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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 제 2화 해골왕 레오릭/ 김 태영
부처를 처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에서 로한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름 없는 풋내기 떠돌이 무사의 비애였다. 명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무사에게 기사단장도 처치하지 못한 부처를 처리했다는 그 자체로 기득권을 가진 무사들에게 모욕이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은 로한의 공로를 애써 깎아 내렸다.
체신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교황청에서 고위 기사 단장을 급파했다. 지난번 부처에게 당했던 기사 단장을 대신한 신참이었다.
로한을 만난 기사 단장은 부처에게 걸린 현상금을 주기 전에 다시 한 번 로한의 실력을 증명해 보라 했다. 다행스럽게도 기사 단장은 교만하지 않았다. 로한에게 고위 무사들이 배울수 있는 진법과 몇 가지의 고급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진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과 검에 기를 불어넣어 속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기술이었다. 로한의 학습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속성변환 기술은 아무리 뛰어난 무사라 하더라도 최소 6개월 이상의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겨우 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뼛속 깊이 전사의 피가 흐르는 로한은 별 어려움 없이 사흘만에 속성을 이해하고 습득해 내었다.
경이로운 학습 능력을 보여준 로한에게 기사 단장은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자신조차도 불의 속성 하나를 완전히 익히는데만 2년이 걸렸다. 기사 단장은 로한이 천민 출신이라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귀족 출신이었다면 체계적인 기술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로한은 지금 제국내 최고의 검사가 되어 있거나 혹은 군사령관이 되어 십자군의 선봉에 서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변방의 촌뜨기일 뿐이었다.
기사단장이 로한에게 실력을 증빙하라며 내준 과제는 4층 안쪽 비밀의 방에 숨어 있는 해골왕 레오릭을 처치하라는 것이었다.
기사단장의 말에 따르면 해골왕 레오릭은 왕이 아니라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그 옛날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무렵, 밀려들어오는 무슬림 군대와 맞서던 십자군의 선봉대장이었다. 그는 전사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용감했으며, 민첩했으며, 괴력의 소유자였으며, 뛰어난 무사였으며,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부대를 이끌고 언제나 선봉에 서서 종횡무진 적진을 달렸다. 아군에게 천군만마의 힘이었으나 적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다. 그의 군대 앞에 적군은 무릎을 꿇었고 항복하거나 도망치기 바빴다. 이러한 레오릭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 또한 로한과 같은 천민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출세의 절대 조건인 출신성분은 중세 시대 유럽에 만연해 있는 사회풍조였다. 바람처럼 적을 베고 승리를 안겨다 주는 레오릭의 최종 계급은 야전 사령관이었다. 그의 부대는 언제나 5백 명 이하로 제한되고 있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출신의 벽을 넘지 못한 레오릭은 끝내 좌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오릭은 금단의 구역에 숨어 있는 반역자 로빈 요한슨을 처치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 로빈 요한슨은 제국의 총사령관이었으나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비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의 부대는 제국군에 의해 섬멸 되었다. 살아남은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붙잡혀 산채로 불태워지는 화형에 처해졌다. 로빈 요한슨은 혼란을 틈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도망쳐 나오면서 제국의 보물창고에 있는 저주받은 왕관을 훔쳐 달아났다. 저주받은 왕관은 해골 병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힘을 배가시켜 강력한 전사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의 힘에 사로잡혀 끝내 뼈만 남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저주는 너무나 강력하여 뼈만 남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도망친 로빈 요한슨은 금단의 구역에 숨어들어 새로운 야망에 불타올라 군대를 소집했다. 그에게는 저주받은 왕관이 있었다. 붙잡히면 화형이나 거열형(산채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걸 잘 아는 로빈 요한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주든 뭐든 살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었다. 행여 해골로 변한다 할지라도 산채로 찢겨 죽는 것 보다 나을 것이었다. 금단의 구역은 불모지의 땅이었다. 죽은 나무숲이라고도 불리는 이 땅에 들어갔다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낮에도 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의 장소였다.
로빈 요한슨은 이곳에서 어둠의 군대를 길렀다. 스스로 해골이 되어 죽은 자를 불러 내어 군대의 규모를 늘렸다. 뼈다귀 군대는 먹지 않았고 입지 않았다. 군수 물자가 필요 없는 환상의 군대였다.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빛이었다. 빛을 받으면 소멸하므로 어둠속에서만 은밀히 이동해야 했다.
5백 결사대를 이끌고 금단의 구역으로 가던 레오릭의 군대는 어느 깊은 밤, 야습을 당했다.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두운 저녁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틈을 타 해골 병사들이 레오릭의 야영지를 급습한 것이었다.
제국의 총사령관을 지낸 로빈 요한슨의 지휘 능력은 뛰어났다. 언덕 위에서 거대한 검을 짚고 서 있는 요한슨은 해골 병사들을 직접 지휘했다.
한손에 들고 있는 깃발 위치에 따라 해골 병사들의 움직임이 물결처럼 변했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기습을 당한 레오릭 군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결사대라는 의미도 없이 맥없이 무너졌다. 혼란을 수습한 레오릭은 방어진을 치고 결사 항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오릭의 군대는 줄어들었으나 해골 병사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레오릭 군대의 검에 쓰러진 해골 병사는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섰다. 아무리 베어내도 적군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해골 병사를 베어내던 레오릭의 시야에 언덕 위에서 지휘하는 사령관 로빈 요한슨이 들어왔다.
‘군대를 와해시키려 한다면 먼저 적장을 베어라.’
장수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레오릭은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해골 병사들의 숲을 헤쳐 나갔다. 마침내 요한슨과 레오릭이 정면 대결하게 되었다.
두 영웅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째깡!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레오릭의 손에도 로빈 요한슨의 손에도 묵직한 통증이 흘렀다. 거대한 두 개의 힘이 부딪히자 강력한 힘의 파동에 의해 땅이 흔들렸다. 요한슨은 레오릭의 힘 앞에 경악했다. 저주받은 왕관의 힘으로 인해 몇 배나 강력해진 자신의 힘과 맞먹거나 혹은 압도했다.
이런 인간이 저주받은 왕관의 힘을 빌린다면 분명 천하무적이 될 것이었다.
요한슨은 군대를 멈추고 레오릭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로빈 요한슨이 레오릭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황제의 친서였다. 레오릭의 군대가 어느 시간 자정에 이곳을 지날 것이니 몰살 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임무만 성공하면 면죄하고 영지를 내리겠다는 교서였다.
요한슨은 황제의 명령을 따랐다. 그의 가족이 볼모로 잡혀 있었기에 황제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레오릭을 처단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 제국내 잠재적 적이 될 수 있다는 중신들의 의견을 수용한 것뿐이었다.
교서를 본 레오릭은 분노했다. 제국을 위한 충성의 대가로 돌아온 것이 교살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로빈 요한슨은 저주받은 왕관을 벗어 레오릭에게 건넸다. 로빈 요한슨은 황제를 믿을 수 없었다.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전투의 선봉에 서서 목숨 받쳐 적들을 쳐낸 레오릭을 교살하라는 명령때문이었다. 로빈 요한슨이 역모를 일으킨 이유 또한 레오릭과 같았다. 간신은 충신을 오래 살려두지 않았다.
‘나 요한슨이 해골 군대의 선봉장이 될테니 당신의 능력으로 해골왕이 되라’는 요한슨의 제안을 레오릭은 받아들였다.
배신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 왕관을 쓰고 디아블로가 이끄는 어둠의 군대에 편입했다. 디아블로의 군대와 전쟁 중 가장 힘들었던 전투가 바로 이 레오릭의 해골 군대였다. 수많은 기사와 군대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단하지 못하고 4층 비밀의 방에 가두는데 겨우 성공했을 뿐이었다. 만약 디아블로의 군대가 다시 재편 된다면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 레오릭이라 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기사 단장은 로한에게 해골왕의 힘을 감소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왕관을 벗겨내야 한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기사 단장은 로한에게 왕이 내린 검을 하사했다. 길이가 1.5미터가 넘는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였다. 미스릴로 만든 강력한 검이었다.
검을 받아든 로한이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보았다. 묵직한 것이 한손으로 사용하기에는 쉽지 않은 검이었다. 기사단장이 검의 사용법을 일러 주었다. 검을 쥐는 법과 휘두르는 법, 십자 베기와 역십자 베기 등의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준비를 마친 로한은 성당을 향했다. 일종의 시험 같은 것이므로 기사 단장은 로한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로한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내려왔다. 성당 안은 여전히 어둡고 음습했다. 로한이 횃대에 불을 붙이자 그나마 조금은 시야가 트였다. 로한은 기사단장이 일러준 대로 복도의 끝을 따라 걸었다. 어둠속에서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로한의 등으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이지만 훈련다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로한은 아직은 경험이 부족했다. 기사단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한의 실력으로는 검을 들기도 전에 저승길로 갈지 몰랐다. 그의 그림자 위로 두려움이 앞서 걸었다. 음산한 공기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벽모퉁이를 돌아 성당 4층의 중간쯤에 전사인지 촌부인지 모를 주검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심하게 부패한 시체 옆엔 녹슬은 방패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죽은 자의 것이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로한은 방패를 들어 먼지를 털어내었다. 아직은 꽤 쓸 만한 원형 방패였다. 방패를 등에 맨 로한은 바스타드 소드를 추켜들고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지난번 4층의 엘리베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정처없이 떠도는 하급 괴물들을 처리해 놓았으므로 괴물들의 저항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이 성당엔 온갖 기관 장치와 부비트랩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부분이 디아블로와의 전투를 위해서 설치한 기관과 함정들이었지만 몇몇은 최근에 설치된 것들이었다.
눈은 매서워야 하고 직감은 날카로워야 했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성당안의 지하 괴물들과의 치열한 전투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진리였다.
마침내 기사단장이 건네준 지도에 표시된 비밀의 방 문 앞 다다랐다.
열쇠를 끼워 넣자 묵직한 기계음이 들려오고 석벽으로 된 두꺼운 문이 한 바퀴 돌면서 비밀의 방이 드러났다. 비밀의 방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오로지 밖에서만 열수 있기에 누군가 열어주지 않는 한 해골 왕이 탈출하는 건 불가능 했다.
문이 열리자 로한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비밀의 방은 의외로 넓었다. 석벽이 둘러쳐진 가운데 돌로 된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해골이 있었다. 살은 썩어 문드러져 사라져 버리고 해골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한의 키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컸다. 로한이 가까이 가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대한 칼을 짚고 앉아 있는 해골왕의 텅 빈 눈과 입 안에는 거미줄이 잔뜩 얽혀 있었다. 해골 병사도 보이지 않았다. 로한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해골 왕이 무척 의아했다. 해골왕에게서 저주받은 왕관을 걷어내기 위해 해골왕에게 다가선 순간, 로한이 열어놓은 비밀의 방 문 틈으로 옅은 바람이 실려 들어 왔다. 바람이 불어오자 해골왕의 입속에 쳐진 거미줄이 출렁였다. 놀란 거미가 바람을 피해 달아났다. 바람이 통과하고 나자 해골왕의 입속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왔는가? 전사여.”
말소리와 함께 해골 왕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목이 움직이자 우두둑 뼈 꺾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로한이 뒤로 나자빠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해골왕의 머리에서 빼낸 저주받은 왕관을 놓치고 말았다. 해골왕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저주받은 왕관으로 향했다. 레오릭이 몸을 일으켜 저주받은 왕관을 집어 들었다. 저주받은 왕관과 로한을 번갈아 쳐다보던 해골왕이 검을 들어 대결 자세를 취했다.
“네놈은 로빈 요한슨이 아니군. 감히 내 왕좌를 노리다니…….”
기백과 분위기에 압도당한 로한은 겨우 일어나 바스타드 소드를 비껴들었다.
“요한슨! 요한슨!”
레오릭이 요한슨을 부르자 땅속에서 뼈로 된 손가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나온 해골 병사 하나가 레오릭 앞에 부복했다.
“침입자로구나, 처단해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명령을 받은 해골 전사는 거대 검을 질질 끌며 로한을 향해 나아갔다. 해골 전사는 황금 갑옷을 걸치고 가시 박힌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레이트 소드를 든 것으로 봐서는 분명 사령관급 장수였다. 검을 추켜들지 않고 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있다는 증거였다. 검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검이었다. 검을 빼냄과 동시에 적을 베는 것이다. 그레이트 소드는 전투용 검이라기보다는 대결용 검이라 해야 맞는 말이다. 자신의 신장보다 더 큰 검은 검날에 의지하기 보다는 무게에 의지한다. 중세시대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아주 효과적인 무기였다.
로한은 로빈 요한슨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세히 살폈다. 그레이트 소드는 자신이 들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와 맞상대 할 성질이 아니었다. 막아내기도 힘들뿐더러 막아낸다 해도 검이 부러지거나 망가질 게 뻔했다. 더군다나 힘이 달린다면 막아낸다 해도 몸이 두동강 날판이었다.
로한은 등에 지고 있던 방패를 풀어 바닥에 던져 놓았다. 힘이 달린다면 속도에 의지해야 한다. 그레이트 소드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전사라면 맞대결은 불가능하다. 로한이 계산하고 있는 사이 로빈 요한슨이 검을 끌며 돌진해 들어왔다. 로한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달려오는 관성의 힘을 이용한 요한슨이 검을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내리쳤다. 로한의 계산과는 달리 매우 빠른 몸놀림이었다. 로한이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자 내려친 검이 흙속에 깊숙이 박혔다. 요한슨이 흙속에 박힌 검을 빼내어 그대로 몸을 돌려 위에서 아래로 그어내렸다. 흙속에 박힌 검이 빠져 나오면서 딸려 나온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로한은 몸을 틀며 간신히 요한슨의 검을 피했다. 겨루기에 있어서 보법은 매우 중요했다. 가장 작은 몸놀림으로 효율적으로 피해야만이 체력을 소모시키지 않고 오랜 전투를 치룰수 있었다. 따로이 보법을 배우진 않았지만 스스로 터득한 결과였다. 그러나 피하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는 키가 크다. 나는 키가 작다. 그렇다면 낮은 곳을…….”
로한이 생각하는 사이 또다시 요한슨의 검이 날아들었다. 쉴 틈을 주지 않는 맹공이었다. 요한슨의 검에서 썩은 흙냄새가 메케하게 피어올랐다. 로한은 검을 피하면서도 끊임없이 요한슨의 약점을 파고들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요한슨, 위대한 사령관이 저런 풋내기 무사에게 쩔쩔매다니, 부끄럽지 않은가?”
석좌에 앉아 있는 레오릭은 이 둘의 전투를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레오릭의 질타를 받은 요한슨은 슬슬 흥분하기 시작했다. 고위 기사단장이라면 모를까?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를 개뼈다귀 같은 촌놈과 어느덧 2십 합을 넘기고 있었다. 사령관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전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요한슨은 전투를 빨리 끝내고자 하는 조바심에 침착성을 잃었다. 욕심이 그의 동작을 크게 만들었다. 그의 검법은 매우 정교했지만 반격은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로한을 보면서 별 것 아니라고 방심했다. 요한슨이 몸을 한바퀴 크게 돌려 돌려베기를 시전했다.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몸을 한바퀴 돌려 포위를 푸는 방법으로 일인의 무사가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므로 온힘을 다해야 하는 기술 중의 하나였다. 당연지사 검의 회전범위가 넓었다. 벽쪽으로 몸을 피했던 로한이 엎드려서 요한슨의 검을 피했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검의 길이 때문에 석벽을 긁으며 긴 검흔을 만들었다.
그 바람에 검의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로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요한슨의 복사뼈에 바스타드 소드를 찔러 넣었다. 검의 끝이 복사뼈와 발목 사이를 꿰뚫자 검을 그대로 회전 시킨 후 로한의 몸 쪽으로 끌어 당겼다. 로한이 검을 빼내자 뼈와 뼈를 잇던 근육이 잘려져 나갔다. 로한이 일어나면서 어깨로 요한슨을 떠밀었다. 어깨에 떠밀린 요한슨이 주저 앉았다. 로한의 검 아래엔 잘려진 요한슨의 한쪽 발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잃은 요한슨이 균형을 잃고 주춤거렸다. 로한이 바스타드 소드를 겨누며 달려들자 요한슨은 본능적으로 그레이트 소드를 들어올렸다. 한쪽 발을 잃은 요한슨은 검의 무게로 인해 그나마 유지하던 균형을 완전히 잃고 옆으로 고꾸라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로한이 그의 목을 베었다. 교황청에서 선사한 바스타드 소드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성기사의 전유물답게 죽음에서 부활한 자들을 영원한 안식에 들게하는 능력이었다. 목이 잘린 요한슨은 더 이상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로한이 그의 머리를 집어들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가루 변해 흩어져 내렸다. 로한의 손엔 요한슨의 가시박힌 금빛 투구만이 남아 있었다.
“멋지군!”
레오릭이 왕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떤가? 요한슨 경을 대신해서 내 군대의 대장군이 되지 않겠는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로한은 입을 다물었다.
“죽음을 자초했군.”
레오릭은 왕좌에서 내려와 대형 검을 썪은 흙바닥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일어나라 어둠의 군대여!”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해골 병사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올라오던 병사들이 마침내 무리를 이루었다.
“물러섬과 나아감이 같다. 나아가되 물러가고 물러가되 나아간다. 한번 갇히면 살아날 길이 없다. 기문진!”
레오릭의 기문진 명령이 떨어지자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해골병사들이 2열 종대로 도열했다. 뒤이어 해골 궁수들이 방패 병들의 뒤에서 화살을 장전했다.
“이 진법에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행운을 빌어보지!”
말을 마친 레오릭은 검을 땅에 그대로 꽂아둔 체, 다시 왕좌에 앉았다. 어떻게 보면 로한의 실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방패 병들이 로한을 향해 일보 전진 했다. 보병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2백이었고 궁수까지 합한다면 3백은 족히 되어보였다. 아무리 해골병사가 약한 존재라지만 3백대 1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철저하게 훈련된 군대였다. 3백의 움직임이 하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보폭과 움직임이 일정했다. 한발을 내딛을때마다 웅장한 발자국 소리가 비밀의 방에 울려 퍼졌다. 로한은 팽개쳐 두었던 방패를 집어들고 등쪽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석벽에 몸을 기대었다. 로한과 보병과의 거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지자 보병들의 발놀림이 빨라졌다. 로한을 중심으로 보병들이 회전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반원형으로 포위된 형국에 놓였다. 앞줄 방패병이 방패를 들이밀며 로한을 밀어 제꼈다. 로한이 검을 크게 휘두르자 방패병들이 한발자국 물러서고 뒤에 있던 검사들이 로한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로한은 방패를 들어올려 간신히 막아내었다. 검과 방패가 부딪히면서 요란한 금속성을 내었다.
검사들이 검을 회수하기 위해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백여 대의 화살이 로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부분의 화살은 로한의 방패에 부딪혀 떨어져 내렸지만 백여 대의 화살을 모두 막아내기에 원형 방패는 너무 작았다. 막아내지 못한 몇 개의 화살이 로한의 허벅지와 어깨 등에 깊숙히 박혔다.
또다시 보병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엔 방패 병이 아닌 검사들이 바로 공격했다. 검의 방향이 직각에서 사선으로 사선에서 직각으로 변화무쌍했다.
병사 하나는 단지 한 동작을 취했을 뿐이지만, 오십이 넘는 해골 병사의 검은 오십 개의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로한은 그 모든 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온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검상을 입었다. 궁지에 몰린 로한에게 희망이란 없었다.
로한은 석벽에 의지해 출구 쪽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이대로라면 해골병사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일단은 출구를 찾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해골 병사들의 검과 화살을 받아내며 한발 한발 움직이다 보다 보니 어느덧 처음 출구에 다다랐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갑옷도 방패도 걸레 조각처럼 너덜거렸다. 마침내 출구의 손잡이를 잡게 되자 로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로한이 탈출하기 위해 출입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 번 닫히면 안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열수 없는 구조였다. 로한을 옥죄여 오던 해골 병사들은 출구 앞 10여 미터 앞에서 멈추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결계였다. 그 옛날 레오릭을 감금할 때 하나님의 충실한 종자들은 이 비밀의 방에 레오릭과 함께 갇혔다. 그리고 이 출구에서 결계를 치고 최후까지 항전하였지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디아블로와의 혈전으로 빈사상태에 이른 교황청은 구원병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비밀의 방에 갇힌 병사들은 끝내 굶어죽고 말았다. 결계 앞에 우왕좌왕하는 해골 병사들이 간혹 화살을 날려 보긴 했지만 그들이 날린 화살은 결계에 부딪혀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로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지난 날 어린 사제의 품에서 얻은 응급처치 법을 기억해 내었다. 상처에 붕대를 감고 지혈을 하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둘 중의 하나가 필요했다.
비밀의 방에서 빠져 나가거나 아니면 레오릭을 처치하거나,
고위 기사단장의 말에 의하면 비밀의 방 열쇠는 레오릭이라 했다. 레오릭이 소멸하면 비밀의 방 출구는 자동으로 열린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레오릭을 처치하기는커녕, 내 몸 하나 돌보는 것조차 마뜩치 않았다.
그나마 결계 안에 있어 다행이지만 이 결계 또한 언제 깨어질지 몰랐다. 로한은 전투의 고단함과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 어느 순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로한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로한이 눈을 뜨자 고위 기사 단장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아 우려하는 마음에 마법 포탈을 사용해 들어와 보았소. 역시나 당신 혼자서 레오릭을 감당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보오!”
기사 단장은 레오릭의 상처에 치유 약을 덕지덕지 발라 주었다.
“일단은 마을로 돌아갑시다. 차원의 문은 엄청난 마력을 소모합니다. 오래 버티지 못할거요.”
로한과 기사단장이 차원의 문을 통과하자 잠시 후 차원의 문이 닫혔다.
마을로 돌아 온 로한은 당분간 휴식을 취했다. 이틀이 지나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로한은 기사단장과 함께 파쇄진을 연습했다. 진법이란 대규모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군대의 배열 형태다. 당연지사 개인에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릭이 로한에게 진법을 시전 했다는 것은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역이용해야만 한다.
진법을 파괴하기 보다는 상대의 진법을 이용해야 한다.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분명 다른 진법을 시전 할 것이다.
기문진, 육화진, 팔괘진, 장사진…….
목적은 하나다. 이미 공격적인 진법을 보여 생명을 위태롭게 했으므로 앞으로 펼칠 진법은 하나뿐이다.
로한은 함께 가겠다는 기사단장의 제안을 뿌리치고 홀로 비밀의 방에 들어섰다.
기사단장과 함께하면 로한은 실력은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된다 하더라도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세상에 로한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먼저 뜨내기 무사라는 꼬리표부터 떼어 내야만 했다. 만인이 존경하는 기사 단장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목표는 하나다. 레오릭의 해골과 왕관을 가져오는 것이다.
로한이 비밀의 방에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레오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가? 항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레오릭의 말에 로한이 검을 비켜들었다. 살기가 흐르는 검이 예리하게 떨렸다.
로한의 결투의지를 확인한 레오릭이 의자에서 일어나 검을 높이 들고 외쳤다.
“머리는 꼬리를 물고 꼬리는 머리를 감는다. 장사진”
-자네를 지치게 한 다음 영혼을 거둘걸세 그럼 자네는 영원히 레오릭의 노예가 되지, 그러하다면 레오릭이 시전 할 진법은 장사진뿐이네-
기사단장의 말은 적중했다.
3열로 도열해 있던 해골 병사들이 서로를 교차하면서 이동했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일사분란 했다. 뱀처럼 길게 늘어진 해골 병사들의 무리가 뱀이 똬리를 틀 듯 처음과 끝이 서로를 물고 빙글빙글 돌았다. 장사진 안에 갇힌 로한은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다. 해골 병사 개인의 위력은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쳐내도 다시 일어나는 해골 병사들의 숫자 앞에서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로한이 끝없이 밀려드는 해골 병사들의 창과 검을 막아내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던 중 기사단장의 말이 떠올랐다.
-머리가 꼬리를 물고 꼬리가 머리를 감았으니 허리를 잘라라-
로한은 방패를 등에 진 다음 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장사진은 공격을 하기 위한 진이 아니다. 가둔 다음에 서서히 지쳐가게 하는 진법이다. 로한이 검에 집중하자 서서히 검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한 번에 쳐내라. 문이 열리면 바로 빠져 나가라-
마침내 검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검이 완성되자 몸을 한 바퀴 돌려 크게 휘둘렀다. 양손 검인 바스타드 소드의 길이는 다섯 자가 넘는다. 화염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비밀의 방 안 가득 퍼졌다. 어둡고 음침했던 방 안이 일순간 환해졌다. 성검에서 뻗어 나오는 화염은 해골병사들의 힘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검을 휘두르며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해골의 잔해가 수북이 쌓였다.
-조무래기를 상대하느라 힘쓰지 마라, 뱀의 머리를 잘라라-
길이 열리자 로한은 전사 특유의 돌격 기술을 이용해 순식간에 레오릭과 마주쳤다.
레오릭과 한자 이내로 가까워진 로한은 미스릴 검을 크게 휘둘러 레오릭을 목을 베었다. 레오릭은 로한의 기습을 예상치 못했다. 기문진에서 보여준 로한의 형편없는 대처 능력에 방심했던 게 화근이었다. 적어도 지쳐 쓰러지거나 항복해서 노예 계약을 할 것이라 믿었다. 풋내기 무사 따위가 완벽한 돌격 기술을 시전 한다는 것 자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레오릭의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로한은 잽싸게 레오릭의 해골에서 왕관을 빼내었다. 레오릭의 머리에서 저주받은 왕관이 빠지자 그동안 비밀의 방을 활보하던 해골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해골 병사들은 선채로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
머리와 왕관을 잃은 레오릭의 몸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의 몸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뼛가루로 변하더니 이내 재가 되어 흩어졌다.
레오릭의 몸이 완전히 소멸되자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비밀의 방 출입문이 끼이잉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열렸다.
로한이 들고 있는 레오릭의 머리가 강력한 성검의 위력에도 소멸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저주받은 왕관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캠프로 돌아온 로한이 레오릭의 해골과 저주받은 왕관을 고위 기사 단장에게 건네 주고 증표를 받았다. 디아블로를 제거하면 기사작위를 주겠다는 증표였다.
기사 단장은 증표와 함께 도살자 부처를 처치한 포상금 황금 다섯 관도 함께 주었다.
이로써 로한의 이름이 제국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로한은 이 정도 명성이면 어머니를 찾아뵙고 클레아에게도 청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과의 교제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클레아 아버지의 마음도 어느 정도 돌려놓을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로한은 클레아에게 당신과 당신 아버지를 만나 청혼하리라는 편지를 보냈다.
클레아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로한의 귀환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다.
로한이 해골왕 레오릭을 처치하고 금의환향 한다는 말에 이 시골 마을은 온통 들떠 있었다. 영웅의 귀환이라 했고 개천에서 용났다 했다. 늘 그렇듯이 소문은 부풀려졌다. 로한이 귀환하면서 황금 스무 관을 가지고 올 것이며 그 많은 금덩이는 온마을을 부자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 했다. 애초에 교황청이 내건 금괴는 열 관이었지만 어느덧 소문은 스무 관 마흔 관으로 부풀려져 있었다.
클레아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 로한은 금괴를 가슴에 품고 말을 달렸다.
마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떡갈나무 숲을 지나야 했다. 워낙 울창한 숲이라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는 음침한 숲이었다. 로한이 말을 달려 숲 입구로 들어섰다. 로한은 한시라도 빨리 클레아를 만나고픈 마음에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숲 중반을 지나칠 무렵 오솔길 양쪽에서 복면을 쓴 괴한들이 나타났다. 괴한들이 줄을 당겨 로한이 탄 말을 넘어뜨렸다. 달리는 말에서 굴러 떨어진 로한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지고 있던 금괴를 탈탈 털리고 고목나무에 묶여 있는 신세가 되었다. 사흘을 꼼짝없이 묶여 있다가 지나가는 과객에게 겨우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상거지가 되어 터덜터덜 마을로 가는 중 영주의 혼사 행렬이 지나갔다. 마차에 앉아 있는 꽃단장한 신부의 모습, 클레아였다. 클레아 뒤로 춤을 추며 따라가는 스캇의 모습이 보였다.
로한은 모든 걸 포기하고 마을 외곽에 있는 주점에 와 술을 마셨다. 다행스럽게도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몸 안쪽 깊숙이 숨겨놓은 조각난 금괴 하나는 잃지 않았다.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금조각 하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단옷 서너 벌 사면 없어지는 돈이었다. 이 주일을 넘게 술을 마신 탓에 그 돈조차도 술값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만 마시고 떠날 참이었다. 그래도 고향 주점은 둘러보고 싶어 망토를 쓰고 마을 안쪽 주점에 들러 술을 마셨다. 한참 술을 마신 후 술값을 지불하고 나오는데 스캇을 위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점안에 들어섰다. 로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한쪽 구석에 숨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을 먹고 떠들던 스캇이 술값을 계산하기 위해 내 놓은 것은 놀랍게도 자신이 조각낸 금괴의 반쪽이었다. 로한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혔다.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고 술집이 문을 닫자 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로한은 스캇의 뒤를 밟았다.
스캇이 홀로 떨어져 담벼락에 기대어 오줌을 눌 때 시퍼렇게 날선 검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놀란 스캇이 바지춤도 추스르지 못하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누, 누구세요? 살려주세요.”
“스캇 나 로한이오. 당신 딸 클레아의 애인, 도둑이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나, 난 아니야. 이러지 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금괴 내가 쪼갠 반쪽짜리야. 어디서 거짓말이야. 당신 같은 가난뱅이가 어떻게 영주에게 딸을 시집보냈지? 지참금도 없었을 텐데. (중세 유럽은 평민이 귀족에게 시집 갈 때는 상당량의 지참금을 요구했다. 지참금 액수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 작가 주)”
“미, 미안해, 딸을 영주에게 시집보내려고 그랬어. 너같이 미천한 출신에게 내 딸을 주기는 아깝지, 안 그래? 너도 이해하잖아. 딸을 출세시키려면 지참금이 필요했어. 모든 것이 다 내가 꾸며낸 일이야. 클레아에게는 비밀로 해줘. 클레아는 네가 배신한 걸로 알고 있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달아난 걸로. 그걸 하기 위해서 연극을 좀 꾸몄어. 자네에게 빼앗은 금괴로 사람을 좀 사서... 지참금은 애비가 몰래 모아놓은 돈이라고 뻥쳤어. 너도 클레아가 잘 사는 거 원하잖아. 그러니까 눈 감아줘 어차피 지난 일이야.”
그 때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버지?”
목소리가 분명 클레아였다. 두 명의 호위기사가 클레아 옆에서 경호하고 있었다. 로한이 급히 칼을 거두었다.
“크, 클레아 지금 봤지? 저 놈이, 저놈 로한이 날 죽이려고 했어.”
“아버지, 그만 하세요. 다 들었어요.”
“다, 다... 어디부터 들었어?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내가 살고 싶어서 거짓말을 꾸민 거라고... 저놈이 날 죽일려고 해서...”
“아버지.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어요.”
클레아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클레아는 스캇 앞에서 등을 돌렸다. 돌아선 클레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클레아의 아버지 스캇은 애당초 로한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부모 없는 고아라 무시하며 천대했었다. 클레아가 로한을 그렇게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하나뿐인 딸을 어찌 저런 촌닭한테 시집보낼 수 있냐며 길길이 뛰었다. 로한은 스캇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출신은 보잘 것 없지만 스스로 당당해지리라. 디아블로를 잡아 세상에 이름을 높이고 기사 작위도 받아 더 이상 천민 출신이라는 조소와 멸시를 당하지 않으리라. 굳은 맹세와 함께 대성당에 들어가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했다. 도살자 부처와 해골왕 레오릭을 처치하면서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기사 작위도 주겠다는 군주(군주는 왕을 말하고 영주는 지방 수령 정도를 의미한다. 지방권력의 실질적 지배자는 영주 또는 성주였다. - 작가 주)의 약속도 받아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캇은 그 어느 것 하나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근본없는 싸움꾼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배움 없는 무식한 싸움꾼한테 시집 보내기가 싫은 스캇은 로한을 모함했다.
이젠 명성이 높아지니 너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딸에게 거짓말을 했다. 로한을 만나보니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했다. 디아블로를 물리치면 성주의 딸과 결혼 할 거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클레아는 거짓 소문을 믿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날 동쪽 숲속을 바라보며 로한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로한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로한은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클레아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영주에게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배신한 로한에게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클레아는 영주의 여자가 되었다. 영주의 아내가 되어 지체 높은 신분이 되었지만 클레아는 여전히 로한을 잊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먼발치에서라도 로한을 볼 수 있을까? 하다 못해 지나가는 옆모습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매일같이 성벽에 올라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로한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던 중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비록 로한과의 사랑을 결사반대하긴 했지만 하나 밖에 없는 딸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지였다. 어머니 없이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홀로 키운 아버지였다.
시골 마을에서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급 음식들로 도시락을 만들었다. 하녀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결혼식 날, 행렬을 따르며 내 딸이 귀족이 됐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 엷은 미소를 띄었다.
다음 날, 고급 음식과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아버지를 만나러 떠났다. 번잡한 것이 싫어 날랜 호위 무사 두 명을 대동하고 아버지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어느덧 어두운 밤중이었다. 클레아와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가 탄 말 세필이 어느 주점을 지나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작은 소란을 목격한 클레아는 말을 세웠다.
젊은 무사가 웬 노인네 하나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보니 담벼락에 기대에 떨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
겨눈 검에 살기가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클레아가 아버지를 부르려다 말고 입을 막았다. 호위 기사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자 클레아가 손으로 누르며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난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어요. 정말로,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고요. 진실을 알았으니 이만 가 볼게요.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난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클레아가 말머리를 돌렸다.
“크, 클레아!”
로한이 다급하게 클레아를 불렀다. 클레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난 이제 영주의 여자에요. 더 이상 내게 미련두지 말아요. 나 또한 당신을 잊을 것이니…….”
여자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묻혔다.
클레아 일행이 떠나고 로한과 스캇의 거친 숨소리만이 적막한 어둠을 뚫었다. 로한이 스캇을 노려보았다. 스캇은 로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로한은 스캇을 어둠속에 홀로 남겨두고 떡갈나무 숲으로 총총히 사라져 갔다.
디아블로 2부 해골왕 레오릭 편 끝
첫댓글 총 6편인데 2편만 올려봅니다. 디아블로 하셨던 분이라면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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