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신학비평사 송기득 교수-
목원대학교 조직신학교수로 재직하다 1999년에 은퇴하고 현재 <신학비평> 주간으로 활동하시는 송기득 교수(이하 ‘송 교수’)는 금년 여름에 신앙평전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를 출판했다. 이 평전에는 해방되던 해에 초등학교 5학년으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일들부터 시작해서 1980년에 폐결핵 환자 요양소인 한산촌을 떠나게 되는 삶의 여정이 마치 거칠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줄기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말하자면 인생의 황금기인 서른세 살부터 마흔여덟 살까지 한산촌 건립과 운영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다. 타의에 의해 한산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내가 요양소 한산촌을 차리면서 기대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나는 한산촌의 삶에서 ‘사람’을 남기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을 남기기는커녕 도리어 얻었던 ‘사람’마저 잃었다. <중략> 나는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을 당했다. 그것은 내게 잔혹한 배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버림과 배신을 하늘의 버림과 배신으로 여겼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사람과 하늘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그때 나는 “하느님, 하느님, 어째서 나를 버렸습니까?”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예수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산촌에서 ‘하느님 없이’ 살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랬을까? 하느님 없이 살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송기득, 나의 신앙평전 1권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신학비평사, 2006년, 478 쪽. 이하 ‘하느님’)
하루 종일 한눈팔지 않고 이 신앙평전을 읽은 나는 그를 휘몰아친 숙명과 그의 저항이 너무 절절하여 마지막 쪽을 덮는 순간 잠시 지금 여기가 어딘가, 하는 멍한 상태에 빠졌다. 설교비평이라는 글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송 교수의 삶을 자세하게 따라가는 일은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그러나 송 교수는 목사가 아니면서도 제법 많은 설교를 했고, 1989년에는 그것을 버젓이 설교집으로까지 묶어냈으며, 지금도 간혹 설교를 하고 있으니 그 사연은 우리가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질문은 이렇다. 뒤늦게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요, 설교자로 살았던 송기득은 왜 목사가 되지 않았나?
좌절된 목사의 꿈
1933년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서 태어난 송기득은 이미 중학생 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창 철이 없어야 했던 그 나이에 그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좋은 조건으로 다니던 5년제 여수수산중학교에서 인문계인 순천의 매산중학교로 전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매산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송기득은 거의 전도사 못지않은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한 해에 육이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간 송기득은 인민군들이 교회당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에 설교하는 일도 있었다.
고2 때 송기득은 학생신분으로 교장의 불법적 행위를 목도하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맞서 싸웠다. 그는 불의를 보고 넘어가거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못하는 청소년이었다. 공부는 잘했고, 통솔력은 뛰어났지만 가난한 집 학생이 학교 권력과 싸운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그는 다른 친구 몇 명과 함께 무기정학을 당했지만, 여론에 못 이긴 교장이 학년말 시험 직전에 그를 복학시킨 덕분에 가까스로 유급을 면할 수 있었다. 결국 그가 목표로 했던 교장 추방에는 성공했지만, 그 교장은 친척인 국회부의장의 ‘빽’으로 오히려 큰 학교의 교장으로 영전되었다고 한다. 그는 왜 그렇게 무모한 투쟁에 자기의 삶을 던진 것일까? 생존 자체가 급급하던 어린 시절에 말이다.
왜 나는 고 2 때 그처럼 ‘무서운 놈’으로 극성이었을까? 내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그것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느님 44)
그에게 불의와의 투쟁은 바로 신앙의 문제였다. 중2 때 이미 “나는 셋째”라는 손양원 목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첫째로는 하느님을 위해서, 둘째로는 이웃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했고, 책상머리에 “나는 셋째”라는 표어를 써 붙이기까지 했으니 그의 신앙 열정을 알만 하다. 고3이 된 그는 주로 기독학생회 연합활동에 주력했다. 매산기독학생회 회장이면서 동시에 순천지역 기독학생연합회 회장을 겸하고 있던 송기득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형모 교장, 또는 황성수 선생을 강사로 모시고 연합집회를 주최했으며, 주말이 되면 학교 밴드 부를 데리고 다니면서 역전과 장터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시오!” 하고 외쳐댔다. 송기득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은 이렇게 목사가 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고3 가을 학기를 맞은 송기득은 보이열 선교사와의 상담을 거쳐 연희(지금의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갔다. 무식한 목사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본인의 생각과 미국에서는 일반대학을 거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보이열 선교사의 충고에 따라서 그렇게 결정했다. 그 결정도 자기 스스로 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를 도와줄 집안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 그는 여전히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대학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내면서 졸업 후에 신학교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해서 유학을 다녀온 다음에 철학교수의 길을 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몸에 이상을 느꼈고, 진단 결과 매우 심각한 폐결핵에 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2년 가까운 병원생활에서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큰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천행으로 다시 살아났으며, 그 뒤로 1년 가까운 후(後)요양까지 대략 3년에 이르는 투병생활을 버텨냈다.
한산촌 촌장으로!
만약 순리라고 한다면 투병 이후에 그는 이제 어릴 때의 꿈이었던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다. 6학기 동안 철학과 수석을 연이어 할 정도로 학문적인 깊이가 있었으며,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거쳤다면 이제 그에게 남아있는 길은 바로 그 길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신앙과 대학생 시절의 지적 훈련과 죽음을 담보한 투병의 경험은 그를 지성과 영성에서 아주 탁월한 종교 지도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만으로 스물다섯 살을 갓 넘은 송기득에게는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정석해 교수와 김하태 교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모교인 연희대학교 철학과 전임조교로(1958년 4월)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쪽으로 잘 풀리기만 한다면 연희대학교 철학과 교수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목사의 꿈을 완전히 접고 만 것일까?
전임조교 다섯 학기 째 송기득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지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길도 막혔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면접을 보고 합격을 확인한 후 곧장 도서관에 들려 틸리히와 바르트의 책을 찾아보았지만 한권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학문을 향한 그의 열정을 실망시켰다. 둘째, 거의 반나절에 이르는 신촌에서 광나루까지의 통학 거리가 그를 질리게 했다. 결국 장로회신학대학교 입학을 포기한 송기득은 4.19와 5.16의 혼란기에 전임조교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이 바로 신학을 해야 한다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청년 송기득은 비교적 개방적인 한국신학대학교를 찾았다. “선생님, 제가 신학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기 위해서 대학원에 연구생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하는 송기득의 물음에 김재준 학장은 정식으로 입학할 것을 권했지만, 송기득은 자기 고집대로 연구생으로 등록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하기 전에 신학이 공부할만한 학문인지, 또는 자신에게 그런 열정과 마음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학기 만에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1962년 봄학기에 결국 연희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장의 도움으로 풀브라이트 장학금과 언더우드 장학금을 받아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는 신학과 목사의 길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 전임조교로 활동했던 본교에 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그에게 몇 년 전 자신의 결핵 치료에 도움을 준 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핵환자들의 요양시설을 짓고 운영하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가능성이 높았던 대학교수의 길을 포기하고 결핵환자들에게 자기의 미래를 맡기기로 했다. 당장 식구들과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 문제와, 대학교수로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송기득의 질문에 “밥은 먹여주지 않아?” 하는 선배 교수의 대답을 핑계 삼아 1965년 3월 서른 세 살의 송기득은 목포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결핵환자 요양소인 한산촌 촌장으로 열다섯 해를 살았다. 그 끝은 위 글머리에 인용한대로 참담한 실패였다. 한산촌 운영은 기금의 이자만으로도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가 말하는 실패는 사람을 남기는 일이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분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배신감은 그를 심부전에 걸리게 할 정도로 심각했다. 다시 한 번 더 그는 목사의 길로부터, 그리고 전통적인 신앙의 길로부터 멀찍이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에게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다고 한다. 한번은 그를 한산촌으로 끌어들인, 공식적으로 한산촌 원장인 여성숙 의사를 통해서 알게 된 안병무 박사와 가까이 지내게 된 뒤에 안 박사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신학교 학생으로 등록한 사건이었다. 교수들은 강의를 직접 듣지 않고 대신 논문으로 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송기득을 특별 대우해 주었다. 그렇게 그는 세 학기를 마쳤다. 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변칙으로 학점을 딴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결국 중도에서 포기했다. 깐깐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래서 목사는 되기 싫었지만 신학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지 여러 해 뒤에 내 생애에 목사가 되려는 또 한 번의 시도를 하게 된다. 끝내 좌절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마도 내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없었던 것이리라. 아니 하느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서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리라. 훗날 때가 오면 그 까닭은 여쭙고 싶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 자못 기대가 되지만, 내가 지금 목사가 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을 아신다면, 그것은 나의 실패로 보실까, 아니면 하느님 자신의 실패로 보실까?(하느님 421)
평자는 송 교수가 목사가 되기 위한 네 번째의 시도에 얽힌 사연이나 한산촌에서의 좌절 이후 목원대학교 신학교수가 된 사연을 모른다. 다만 그가 한산촌을 떠난 다음에 서울에서 안병무 박사와 함께 활동했으며, 5년가량 몇몇 신학대학교에 출강하다가 1985년에 정식으로 목원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신학교수 활동을 하면서 <인간 -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을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평자가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들여다보기 위해 책상머리에 놓아둔 <파울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15년 동안 한산촌에 쏟았던 정열을 그는 다시 15년 가까이 목원신학대학교에 쏟은 셈이다. 그의 신학은 현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 용해된 행위이다.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은퇴 후 지금도 그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계간지 <신학비평>을 6년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발행하고 있으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신학강연과 설교를 한다.
도대체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힘은, 혹은 운명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위해 한산촌에 들어갔으며, 무엇 때문에 절망했는가? 목사의 길로 줄달음치던 그는 왜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걷어찼는가? 아니면 무엇에 걷어차였는가? 신학자의 길로 들어선 그에게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은퇴한 그는 지금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잡았는가, 아니면 아직도 잡으려고 앞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대답은 ‘사람’이다. 그는 사람 때문에 목사의 길을 외면했고, 사람 때문에 한산촌에 자기의 삶을 불살랐고, 사람 때문에 그곳에서 좌절했다. 그에게 화두는 곧 사람이다. 당연히 그에게 신-학(Theos-logos)은 곧 인간-학(Anthropos-logos)이다. 그는 목원대학교 교수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9년에 <예수와 인간화>라는 제목으로 설교집을 출판했는데, 그의 설교도 역시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사람다움의 회복에 집중한다. 평자는 사람의 사람다움((homo humanus)을 부르짖는 그의 설교에, 말로만이 아니라 이미 삶으로 육화된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볼 생각이다. 평자가 앞에서 언급한 송 교수의 이야기는 삶으로 된 설교였다고 한다면 이제 하게 될 이야기는 언어로 된 설교인 셈이다.
복음화와 인간화
아마 송 교수의 설교집을 읽는 사람들은 서른두 편에 이르는 그의 모든 설교가 오직 이 한 가지 주제, 즉 인간화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거의 편집증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설교하는데, 그 집중력이 놀랍다. 저건 설교가 아니라 대학의 인간학 강의야, 하고 생각할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송 교수는 형식으로나 내용적으로 분명히 설교를 하고 있었다. 평자가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의 설교관이 분명하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설교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묶어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명제로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저절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어째서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설교입니다. 따라서 설교라는 것은 예수가 어째서 그리스도인가를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교훈 따위를 능가합니다.(<예수와 인간화> 현존사, 1989년, 6쪽. 이하 제목 없이 번호만 인용할 경우에 이 설교집의 쪽수를 가리킴)
송 교수는 설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설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가리키는(指) 것이다. 둘째, 설교는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평자가 보기에 설교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중에서 첫 관점은 송 교수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둘째 관점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가 난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송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해방자를 뜻한다고 볼 때, 해방의 실체는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고 따돌리는 비인간적 현실의 극복이므로, 해방자는 일체 비인간적인 것을 극복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인간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는 바로 이 인간화의 실현에 그의 운명을 걸고서 인간화 운동을 펴다가 죽임을 당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었고, 또 그렇게 고백되어옵니다.(6)
일반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의 중심을 소위 복음화로 보는데 반해서 송 교수는 인간화로 본다. 복음화와 인간화 문제는 1960-80년대에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세계교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선교신학적인 주제였다. WCC 2차 총회(1954년 에반스톤)를 거쳐 3차 총회(1961년 뉴델리)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 제시된 이후로 세계교회는 민주화와 인간화를, 특히 제삼세계 민중들의 정치 경제적 해방을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양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사회구원을 중심으로 한 인간화에, 다른 한쪽은 개인구원을 중심으로 한 복음화에 무게를 두었다. 전자는 진보진영, 소위 에큐메니칼이며, 후자는 보수진영, 소위 복음주의이다. 양 진영 안에는 훨씬 많은 갈래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도 개인의 영성을 소중히 여기며, 복음주의도 사회구원의 요소가 없지 않기 때문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구별할 수는 없지만, 큰 틀로만 본다면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
한국교회에서 인간화 문제를 선교와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은 일단의 신학운동을 가리켜 민중신학이라고 한다. 민중신학은 기득권 세력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민중의 해방을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안병무, 서남동, 김용복 교수가 있다. 평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민중신학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안병무와 절친했던 송 교수가 이들과 더불어 해방신학자 제1세대라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송 교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민중신학을 떠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나는 나의 신학 생태로 보아 민중신학을 떠날 수가 없다. 나는 내 신학의 화두를 ‘인간화’에 두고 있는데, 인간화는 먼저 ‘민중의 인간화’이므로, 나는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신학비평>,2005년 겨울호, 61 쪽)
그는 “민중신학은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글에서 오늘 민중신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부터 민중신학회 회원과 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요즘 세미나 소식도 듣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는 “민중 편에 서서 민중의 인간화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예수’를 전거로 삼아, 민중신학은 아직도, 아니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한다. 가깝게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덜 가깝게는 유럽의 정치신학 및 여성신학과 연결된, 한국교회의 고유한 신학인 민중신학이 송 교수의 희망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시대적 조류로 끝나버리고 말 것인지 평자는 확언할 수 없다. 1990년대에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마르크스주의가 표면적으로는 급격하게 쇠락하는 것 같지만 그 정신만은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는 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제2, 제3 민중신학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민중신학의 미래도 결정되지 않겠는가. 다만 오늘의 시대상황에 한정해서 본다면 그 전망이 어둡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글쓰기에서 민중신학에 대한 부정확한 진술이 있다면 독자들의 질책을 바란다.
예수의 당파성
송 교수가 보기에 예수는 인간화 운동에 몸을 던진 분이다. “예수의 민권선언의 본뜻”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예수의 제자들로 인해서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본문으로(막 2:23-28) 한다. 그는 본래 약자를 위해서 제정되었던 율법이 예수 당시에 오히려 약자를 억압하는 악법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역사 비평적으로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루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안식일 법을 예수는 해체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송 교수에 따르면 예수의 이 선언은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 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복이 임한다는 예수의 가르침과 상응하는 이 선언은 곧 가난한 사람을 향한 예수의 편향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말의 내용 전체가 하느님 나라로 결집되고, 그가 벌인 운동이 곧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로 집약되는데, 바로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운동이 가난한 사람들을 겨냥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철저한 편향성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35)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당파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여기에 관한 논란도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평자는 이에 연관된 논란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 그 논의가 지나치게 첨예할 뿐만 아니라 결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의 글쓰기에 직접 연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평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설교의 중심에 자리매김하려는 송 교수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하고, 그 이유를 밝혀야겠다. 이를 위해서 그렇게 복잡한 성서학적 담론으로 들어갈 것까지도 없다. 송 교수가 이미 지적하고 있듯이 구약의 율법은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해주기 위한 안전장치였으며, 예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오늘의 설교자들이 무엇을 설교해야 할는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 현상에 노출된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이런 관점은 더욱 시급하게 요청된다. 이런 요청에 명민한 영성을 집중시킬 때 우리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설교자들이 경쟁력 제고만을 최고의 가치와 규범으로 삼는 이 시대정신에 영합하는 것 같다.
훨씬 근원적인 신학적 주제가 여기에 연루된다. 그것은 창조론과 인간론이다. 우리가 성서의 하나님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창조주라고 믿는다면 그런 창조의 질서, 또는 창조의 영성을 훼손하는 악한 질서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숨(루아흐)을 불어넣어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이 되게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숨은 영이며, 그 영이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인 영을 부여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이다.”(人乃天) 오해는 마시라. 이 말이 사람을 신격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평자는 사람(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바르트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는 그리스도교의 기초적인 교리에도 동의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원초적 창조능력과 구원능력을 참되게 신뢰하기 때문에 바로 그 현실의 인간을, 흡사 하나님의 형상을 몽땅 도둑질당한 것 같은 그 인간을 하나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곧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창조론은 죄론에 비해 훨씬 상위에 놓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예민하기도 하고, 창조론과 인간론에 근거해서 인간 구원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보충하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립적인 명제가 놓여 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둘째,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죄로 타락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게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지만 각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여전히 진리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명제를 인간론이라는 하나의 도그마 안에 받아들인 이유는 인간 자체가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이기도 하며, 근본적으로 세계와 역사와 인간의 삶이 우리의 인식론적 논리를 뛰어넘는 신비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론만이 아니라 신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정론 문제를 보라. 인간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임한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모순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서로는 대립적이지만 각각으로는 옳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각각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독단적인 규범으로 적용하지 말고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특히 해석해야만 한다. 성서와 교리에 대한 통합적인 해석 없는 설교는 곧 선동으로 변질되고 만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이 예수 당시에 생명력을 잃고 형해화한 것처럼 말이다. 평자의 생각은 이것이다. “해석 없이 설교 없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향적으로 대했다는 사실은 송 교수의 해석학이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라는 설교의 근본 질문을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평자가 보기에 그의 해석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이런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복음과 설교가 탈은폐의 속성을 가진 진리(알레테이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사람다움의 회복
송 교수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당파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이 누구인지 살피는 게 송 교수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연희대학교 철학과 김하태, 정석해, 구본명, 그리고 김하태를 통해서 소개받은 틸리히, 결핵 요양소에서 만난 유영모, 전임조교 시절 서울 와이엠씨에이에서 만났던 함석헌, 한산촌 시절부터 깊은 인간적 유대와 사상적 관계를 맺은 안병무 등이 그에게 중요한 인물들이다. 틸리히만 제외하면 모두 송 교수와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은 분들이다. 크게 구분한다면 그는 틸리히의 신학적 철학에서 궁극적 실재를 배웠으며, 유영모의 구도적 삶에서 보편적 사유와 삶의 철학을,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 역사의식을 배웠다. 이런 제 사상이 어릴 적 손양원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서 목사의 길을 가겠다고 나섰던 송기득이라는 한 인격체에서 지평융해를 일으켜 고유한 인간화 신학으로 열매를 맺은 셈이다. 그런데 틸리히의 궁극적인 관심이나 실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지만,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아주 강력하게 당파적이기 때문에 서로 이질적이지만 송기득에게서 일치하고 있었다. 틸리히의 궁극적인 실재가 곧 안병무의 민중 편향성, 즉 인간화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송 교수 신학의 뿌리이다. 예수가 전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세상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어떤 나라입니까? 성서에는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그때그때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표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사람대접 받고 사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고 목적으로 받들어지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할 말 좀 하고 사는 세계입니다.(276)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음이다. 송 교수의 인간화는 거창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가리킨다. 그는 어떤 형이상학의 설계도로부터 이런 논리를 연역해내는 게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부터 귀납적으로 대답을 얻는다. 그에게 인간화는 거시담론이 아니라 오히려 미시담론인 셈이다. 복음서에 보도되고 있는 치유, 해방 사건들은 그것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죄인 취급을 당하던 병자들을 예수가 고쳤다는 것은 그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병자를 고친 것은 병의 고통에서 벌어나게 하기 위한 것에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병 때문에 사람취급 받지 못한 그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받게 하기 위한 데 있었습니다. 환자에게 일차적인 해방은 병을 고치는 ‘치유’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구원은 그 환자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일입니다. 병의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병 때문에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고통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88)
이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인 인간 지향성이 바로 안병무의 민중신학과 송 교수의 민중신학을 구별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 교수는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바로 옆에서 함께 숨을 쉬는 사람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는 비인간적인 모든 세력에게 저항한다. 표면적으로 사회복지를 내웠던지, 민주화를 내세웠든지, 아니면 경제정의를 내세웠든지 불문하고 인간다움을 상실한 세력에게 그는 저항한다. 그가 한산촌을 떠나면서 겪게 된 배신감도 역시 이런 사람다움의 상실을 목도했다는 데에 있었다.
“성전종교와 예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송 교수는 이 대목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 설교는 악마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던 이야기를 본문(눅 4:9-12)으로 한다. 송 교수는 기득권 세력의 성전체제를 거부한 예수가 무엇을 대안으로 선택했는가, 하고 묻는다. “흔히 해방자들이 선택한 카리스마적 영웅주의를 표방했을까요?”(202) 아니다. 예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았다. 예수 당시에 정치적 메시아로 등장하려면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예수는 그런 방식으로 영웅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카리스마적 영웅주의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카리스마적 메시아니즘을 거부한 까닭 가운데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카리스마적 영웅주의 대신에, 바로 그것 때문에 빚어지는 비인간적, 반인간적인 질곡에서 소외계층을 해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지배 때문에 빚어지는 비인간적 현상, 바로 거기에서 피지배자의 구원을 문제시했다는 점입니다.(205)
송 교수는 정치,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영웅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소위 양 김 씨가 민주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영웅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 설교는 1988년 2월에 행한 것인데, 그 시기는 김영삼, 김대중 양 김 씨의 분열로 인해서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주어진 실재적인 민주화의 기회를 놓쳤을 때이다. 양 김 씨는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열화 같은 요구를 저버림으로써 군사정권을 연장시켰다. 양 김 씨의 분열이라는 그 여파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걸 보면 송 교수는 역사의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 같다. 물론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비인간적 영웅주의가 팽배하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오늘날 교회의 성직자 가운데는 섬기는 자임을 망각하고 도리어 하느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지배하려 드는 카리스마적 영웅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습니다.”(204)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영웅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송 교수의 비판은 매우 극단적이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세울 경우에 무소유도 소유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274) 언급하는 그는 민중신학의 경직화와 공산주의의 관료화가 불러올 비인간화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내다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교수은퇴 기념 강연에서 자신의 신학을 민중신학이 아니라 “인간화신학”이라고 말함으로써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을 놀라게 한 것일까. 어쨌든지 평자가 보기에 그는 철저하게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민중지향성과 편향성을 추구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인간다움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의 사람다움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휴머니스틱 민중신학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기득은 그런 사람의 사람다움을 성서에서, 특히 예수에게서 발견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의 두 아들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세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송 교수의 설교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의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체제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사회주의 체제로 운영되는 북한과 자본주의 제체로 운영되는 남한이 경쟁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사람다운 체제는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인가? 오늘의 시대는 순전한 사회주의나 순전한 자본주의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원적이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와 정의를, 반면에 자본주의는 생산성과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는 건 분명하다. 평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 경제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송 교수의 설교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간략하게 짚겠다.
소위 포도원 주인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마 20:1-1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예수의 경제학”에서 송 교수는 “예수의 경제학은 분배에 그 초점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 분배경제학은 성서의 일관된 사상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 비유는 아주 간단한 구조이지만 내용은 매우 심각하고 치열하다. 하루 노동이 끝난 후 포도원 주인이 노동자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기준은 파격적이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이나 하루해가 지는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인 한 데나리온 씩 받았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이런 주인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렸고, 주인은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행간을 통해서 볼 때 주인의 논리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한 시간만 노동한 사람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일할 기회가 없어서 일하지 못한 실업자였다. 둘째,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역시 생존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포도원 주인은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동일한 일당을 지급했다. 이 비유는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아닐는지.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인간은 결코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목적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공평한 분배, 이것이 예수의 경영학의 제일원리입니다.”(161)
정의로운 분배 위주의 경제학은 성장 동력을 훼손시켜서 결국 전체적으로 가난한 사회를 만든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며, 그것이 어쩌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학자나 경제인이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가나안 바알의 풍요가 아니라 공의로운 야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경쟁력이 아니라 더불어 나누는 삶을 공동체의 토대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오늘 신학회와 노회나 총회가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양극화를 중요한 신학적, 목회적 이슈로 제시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분들에게 불쾌할지 들릴지 모르겠지만 기왕에 나온 말이니까 그에게서 대답을 들어야겠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무엇이 사람다운 사회체제일까?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는 둘 다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인간화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배다른 두 아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고,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이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이 문제겠습니까?(<하느님의 두 아들> 한국신학연구소, 1995, 145 쪽)
송 교수의 설교집과 평전을 읽은 평자는 약간 우울하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쏟았던 한산촌에서 사람을 잃었다. 그가 꿈꾼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은 오지 않았으며, 불원간에 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은 어긋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와 (이복)형제인 사회주의는 가출한 탕자와 같고,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도 한국에서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오늘의 사태가 송 교수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자는 이 글을 끝내기 전에 한 마디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마음을 쏟았던 민중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한 것일까?
프로메테우스의 불
송 교수에 의하면 “인간해방의 주역, 민중해방의 주체는 민중 그 자신”이다.(20) 그뿐만 아니라 “민중이 곧 메시아”다. “예수는 억압받고 소외된 민중의 대표이며 상징”이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프로메테우스의 수난은 인간해방이라는 뜻에서 같은 차원의 것”이다.(106) 예수에게 닥친 십자가의 운명과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받아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이 과연 동일한 것일까? 우리는 송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예수와 전통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문제를 소상하게 검토해야겠지만 이 자리에서 이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신학적인 비약이 심하다는 말을 감수하고, 평자는 이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다. 송 교수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인간과 세계를 자유하게 하고 해방하는 힘과 지혜이다. 과연 그런가? 호모에렉투스(직립인)가 발견한 불은 분명히 문명의 토대였지만 그것이 곧 자유와 해방의 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제2의 불인 핵이 무한의 에너지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지구 멸망의 씨앗인 것처럼 프로메테우스의 불도 역시 양면성이 있는 게 아닐는지.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더 정확히 말해서 문명의 에너지는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밝은 눈(目)처럼 못 볼 것을 봄으로써 얻게 된 자기 분열은 아닐는지. 평자의 생각에 피투적 존재인(das geworfenes Sein) 인간은 궁극적인 구원과 생명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흡사 신을 보면 죽어야 하듯이 인간이 생산해내는 것은 결국 양날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의 완성인 구원은 그리스도교의 대림절 신앙이 말하듯이 세상 너머에서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닐는지.
평자의 생각이 송 교수와 대척점에 서는 건 아니다. 인간 삶과 구원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송 교수는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인간다운 삶에 몸을 던지는 반면에 평자는 이 삶의 질적인 변형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는 “지금 여기”서 최선의 삶을 찾아보지만, 평자는 “종말론적 미래”로부터 오게 될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 약간의 수사적인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생명과 구원의 단초이다.
위에서 평자는 그의 설교와 평전을 읽고 우울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송 교수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오늘날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울 때가 없습니다.”(90) 그렇다. 사람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외롭다 하더라도 여전히 행복한 사람 아니겠는가. 반민중적이고 반인간적인 권위주의에 저항하면서도 사람의 사람다움을 결코 놓쳐본 적이 없었던, 아니 그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송 교수에게서 우리는 사람의 체취를 느끼며, 사람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기독교사상, 2007년 1월호)
나의 설교에 대한 정 용섭 박사의 비평:
「사람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읽고서
설교는 사람다운 삶을 겨냥해야
송기득 <『신학비평』 주간>
1. 정용섭 박사의 대견한 설교비평
내가 『기독교사상』에서 빼놓지 않고 읽는 글이 있다. 정용섭 박사의 설교비평이다. 우선 정 박사의 글이 좋다. 깔끔하고 날카롭고 명석하고 조리 있는 글 솜씨에 매료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비평 상대의 설교가 지닌 내용과 특징을 잘 밝혀내고, 그 설교의 문제점을 제대로 꼬집어서, 아주 건전하고 진지하게 평가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것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하다. 비평의 주제를 붙이는 것도 비상하다. “열린 교회, 닫힌 하느님”과 같은 주제가 그렇다.
또한 나는 정 박사의 성실성과 진정성에 놀란다.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설교자의 설교 수십 편씩을 꼼꼼하게 읽고서 진지하게 비평하는 자세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설교를 비평하는 것 자체를 못 마땅히 여기는 풍토에서, ‘내노라’하는 대가들의 설교를 ‘속 빈 설교’라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예언자의 의식이 없이는 못하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객기나 용기에 걸친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꽉 찬 설교’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없이는 그런 설교비평에 뛰어들기 어렵다. 설교비평은 단순히 “멀지만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기를 바라는 진리 사랑의 마음과 열정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 박사는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가 대견하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언제인가『기상』에서 열었던 세미나에서 발표한 다른 분들의 설교비평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이의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 숫제 ‘변호’이거나 ‘칭찬’이었고, 심지어 그 설교자의 명성을 추켜세우기조차 했다. 비평하는 패널 가운데는 신학교수들도 끼어 있었다. ‘자리’의 위험을 느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속 빈 설교’에 공감해서 그랬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신학한다’는 사람들이 그처럼 비판의식이 없어서야 어떻게 학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 박사야말로 설교에 대해 비평다운 비평을 했다고 여겨진다. 이번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펴낸 설교비평,『속 빈 설교, 꽉 찬 설교』에 실린 것들이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아는 목사들에게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설교를 깊이 성찰해서 제발 ‘속 빈 설교’를 하지 말았으면 해서다.
차제에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우리나라 모든 신학교에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신학과에「설교비평학」이 정규과목으로 개설되었으면 한다. 설교를 어떻게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비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정 박사의 설교비평에서 똑똑히 보았다. 진정한 비평이란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니라, ‘알 찬 설교’, ‘씨알 먹는 설교’를 위한 비평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 ‘속 빈 설교’가 수두룩한 것은 설교한다는 목사들이 신학교에 다닐 적에 설교비평학과 같은 과목을 듣지 못한 탓이 아니었을까? 정 박사가 꼬집었듯이, 이른바 ‘잘 나간다’는 목사들의 설교를 보기로 들어, 그 잘잘못을 낱낱이 짚어간다면, 그 강의를 들은 학생은 나중에 설교자로서 강단에 섰을 때, 적어도 ‘속 빈 설교’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비평에는 반드시 설교비평의 원리가 미리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비평은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에게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라는 책을 낸 데 대해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하루라도 빨리『설교비평의 원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고 부탁했다. 정 박사는 머지않아 이런 책을 쓸 것으로 기대한다. 어쩌면 그것은 설교비평가로서 그의 책무인지 모른다. 남의 설교를 ‘속 빈 설교’니, ‘꽉 찬 설교’니 하고 진단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비평의 바탕은 밝혀주어야 마땅하다.
사실 이미 그는 자신의 설교비평의 원리를 그의 여러 설교비평에서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눈여겨보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신학적으로 체계화될 때 비평의 원리는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나는 지난해에 정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정 목사님은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 분은 친절하게도「당신 설교는 어떤데?」라는 주제로써 자신의 설교비평 원리를 뚜렷하게 밝혀주었다.(『신학비평』2006 봄호, 통권 20) 이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새롭게 정리하면 될 것으로 여긴다.
2. 설교비평의 다양성과 보편성
설교비평의 원리는 비평자가 서 있는 신학의 자리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근본주의신학의 자리에 선 설교자는 ‘근본주의신학’이 설교비평의 관점이 될 터이고, 신전통주의신학의 자리에 선 설교자는 ‘신전통주의신학’이 설교비평의 관점이 될 터이고, 민중신학[정치신학, 해방신학]의 자리에 선 설교자는 ‘민중신학’[정치신학, 해방신학]이 설교비평의 관점이 될 터이다. 보수신학자는 보수신학의 자리에서, 진보주의신학자는 진보신학의 자리에서 설교를 비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교신학 안에 국한하지 않는다. 설교비평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밖에서 하는 설교비평이 더 바른 비평이 될 수 있다.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비]그리스도교의 사상가는 그리스도교 밖에 서서 설교를 비평할 것인데, 한번 그리스도교를 거친 사람의 설교비평은 더욱 무게를 지닐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설교비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살이의 길을 여는 데 보다 알찬 것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휴머니즘’과 같은 사상의 자리에서 하는 설교비평이다. 사람다운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라면, 설교가 어찌 그리스도교의 독점물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설교가 어찌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삶의 진리란 사람의 궁극적 관심이므로, 모든 종교를 넘어서 추구될 수 있다. 그래서 설교비평은 비록 그리스도교의 설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설교를 비평하는 눈과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거기에 따라서 설교비평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관점의 설정은 그만큼 중요하다 할 것이다. 비록 그 관점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 충실하면 그 설교비평은 적어도 일관성은 견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비단 엉터리 설교라고 해도 그 설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자기정체성’을 간직한다면, 그 설교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리라.
3. 설교는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해석을 겨냥해야
그리스도교의 설교란,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복음)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 메시지(복음)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해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메시지의 ‘해설’과 ‘해석’이 설교의 두 기둥이란 말이다.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명제로 모아진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교회]의 설교는 우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고, 그 예수가 어째서 그리스도가 되는지 그 까닭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까닭을 밝히려면 먼저 예수는 누구이며, ‘그리스도’는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밝혀진 예수와 그리스도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말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메시지를 설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설교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메시지의 참뜻이 밝혀지면, 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해석해야 한다. 이 때야 비로소 설교는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오늘을 사는, 아니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는 더 절실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구실은 결코 떼어질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해석은 기껏해야 일반 교양강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오늘의 해석을 저버린 설교는 훌륭한 성서강의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오늘을 사는 데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메시지의 해설과 해석, 이 둘의 상관관계를 놓치면 설교는 절뚝발이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위에서 내가 말한 설교의 구실은 그대로 신학의 구실이다. 설교의 구실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알짬을 밝히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풀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신학이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설교와 신학의 구실은 근본에서 하나인 셈이다. 그 차이는 그 표현의 방식이 다르다는 데 있을 뿐이다. 신학은 그것을 ‘이론의 자리’에서 수행하고, 설교는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수행한다. 신학하는 사람은 설교해야 할 메시지의 이론적인 바탕을 제공하고, 설교하는 사람은 그 메시지를 삶의 현장에서 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학과 설교는 뗄 내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신학과 설교의 밀접한 관계를 굳이 칸트 투로 말하면, (반드시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신학 없는 설교는 공허하고, 설교 없는 신학은 맹목적이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신학과 설교 가운데서 설교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설교야말로 ‘신학의 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살이의 현장에서 살아 있지 않는다면, 다른 말로 해서 말씀이 설교로서 육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갓 이론이나 공론에 그칠 공산이 크다. 모든 이론이 삶의 현장에서 ‘진리’로서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이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일은 우선 설교자의 몫이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거는 기대는 그 이상이다. 설교하는 사람은 ‘온 몸으로써’ 설교해야 한다. ‘온 몸’이란,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경지를 일컫는다. 아무리 이론이 정연한 설교를 했다 하여도, 설교자의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면, 그의 ‘말씀’(설교)은 씨알먹지 않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설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설교한다는 사람 가운데는, 자신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뜻밖에 많다. 이것은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휘브리스’(hybris, 자만)의 극치이다.
4. 정 박사의 ‘성령론적 설교해석’
정 박사는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나의 설교이해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나는 정 박사의 설교론이나 설고비평론을 아직 읽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부탁을 받고 써준 글,「당신 설교는 어떤데?」에 나타난 그의 설교이해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글은 그의 설교이해의 한 가닥만을 드러내고 있을 터이지만, 나는 거기에 나타난 그의 설교의 본질이해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정 박사는 먼저 자신의 존재가 막막하고 어두운 상황에서 설교할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움을 전제한다. 존재의 막막함은 사람 사이의 소통이 부재하다는 데 그 심각성이 더한다. 그는 텍스트 앞에 설 때 두려움을 경험한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두려움은 텍스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비평 34쪽) 이들의 삶을 곧장 알 수 없는 소외감, 이것이 설교자로서 그가 느끼는 엄연한 실존이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무엇을 설교하는데?”라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을 ‘성서 텍스트의 지평 속으로’(비평 35쪽) 인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중과 텍스트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설교자로서 그가 선택한 길이다.(비평 36) 그러기에 그는 다만 텍스트 안에 있는 ‘영의 현실[실재]’를 향해 손가락질이라도 하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여느 설교자들 마냥 성서를 근사하게 해석해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하지 않는다. “설교자들이 아무리 삶의 변화를 외쳐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법”(비평 36쪽)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 삶의 변화 가능성을, “성령의 존재론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에” 기대한다.
그가 이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를 지닌 것은,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활동하신 생명의 영인 성령만이 성서를 읽는 오늘의 우리에게 성서 텍스트의 내막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비평 37쪽) 설교는 설교자가 주관하기보다는 성령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성령의 활동과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성령론적 설교’라고 이름 짓는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설교 시간에 성령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텍스트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인 성서비평학은 물론, 사람살이의 자리를 심층/중층적으로 읽으려는 인문학이나, 교회가 시대정신에서 자기 정체를 확립하려는 조직신학과 같은 학문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텍스트에 대한 학문적인 올바른 이해와 해석은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그에겐 그만큼 중요성을 가진다.
나는 이 대목에서 슬쩍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한 가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다. 설교하는 사람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텍스트의 실체를 만날 수 있게끔 안내하려고 할 때 성령의 역사가 필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는 어찌 그리 더딘 것일까? 설교하는 사람이 자기 주관만을 내세운 바람에 성령이 외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성령은 그런 설교자에게 설교를 맡기지 말거나, 아니면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런데 정 박사의 말대로, “설교자들이 아무리 삶의 변화를 외쳐도 사람은 변화하지 않는 법”이라면, 그 설교자가 ‘꽉 찬 설교’를 했을 때도 별로 소용이 닿지 않을 성 싶은데, 이 때에도 성령은 역사하지 않아서일까? 사람의 변화가 전적으로 성령의 몫이라면, 그 성령은 참으로 인색하기 짝이 없거나 아니면 무기력하다는 평가에서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은 삼가야 할 테지만, 나는 요즈음 설교자들이 걸핏하면 “성령을 받으라.”고 소리치면서 성령의 역사를 내세우는 데 질려서 한 마디 해본 것이다.
성령이란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힘과 의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사람은 자신의 영성을 통해서 그 힘과 의미를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남에서 사람은 삶의 힘을 얻고 삶의 의미를 깨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삶의 힘과 의미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적에, 그 하느님의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성령’이다. 이 점에서 정 박사의 ‘생명이신 하느님’의 의미가 보다 뚜렷해진다. 그는 그의 성령론적 설교에서 생명과 성령의 관계를 따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데, 이 점에 유의했으면 한다.
그리고 정 박사는 설교자는 우선 청중을 텍스트의 지평으로 인도해서 그 실체와 만나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설교자는 청중들을 비록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서 그 실체를 체험하게 했다 할지라도, 설교자 자신은 거기에 담겨 있는 생명의 실체를 확실하게 붙잡았다고 자신할 수 없으며, 다만 설교자 자신이 텍스트의 지평에서 체험한 실체를 가리킬 뿐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 길을 열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에 담겨 있는 생명의 실체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바로 그 때문에 그 실체는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질문으로 다가올 뿐이다.”(비평 39쪽) 이 말은 나에게는 하나의 질문으로 다가온다. “‘종말론적으로’라는 것은 앞으로 올 것이므로 우리는 다만 그것을 종말의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인가?” 아마도 이 물음은 우문에 그칠 수도 있다. 정 박사가 종말의 현재화를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사가 이어지는 한, 텍스트의 실체에 대한 의미추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텍스트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있다. 설교자가 청중을 텍스트의 지평으로 인도해서 그 안에서 만나게 하는 텍스트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스도교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신앙고백이다.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설교의 본분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 박사는 이 사실을 온갖 수사학을 동원해서 전달하는 데 힘을 쏟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미 대답은 주어졌으니까, 포장하는 일만 남아 있다는 투의 말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아마도 그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명제를 맹목적으로 설파하는 것이 마땅치 않는 모양이다. ‘예수’라는 말에 담긴 삶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면서, 그리고 ‘구원’이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 하면서, 예수를 구원자로 선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이해하고 해석한 역사적 과정에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마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했던 그 체험의 세계를 ‘추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정 박사는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는 것을 무조건 ‘정답’으로 답습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른 그 과정을 다시 추적하고, 오늘 우리가 새로운 답을 찾는 게 중요하다.”(비평 40쪽) 그러나 처음 교회가 도달한 그리스도 고백의 과정을 추구하고 거기에 담겨 있는 오늘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마침내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는 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모든 탐구과정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하기 위한 예비단계라고 보았을 때, 아무래도 강조의 초점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작 정 박사는 설교의 실체를 ‘생명’에 있다고 말한다. “내가 설교해야 할 그 세계는 ‘생명’이다. 이것 말고는 내가 설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비평 41쪽) 그래서 그가 텍스트를 만난다는 것은 곧 생명과 만난다는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감동스러운 설교는 청중이 설교를 들은 다음에 생명에 대한 신비가, 그 다층적인 성격이 열리고, 그래서 놀라고 황홀해 하고, 하느님을 향해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설교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하느님을 향해서 드리는 doxology(영광의 노래)이다.”(비평 41쪽)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가리키고, 그 생명의 세계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태도를 알려주는 것을 자신의 설교행위라고 생각했다.
이 때 정 박사가 생각한 ‘생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생명 일반을 말하는 것은 물론, 사람의 ‘목숨’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생명과학이나 생태학의 대상으로서 생명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사람의 경우 사람의 ‘목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외연(外延)을 ‘삶’으로 넓힌 것이다. ‘삶의 철학’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아니 정 박사가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삶을 함축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 지니는 특징이 뜻있고 보람 있는 삶에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생명은 곧 사람답게 사는 삶을 아우른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생명을 그리스도교 설교의 주제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의 법문에서도, 유가의 강론에서도, 베르그송이나 딜타이의 삶의 철학에서도, 니체와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삶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설교를 훨씬 능가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계시가 어찌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국한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정 박사가 말하는 설교의 주제인 ‘생명’은, 그리스도교 설교의 핵심이라고 할 ‘케리그마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를 생명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다.”(14 : 6) 도대체 예수가 생명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를 통해서 죽을병을 고쳤다면, 아니면 예수를 통해서 절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안게 되었다면, 그리고 사람으로 대접 받게 되었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예수가 ‘생명’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곧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정 박사의 생명과 예수의 메시지가 연계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기본 메시지가 “하느님나라가 가까웠다”는 데 있다면, 그리고 그가 벌인 운동이 하느님나라운동이라면, 예수의 하느님 나라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뜻한다고 할 적에, 예수야말로 사람의 ‘생명’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에게는 그 이상 가는 생명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도 이것과 상통한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을 적에, ‘영생’(영원한 생명)이란 사람이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인가 죽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영생이란 참되고 보람 있는 삶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사는 것 이상으로 영원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정 박사가 가리키는 ‘생명’은 ‘사람다운 삶’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사람다운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댄 예수와 연결지어본 것이다. 아니 그럴 경우에 ‘생명’은 그리스도교 설교의 알짜 주제가 된다.
그리고 정 박사에 따르면, 생명 세계의 신비는 성서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하느님 체험에 닿아 있다. 따라서 설교는 청중들에게 생명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절대적인 생명에 직면하라고 명령하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왕도란 없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다만 어떤 절대적인 힘에 사로잡히기 위해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진짜 설교에는 설교자 자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텍스트와 그것이 열어가는 생명의 능력만이 지배해야 하는 설교여야 한다. 이때 비로소 설교자는 자유로워진다. 그는 이것을 ‘성령론적 설교’라는 말과 연계시킨다.
그러나 생명의 신비 체험, 유일한 하느님 체험은 반드시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한가? 오히려 성서의 신비는 자기초월을 내세우는 여느 신비주의사상보다도 훨씬 덜 신비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서는 본디 해석사(Geschichte)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성령론적 설교’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메시지와는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그의 설교론은 굳이 ‘그리스도교의 설교’에 국한할 필요가 없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 그리스도교가 ‘이단’으로 멀리했던 ‘영지주의적 설교론’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정 박사와 쌍벽을 이룰 만한 설교비평이, 진보적인 신학자 가운데서 나왔으면 한다. 아마도 그것은 정 박사의 ‘성령론적 설교’에 비해서 ‘예수론적 설교’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겠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다움’의 구원 원리를 밝히는 설교라는 뜻에서 그렇다. 그랬을 적에 두 설교론이 지평융합을 이루어 한국교회의 설교를, 보다 알차고 꽉 찬 설교로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5 예수를 바탕으로 하는 나의 ‘인간화 설교’
이제 나는 정 박사가『기독교사상』(2007년 1월호)에서 나의 설교를 다룬 글,「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에 나타난 그의 평가에 대해서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한다.
정 박사는 나를 가리켜 ‘사람다움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그렸다. 나의 반생을 다룬 신앙평전,『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를 읽고서 그렇게 느낀 것이리라. 그는 나를 잘 보았다고 여긴다.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고 지금도 그 그리움은 한결 같다. 그래서인지 사람다운 사람으로 느껴지는 사람을 보면 눈시울을 적신다. 또한 나 자신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으며, 내 둘레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서, 결핵요양소 “한산촌”의 일도 했고,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교회에서 설교도 했다. 지금도 그 일을 이어오고 있다. 때로는 사람이란 것에 실망하면서도, 처음 생각한 대로 사람은 ‘그냥 사람’이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아직껏 대학교 철학과에서조차「예수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강의하고 있으며, 그런 설교를 놓지 못하고 있다. 『신학비평』을 내는 것도 사실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사람다움의 중요성을 깨우치려는 데 본뜻이 있다.
나는 사람다움(인간화)을 나의 신학의 화두[주제]로 삼고 있다. 나의 모든 글이나 설교는 여기에 모아진다. 나의 신학논문모음, 이를테면『끝내 사람이고자』(1990)나 『사람다움과 신학하기』따위가 그렇고, 나의 세 권의 설교집 곧『예수와 인간화』(1989),『살며 믿으며 바라며』(1993),『사람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1998)가 모두 그렇다. 지금 나는 무엇을 말하든 역사의 예수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화를 말하고 있으며, 그 바탕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나의 신학을 ‘인간화신학’이라고 부른다. 내가 나의 신학을 ‘인간화신학’이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뜻이 결국에는 사람다움의 실현을 겨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풀이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그 해설과 해석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으로 모아지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다움의 전거’(paradigm)를 역사의 예수에게서 찾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화운동의 추동자란 의미에서 내게 ‘그리스도’이다. 정 박사가 말한 대로, 이런 의미에서만 예수는 내게 ‘그리스도’인 것이다. 나는 ‘교회의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인간화운동)은 철저한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에서 줄곧 일어난 인간화운동에서 예수의 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져온다. 그는 전봉준의 동학농민항거에서, 문 익환의 통일운동에서, 모 택동이나 호치민이나 만델라의 해방운동에서 다시 살아났다. 특히 5.18 광주민중민주항쟁에서 예수는 ‘민중 자체’로 부활했다. 민중이 곧 예수였던 것이다. 아니 5.18의 민중은 이천 년 전의 예수를 능가한다. 역사의 변혁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오늘의 그리스도’이다.
정 박사는 내가 ‘사람다움의 회복’을 겨냥하고, 그 바탕으로서 ‘예수의 민중 당파성’을 내세우고, 아울러 그리스도교나 사회주의가 모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본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나의 인간화신학의 핵심을 잘 짚어서 평가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대척점에 선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과 구원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기상 2007년 1월호)고 말하면서도, 나와의 차이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어서 이제 나는 그 차이점의 핵심이 어디 있는가를 짚어보려 한다.
정 박사의 주제에서 드러난 대로, 그는 그 차이를 ‘복음화와 인간화’의 관계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굳이 맞세운다면 그는 ‘복음화’ 쪽이고, 나는 ‘인간화’ 쪽인 셈이다. 나의 신학이나 설교가 거의 ‘사람다움’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인간화’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복음화와 인간화를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서 참된 ‘복음’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다움 이상 가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들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게 하라.” 이들을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이들에겐 참된 ‘복음’이다. 그렇다면 복음화와 인간화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복음화는 그리스도교의 언어이고, 인간화는 휴머니즘의 언어일 뿐이다.
정 박사가 복음화와 인간화를 나누어본 것은 한국교회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구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보수진영에서 내세운 복음화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복음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삼아 사람의 개인구원의 길을 열려는 입장인 듯하고, 진보진영에서 내세운 인간화는 ‘하느님의 선교’신학을 바탕으로 삼아 사람의 사회구원의 길을 열려는 입장인 듯하다. 한 때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의 논의가 있었는데, 이 논의가 얼마나 진부했던가를 알고 있다. 사회 없는 개인이 어디 있으며, 개인 없는 사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바꾸기는커녕, 도리어 개인은 사회구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으로 살려면,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는 비인간적 사회의 구조악의 틀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에 개인의 구원은 인간화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고, 여기에서 복음의 참뜻이 매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할 게 있다. “예수를 믿으면 하늘나라에 간다.”는 투의 말을 정제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극우보수교회의 설교자들은 근본주의신학이나 그 신앙을 ‘복음주의’로 포장해서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 그 자체를 농락하거나 모독하는 일이니, 삼가는 것이 좋겠다.
정 박사는 한국에서 사회구원과 인간화를 내세운 신학의 중심에 민중신학을 놓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신학 가운데서는 민중신학이 ‘사회구원’ 쪽을 맡아 민중해방을 신학화했다. 그런데 정 박사는 민중신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민중’에 대해서 폄훼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에게는 그의 말마따나 민중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고 있지만, 민중을 사랑하는 쪽보다는 민중을 싫어하는 쪽이 더 강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조 용기 목사의 설교비평, 『민중에 대한 질문』에서 민중을 ‘욕망의 주체’로 보고, 자신의 영혼을 쉽게 파는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어째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로 서지 못하느냐고 서슴없이 질타한다. 그리고 그는 “도대체 민중은 누구냐?”고 물으면서, 민중신학자는 여기에 대답하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그 심정을 넉넉히 이해한다. 70만이나 되는 ‘신자 민중’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조용기의 삼박자구원논리에 무릎을 꿇고서, 조 용기 목사의 정당성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서 정 박사는 같은 목사로서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민중에게서 “어떻게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기대한단 말인지, [민중신학자여] 대답하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정 박사는 한 가지 눈여겨볼 게 있다. 예수는 당시 사람으로 받들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사람 아닌 ‘죄인’으로 취급받은 ‘무리’(ochlos) 곧 민중을 조금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예수는 민중을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독사의 새끼들아, 이 위선자들아”고 온갖 독설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사실도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민중신학 쪽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대답하지 않을 수 수 없다. “정 박사님, 그게 바로 민중입니다.” 그들이 아니꼽게 보여도 그들 또한 ‘그냥 사람’이라는 점에서 사람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또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든 그게 바로 사람살이이므로 그들의 모든 짓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 박사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그가 놓친 게 있다. 그것은 민중의 긍정성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민중은 ‘민중’이란 말에 매이기를 거부한다. ‘민중’이란 개념은 민중을 결코 담아내지 못한다. 민중은 살아 있는 실재이다. 그래서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에 대한 정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한정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신학’이라는 학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민중을 ‘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민중을 정의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이란 말은 우선 사람이란 데서 철저하게 버려진 계층 곧 인간소외계층을 가리킨다. 또한 민중은 우리[사람]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필품을 만들어내는 ‘기층민’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민중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역사의 주체이며 그 추동자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민주와 인권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목숨을 내대고 싸운 민중의 해방운동의 덕이다. 3.1운동이나 6월항쟁이나 5.18민주민중항쟁 따위가 이를 강변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화신학의 자리에서 민중을 다른 쪽에서 특징지어본다. 민중이란 ‘사람으로 받들어지지 않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민중 개념의 폭을 넓혀본 것이다. 가진 사람들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민중인 셈이다. 돈은 높이고 사람은 얕보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으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인간화신학이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 때 인간화신학은 차라리 ‘사회적 휴머니즘’이다. 사회적 휴머니즘은 민중의 인간화를 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민중의 인간화를 실현하는데 참여한다. 그것이야말로 민중이 민중을 스스로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차제에 나는 민중신학이 쇠퇴했느니, 민중교회가 사라졌느니 하는 논평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고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사람으로 받들어지지 않는 ‘인간소외계층’이 있는 한, 그리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민중신학이나 민중교회는 있는 것이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을 하는 젊은 신학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민중신학에는 ‘민중’이 없을지 몰라도, 민중은 엄연히 실재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민중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러니 비록 역설이겠지만, ‘민중이 없는 시대’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런데 웃기는 것은 민중신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조차 설교할 때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고 ‘민중구원’을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중’을 팔아먹는 짓이니, 참으로 역겨운 반어(反語, eironeia)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한편 정 박사는 설교자들에게 민중 구원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민중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는 게 좋다. 그들을 닦달하지 말고,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라.”(비평 44쪽)고 일갈한다. 그의 말은 옳다. 민중 스스로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지, 설교자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이, 민중 스스로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생명력을 가졌다는 ‘씨알’(함 석헌)을 뜻한다면,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설교자가 민중을 구원한답시고 나부대는 꼴은 보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박사의 말대로, “부화뇌동하는 민중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은 민중을 얕보는 것이기도 해서 삼가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민중구원에 대한 정 박사의 관점은 다르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그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민중]을 구원할 것”이라는 게다. 그런데 생명의 영인 성령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시기에,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껏 민중구원을 이루지 않고 있는 것일까? 우리더러 ‘그날’을 마냥 기다리라는 것인가. 이럴 때 설교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참으로 답답하다. 그런데 정 박사는 “종말론적인 미래”로부터 오게 될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의 구원, 사람의 구원은 미래에서 그 생명이 오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그의 종말론이 혹여 ‘묵시[문학적]적 종말론’을 뜻한다면,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 세례자의 말대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다만 구원[심판]의 ‘그날’을 기다릴밖에 없다. 그러나 정 박사가 말하는 종말론이 ‘역사적 종말론’을 뜻한다면, 종말의 역사화, 미래의 현재화가 가능할 것이므로 우리는 구원의 ‘그날’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힘쓰는 사람이 빼앗는다.”(마태 11 : 12)는 말이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당위화(當爲化)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마가 1 : 15)는 예수의 메시지는 바로 그것을 촉구한다. 예수가 외친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태”를 다루는 ‘유물론적인 접근방법’을 통해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민족이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억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