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산성 전투
- 백제군은 신라 한성에 주둔했던 김무력군의 남하를 아예 몰랐던 것으로 알고 있소.
태자 여명이 이끄는 백제군이 김무력군과 교전하다가 전술적으로 포위당하여 섬멸당한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퇴로를 끊기고 전략적으로 포위되어 궤멸당하고 여명과 좌평을 비롯한 지휘부만 간신히 달아났다고 말이오.
또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이 김무력군의 척후에 우연히 걸린 것이 아니라 성왕의 이동을 알고 신라군이 매복했다가 잡아서 참수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 님은 전쟁사를 기술함에 있어 기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군사적인 상식은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록에만 의지하는 서지(書誌)학자와 전문적으로 군사이론을 배운 사람의 차이입니다. 님은 전투지도를 한 눈에 보고 이를 전략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자구(字句)에 매달리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인식이야 왕자 부여창이 배후에 있는 김무력의 존재를 무시하였다가 포위되어 전멸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부여창이 전략의 기본도 모르는 바보라는 설정하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김무력이 한강 하류에 있는 신주(神州)의 군주(軍主)로 임명되는 등, 신라가 한강하류와 남한강 유역에 군사력을 증강시켰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어야 가능한 설정입니다.
동양에서의 전쟁기록은 대개 전술적인 분석보다는 단순히 지휘관의 오판이나 지휘관의 소속국가의 실정(失政), 또는 도덕적 타락으로 인하여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는 식으로 인식합니다. 본인은 바로 그러한 인식을 타파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님도 전황(戰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창의 패배를 단순히 그의 무능 탓으로 돌리는 듯 합니다.
더군다나 관산성 대전 이전에 벌어진 백합야의 전투는 분명히 당시 백제 국경의 북쪽, 그러니 지금의 경기도에서 싸웠을 텐데, 그 사령관되는 부여창이 한강 하류에 포진해있는 신라군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까?
그리고 본인은 김무력이 정찰활동을 부지런히 했기 때문에 성왕의 접근을 알아차렸다고 했지, 운 좋게 발견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김무력이 성왕의 이동을 ‘알았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알아낸 것이죠? 김무력이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정찰활동으로 알아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기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쟁기록을 분석하는데는 기록뿐만이 아니라 전략적인 상식도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나치게 ‘기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신지요?
2. 살수대첩
- 책의 본문에서 내호아가 이끌고 평양으로 직공한 수군의 내용은 왜 다루지 않는지 궁금하오. 책 본문에는 기록이 없다고 되어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내호아의 수군은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고 초전에서 승리하여 사기가 올라 정예 4만을 추려 평양성 외성 안까지 진출하지만 훗날의 영류왕인 건무가 선봉에서 5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내호아 수군을 쳐서 거의 전멸시켰고, 그때문에 함대로 퇴각하여 찌질거리다가 결국 평양 직공의 우중문군과 합류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소.
---> 물론 살수대첩의 전체적인 국면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살수에서의 전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아울러 아무리 패잔병이라도 그런 대함대로 물러났으면 아직도 상당수의 배와 병력이 있을텐데 그들의 활동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함대로 물러났고 패잔병, 그것도 사기가 잔뜩 쫄아 있는 패잔병을 고구려의 수군이 그냥 놔주었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중국쪽으로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3. 주필산 전투
- 고연수가 이끄는 선봉군이 패배하고 항복한 후 고정의가 당군을 역포위하였다는 것은
작자의 상상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기록에 바탕하고 있는 것인지 심히 궁금하오.
본햏도 안시성 지원군은 원래 15만인데, 고연수가 이끌고 항복한 병력은 3만 6천 8백 뿐이라 전사와 탈주병을 2~3만으로 추정해도 절반 이상의 대군이 남은 셈인데 그 후 기록이 없어 궁금했소.
아마도 작자의 상상이겠지만 꽤 논리성 있는 것이라 사료되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8년조에 김부식이 유공권의 소설을 인용하여 주를 달면서 ‘주필산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니 그 군사가 40리에 뻗쳤으며 태종이 바라보고 두려워했다’고 했으며, 바로 뒤에 ‘황제(이세민)이 친솔한 6군이 고구려 군사들에게 핍박을 당하요 위축되었고, 영공(태종)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상상이라고 생각하시다니...상당히 유감이군요.
4. 일리천 전투
- 고려군 배치는 좌군과 우군은 각각 마군 1만, 보군 1만으로 각기 2만이었고,
중군은 마군 2만에 보군 3천, 그리고 전위부대가 말갈 기병대 9천 5백,
그리고 후위가 기병 3백에 여러 성에서 차출한 1만 4천 7백의 보병이었소.
그런데 책의 본문에서는 공훤이 후위대에 기병 1만을 이끌었다고 되어 있소만 어떤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인지 궁금하오.
---> 바로 삼국사기 권 제50에 있는 ‘견훤열전’입니다. 태자 무(武)와 박술희가 보․기 각 1만을 거느리고 갔다는 것만 보시고 뒤에 나오는 기록은 아니 보신 모양입니다. 태조 왕건이 열병을 하면서 견권/박술희/금산/용길/기언 등이 이끄는 보기 혼성군 3만으로 좌익, 김철/홍유/수향/왕순/준량 등이 이끄는 보기 3만으로 우익, 거기다고 보병 2만에 기병 3천, 그리고 흑수의 강한 기병 9천 5백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공훤과 왕함윤의 군사 1만 5천입니다. 다 합하면 10만 7천 5백입니다.
그러나 전에 출발하였던 2만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를 빼고 87500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록을 그리 강조하시면서 이 기록은 못 보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5. 141쪽의 당의 군사 복원도 말이오.
당은 이세민, 이정, 이세적의 기병 개혁으로 중장기병을 폐지하고 그 충격작전을 보병대에 맡기고 기병은 경기병을 대량 양산하여 기동성과 전술로써 중장기병의 빈자리를 보완하였소. 그런데 복원도에는 기병이 중장기병으로 묘사되어 있구려.
---> 당나라가 경기병을 대폭 늘리기는 하였지만 중기병을 아주 폐지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복원도는 중국에서 편찬된 <중국군융복식사>라는 화보집에 근거한 것입니다.
6. 귀주대첩1
- 검차는 고려의 신무기가 절대 아니었소.
[육도] <호도편>에 보면 "축이 짧아 잘 구르며 창을 장착한 전차 120대를 준비합니다.
이것은 옛날 황제가 치우를 격파할 때 사용한 것으로서 적의 보병과 기병을 공격하고
궁지에 몰린 적을 요격하며, 패주하는 적을 차단하는 데 사용합니다." 라는 기록이 있소.
그리고 개경의 나성은 거란 3차 전쟁이 모두 끝난 후인 1020년에 축성을 시작해 9년 후에야 완공하게 되오. 책 본문에는 소배압이 2차 전쟁 때는 없었던 개경의 나성을 보고는 기세가 꺾였다고 되어 있구려.
---> 신무기란 개념이 전에 없던 무기를 발명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검차는 그 전에 있던 ‘차전’을 개량한 무기입니다. 그리고 이 개량된 무기를 군에 ‘새로이’ 배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비록 거란 침략이 끝난 후 본격적인 공사가 전개되지만, 성을 기초적인 축성은 이미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현종 초기에 나성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고, 성의 특성상 기본 계획수립과 함께 기초공사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반란과 거란의 1,2차 침략 때문에 높이 쌓아올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려사 제 4 권4에 현종 즉위년에 이미 ‘이 달(3월)에 開京의 羅城(外城)을 쌓기를 論議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아직도 상당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거란군이 나성도 없고 불과 1만+α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개경을 함락시키지 못했을까요? 단순히 고려의 포커페이스나 후방의 위협이 아니라, 이미 금교역에서 패배한데다가 개경의 방어태세까지 강해보이자 개경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아 후퇴를 단행한 것입니다.
7. 귀주대첩2
- 소배압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 1만의 김종현군은 그때까지도 소배압을 추격하는 중이었소.
실제로 소배압이 개경 코앞에 진을 쳤을 때 전 병력을 강동 6주를 비롯한 북방 방어선에 배치한 이유로
개경에는 병력이 거의 없어서 현종이 기겁을 했으며, 농성 준비를 하는 포커페이스에 소배압이 속아 넘어가서 겨우 철군하게 되오.
(사실 소배압이 이걸 노리고 개경 직공 작전을 펼쳤지만 지꾀에 지가 넘어가게 되오.)
김종현군은 소배압이 남하하는 시점부터 계속 추격하지만 소배압군의 환상적인 기동으로 인해 잡지 못하다가
마지막 결전인 귀주 전투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소배압이 예상하지 못했던 거란군 후위에서 갑자기 나타나
거란군을 혼란하게 하고 고려군의 사기를 끌어올려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오.
김종현군이 개경 앞에 진을 치고 소배압을 기다렸다는 것은 작자의 기록을 너무 무시한 서술 같구려.
그리고 고려가 20만 8천의 병력을 모두 강감찬의 직속군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강동 6주를 비롯한 북계 방어선에 배치한 것이고,
귀주에서 거란군과 맞붙은 고려군의 병력은 거란군과 거의 비슷하다고 여겨지는게 정설이오.
거란군이 개경으로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면서 잃은 병력이 2~3만 정도라 추정되고,
따라서 귀주에서 거란군은 7~8만, 고려군은 약 10만 가량으로 맞붙었을 것이오.
---> 일단 과거에 나주까지 도망간 현종이 개경안으로 백성들을 피신시킨 후 항전을 준비한 것도 사실이고 김종현이 개경까지 와서 지켰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인이 그 정도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김종현은 개경까지 갔고 그 뒤를 따라 동북면 병마사의 병력이 구원군으로서 오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기록을 보신 것입니까?
고려사 94 열전 제7 ‘강감찬’편에 있는 대목입니다.
...이듬해 正月 邯贊이 契丹兵이 京城에 逼迫함으로 兵馬判官 金宗鉉을 보내어 兵士 一萬을 거느리고 길을 倍나 걸어서 入衛케 하고 東北面 兵馬使도 또한 軍士 3千3百을 보내어 入援케 하니...
여기서 ‘입위’란 말은 임금이 계신 궁궐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즉 개경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 책을 다시 읽어보시지요. 본인은 20만 8천명이 모두 강감찬의 직속군이라고 이야기한 것 없습니다. 다만 그가 거란과 싸우는 고려군의 최고사령관이라고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사령관이라고 해서 전군(全軍)을 직접 거느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8. 황산대첩
-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이끌었던 고려군은 왜구의 병력보다 크게 열세였던 것으로 알고있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왜구의 병력이 이성계군보다 10배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 과장 같고.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고려군이 많아봤자 왜구와 엇비슷하거나 적었다는 것이 정설이오.
---> 우선 왜구의 전투 병력수가 약 8000명이니 10분의 1이라면 800명밖에 안됩니다. 구러니 이는 애초부터 말이 안되고 이성계는 조정에서 딸려보낸 군사이외에 자신의 사병도 참전시켜서 왜구들을 토벌합니다.
만약 왜구의 숫자가 고려군보다 많았다면 그들이 왜 굳이 험지에 올라가 버티기 작전을 구사했는지 설명이 안됩니다. 이미 고려군 500명과 장군 2명을 죽인 일까지 있는데 말입니다. 병력이 우세했다면 군을 양분하여 협공을 한다던가 하는 작전도 가능했겠지만 그들이 험지에 올라가 수비를 한 것은 그들의 병력이 열세였다는 정황증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록이나 ‘정설’에만 의지하는 것은 전쟁사 연구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9. 탄금대 전투
- 첫장인 209쪽부터 조선군이 철저히 무력했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사실 조선군이 공세를 취한 전쟁이었으며, 조선군이 훨씬 많이 승리한 전쟁이오.
이것은 본햏이 예전에 썼던 '7년 전쟁의 진실을 파헤치자'를 참고하길 바라오.
----> 후반부로 가면서 조선군이 많이 정비되고 승리도 거두지만, 초기에 조선 관군이 보여준 무능력은 숨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끝에서 만회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이란 국가의 방위체계가 허술하였음은 인정하셔야합니다. 조선군이 나중에 공세를 많이 취했으면 뭐합니까? 애초부터 국방력을 튼튼히 유지하여 왜군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야죠.
국방을 허술히 여기는 바람에 이미 당할 것 다 당해놓고 나중에 만회하였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만한 일이 못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