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축성설교(2023.2.5. 공현후 제5주일.봉명동성당 축성기념일).
신도들의 집 –성당(1열왕8:23)
+ 오늘 주님의 집에 오신 여러분이 하느님의 힘으로 입혀진 거룩하게 된 축성된 날이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우리는 모두 집에서 살아갑니다. 집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집은 유대감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집을 즐거운 나의집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집을 하느님과 함께 사는 집이라 하여 성가정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모이는 집을 거룩한 집 성당이라고 부릅니다. 밖에 있는 호텔에 있다 하더라도 호텔보다도 못해 보이는 누추한 자신의 집을 찾아들어오는 것을 편하게 느끼는 우리들입니다. 집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은 거룩함이 들어있습니다. 우스게 소리로 ‘집은 모자를 걸어두는 곳’이라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머리를 두는 곳이 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두는 곳이 우리의 집으로 성가정입니다. 우리의 몸은 집 밖의 화려한 호텔에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모여 있는 성가정과 성당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빕니다. 집은 유년기 자신이 자랐던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꿈꾸던 곳이어서 평생 그리워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All is well(노르위치의 줄리안,1342-1416).”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곳이 하느님이 계신 곳이자 우리가 에너지를 받는 꿈이 서린 집이 성당입니다. 성당에 오신 신도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세상을 담대하게 살 힘을 받아 가시길 빕니다. 아멘.
하느님이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저와 똑같다면 초월적인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친구, 동무라고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나의 능력보다 훨씬 크시기에 초월적인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의 능력보다 훨씬 크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불러 봅시다. 11: 초월적인 하느님이시여:11. 그 초월적인 하느님이 서투르게 사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복을 망가뜨리는 삶에서 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삶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하느님이십니다. 초월적인 능력의 하느님이 한계가 많은 연약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힘있게 세워 주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자 하느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성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밖에 나가서 놀다가도 주일이면 고향이자 꿈을 꾸고 하늘의 에너지를 받고자 우리 성당에 오는 것입니다. 11:우리에게 어서 오소서:11
성당에 와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으면 우리의 삶에서 빠져나가 하느님께로 가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보다도 자신의 힘이 더 세다고 우기는 삶은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삶입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악마와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느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빕니다. 아멘.
솔로몬왕이 성전을 세우고 제단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려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며 성당을 봉헌기도를 바칩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과 같은 신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종들에게 신실하시며 맺은 계약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1열왕 8:23). Lord God of Israel, there is no god like you in heaven above or on earth below! You keep your covernant with your people and show them your love when they like in whole-hearted obedience to you.”
이스라엘은 노예들의 집합체로 구성되었습니다. 자기주장대로 살지 못하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입니다. 자기신념대로 살지 못해서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된 족속이 하느님이 택한 이스라엘족속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족속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장대로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매우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하느님!” 제대로 산적이 별로 떠오르질 않는 우리들입니다. 사는데 많이 서투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복종하는데 참으로 서투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 즈가리야도 아론의 자손인 부인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가브리엘천사의 말에 의구심을 품었기에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엘리사벳이 주장한 요한이라 서판에 적자 즈가리야는 그때부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즈가리야의 노래(루가1:68-79)는 한 아기의 탄생이 공동체의 구원과 연결되었다는 확신에 찬 노래로 조도(아침기도)때 마다 부릅니다. 즈가리야의 노래를 통해 하느님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의 구원에 대한 일을 하게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로 살라고 우리 성당에 모이게 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하는 하느님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천지 어디에서도 하느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이곳에 계시고 저곳에 계시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 너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판단하시기 전에 우리를 연민으로 불쌍하게 슬픈 눈으로 보십니다. 우리를 불쌍하게 슬픈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쌍한 눈으로 식구들을 보면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고 돌보는 것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애정을 가지면 판단유보를 하고 애정이 없으면 즉각적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하느님이 주신 사랑이 넘쳐서 애정이 많아 판단유보가 많은 성당입니다. 사랑도 없고 애정도 없으면서 판단이 많은 집은 망가지는 집입니다. 불쌍한 슬픈 눈으로 보시는 하느님처럼 우리의 눈도 불쌍한 사람을 애정으로 보는 슬픈 눈을 지녀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최고의 예절이 감사성찬례식입니다. 초입에 기리엘레이손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노래를 바칩니다. 우리를 불쌍한 눈으로 보시라는 애절한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불쌍한 눈으로 보여주셔서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우리를 구해 주시는 곳이 바로 우리 성당입니다. 그래서 성당생일을 축성일로 정해 모든 신도들이 기념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미국성공회 뉴욕교구에 한국인으로 처음 성품된 신알랜주교가 사목을 하시고 계십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셨기에 영국신사의 풍모를 지니셨으면서 미국의 실용적인 현실에서의 힘찬 모습도 지니셨습니다. 디자인공부를 하신 문클라라 사모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부부애가 깊은 부부이십니다. 몇 년 전에 뉴욕교구를 방문하였을 때 백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건축 중인 뉴욕대성당을 안내해주어 곳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성토마스성당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영국에서 공부하신 신부가 사목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현재 이곳에 배마가주교의 며느리이고 배요셉사제의 사모이신 분이 보좌사제로 사목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미국인들은 영국을 그리워하는 종족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지식인들이 영국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까요. 뉴욕의 성 토마스성당의 제단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물론 설교대에는 네 복음서 기자상의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어 복음을 전파하는 지위를 부여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조각상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위로와 용기를 준 한민족의 영적예언자가 앞으로 새겨지길 바라며 깊이 간절하게 기도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한국서 태어나고 미국서 자라고 영국서 신학공부를 하신 신알랜주교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미국에 사시면서 한국의 문제를 푸는데 어떻게든 도움을 주시려는 신알랜주교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였습니다. 제 길을 잘 찾지 못하는 한국의 주교를 위해 방문해 주시고 들어 주시고 앞길에 대해 함께 기도해 주신 신주교이십니다. 이민자의 전형으로 유목민으로 사신 신알랜주교의 삶이 히브리인들의 삶과 같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전형적인 한국인인 문클라라사모가 때로는 성모 마리아처럼 보였고 때로는 막달라 마리아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처럼 신알랜주교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돌보셨습니다. 성당의 외형을 갖추었다면 성당 안의 내부는 뉴욕의 성 토마스성당을 기도하시면서 보시면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뉴욕에서, 런던에서, 켄터베리대성당에서, 제주에서, 천안에서, 전주에서 하느님의 크신 마음으로 보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큰 마음으로부터 성당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느님의 큰 마음을 지닐 때 우리 성당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종들이 모인 집이 성당입니다. 여기서 한마음이라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마음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복종하는 전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부만 복종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복종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복종이 전부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망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하느님은 자신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산 사람을 건져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온전한 복종을 하는 한 마음으로 네 후손들이 너처럼 살아가기만 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후손이 끊기지 아니하리라(1열왕8:25).” 솔로몬의 이 성당봉헌기도가 우리의 기도이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 성당 신도들에게 선포하였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