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문교부(예전에는 교육부를 문교부라 불렀다)가 가르쳤던 기존의 역사 교과서에서 기억하건데 고려의 최 북방 영토는 황해도 구월산 북부의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 영토였고, 이도(세종)가 절제(節齋) 김종서[金宗瑞]를 시켜서 북서 4진과 북동 6진을 개척하므로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영토를 확보하였다고 수도 없이 되뇌이고 세뇌학습 한 것을 독자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 교육부 검인증 중.고교 교과서가 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계속 되뇌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어 볼것 같으면 여러분은 심한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고려사”를 정인지가 지었습니다. 고려의 권신이었으며 이성계 조선의 신하로서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망국 고려의 역사서를 적고 여러 권신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정인지 당대에 수많은 학자들이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사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거짓이 통할수 없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미리 염두에 두게되면 다음 이야기가 진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려사 초기기록 홍유열전을 소개합니다. 홍유는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4기병대장으로 덕이 많은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출신 이왕건을 태조신성대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개국공신입니다.
홍유가 말하길 궁예가 요땅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태조신성대왕 이왕건이 공짜로 취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예와 왕건이 살아있을 당시 가장 권력의 핵심에 있던 홍유가 행한 이야기를 고려의 권신이었고 고려사를 지은 정인지가 인정하고 살아남은 수많은 고려의 권신들이 정히 옳다고 인정한 고려사의 기록을 부정한다면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홍유가 말하는 내용이 맞으면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고려의 최북단 국경선 이남에서 요遼땅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를 식민사학자는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두계 이병도를 거두로 한 서울대학교 관학파 식민사학자들이 수없이 사기를 쳤어도 일반인은 먹고 살기 바빠서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사료가 한정되어 있었고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고 또 그들의 거짓사실을 알았다 할지라도 널리 밝혀 알려내기가 얼마나 힘든 현실이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인터넷이 세상을 하나로 순식간에 연결해주고 또 그 덕분에 지방말단 공무원인 필자도 높디 높으신 대학강단의 교수님들의 고담준론에 끼어들어 당신말이야 사기치지마세요 라고 훈수를 둘수 있는 시절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철밥통 식민사학자들 입장에서야 죽을 맛이겠지만 말입니다.
홍유의 처음 이름은 홍술(洪術)이니 의성부 사람이다. 궁예 말기에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기병대장(騎將)으로 되었는데 이들이 밀모하고 밤에 태조(왕건)의 집으로 찾아 가서 말하기를
“삼한이 분열되고 뭇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지금 임금이 용기를 분발하고 크게 호통치므로써 그만 도적들을 쳐 없애고 요좌(遼左) 지방의 3분의 1에서 그 절반 이상을 점유한 후 나라를 건설하고 도읍을 정한 지도 이미 2기(紀-12년)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끝을 잘 맺지 못하고 포악한 행위가 태심하여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관리(臣僚)들을 죽여 없애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 같이 여기게 되었는바 걸(桀)이나 주(紂)의 죄악도 이 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태조는 안색을 변하며 거절하는 말이.....
홍유가 말하기를, “궁예가 요좌 지방의 1/3에서 반까지를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그 땅을 왕건이 고스란히 차지했다고 했는데 강단사학자들은 궁예의 태봉국이 대동강을 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당시에 살았고 장수로써 전국을 돌아다닌 홍유의 말이 정확하겠습니까, 아니면 요하가 대동강이었다고 우기는 강단사학의 말이 정확하겠습니까?
요좌란 만주벌판의 “랴오허강”일때 요하 이남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홍유가 “삼분요좌”라고 했지 “삼분요하좌안”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요하”였으면 반드시 “요하좌안” 이라고 명시하였을 것인데 말입니다.
필자가 주목하는 “요遼”가 요河이던 요땅이던 최소한 김종서의 북서 4진과 북동 6진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먼저 주목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고려의 시작은 궁예가 세운 태봉국입니다. 태봉이 최소한 만주벌판에는 있어야 하며 요遼를 어디로 비정하느냐에 따라 중원대륙에 있을수도 있고 고려 또한 대륙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사학은 고려의 최북방 영토가 “대동강에서 원산만”이라고 사기를 쳤던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박창범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가우리(고구리 高句麗), 백제(맥제), 신라(사로)가 중원에 있었는데 갑자기 통일신라가 한반도에 건국할 이유도 없거니와, 통일신라가 분열하여 후삼국이 이루어 졌다가 통일된 게 태조 이왕건의 고려인데 고려가 한반도에 있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지 어째서 반도고려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북경의 서쪽이 태행산맥이고 산서성인데 이 산서성 태원의 남서쪽 유적지 평요(平遼 현재 발음 핑야오 Pingyao)시 기행문이 있는데 이 平遼(평요시)가 고대의 요서 요동의 기준이 되는 “요”땅이다. 지나족들이 비열하게 역사를 훔치면서 지명을 수없이 바꾸었는데, 역사적으로 너무나 자명한 요遼땅을 그냥 다른 이름으로 바꾸기가 너무 어려웠는지 遼요자 앞에 平평자를 붙여 평요라고 하고 동남쪽으로 요땅을 살짝 옮겨 놓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遼요 땅이 수없이 이동하는 통에 어제의 요동이 오늘의 요서가 되고 오늘의 요동이 내일의 요서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 졌다. 지금은 지나족들이 요동과 요서의 기준을 만주벌판의 랴오허강 요하로 획정하는 바람에 식민사학에서 고구리(高句麗)가 반도 평안도의 평양으로 낙찰되고 말았지만 우리의 역사서는 반도 평양이 고구리가 아니라고 헤아릴 수도 없이 분명히 항변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아무리 가리고 거짓말을 해도 결국은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왜족과 지나족들은 잘 모릅니다. 그들은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역사를 훔쳐서 자기것으로 포장만 할줄 알았지 새 역사를 만들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학적 증거를 제시해도 결코 철밥통을 놓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천하의 역적놈 집단인 강단의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에게는 더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집트 기자의 피라밋이나 잉카유적지 또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피라밋 유적지와 미얀마의 앙코르와트 유적지.... 그리고 옛 선임(檀君)임금이 살았고 가우리(고구리 高句麗)가 살았던 중원의 서안(= 평양땅)에 남아있는 수천기의 피라밋과 수없이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역사유적을 관통하는 역사정신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축을 같이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글에서 필자가 천부경을 강독할만한 역사학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망발(?)을 한 것은 이러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이고 과학이고 진실입니다. 자기 밥그릇을 위하여 권력과 야합하여 학문을 쓰레기로 만들고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진실과 진리에 입각하지 아니하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거짓의 역사소설을 지어서 도덕을 왜곡하고 권력창출에 협조하여 민중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비열한 역사학자가 하느님 아버지 이름 팔아서 인간에게 사기치는 개신교목사나 부처님 이름 팔아 신도들의 돈을 후리는 절집 땡중과 무엇이 다릅니까?
독자 여러분 이제 식민사학자의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야! 이 천하의 사기꾼. 도적놈들아 스스로 강단에서 내려와 민족과 역사에 사죄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바로잡는데 너희들의 모든 재산과 천명을 걸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댓글 오랫만에 왔다가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또 퍼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