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연인원 7만명을 동원, 대대적인 수사와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자 2년전 수사전담반만 남긴 채 수사본부를 해체했다.
그동안 아이들의 부모와 교사, 친구들이 전국을 헤매다닌 것은 물론, 정부부처에서도 가정통신문 1,000만장을 제작, 실종어린이 찾기운동에 나서는등 범국민적인 캠페인이 벌어 졌었다.
한국일보 2002-09-26 일자]
저 역시 어린 나이였지만, 그 사건이 당시 얼마나 전국을 들썩거리게 했는 지는 알만합니다.
만약에 10-20명 정도가 한 조가 되는 군인들이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 모든 사람들이 이 난리를 치는 동안 과연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요?
게다가 대부분의 유괴 혹은, 살인 사건의 수배범의 경우 공범 중 제보자가 나오면 그 사람을 굉장히 우대(형량을 가볍게 하는 등)해 줍니다.
(국민은행 현금 수송 강도 살인 사건 등등)
그렇다면 과연 10-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입을 다물고 있을 지 자체가 의문입니다.
특히 군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20대 초반의 분명히 심약한 성격의 청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누구든 한 마디 말도 없었을지 의문입니다.
전국민이 찾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말이죠.
2. 그런데 하나 생각해 볼 것이 더 있습니다.
과연 이 아이들이 살해된 시점이 언제냐 하는 거지요.
[개구리소년 실종 당일인 지난 91년 3월 26일 오후 5시께 대구 서구 이현공단의 한 회사에서 당직근무를 하던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기 위해 당시 87번(추정)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 개구리 소년 5명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서구 내당동에서 버스를 타 맨 뒷좌석에 앉아있던 중 서구 중리동 가축도살장 부근 정류장에서 초등생 5명이 올챙이 등이 든 물통을 들고 버스를 탔다고말했다.
박씨는 소년들에게 `이것을 어디에 쓸려고 하느냐'고 묻자 소년들이 `이것들을와룡산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가져가면 몇백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특히 박씨는 다른 4명의 아이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물통을 든 푸른색계통의 체육복을 입은 꼬마(김영규군 추정)가 기억나고, 이 버스의 종점이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과 가까운 곳(세방골)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한 당일이 지방선거일로 휴일이기 때문에 버스내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운전기사, 중년 남자 한 사람, 어린이 5명만이 타고 있어 기억이 생생하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2002-09-28
이 제보가 맞는 얘기라면은 오후 5시에는 아이들이 살아있었으므로 아이들은 밤에 살해당해야 맞지요.
그런데 이 제보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들이 버스를 탔다.
세방골은 아이들의 집에서 도보로 3.5 킬로 되는 지점으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가 있습니다.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라면 한 시간 정도 걷는 걸음이라면 당연히 걸었겠지요.
게다가 버스 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당시 버스비는 백원 안팍이었지만, '이것들을 와룡산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가져가면 몇 백원을 준다.' 라면 다섯 명의 왕복 차비가 그 버스비보다 오히려 많아지잖아요?
둘째: 만약에 재미로 그 할아버지에게 놀러가는 셈 쳐도 그 전에 다른 증언이 있습니다.
[실종 어린이들이 '개구리 소년'으로 불린 것은 당시 목격자와 일부 가족이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기자들이 이들의 진술에 근거, 당시 인기를 끌었던 TV만화 '개구리 소년'과 이미지를 연결시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뒤 소년들은 도롱뇽을 잡고 알을 주우러 간 것으로 확인됐다. 김영규(당시 11세)군의 아버지 김현도(59)씨는 "전날 애들이 도롱뇽을 잡아와 다시 도롱뇽을 잡으러 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기억했다.
당시 취재를 한 한 기자는 "나중에 도롱뇽을 잡으러 갔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개구리가 친숙하고 어감이 좋아 '개구리 소년'을 '도롱뇽 소년'으로 바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2-09-27]
여기서 보면 아이들이 도룡뇽을 잡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지요? 아이들 눈에는 도룡뇽 정도면 굉장히 신기하고 재밌는 희귀한 장난감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절대 팔기 위해 잡으러 간 게 아니지요.
그럼 오히려 신빙성이 있는 증언이 있습니다.
[-중략- 유가족들에 따르면 개구리소년이 도룡뇽을 잡으로 간 선원지 옆 산 아랫마을에 살던 함성훈(당시 11세)군이 사고 당일 오전 10시~11시께 와룡산중턱에서 놀던 중 산윗쪽 부분에서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겁이나 황급히 산을 내려온 뒤 며칠 후 가족들에게 알려줬다는 것.
김영규(金榮奎ㆍ당시 11)군의 아버지 현도(56)씨는 “실종 며칠 뒤 와룡산 일대 마을 아이들을 상대로 탐문하던 중 함군이 사고 당일 비명소리를 듣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찰에 제보했지만 ‘아이들의 야호 소리일 것’이라며 수사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다.-후략- 한국일보 2002-09-29]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증언이 있지요. 이 건 경찰의 당시 수사에 밝혀진 것인데.
[---개구리 소년들은 1991년 3월 26일 오후 2시쯤 와룡산 불미골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다.---]
중앙일보 2002-09-27
그리고 아이들과 같이 탄환을 주으러 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돌아왔다는 김모군은 역시 오전 10시경에 사격장으로 가다가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럼 아이들은 밤 보다는 오히려 낮에 죽었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봤다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전 중에 본 사람이지요.
그럼 낮에 아이들을 적어도 깊이 30센티 이상에 파 묻었다면….
그럼 앞에 처음 추리에서 살펴보면 많은 인원이 아주 재빠르게 묻었겠지요.(하지만 1번 항목에 위배됩니다.)
그리고 이 시체를 가지고 이동했을까요? 아무리 그렇지만 동네 주민들이 돌아다니는 대낮에….
그런데 다른 걸 하나 생각해 봅시다.
발견된 총알은 대부분 우리나라 국군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81년 이전 사용하는 것들이라면… 차라리 전쟁 때 남은 건 아닐까요?
그런데 반대로 아이들이 밤에 살해 당했다면…
그리고 처음 대로 소수의 인원이라면…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되면… 그 시체는 무려 150킬로 이상에 이릅니다. 이 걸 소수가 데리고 이동했다. 어떠한 연유로…
그럼 그 현장에서 사람이 이 시체를 지고 대담하게도 밤길을 걸어 묻으러 갑니다. 그것도 산책로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외진 곳으로… 그런데 그 사람이 과연 불을 밝혔을까요? 이 아이들은 7시 35분에 실종 신고를 받았고 밤에는 이미 공무원과 부모들이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