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5월 26일 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제1독서 : 신명 4,32-34.39-40
제2독서 : 로마 8,14-17
복 음 :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장엄히 선포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대목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수동형 문장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일이 아버지에게서 위탁되고 주어진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신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제1독서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늘 인간과 함께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십니다.
더욱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함께 하심’이 ‘예수님과 우리가 공동 상속자’라는 내용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려고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 그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역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인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준엄한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육화하신 ‘성자’께서는 구약 내내 인류와 함께하신 ‘성부’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이시고,
이렇게 성자 안에 성부께서 온전히 드러나셨음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함 때문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을 통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확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의 결정적 신비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선언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지금 내 삶과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의 관계적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있었던 갑곶성지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여름 태풍에 쓰러지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가 쓰러질까요? 키 작고 약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는 모두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들이 태풍을 잘 견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키 작고 약한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태풍에는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아는 나무만 살아남습니다.
보란 듯이 자신을 과시하는 나무는 쓰러지고 맙니다.
한 그루의 거목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러나 태풍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강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연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풀잎은 어떨까요?
너무 약해서 그냥 날아가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가고 얼마 뒤에 누워 있던 풀잎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는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태풍 앞에 고개 숙이는 풀잎만이 살아남듯 주님 앞에 고개 숙이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풀잎의 삶을 기억하고 또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기억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직접 보여 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부께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성자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면서, 교회를 성화하고 인도하도록 성령 하느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세 위격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치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나의 이웃들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을까요?
혹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웃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우리 역시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 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고 목표이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외 아드님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믿을 교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성부는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성자 역시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아들로 존재합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시며 성자의 영이십니다.
이렇듯 삼위일체는 하나가 타자 없이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런 다음 성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
성령께서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포하시고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자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대함을, 타자에게 열려 있음을 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나와 너, 우리라는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긋고 있는 십자성호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이웃사랑의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미야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 주겠다”(탈출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서로 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데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삼위일체의 신비'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하는 신비입니다.
흔히들 '삼위일체'를 알아듣기 힘든 신비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곧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과 그 사랑으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축복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
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함께 친교 안에 머문다'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함께 일하신다(활동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이미 사랑입니다.
함께 있는 것,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관계 맺는 것,
그것은 함께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곧 벗이 되는 일이요, 우정을 나누는 일이요,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음’, ‘사랑으로 서로 속해 있음’, ‘사랑으로 서로의 것이 됨’,
이는 참으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오늘 이처럼 우리가 '함께 있음'도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총인지! 참으로 큰 행복인지!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라야 이를 더 잘 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함께' 여기에서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안에' 함께 계시며 ‘상호내주’(perichoresis)하시며, 사랑으로 서로 '속해' 계십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바치고 비우시면서, 섞이되 혼동되지 않으시며,
‘하나’를 이루시며, 자신을 통해 자신 안에 계신 타자를 드러내십니다.
곧 성부께서는 자신을 말씀으로 내보내시니 성자요, 숨으로 내보내시니 성령이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부를 드러내는 성령을 내보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구원경륜을 이루십니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계시는지를 밝혀줍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 깊이 관계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친교가 우리와 함께하시고, 동행하심을 드러내 줍니다.
곧 ‘동행’하시는 하느님임을 말해줍니다.
‘동행’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심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사랑의 생명을 꽃피워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실현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토록 거룩한 일입니다.
참으로 축복입니다.
'함께 있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삼위일체시요 사랑이신 하느님!
늘 함께하시는 당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늘 곁에 머물러, 당신 눈길 속에 저를 담고 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품으시고, 숨(영)과 말씀의 양손으로 쓰담쓰담 어르시고 달래십니다.
오늘 전부를 비우시고 건너오시어 제 안에서 사랑으로 사라지시는 당신은
저의 생명으로 차오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제가 녹고 사라져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오, 경탄 하오는 사랑이시여!
저를 차지하소서.
저를 비우소서.
오롯한 당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은 모세와 함께한 ‘출애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었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신다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도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직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 준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
모범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수도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자에게서는 ‘청빈, 정결, 순명’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신자들이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서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과 가정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직자의 겸손, 수도자의 기도, 신자의 회개가 삼위일체를 이루면
본당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하기 참으로 힘든 주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난 시절,
생뚱맞고 엉뚱한 이단 교리를 선포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싸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 때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 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가 부활의 가장 큰 결실인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끝났다.
이렇게 부활시기가 끝난 후 바로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모든 구원 질서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며,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의 업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의 신비가 발하는 빛들이 삼위일체에서 구원의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단테는 “신곡” 천국 편 제33곡 85-87에서 내세에서의 상징적인 모험 여행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책임을 충만히 지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함께 하므로 하느님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생명에 신비롭게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부르고 계신 그 이름,
“아빠!”를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때문에도 “삼위일체”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새로운 인간”(갈라 6,15; 2코린 5,17 참조)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생활이 윤리적, 영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19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그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종속되는 그런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 삼위께로 가는, 그 신비에 참여하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시고 계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19-20절).
이렇게 이루어진 공동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봉헌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여 그 생명을 누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생활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20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확산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완전한 모습이며,
그 사랑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진정한 친교를 나누려면,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러 식구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가족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여럿이라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것이며,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보통 삼위일체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하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만난 예화를 사용합니다.
아이는 조개껍데기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어떻게 작은 웅덩이에 다 담으려고 하느냐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이는
“당신도 인간의 작은 머리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느냐?”며 반문합니다.
아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히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도출하고 끝내야 할까요?
어쩌면 무한한 삼위일체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바다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작은 바다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 되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명확하게 계시 되는 때는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아버지-아드님-모든 권한).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모든 능력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에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아드님께 전해주시고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 말씀에도
‘그리스도-제자들-성령’의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첫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날 때 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아담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담이 흘리는 피가 성령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이뤄지는 성사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믿음’으로 이뤄지는데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받아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세 분이셔야 할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최소 단위는 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선물하는 ‘관계’가 일어나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1 참조).
관계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데,
하느님은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았다는 힌트를 성경에서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가난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가보처럼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한 시곗줄을 사서 선물했습니다.
선물 안에는 주는 이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은 성령인데 선물을 무시할 때 관계가 끝납니다.
아내는 분명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감사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탄생이 ‘아빠-엄마-선물’로 이뤄짐을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 삼위일체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자녀는 부모의 삼위일체 사랑으로 탄생합니다.
‘아버지-어머니-피’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
길거리 짐승들처럼 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아드님-성령’ 삼위일체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교회-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따라서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는데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도 ‘교회-나-성령’으로 자녀를 낳으라고 파견받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파견받아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나의 피에 성령을 섞어 내어주며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전해주는 삶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고 삼위일체만이 사랑이며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三位一體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요약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말을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비밀리에 알려주신 신비스런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세 개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서에 없습니다.
3세기부터 그리스도 신앙 언어 안에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十字家刑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제자들은 絶望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그들이 믿게 되면서, 그들은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함께 回想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셨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주던 예수님의 마음, 사람들을 돌보아 주던 그분의 몸짓,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던 그분의 관대함이 모두 그분 안에 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이 하신 일이었다고 그들은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숨결에 충실하셨으며, 평소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같은 숨결이 그들 안에도 일하신다고 깨달았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숨결인 영이 내려오셨다.”는
「창세기」(1,2)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천사의 입을 빌려 “그 수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1,20)이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서」도 가브리엘 천사의 입을 빌려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다.”(1,35)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인류역사 안에 나타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같은 성령이 일하셔서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같은 성령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발생시킵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초기 신앙공동체의 관행은 그런 믿음을 배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자기 안에 살아 일하시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돌보아 주며, 용서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인간의 관행을 넘어,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 주고 용서하며, 이웃과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그것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세계에 열린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데에 본받아야 하는 유일한 귀감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자녀 됨의 실천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계셔서 하느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려고 합니다.
신앙도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잘살기 위한 대책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자기 중심적 좁은 공간 안에서 想像하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넓디넓은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 마음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며, 용서하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그런 실천을 하신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도 성령을 자기 안에 영접하여 같은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지만, 인간이기에 그분이 한 일은
하느님의 일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그 시대 신학자들이
오랜 討議를 거쳐 사용하기 시작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이 단어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라는 말은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성령은 하느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실제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도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참다운 하느님의 숨결이고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에도, 구약의 예언자들 안에도, 예수님 안에도, 하느님의 숨결은 일하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숨결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아들어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 예수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그 실천을 배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변회시켜 참으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세분의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삶을 보고 배우며,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에 협조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신앙인으로 삽니다.
‘삼위일체’는 한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예수님도 성령도 모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旅程을 밝히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한다고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이 보나벤뚜라 수녀
삼위일체를 성경 본문만 가지고 논하려 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성경 본문에서 논지가 출발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사도들의 증언과 초세기 교부들의 신구약 성경 본문 탐구와 치열한 사유 뿐 아니라
초세기 교회 공동체의 열렬한 신앙 실천이 어우러져 빚어진 하느님에 대한 우리 쪽의 고백이다.
우리 쪽의 고백이라는 말은 삼위일체가 우리의 하느님 이해를 최대치로 설명한 언어이고,
뒤집어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사고 수준까지 당신을 낮춰 우리 언어로 당신을 계시하신 결과이다.
오늘 독서들은 이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체험되는가를 보여 준다.
구약의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살이 해방을 겪으면서 이 체험을 통해 알려진다.
하느님은 그들의 힘으로 불가능한 존재의 변화를 일으켜 주신 분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누구이며
그들이 누구인가를 기억시켜야 하는 때가 오면 반드시 이집트 탈출 사건을 언급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해방시킨 존재’이며
그렇게 구원되어 하느님을 알아 모시도록 선택된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의 하느님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과 엮여있다. 오늘 첫째 독서는 바로 이것을 설파한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도 ’해방‘ 곧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풀려나는 자유의 체험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가 종들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인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상속자임을 알려주신다.
이 정체성을 깨닫게 될 때 동시에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신 분은 예수님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이분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모든 것을 알려주신 분이기도 하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해방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알았다면,
신약의 백성은 예수님 파스카 사건을 통한 구원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깨닫고
아빠이신 하느님을 알아 모시게 된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 완전히 드러난다’고 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단언대로라면, 구약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신 한 분 하느님은
신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분으로 드러나신다.
우리가 체험하고 고백하는 구원은 이 세분의 절대로 나뉠 수 없는 콜라보이다.
서로를 향한 영원한 사랑과 신뢰 속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의기투합하신 세분의 업적이다.
처음부터 삼위로서 한 분이셨던 분을 우리는 우리 구원 체험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깨닫는다.
그럼 이런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깨달음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
그 결과는 어떤 행위로 나타난다.
모세는 구약의 하느님 백성에게 그분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하느님 백성답게 사는 길이며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주님만이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길이다.
사도 바오로는 신약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권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된 이들로 살아가는 길이며
그분의 부활로 인해 모든 이들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길이 열렸음을 선포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다.
곧 우리가 구원으로 체험한 삼위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구원을 세상에서 계속하시도록
이제 우리가 그분의 편이 되어 그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어쩌면 엄정한 논리를 펼치며 논할 주제가 아니라
오늘 독서와 복음이 보여 주듯 체험 속에서 고백 되어 지고 선포 속에서 드러나시는 분이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구체적인 사랑의 길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삼위일체이신 주님을 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해 본다.
나도 구구하게 이런 글 쓰는 것만 하지 말고 실천해야 할텐 데 말이야.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