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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5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야고 5,13-20
복 음 : 마르 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절마다 “어린이”라는 낱말이 되풀이됩니다.
이에 해당 되는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이 가지는 특징은 어른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따르며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삶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고,
이렇게 하느님께 의존하는 삶의 자세가
역설적으로 인생을 무엇보다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독서의 내용이 이러한 역설을 확인하여 줍니다.
독서에서는 고통을 겪으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찬양 노래를 부르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수용하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온전한 신뢰와 의존으로 단순하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를 막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막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비록 그것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희 본당에는 다른 성당과 달리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린이 미사 때 120~130명의 아이가 나와서 열심히 미사에 참석합니다.
노래도 정말 크게 부르고, 율동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 미사 시간이 성인 미사 시간보다 더 깁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그리고 너무 재미있다면서 미사에 임합니다.
저의 역량인 것처럼 생각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면,
저와 아이들의 나이 차가 자그마치 40년이 넘습니다.
또 제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결국 저의 능력이 아닌, 아이들 스스로 집중해서 그런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성가는 전혀 부르지 않고, 기도 손 하는 친구는 이제 찾기 힘듭니다.
청소년들은 말합니다. 미사가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말입니다.
분명히 이 아이들도 어린이 미사 때는 열심히 했고 또 재미있어했는데 말이지요.
똑같은 미사인데 과거에는 재미있고, 현재는 재미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미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재미에 너무 중독된 것입니다.
모든 중독성 물질이 그러하듯 재미에 대해서도 내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었던 일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재미와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를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미사에 흥미를 잃었으면 더 집중해야 가능했습니다.
더 집중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 너머를 볼 수 있는 것이 ‘감각’인데,
이 감각이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집중할 때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께 주시는 사랑을 통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이들의 이 감각을 말씀하십니다.
순수한 마음, 작은 것에서도 감탄하는 마음, 무조건 의지하는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편안함만을 추구하면 절대로 믿음의 감각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편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뛰어다닙니다.
뛰어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고 신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향해 순수한 마음으로 신나게 뛰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감각이 사라졌다 싶을 때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 순수함을 지니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탁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유다 사회에서는 12세 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직 잔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짓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전적인 의존성”
어느 날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알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하자 했더니 ‘식사 전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성 시간에 참석하였는데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던지요!
놀라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꼭 안아주셨다고 하더라고요.
반 모임에 갔는데 18개월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며 참석한 교우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해 드렸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면 하느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 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 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고, 또 전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 학교 갈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할 때....
늘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획득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 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어린이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모르기에 놀라워하고 경이롭게 여기고 경외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아들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까닭입니다. 아인쉬타인은 말합니다.
“경외심을 느끼고 감탄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곧 지성적 동의를 통해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니 아는 것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선사된 것, 베풀어진 것, 선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요,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의탁과 신뢰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결국,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습니다.
베풀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사 되고 주어져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 어르신 부부가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원하였습니다. 봉사자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형제님은 집에 있었는데, 자매님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합니다.
전화를 드리니,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형제님이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매님이 돌아왔고, 봉성체 날짜를 착각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하루 전날 확인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때로 착각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어르신 부부는 점심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어서 근처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한(恨)’이 맺힌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던 부부에게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을 믿으면서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한’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가슴에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작은형이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늘 밝고 화사했던 어머니도 가슴 한쪽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한(恨)은 아니지만 몇 번의 아쉬움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의 임종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5월 5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함께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 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들이 미사를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9월 10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뉴욕에 있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으로 갈 수 없었고, 뉴욕에서 다른 분을 위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추기경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잘 마쳤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방송 사장 신부인 동창 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1995년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의 교포사목을 권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 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느덧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열정은 넘쳤지만, 절제와 겸손의 덕이 부족했습니다.
부덕한 저의 탓으로 미국으로의 인사이동은 취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좀 더 여물게 하신 다음 미국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한 후에 증상에 맞는 ‘처방전’을 만들어 줍니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으로 가면 약사는 처방전에 따른 약을 줍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기도’입니다.
즐거운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찬양 노래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교회의 원로들입니다.
원로들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라줍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처방전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교회와의 연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놓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스승이 제자나 어린이를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 같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14절)
그 어린이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갓 태어난 아이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는 은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든지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벌어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걸려 넘어진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야고 5,13)
여러분의 삶은 즐겁고 행복합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때로는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겁니다.
즐겁고 기쁠 때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지요?
그 흥얼거림이 단순히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라면 더욱 좋겠지요.
기쁜 일이 있다면, 내 안에만 감춰두지 말고 하느님께 찬양 노래를 드리라네요.
그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는데 반대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을 원망하거나 힘들다고 짜증을 내거나 술을 퍼마시면 되나요?
사도는 말하네요. 그럴 땐 기도하라고요.
훨 나은 방법이 아닐까요?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즐거울 때는 찬양 기도드리고, 괴로울 때는 청원 기도드리고...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축제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복된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그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오늘 야고보서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 고통을 겪을 때 의외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자들이지요.
이들은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니 고통은 물론,
어떤 경우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과 관련 없이 생각하고 행위를 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뿐 실제의 삶은 하느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실제 삶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것입니다.
강론을 들을 때나 누가 하느님 얘기를 하면 그때 잠깐
그의 귀에 하느님께서 머물다가는 이내 자취를 감추시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합니까?
껌을 계속해서 씹듯 고통을 씹고 또 씹습니다.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고통과 싸웁니다.
고통 때문에 이웃과 싸웁니다. 그래서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고통을 남에게 토로합니다.
고통을 가지고 상담을 합니다.
이것은 혼자 고통과 씨름하고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낫고
점쟁이한테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사제에게 가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면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야고보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면 고통이 있을 때
고통을 곱씹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으로 남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원망하지 말고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어제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병 주고 약 주냐고 화를 내기도 하는데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병을 주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렸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설혹 내 잘못과 내 죄로 병이 나고 고통이 왔을지라도
그것들이 하느님과 전혀 무관치 않다고 믿는 자들이고
그것들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무엇보다 치유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어 간이 나빠졌을 경우,
내 잘못으로 간이 나빠진 것이 분명하지만
벌로 주셨건 사랑의 매로 주셨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벌로 하느님을 만나건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기도이고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신앙이어야 한다고 오늘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즐거울 때는 하느님 찬양 기도가 나오는 것이 다를 뿐이겠지요.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즐거울 때 혼자 싱글벙글하거나 히죽거리지 말고
찬양 노래합시다. 오늘 우리.
성 호세 마리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북적북적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에서 부모, 친척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아이들을 예수님 쪽으로 가게 합니다.
제자들은 안된다며 사람들을 꾸짖으며 무안을 줍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은 언짢아하시며
어린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아홉 살, 종교가 없는 집에서 혼자 성당에 가게 된 저는
성당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그저 토요일에 날 위해 놀아주고 같이 기도하며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이라는 분이 계신 곳에 다닌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낯설기만 한 이곳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제가 오면 두 팔 벌려 안아주신다고 느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환대의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환대 덕분에 저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이렇게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가 어린 시절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은 그저 그분 품에 푹 안겨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분 품에 안겨 그분 사랑을 그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비교하는 것은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품 안에 푹 안겨 의심 없이 그분의 사랑을 느끼며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