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홀로 존귀한 이는 누구입니까 / 정념스님(월정사 주지)
여러분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지 얼마나 됐을까요. 오늘로 정확히 2630년입니다. 부처님은 80세를 사셨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올해로 꼭 2550년이니까 여기에 부처님의 나이 80세를 더하면 2630년이 되는 것이지요. 경전을 살펴보면 부처님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80세까지만 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중생들이 생명에 대한 욕심을 적당하게 갖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올해 부처님 오신날은 우연히도 어린이날과 같은 날입니다. 어린이를 유달리 사랑하셨던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일제의 암흑기에 어렵게 어린이날을 제정해 오늘로 84회가 됐으니 오늘은 참으로 감개무량한 날이기도 합니다.
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셔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 이 세상에서 나 홀로 존귀하구나. 내가 삼계의 고통을,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모두 여의고 편안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홀로 존귀한 분이십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씀이지요.
부처님 첫 선언은 ‘생명존중’
그러나 이 말씀이 부처님 자신만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요. 아니지요. 부처님께서 세상을 살펴보시니 일체중생이 모두 실유불성(悉有佛性)이더랍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지요. 한발 더 나아가 불성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의 본래 모습 자체가 완연한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합해 보면 부처님의 첫 일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귀하다는 생명 선언에 다름 아니지요.
우리가 거짓없는 부처님 모습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 차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이야기지요.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것을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어떤 차별도 없다. 내 마음이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된다. 다시 말하면 이 마음이 이대로 곧 부처라는 것이지요. 중생심 가진 이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처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심 가진 이 모습이 부처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부처임을 알지 못할까요. 우리가 착각지심에 의해서, 어두운 마음 때문에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부처님의 모습임을 알려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이 어린이날과 같은 날이라는 점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와 노자, 그리고 부처님은 한결같이 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한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천국에도 날 수 있고, 도인도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천진무구한 마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물론 얻을 필요가 없지요.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님의 강림은 이런 진실을 일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라는 진리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스스로 부처이며, 천진무구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명(無明)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명은 탐진치(貪瞋痴)로 인해 생기는데, 풀이하자면 강한 탐욕심, 어리석은 마음, 분노지심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세 가지 큰 독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것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고통스러운 중생의 삶을 영위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주변에 걸려 있는 연등을 보십시오. 환하게 빛을 밝히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지 않습니까. 무명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밝게 밝히면 어둠 속에서 일어난 탐욕, 분노 같은 무명의 찌꺼기들이 일거에 소멸됩니다. 부처님 오신날 우리가 등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 무명의 그림자를 환하게 밝힘으로써 착각에 의해 일어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깨끗하게 소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무명을 여읜다면 니르바나(열반, 해탈)라는 최고의 행복을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옛 말에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闇)하고 일지능멸만년우(一智能滅萬年愚)라고 하였습니다. 천년의 어둠도 등불이 밝혀지는 순간 일시에 소멸되고, 영겁의 세월 쌓아온 우리의 무명도 지혜가 열리는 순간 일거에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오신날 등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듯이 우리도 마음속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만년의 긴긴 세월 업파랑에 의해 만들어진 무명이 깨끗이 사라지고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등 밝히는 순간 어둠은 사라져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자신을 성찰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비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6바라밀이 아닐까 합니다. 6바라밀은 끊임없이 보시하고 지혜를 탐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물질로, 그리고 지혜로 베풀어야 합니다. 베품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단절되고 대립되고, 그로 인해 항상 어두운 길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을 베풀고, 마음을 베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고 베푸는 보시의 삶, 이것이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비결입니다.
세상은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지요. 고통의 바다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인욕이 필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참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참고 인욕하는 삶, 이것이 불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감촉과 생각은 방종해서 밖으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쾌락을 향하고 탐욕심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스리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인욕만한 것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과 말을 조심하고, 세상의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욕은 지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회광반조’가 참불자의 삶
순간도 마음을 놓치지 말고 항상 기도하는 마음, 내면을 향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처럼 물욕화 된 시대에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하게 지키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물질과 화폐에 온 정신을 쏟다보니, 자신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겨 중생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면을 반추하고 돌려서 진정한 자기의 본분을 바로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잘 이뤄질 때 우리는 슬기로운 지혜의 삶을 증득하고 지혜를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 홀로 존귀한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을, 또한 세상이 한없는 생명의 존엄으로 장엄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평창 극락사의 초파일 저녁은 너무나도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자용 스님께서 어린이 포교에 진력하신 덕분에 많은 어린이들이 이 자리에 모여 부처님 오심을 봉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가 부처님께서 천진불의 모습으로 두루 강림한 그런 자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은 여기 계신 모든 이들의 생일입니다. 너와 나, 그리고 여러분의 생일입니다.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법문은 5월 5일 강원도 평창 극락사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날 봉축법회에서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정념 스님은
1956년 태어났으며 월정사에서 만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0년과 85년에 일타 스님과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각각 수지했다.
1981년 상원사에서 수선안거 이래 15하안거를 성만했다. 1987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총무원 호법국장과 승가학원 감사, 상원사 주지, 12ㆍ13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현재 월정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