’이라는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박 대표가 확 바꿔 놓은 것이다. 그는 이미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 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미지만으로 그의 리더십이 유지되었던 것이라면 총선 이후 추진력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라는 원칙하에 구태의 이미지를 벗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극우적 이미지를 벗어 던지려고 하고 있다. 이번 용천폭발사고에 신속한 대응을 하는 등 유연한 사고와 추진력이 그의 리더십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동적인 당을 움직이게 한 리더십이 그에게 있다.”
이혜훈이 걸어온 길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 및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UCLA) 경제학박사
미국 랜드연구소 연구위원
영국 레스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교수
한나라당 중앙차세대여성위원회 위원장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자문위원
한나라당 보건복지위원회 자문위원
유엔(UN)정책자문위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표
재정경제부 자금세탁방지위원회 위원
행정자치부 행정자치개혁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 위원
여성부 여성정책평가위원회 위원
국방부 국방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어떻게 살아왔나
이혜훈 당선자는 ‘보육 문제’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자신이 아이 셋을 키우면서 성장한 커리어우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3년 동안 랜드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을 때 남편도 없이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남편이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갔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쏟아낸 눈물은 몇 트럭으로도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한 번은 두 아이가 동시에 아파서 혼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어요. 큰아이는 입원을 시키고, 응급실에서 작은아이를 지켜보면서 밤새도록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는 정말 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었어요.”
곪았던 상처를 터트린 것처럼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일하는 여성이 겪는 보육의 어려움을 낯선 이국에서 몇 배로 겪어야 했던 이 당선자는 “사회가 보육을 담당하지 않는 한 여성의 사회생활에는 늘 좌절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모성이 존중받고 보호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해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교수, 국가기관 각종 경제자문역을 거쳤다. 이런 경력을 쌓는 동안 그에게도 ‘여성차별’이라는 독소가 늘 따라다녔다.
“제가 여성투사가 된 것은 사실 한국에 오고 난 뒤예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은 경력에 틈을 벌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는데, 그 경력을 한국에서 인정해주지 않더군요. 여자가 무슨 경력에 집착하느냐. 둘이 벌면서 무슨 욕심이 그리 많으냐는 식으로 나오는 데 기가 콱 막히더라고요.”
그는 여성의 직장생활을 ‘사치’쯤으로 여기는 남성중심적 사고에 진저리를 쳤다. 자기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사회적 편견에 더 화가 났다. 개인적으로 그가 자신의 일을 꿋꿋이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머니’였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던 어머니의 ‘한숨’을 보고 자라왔던 이 당선자는 “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친정 어머니의 당부를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어머니, 가족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여성정치인으로서 국회에 들어간 만큼, 사회가 여성들이 능력을 펴는 데 날개를 달아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내인생의 멘토‘한승수 의원’
이혜훈 당선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혜훈 이야기’ 코너가 있다. 여기서 그는 한승수 한나라당 의원을 ‘인생의 멘토’라고 소개하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시절 그의 교수였던 한 의원은 그에게 늘 전문 일꾼이 될 것을 권유했다. 한 의원은 제자에게 조언만으로 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었다. 그에게 인생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줬고, 그리고 유학길을 주선하고, 유학을 마치고 온 제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스승이었다.
‘경제전문가 이혜훈’은 한승수가 만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교통상부 장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주미대사 등을 거친 3선 한승수 의원은 이제 정계 은퇴를 앞두고 아끼는 제자에게 정치인으로서 바통을 넘겨줬다.
우먼타임스기자 ⓒ[우먼타임스 05/19 13:39]
첫댓글 "한나라 여성 당선자 네트워크 창립"- 김영선(3선)의원 등 한나라당 여성 당선자 16명은 18일 여성의 권익 향상과 여성 정치인들의 역할 강화를 위해 '한나라 여성 전진 네트워크'를 창립했다. 대표엔 金의원이 선출됐다.
와...똑독하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