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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염화미소
노회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
그가 걸어온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 이었다. 그래서 힘든 적이 많았다. 외로울 때도 있었다. 경찰을 피해 다니던 그 어느 해. 몸을 숨겼던 다락방에서 밤하늘에 박혀있는 별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부산 금수사에서 아들의 무사(無事)를 기원했을 어머니.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화두를 든 노회찬 국회의원(민주노동당)을 지난 12일 마들역 근처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불교는 믿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되는 것” 참된 삶 찾기 위해 선운사서 번뇌의 나날 장밋빛 미래 포기, 땀의 현장서 大義 세워
# 참당암의 ‘결단’ ‘지금의 노회찬’은 고창 선운사 참당암(懺堂庵)에서 지낸 한 달에서 비롯됐다. 1980년 군사정부는 광주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희망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이 땅에서 다시는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상식을 지닌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지를 놓고 고민하고 번민했다. 1981년 스물다섯 살의 ‘청년 노회찬’은 참당암에 한 달간 머무르며 삶의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암자에서 스님이 내준 응진전(나한전)에 머물며 두문불출했다.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밖을 나서지 않았다. 당시를 노회찬 의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성찰(省察)하고 또 성찰했습니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진지한 고민을 계속했던 기억이 납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 졸업을 눈앞에 둔 그의 미래는 장밋빛 청사진이 펼쳐질 가능성이 많았다. 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광주시민들의 외침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올바르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른 번의 낮과 밤을 보내며 ‘청년 노회찬’은 점차 삶의 나침반을 찾아갔다. “ ‘물의 흐름’ 처럼 역사에 나를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명예나 이익을 탐하기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대의(大義)에 서라’를 떠올렸습니다.” 상식이 통하고 약속이 지켜지는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굳혔다. 참당암을 나선 ‘청년 노회찬’은 역사의 현장으로 뚜벅뚜벅 들어가고 있었다. # 현장이 곧 ‘도량’ 마음을 굳게 담금질한 그는 약자(弱子)와 함께하는 길을 택했다.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 졸업식은 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고려대와 졸업식이 같은 날 이었다. “어떤 삶을 살거니”라는 또 한 번의 판단을 요구하는 듯 했다. 하지만 주저 않고 직업학교로 달려갔다. 꽃다발도 없고 축하해 주는 가족도 없었지만 동기들과 거리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며 마음을 통했다. “몸은 힘들고 일은 어려웠지만, 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일했던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한다. ‘진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서울과 인천 부천 등의 노동 현장에서 일했다. 책과 씨름하던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힘들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의 파도를 헤쳐 가는 든든한 힘은 다름 아닌 동료들이었다. 동지이자 도반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1987년 6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창립하여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1989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사회 민주화가 진전을 보이고 노동현장의 역량이 강화됐을 무렵 또 한 번의 선택을 했다. 진보정치연합과 국민승리 21을 거쳐 민주노동당에 몸 담으며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다. 정치에 입문했지만 참당암의 초심을 잊지는 않았다. “시대가 요구하는 큰 뜻에 나의 작은 힘을 보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 나의 노선은 ‘대자대비’ 노회찬 의원은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노선”이라고 말했다. 부처님 가르침과 역대 선지식들이 강조하고 실천한 것이 바로 대자대비이며,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강조되는 ‘나눔’이며 ‘복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실에서 아쉬운 점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에는 ‘나눔’이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제도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뤘지만 약자에 대한 배려가 미흡하기 때문에 나눔의 정신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대자대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본래 지닌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지사회 구현 입니다.” 때문에 노회찬 의원은 복지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누구나 기회를 공평하게 부여 받아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다. “특히 복지.의료.교육.건강.취업 등에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도록 한 뒤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누구나 인생에서 굴곡을 맛볼 수 있다. 살다보면 차이도 생길 수 있는 게 인간사이다. 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골이 깊어만 가니 문제”라면서 “골을 메우는 일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불교는 ‘삶의 충전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절을 찾는다. 우선 마음이 편해져 좋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면서 ‘바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데 사찰만큼 좋은 공간이 없다고 했다. “어머님이 오랫동안 절에 다니신 영향도 있지만, 불교는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아 좋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무교인 그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인류에게 언제나 유효한 메시지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사진> 노회찬 의원은 지난 2006년 7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환수에 앞장선 공로로 총무원장 지관스님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그 옆은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선운사 참당암에 다녀왔다고 한다. 결제 기간이어서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조용히 한 시간 정도 머물다 되돌아 왔다. 27년 전 응진전의 변함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또한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발원을 다시 했다. 지난 2007년 1월 한미 FTA 반대 단식을 끝내고 찾은 곳도 사찰이다. 양평 상원사 요사채의 작은 방에서 지친 심신을 재충전했다. “너무 좋았습니다. 요즘은 보기 힘든 장작불을 때는 방이었는데, 바닥이 절절 끓을 정도로 따뜻했습니다.” 당시 상원사 주지 호산스님의 ‘따뜻한 배려’를 잊을 수 없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大慈大悲’ 구체적 실천은 복지사회 지름길 경전의 한글화는 불교대중화의 선결 과제 노회찬 의원의 불교 인연은 뿌리가 깊다. 부산이 고향인 그의 모친은 금수사에 다니는 신심있는 불자이다. 어머니 따라 절을 찾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산 중턱에 자리한 장군암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때면 친구들과 늘 찾았던 곳. “학교 가듯 장군암에서 놀았다”고 회고했다. 경기고 재학시절에도 절에서 한 달간 지냈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지도를 펴 놓고 ‘떠날 곳’을 찾았다. 부산 기준으로 가장 먼 구례 화엄사와 평창 월정사를 놓고 고민하다 화엄사로 결정했다. 산내 암자인 지장암에 한 달간 머물렀다. 새벽 예불 드리는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은 잊을 수 없다. 낮에는 스님들과 축구도 했다. “스님들이 축구를 잘 하시더라고요.” 지난해 화엄사 주지 종삼스님을 만나 차담을 나누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함께 탄허스님의 화엄경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탄허스님이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근처에 경전교실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와 같이 수강한 것이다. 검은색 교복을 입은 그들이 눈에 뜨였을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탄허스님이 다가와 “재미는 있느냐. 이해는 하느냐”라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때는 탄허스님이 큰스님이신 줄 전혀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은 경전의 한글화에 관심이 많다. “말과 글은 수단입니다.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불교가 대중화되지 않으면 중생을 살릴 수 없습니다.” 노의원은 “소수 선각자만 아는 가르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더 낮은 곳과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 노회찬. 그는 이제 또 다른 선택의 길에 들어섰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한다”고 토로한 그는 “정치가 본래 임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부처님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하는 것이 바로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정도이며 지름길입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soolee@ibulgyo.com
노회찬 의원은 / 1956년 부산출생. 부산중, 경기고,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경인지역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창립했다. 진보정치연합 대표, 민주노동당 부대표,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 한-프 의원친선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백봉신사상과 무지개 인권상을 받는 등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불교신문 2397호/ 1월30일자] |
첫댓글 따뜻한 분이시군요 _()_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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