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숙명(宿命)의 만남
[1]
삘리리리... 삘리리.......
어둠을 타고 한 가닥 피리소리가 흐른다. 기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피리소리였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들리는 피리소리에는 왠지 사람을 비탄에 잠겨들게 하는 마력이 들어있는 듯했다.
귀발애(鬼髮涯).
황량한 이름이 붙어있는 이곳은 감숙성(甘肅省)의 한 산곡에 위치한 곳이다.
돌무더기가 널려있는 골짜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다 보면 흡사 귀신의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형상의 아스라한 단애가 펼쳐져 있다.
그 단애 끝에 꽤 규모가 큰 석옥(石屋)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곳에 석옥을 지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황량한 단애 위에서 살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석옥은 보통 가옥이 아니었다. 석옥 안은 하나의 거대한 서고(書庫)였다.
사면의 벽이 온통 서가(書架)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서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는데, 서가에 꽂히고도 모자라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기까지 수북이 쌓여있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고서의 내용이었다.
고서들은 대부분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희귀본으로 기문벽서(奇文僻書)들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하에 산재한 무공비급(武功秘 )들이 태반이었다.
거기에 기문진학(奇文陣學), 오행둔갑술(五行遁甲術), 성복학(星卜學), 의전(醫典), 독약경(毒藥經)...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책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삘리리... 삘리리.......
피리소리는 바로 이 서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서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방 한가운데의 석탁 앞에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린 흑삼(黑衫)의 미서생이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나이는 이십여 세 가량 되었을까?
그에게는 천품(天稟)의 귀재와도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용모 또한 준미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의 전신에서 얼음처럼 찬 기운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성(寒星)과도 같은 눈빛은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줄 듯했다.
미서생은 문득 입술에서 피리를 떼었다.
냉월(冷月)처럼 창백한 그의 얼굴에 고뇌의 표정이 덮였다.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렸다. 피리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자에게 물어 그의 대답에 따라 떠나거나 머물리라."
미서생은 몸을 일으켰다.
"용정차를 준비해야겠군."
험준한 산야를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야유신행술이란 녹림의 경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바로 팔불랑객으로 변장했던 소년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는 신형을 멈추었다.
온통 돌천지를 이루고 있는 곡구였다. 그는 골짜기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 계곡 끝은 사람들이 귀발애라 부르는 곳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피리소리가 들리다니.......'
소년은 바로 심금을 뒤흔드는 피리소리에 이끌려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어쨌든 들어가 보자.'
그는 신형을 날려 돌투성이의 계곡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는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진(陣)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
소년이 서있는 주위에 짙은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귀기가 느껴지는 안개였다.
문득 그의 눈에서 벽광(碧光)이 발산되었다. 그는 안개를 뚫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천극벽파안공(穿極碧破眼功)이란 초극의 안공을 펼친 것이다.
그러자 오 장 밖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바위는 한 면이 깨끗이 문질러져 있었는데 그곳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입곡하여 일다향(一茶香)을 함께 나누지 않겠소?
바위에 새겨진 글은 세 치 깊이로 파여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쓴 것이었다. 필체는 가히 천하의 명필이라 할 만했다.
"......!"
소년은 아연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씩 웃었다.
"놀랍군. 나보다 더한 귀신이 있다니. 하여간 들어가 보자. 도적이란 자고로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하니 말이야."
소년은 자신을 도적이라 칭했다.
스슥!
소년은 야유신행술을 발휘하여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계곡 속에 펼쳐진 진은 더 이상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석정(石亭).
곡 안에는 한 채의 정자가 서있다. 전체가 돌로 된 정자였다.
스슷!
정자 앞에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미소년이었다.
"......!"
소년의 신비한 매력이 감도는 눈길이 정자로 향해졌다. 정자 안에는 석탁이 있었고, 그 위에 찻잔 두 개가 김을 내며 놓여있었다.
소년의 눈길은 곧바로 석탁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흑삼서생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 사위가 어떤 눈부심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그들은 동시에 숙명적인 끈이 서로를 향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영원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긴 것이었다.
하나 무엇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흑삼서생이었다.
"하하......! 어서 오게. 나무꾼이나 도사가 오기를 기대했었는데 나보다 어린 사람을 보게 되다니 뜻밖일세. 난 천옥룡(天玉龍)이라 하네."
흑삼서생의 음성은 맑고 청아했다. 그는 무릎에 놓인 한 자루 흑소(黑簫)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한 가지 고민이 있어 피리를 불어 객을 청했네."
천옥룡은 소년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으로 올라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천형이시오? 소생은......."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했다.
"소생은 단몽경(段夢卿)이라 하오."
"하하... 이제 보니 단소형제(段少兄弟)였군. 자... 우선 식기 전에 차를 드세."
천옥룡은 차를 권하며 자신이 먼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었다.
구름에 가린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사위는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으나 두 젊은 기재의 담론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고담준론(高談峻論)이었다.
두 사람 다 모르는 것이 없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기재들이었기에 대화를 하면 할 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탄복하고 있었다.
"하하! 단소형제,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네."
"별 말씀을요. 천형의 하늘보다 높은 학식이야말로 소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어린 눈으로 마주보며 대소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 나이와 출신을 초월하여 마음이 교통하는 것을 느꼈다.
한데 두 사람의 기질은 몹시 대조적이었다.
천옥룡은 냉랭하고 패도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반면 단몽경은 부드럽고 낙천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이 맞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사경(四更)에 이르고 있었다.
천옥룡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 이제 날 위해 대답해 주지 않겠는가?"
단몽경은 미소지으며 물었다.
"무엇을 묻고자 하시오?"
천옥룡은 눈빛을 기이하게 번뜩이며 말했다.
"내 갈 길에 대한 것이네."
"......?"
단몽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길은... 내가 꺼려하는 길이네. 하나 난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키워졌네."
단몽경은 의혹이 치밀었다. 하나 천옥룡의 표정은 심각했다.
"하늘과 땅의 뜻이 날 그 길로 밀어내고 있네. 그런데 난 그 운명을 따라야할지... 아니면 은자(隱者)로 평생을 유유자적하며 살아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네."
천옥룡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난 삼 년 전 집을 나왔네. 운명을 따르기 위해서 말일세."
단몽경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대체 어떤 길이기에?"
천옥룡의 눈에서 문득 푸른빛이 흘렀다.
"내게는... 숙명적인 경쟁자가 있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보다 나아야만 되는 사람이네. 하지만 아쉽게도......."
"......?"
천옥룡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단몽경을 바라보았다.
"숙명의 경쟁자가 자네처럼 영리한 것이 아니라... 후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위인이라네. 그래서 난 경쟁심을 잃은 나머지 허탈해진 것이네."
천옥룡은 자신의 말 속에서 자신의 유아독존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단몽경을 높이 평가하는 듯했으나 실상은 은근히 자신만 못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단몽경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만에 하나... 나의 경쟁자가 만고기재라면 그를 상대로 무엇인가를 해볼텐데......."
천옥룡은 혀를 찼다.
"쯧쯧! 너무 쉬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즉시 이길 수 있으니 말일세."
단몽경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쉽게 뜻을 이룰 수 있단 말이오?"
천옥룡은 오만한 기소를 날렸다.
"후후... 난 그 누구도 겁내지 않네. 세상에는 나의 적이 없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기를 망설이며 주저하는 것이네. 알겠는가? 내 고민이 무엇인지를?"
단몽경은 내심 기가 찼으나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넓다고 알고 있소, 천형."
"넓다? 후후훗......!"
천옥룡은 괴소와 함께 자신의 손바닥을 불쑥 내밀었다.
마치 세상은 나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다.
정자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옥룡은 흑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단몽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 단몽경은 눈을 반쯤 내리 감은 채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참 후에야 그의 입술이 열렸다.
"천형, 천지간에 널린 나뭇잎 한 개, 차돌 한 개에도 뜻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만약 소제라면......."
"자네라면?"
천옥룡은 침을 삼켰다.
"소제라면 고민하기보다는 숙명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천옥룡의 안색이 변했다.
"직접 발로 뛰어 돌아다니며 그 숙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할 말은 그 뿐입니다."
"흐음!"
천옥룡은 적지 않은 감응을 받은 듯싶었다. 그의 안색이 몇 차례나 변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멋진 말이군. 내 참고하겠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아주 단호하고 냉정한 태도였다. 그것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떠나라는 무언의 축객령(逐客令)에 해당되는 동작이었다.
"......."
단몽경은 그의 뜻을 알았다. 그는 태연히 몸을 일으켜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후일을 기약하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두 기재는 그렇게 헤어졌다.
스스스......!
야풍이 불었다. 더욱 스산하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귀발애에서 화광(火光)이 충천했다.
귀발애 끝에 걸쳐져 있는 석옥이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석옥 안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서들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석옥과 함께 송두리째 불타고 있었다.
석옥에 불을 지른 것은 천옥룡이었다.
그는 묵묵히 화염에 휩싸인 석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석옥이 굉음과 함께 귀발애 아래로 무너져 내리자 그의 얄팍한 입술이 움직였다.
"들어가리라, 소인배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으로. 그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어디 한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보자."
그 한 마디 말!
그것이 장차 무림에 엄청난 혈겁을 뿌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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