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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생각을 합리성 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합리성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심이 좋다고 봅니다. 이미 부정되어진 합리성의 범주에서 새로운 상반된 것으로서의 합리성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건 어때.. 그런 이야기 인 것같습니다.
제가 코코시카님의 신론과 역사적 계시라고 함에 대한 판단과 그 판단의 범주가 분별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는 옳은 합리성이 나올 수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드렸는데 이해하지 못하신 것같습니다.
표현의 어눌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어서 구체적으로 한번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현대신학의 특징은 초월적 신에 대하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래서 정황적 개념에서 상황적 개념에서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 즉 그러한 보편성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게할더스 보스도 그의 바울의 종말론에서 이미 이러한 것은 종교로서 참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즉 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는 것이 종교의 참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성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코코시카님은 제가 역사적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제한적 발전적 개념에서 판단받는 신관임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바로 구체적인 주석적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론적 보편성과 정황적 보편성을 비교하지 않는 가운데서 합리성의 재가문제는 이미 부정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되어진 합리성에 대하여서 구태여 논할 필요가 없지만 결국 상황화 신학 폴틸리히적인 존재론적 소외의 개념에서 죽음과 관련되어진 인신제사에 대한 언급을 하시고 있는 것은 이미 부정되어진 합리성에 임의적으로 타당성을 부여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상반된 글을 올리신다고 하셨는데 차이가 있다고 해서 상반된 글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것도 여전히 분별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하나는 코코시카님은 제가 한 말에 대하여서 전혀 제대로 읽지 않으신 것으로 성실하심이 없는 것같군요.. ^^ 님의 학식정도라면 저의 글에 대하여서 소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님의 신실성이 섭섭하게 하는군요..^^
미가서 해석에 따른 것에 대한 구체적인 논박
서론 :
먼저 칼빈과 총신대교수님의 답변에 대한 글을 올리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총신대를 비롯해서 고신대 교수님들 입장에서도 칼빈에 대한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각주1) 이것은 외국에서도 칼빈과 청교도의 입장의 차이를 말하는 것을 이은성교수님이 지적하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의제기가 되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가지고 올 때에는 그만한 이해를 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칼빈의 실재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미가를 그 주어 자신으로 말하고 있는지(각주2) 그것을 말씀하시고 분석하심이 좋았을 것입니다. 칼빈의 실재론에 대한 이해는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인데 이러한 것에서 개연적인 인식의 방향만 잡아서 말씀하시고 있는지 좀 신실하지 못하시군요..
본론
코코시카님의 글인용
'미가 6:7 의 주어를 누구로 해석하는가가 문제이다.
답변
첫째로 본문에서 내라는 말을 미가 자신으로 해석한다는 코코시카님의 말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칼빈은 말하는 이는 미가 선지자이지만, 그 백성들의 입장이라고 함을 미가 선지자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한다면 이것은 코코시카님의 판단은 근거없는 사변으로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각주3) 즉 미가서 자신의 번민을 담아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코코시카님은 칼빈을 잘못보았습니다.
둘째로 코코시카님은 '성서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내증되어야 할 고문서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코코시카님의 인식이 편협한 가운데서 분별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이유에 대해서 코코시카님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에서는 역사적 보편성 정황적 보편성이라고 함을 전제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시간의 보편성에서의 역사이해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에 별로 관심을 두시지 않는 가운데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시간보다도 더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절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임의적으로 부인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절대를 평가하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시고 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각주4) 그 권위적 개념에서의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어가 누구냐라는 질문과 그가 어떤 인식으로 말하고 있는가 그러한 것을 고려했어야 합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칼빈이 미가 선지자를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을 말함을 바르게 본 것은 미가 선지자의 존재론적 증거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미가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있는가' 여호와하나님과 비교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실제라는 개념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합리성을 따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주5) 합리성에서 비로소 타당성을 찾으려고 임의적 합리성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 보편적인 정당함을 얻는 사실로서의 언약을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코코시카님은 객관적이란 말을 역사적 보편이라고 함에서 상황적 정황적 보편에서 말씀하시며 이성의 직무유기를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절대 보편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절대 보편 앞에서 직무유기라는 점도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객관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함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자료들도 성의껏 잘 보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심이 또한 책망되어질 수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가서에서 인신제사의 여부는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정당함을 따른 완전영감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 아니면 여자적 완정성 문법적 완전성을 따라서 해석하느냐는 말이 있지만(각주6) 그러한 것에서 하나님의 절대 보편적 정당함을 따르는 해석으로써 문자적 인신제사를 말하지 않는 해석, 즉 칼빈의 해석이 더 절대보편적 정당함을 따르는 것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인신제사로 해석함의 당위성이 실제적으로 기각되어짐을 말하게 됩니다.
각주1) 존 칼빈 칼빈의 갈라디아서 강해 설교 상, 김동현 목사 옮김, 이상규교수 추천 서로사랑, 역자서문중에서.. 김동현 목사님은 칼빈의 저서를 번역함에 의미를 많이 두고 언급함을 보는데 그것은 칼빈에 대한 이해의 미숙함에 대한 것을 지적함을 나타내고 있다. 완곡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도 기억할 때에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기독교 출판을 통해 문서사명을 감당하시는 기독출판인들의 영적, 신학적 깊이가 미숙한데도, 부분적인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좋은 책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 잘 팔리지 않아 경제적 타격을 받는 한국 독서계의 현황)어쨌든 이러한 측면도 무시못할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셋째,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다른 견해와 의견도 있겠으나 나름대로 제가 확신하는 바로는 한국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약점과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각주2)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28권 B S M P, pp.372-373. 그러나 위선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관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언자가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리고 말하기 때문이다(註 8). 오늘날 교황청 산하에서 똑같은 일이 만연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들은 값비싼 것도 아끼지 아니하며, 가장 큰 수고도피하지 않는다. 악인들이 항상 죄악 속에서 살 자유만 누릴 수 있다면, 그들은 쉽게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허락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된 자세로 하나님과 한편인 것처럼 위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고행을 행하고 수고스럽게 온갖 예배의식을 거행하면, 또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를 부어 넣으면, 만약 그들이 때때로 돈의 세력을 억압시키면, 만일 그들이 금식과 다른 무슨 고행을 통하여 자신을 괴롭히면, 이러한 수단을 통해 그들은 자기의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중략 이와 같이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현상 그대로 머물러 있기 원하여 하나님과 물질을 나누어 갖고자 원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달랠 목적으로 수없이 시시한 것을 외형적으로 펼쳐 놓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의 예언자는 “내 아들을······들리까”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위선자들은 지극히 큰 열성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화를 내시도록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는 내 맏아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겠다. 나는 차라리 내 친아들의 처형자가 되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와 화평의 관계를 맺기만 한다면 내가 하나님께 나누어 드릴 각오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귀중한 것은 내게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이와 동시에 자기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칠 결심은 하지 않는다.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28권 B S M P, pp.372-373.)
각주3)존 칼빈, ‘칼빈의 미가강해’ 서문강 옮김 잠언, 칼빈의 미가 강해 22 강해일자 1550, 12.27 토요일 p. 418 미가는 그러한 모든 실제들을 기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단 하나님이 노를 격동하면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은혜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헛되이 제사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이나 어떤 다른 짐승들을 원하시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각주4) 칼빈의 미가서 본문에 대한 해석적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적 인식표명 모든 원수들을 이기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요새화 하시는 그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흐르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한 방도를 천 가지도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어 사단에게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너무나 잘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 기를 쓰더라도 우리에게 자기의 진을 구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배반하였다고 탄식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셨다면, 우리에게는 더 더욱 불쾌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락을 우리 구원을 위하는 쪽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못한다면 말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제일되는 목적입니다. (존 칼빈, ‘칼빈의 미가강해’ 서문강 옮김 잠언, 칼빈의 미가 강해 22 강해일자 1550, 12.27 토요일 pp. 416-417)
각주5) 존 칼빈, ‘칼빈의 미가강해’ 서문강 옮김 잠언, 칼빈의 미가 강해 22 강해일자 1550, 12.27 토요일 p. 429 미가는 이어서 말합니다.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제사를 반대하여 말하는 자기의 논리를 더 확증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이가 이 대목을 “내가 너희를 가르칠 것이라”고 읽는다 할지라도, 더 보편적인 번역은 “그가 선한 것, 곧 정당하고 자비로운 것과 그 밖에 모든 것을 가르치셨다”입니다.
각주6)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28권 B S M P, pp.372-373
그러나 위선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관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언자가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리고 말하기 때문이다(註 8).
註 8 : 이 두 구절이 요점이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고, 문자 그대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칼빈은 우리와 번역이 약간 의미가 다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원문은 아마여기에 채용된 구조를 더 인정할 것이다. 범죄나 불법 행위를 의미하는 ‘타사아’가 속건제로 이해되고, ‘하타하’가 죄악에 대한 희생제물로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범죄 때문에 나의 맏아들을 제물로 드릴까, 내 허리의 열매를 나의 영혼을 위하여 죄악을 씻는 제물로 드릴까? 본문의 동사 나탄은 주다, 선사하다, 제공하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다, 구성하다, 지적한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첫 행에서 범죄라는 번역이 나오면, 둘째 행에서는 죄악이라는 번역이 나와야 평행법칙의 요구에 부합된다.
해설 : 칼빈은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에서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여 기각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성경의 실증과 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론을 생각하지 않는 한국의 역자들은(신복윤, 이종윤 한철하) 히브리 문법에서 나타나는 구문론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문자적 완성이라는 개념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써 여자적 성경영감의 입장의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고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인신제사의 문제는 논쟁의 수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것은 칼빈의 실재론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가운데서 영감론의 차이에서 있어온 한 합리성의 논쟁의 하나이다.
성경의 완전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성경해석의 사실을 받게 되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성경의 무오를 말하게 된다는 것이며, 성경의 문자적 영감이라는 것은 성경이 상대적으로도 완전하게 기록되어진 것이라는 전제에서 문자적으로도 완전한 것으로서 문법적 완전성을 기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중세 카롤링 서부지역에서도 이런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후스토 곤잘레스는 그의 사상사 1권에서 언급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실재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사실을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뜻하심을 받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
첫댓글 휴~.. 이제 글쓰는 것 끝냈습니다... 사실 수요일날 코코시카님의 글을 읽고 오늘 아침에 칼빈의 미가서 강해설교와 주석을 찾아보고 글을 준비했습니다.
간단하게 글쓴다고 썼는데..^^ `` 도입부분은 코코시카님이 저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이유가 되어질 것입니다. 또 저의 글을 읽지 않는 성의없으신 것같으심도 도입부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셔서 그렇다고 봅니다.
코코시카님이 이해하시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것과 신앙에서는 코코시카님의 객관은 인증받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의 실재론적 입장도 이해하시지 못하시고 본문의 미가의 인식도 생각하시지 못하시고 미가가 말한 것이라는 그것만 생각해서 말씀하심에서는 이성의 분별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닐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각주들을 주목해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더 반론이 있으시면 다음 기회에 보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코코시카님이 두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감의 차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영감적 기반에서 해설되어지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칼빈주석까지 인용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하지만 오해가 있군요.미가 자신이라고 했을때 그는 '백성의 대표자'격임을 분명히 했거든요.김희보 교수의 글을 인용했으니 간접인용한 셈이지요.
그리고 칼빈의 견해가 아닌 (2)번을 다수가 지지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장로교 많은 계파가 칼빈의 해석을 따르는지의 자세한 여부는 모르겠으나 최대 교파의 하나인 합동측을 대표자로 삼았습니다.
합동측에서도 칼빈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서 이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에 대해 김동현씨의 견해를 말했는데 자세히 보시지 않으신 것같군요..
다수라는 개념, 그것이 보편적이란 말인데 제가 보편을 말하는 기준에 대하여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그것이 칼빈의 견해이해를 떠나 코코시카님의 판단에 대한 답변인데.. 축소시켜서 비켜가시는군요..^^ 암튼 건강하시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