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산성 전투
- 백제군은 신라 한성에 주둔했던 김무력군의 남하를 아예 몰랐던 것으로 알고 있소.
태자 여명이 이끄는 백제군이 김무력군과 교전하다가 전술적으로 포위당하여 섬멸당한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퇴로를 끊기고 전략적으로 포위되어 궤멸당하고 여명과 좌평을 비롯한 지휘부만 간신히 달아났다고 말이오.
또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이 김무력군의 척후에 우연히 걸린 것이 아니라
성왕의 이동을 알고 신라군이 매복했다가 잡아서 참수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2. 살수대첩
- 책의 본문에서 내호아가 이끌고 평양으로 직공한 수군의 내용은 왜 다루지 않는지 궁금하오.
책 본문에는 기록이 없다고 되어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내호아의 수군은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고 초전에서 승리하여 사기가 올라 정예 4만을 추려 평양성 외성 안까지 진출하지만
훗날의 영류왕인 건무가 선봉에서 5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내호아 수군을 쳐서 거의 전멸시켰고,
그때문에 함대로 퇴각하여 찌질거리다가 결국 평양 직공의 우중문군과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소.
3. 주필산 전투
- 고연수가 이끄는 선봉군이 패배하고 항복한 후 고정의가 당군을 역포위하였다는 것은
작자의 상상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기록에 바탕하고 있는 것인지 심히 궁금하오.
본햏도 안시성 지원군은 원래 15만인데, 고연수가 이끌고 항복한 병력은 3만 6천 8백 뿐이라
전사와 탈주병을 2~3만으로 추정해도 절반 이상의 대군이 남은 셈인데 그 후 기록이 없어 궁금했소.
아마도 작자의 상상이겠지만 꽤 논리성 있는 것이라 사료되오.
4. 일리천 전투
- 고려군 배치는 좌군과 우군은 각각 마군 1만, 보군 1만으로 각기 2만이었고,
중군은 마군 2만에 보군 3천, 그리고 전위부대가 말갈 기병대 9천 5백,
그리고 후위가 기병 3백에 여러 성에서 차출한 1만 4천 7백의 보병이었소.
그런데 책의 본문에서는 공훤이 후위대에 기병 1만을 이끌었다고 되어 있소만 어떤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인지 궁금하오.
5. 141쪽의 당의 군사 복원도 말이오.
당은 이세민, 이정, 이세적의 기병 개혁으로 중장기병을 폐지하고 그 충격작전을 보병대에 맡기고
기병은 경기병을 대량 양산하여 기동성과 전술로써 중장기병의 빈자리를 보완하였소.
그런데 복원도에는 기병이 중장기병으로 묘사되어 있구려.
6. 귀주대첩1
- 검차는 고려의 신무기가 절대 아니었소.
[육도] <호도편>에 보면 "축이 짧아 잘 구르며 창을 장착한 전차 120대를 준비합니다.
이것은 옛날 황제가 치우를 격파할 때 사용한 것으로서 적의 보병과 기병을 공격하고
궁지에 몰린 적을 요격하며, 패주하는 적을 차단하는 데 사용합니다." 라는 기록이 있소.
그리고 개경의 나성은 거란 3차 전쟁이 모두 끝난 후인 1020년에 축성을 시작해 9년 후에야 완공하게 되오.
책 본문에는 소배압이 2차 전쟁 때는 없었던 개경의 나성을 보고는 기세가 꺾였다고 되어 있구려.
7. 귀주대첩2
- 소배압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 1만의 김종현군은 그때까지도 소배압을 추격하는 중이었소.
실제로 소배압이 개경 코앞에 진을 쳤을 때 전 병력을 강동 6주를 비롯한 북방 방어선에 배치한 이유로
개경에는 병력이 거의 없어서 현종이 기겁을 했으며, 농성 준비를 하는 포커페이스에 소배압이 속아 넘어가서 겨우 철군하게 되오.
(사실 소배압이 이걸 노리고 개경 직공 작전을 펼쳤지만 지꾀에 지가 넘어가게 되오.)
김종현군은 소배압이 남하하는 시점부터 계속 추격하지만 소배압군의 환상적인 기동으로 인해 잡지 못하다가
마지막 결전인 귀주 전투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소배압이 예상하지 못했던 거란군 후위에서 갑자기 나타나
거란군을 혼란하게 하고 고려군의 사기를 끌어올려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오.
김종현군이 개경 앞에 진을 치고 소배압을 기다렸다는 것은 작자의 기록을 너무 무시한 서술 같구려.
그리고 고려가 20만 8천의 병력을 모두 강감찬의 직속군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강동 6주를 비롯한 북계 방어선에 배치한 것이고,
귀주에서 거란군과 맞붙은 고려군의 병력은 거란군과 거의 비슷하다고 여겨지는게 정설이오.
거란군이 개경으로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면서 잃은 병력이 2~3만 정도라 추정되고,
따라서 귀주에서 거란군은 7~8만, 고려군은 약 10만 가량으로 맞붙었을 것이오.
8. 황산대첩
-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이끌었던 고려군은 왜구의 병력보다 크게 열세였던 것으로 알고있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왜구의 병력이 이성계군보다 10배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 과장 같고..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고려군이 많아봤자 왜구와 엇비슷하거나 적었다는 것이 정설이오.
9. 탄금대 전투
- 첫장인 209쪽부터 조선군이 철저히 무력했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사실 조선군이 공세를 취한 전쟁이었으며, 조선군이 훨씬 많이 승리한 전쟁이오.
이것은 본햏이 예전에 썼던 '7년 전쟁의 진실을 파헤치자'를 참고하길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