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인생의 시작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였던 '포쉬' 빅토리아의 남편으로, 그리고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축구 스타로 잘 알려져 있는 데이빗 베컴은 1975년 리튼스톤(Leytonstone)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들의 주장 브라이언 롭슨을 우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어린 벡스의 마음에 가장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선수는 바로 글랜 호들이었다.
12세때에 '보비 찰튼 축구 기술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에섹스(Essex)주의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토튼햄 핫스퍼 유스팀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전히 벡스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팀은 붉은 유니폼의 맨유였다. 16세가 되던 1991년, 그는 마침내 연습생 신분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할 수 있었다.
FA 유스컵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낸 베컴의 특징은 유난히 정확한 킥과 넓은 시야였다. 그러나 성인팀에는 에릭 캉토나, 라이언 긱스등과 함께 공격을 주도하던 오른쪽 날개 칸첼스키스가 버티고 있었고, 그는 좀 더 선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야만했다.
▲성장기
베컴은 1995년 4월,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마침내 프리미어 리그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주전 오른쪽 윙으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일조했던 그는 '올해의 신인 선수상'을 차지했던 96/97 시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윔블던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골키퍼 설리반을 농락시키는 그 유명한 60야드짜리 초장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베컴은 어느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기대주로 손꼽히게 되었다. [사진: 맨유의 가까운 과거를 대표하는 에릭 캉토나, 맨유의 현재를 대표하는 데이빗 베컴]
96년 9월에는 몰도바와의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나날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소속팀에서도 자신의 굳건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 젊은 미남 스타에게는 한마디로 거칠것이 없었다. 특히 97년 2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대포알같은 중거리포는 유럽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오른발을 떠나 골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눈깜짝할 사이에 득점으로 연결됐고, 그 시속이 무려 97.9마일(약 157km)로 측정되었다. 이쯤되면 야구에서도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에 버금가는 수치라 할만했다.
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베컴은 이미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젊은 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글렌 호들 감독은 9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미드필드의 재능 폴 개스코인을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시키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는 이미 과다한 알코올 섭취로 인한 체중 증가를 비롯해 사생활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며 '예고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데이빗 베컴은 대표팀의 새로운 중심이 될만한 선수로 자연스럽게 주목받았다. 화려함보다는 정확함을 장점으로 하는 그의 재능은 폴 개스코인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유형이었지만 리더로서의 자질만큼은 더 나은 듯 보였다. 항상 성실하게 연습에 임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을 빛내기 위한 개인기나 득점보다는 동료를 빛내주기 위한 어시스트와 패스에 주력하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팀 전체를 조직적으로 단합시키는데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용감한 10명과 얼간이 1명
98 월드컵 이후, 데이빗 베컴은 올드 트래포드 스타디움의 홈팬들에게까지 야유를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축구에 커다란 열정을 갖고 있는 잉글랜드 국민들 모두가 데이빗 베컴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는 왜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해야만 했을까?
때는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프랑스 월드컵 16강전. 포클랜드 전쟁과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으로 인해 여러모로 웃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두 팀은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하는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반전에만 총 4골이 터져나오며 2:2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던 양팀의 상황은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이 울린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었다.
전반에 베컴이 보여준 활약은 뛰어났다. 특히 마이클 오웬의 '원더골'을 특유의 정확한 패스로 어시스트했던 장면은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반 1분, 시메오네에게 밀려 넘어진 베컴은 흥분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채 경미한 보복 행위를 가했고, 설령 그것이 상대 선수에게 육체적인 해를 입히지는 않았을지라도 명백한 비신사적 행동이었음을 부정할수는 없었다. 닐센 주심이 꺼내든것은 레드 카드. 순식간에 경기의 흐름은 수적 우위를 확보한 아르헨티나쪽으로 기울어갔다.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아쉽게 패배한 잉글랜드는 눈물을 삼키며 고국행 비행기에 올라야했다. 대표팀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은 결코 승부차기 실축자들인 폴 인스와 데이빗 배티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퇴장을 자처하며 동료 선수들에게 체력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던 데이빗 베컴에게 엄청난 수위의 비난을 퍼부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결코 베컴을 지칭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얼간이(Stupid Boy)'라는 대명사를 대신 사용했다.
콜롬비아와의 조별예선 3번째 경기에서 특유의 정교한 프리킥 득점을 터뜨릴때만 하더라도 새로운 스타의 탄생은 이미 예고되었던 일 같았다. 앤더튼과 베컴의 공존을 선택한 호들의 판단은 현명했다. 거친 태클과 파이팅 넘치는 폴 인스의 파트너로는 비슷한 스타일의 데이빗 배티보다는 넓은 시야와 정교한 킥, 패스등이 돋보이는 베컴쪽이 더욱 적합해 보였다. 그리고 주력이 좋은 앤더튼은 부상으로 인해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하던 맥마나만을 대신하여 확실하게 오른쪽 측면을 책임지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 베컴,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지.."]
모든것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베컴의 그 어리석은 행동에서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2002년 현재의 관점에서 비추어본다면 더욱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사전적 장치에 불과했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마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유명 헐리우드 영화의 스토리처럼 자신의 축구 인생을 화려하게 가꾸어나가기 시작했다.
Great, Great Becks!
데이빗 베컴이 홈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꾸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레스터 시티와의 개막전에서 터뜨린 득점을 포함, 그는 매경기마다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승리를 주도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난 97/98 시즌에 아스날에게 내준 리그 왕좌 탈환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계속했다.
90분내내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이며 공,수 양면에 걸쳐 맹활약을 펼친 베컴은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부메랑처럼 휘어드는 크로스는 '검은 투톱' 드와잇 요크와 앤디 콜의 머리 위로 어김없이 떨어졌고, 프리킥 감각 또한 절정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은 베컴이 축구 선수로서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인 '트리플 크라운(자국 리그, 컵, 챔피언스 리그등 3개 대회 우승)'을 주도해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에 이르러서야 아스날을 따돌리고 우승을 확정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치르게 된다. 마리오 바슬러에게 프리킥 골을 허용한 이후, 전광판 시계가 멈출때까지 1:0 스코어가 계속 유지되고 있던 상황은 그야말로 '절대절명'이었다. 이 때 테디 셰링엄의 동점골이 극적으로 터져나왔고, 바로 1분뒤에는 솔샤르의 역전 결승골이 맨유의 팬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각본없는 드라마'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100%를 담아낼 수 없는 환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진: 유나이티드 영광의 중심에는 항상 데이빗 베컴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윽고 프리미어 리그, FA컵, 챔피언스 리그를 동시에 제패하며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고, 파우메이라스와의 도요타컵에서도 승리를 거머쥐며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데이빗 베컴은 단연 그 중심에 서있었다. 더 이상 '얼간이 베컴'은 존재하지 않았다.
1999년, 히바우두의 뒤를 이어 FIF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과 프랑스 풋볼이 주관하는 '올해의 유럽 선수상'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린 베컴은 유로 2000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릴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비록 포르투갈과의 첫경기에서 루이 코스타의 마법과 누노 고메스의 일격에 3-2로 무릎을 꿇었지만, 이 경기에서 베컴이 보여준 수준은 매우 놀라웠다. 그는 스콜스와 맥마나만의 연속골을 정교한 크로스 패스로 어시스트했고, 특유의 시원스러운 롱패스로서 경기를 주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했다.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32년만의 감격적인 승리를 결정짓는 알란 쉬어러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하며 물오른 패싱 감각을 과시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8강 진출에 실패하며 축구 종가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사람들은 다시금 대표팀의 수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1분
잉글랜드와 그리스가 맞붙은 2002 월드컵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 전광판의 시계는 이미 멈춰있었고, 양팀의 스코어는 2:1로 그리스가 앞서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수차례의 프리킥을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데이빗 베컴이 살며시 공을 그라운드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느낄 수 없다. 언제나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왼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특유의 유연한 오른발 스윙이 이어졌다. 공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올드 트래포드 스타디움에 모여든 팬들은 곧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동점골이 터진 것이다. 베컴은 포효했다. 이는 분명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만한 명장면이었고, 베컴은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는듯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3년전만해도 얼간이 소리를 들어야했던 그가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독일과 핀란드의 무승부로 인해 잉글랜드는 월드컵 본선에 직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컴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던 1999년에 이어 다시금 '최고의 한해'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프리미어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위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해내며 대표팀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FIFA 올해의 선수는 루이스 피구의 손을, 프랑스 풋볼 올해의 유럽 선수는 마이클 오웬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2001년의 데이빗 베컴은 분명 최고였다. 지난 2000년에 "올해 최고의 선수는 베컴이었다" 라며 지지를 보냈던 독일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 프란츠 베켄바우어 또한 승부를 결정짓는 그의 힘에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베컴의 무서움은 바로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축구가 결국 득점으로 승패가 갈리는 종목임을 생각한다면 무섭도록 정확한 셋트 플레이 능력과 최고 수준의 어시스트, 그리고 미드필더로서 비교적 높은 득점력을 갖추고 있는 베컴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선수일 수 밖에 없다. [사진: 라이언 긱스(좌)와 데이빗 베컴(우)의 골 세레머니]
그리스전에서의 드라마틱한 결승골을 포함해 그가 터뜨린 수많은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득점과 어시스트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시간과의 싸움
01/02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32강전에서 자신들에게 충격적인 2연패를 안기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맨유는 이 승부에서 통쾌한 복수에 성공했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보다 더욱 큰 재난을 맞이하게 된다.
원정에서 맞붙은 1차전에서 2:0으로 승부를 마무리 지으려던 순간, 데포르티보의 간판 스트라이커 디에고 트리스탄은 데이빗 베컴에게 강력한 백태클을 선사했다. 다행히 전치 3주 수준의 부상에 머물렀지만, 당시의 태클 장면은 베컴의 선수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위의 위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던 트리스탄은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베컴은 월드컵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데포르티보와의 2차전에 맞춰 가까스로 복귀한 그에게 더욱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사건은 상대 선수의 백태클에서 비롯되었다. 전반 16분,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드필더 알도 두셰르는 트리스탄의 그것에 못지 않은 태클을 시도했고 베컴은 그라운드에 쓰러져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정밀 진단 결과, 발등뼈에 골절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회복까지는 전치 8주의 시간을 요했다. 월드컵이 6월부터 시작되고, 부상을 당했던 시점이 4월초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을 다짐해야 할 시기였다. [사진: 이것은 잉글랜드 축구의 재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건 경기 감각을 되찾기 위해 더해지는 시간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베컴은 부상 치료와 함께 최대한으로 체력적인 부분을 유지할 수 있는 특수한 프로그램을 병행함으로써 상처가 아무는 동시에 무리없이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는 분명 극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다.
에릭손 감독은 스티븐 제라드로 하여금 베컴의 대비책을 마련하려 했지만, 제라드마저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해짐으로써 주위의 반응은 더욱 예민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컴은 무리없이 부상에서 회복해나갔고, 마침내 스웨덴과의 첫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잉글랜드 대표팀은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2002 한/일 월드컵
가까스로 부상에서 회복하며 스웨덴과의 '죽음의 조' 첫경기에 출전한 베컴은 경기 시작부터 안정된 패싱력을 선보이며 주위의 우려를 잠재우는 활약도를 보여주었다. 정확도 높은 코너킥으로 솔 캠벨의 선취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은 그의 진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고, 전반전내내 미드필드를 지휘하는 모습에서 부상의 후유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후반전에는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벤치로 물러나야 했다. 알렉산데르손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다시금 '스웨덴 징크스'를 실감한 잉글랜드는 자신들의 에이스 데이빗 베컴이 결코 100%로 돌아오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요인은 충분했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결승골을 성공시킨 베컴의 페이스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를 거치며 조금씩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덴마크와 맞붙은 16강전에서는 리오 페르디난드의 헤딩골과 헤스키의 월드컵 데뷔골을 어시스트하는 수훈을 세우며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모습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사진: 아르헨티나전 결승골의 주인공, 데이빗 베컴의 포효]
하지만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잉글랜드는 무기력하게 패했고, 데이빗 베컴은 기대만큼의 활약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위협적인 왼쪽 돌파 때문인지 지나치게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펼쳤고, 에릭손 감독의 전술 운용 또한 소극적이었다. 한국 대표팀의 4강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은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수적우위를 점하고도 빈약한 공격력을 선보인 잉글랜드를 가리켜 '대회 최악'이라는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데이빗 베컴이 2002 월드컵을 통해 보여준 활약도가 이름값에 걸맞지 않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부상 직후에 적지 않은 핸디캡을 안고 전경기를 소화해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2번째 월드컵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결론 또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tra Story
▷ 몇몇 헐리우드 스타 부부들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불러모으는 데이빗 & 빅토리아 베컴 부부는 서로 첫눈에 반한 사이였다며 서슴없이 옛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데이빗 베컴은 TV를 통해 스파이스 걸스를 지켜보면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과거를 회상하지만, 자신의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온 빅토리아와 잊을 수 없는 첫만남을 갖고 난 이후부터는 오래전부터 함께 지내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 98 월드컵 16강전에서 데이빗 베컴의 레드 카드에는 아르헨티나의 노련한 미드필더 디에고 시메오네의 오버 액션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두 선수는 2002 월드컵 '죽음의 조' 에서 다시금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된다. 베컴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시메오네를 축구 선수로서 존경하고 있다." 라며 담담한 반응을 보였고, 시메오네 또한 벡스의 기량을 칭찬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경기. 마이클 오웬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베컴이 준비하자 시메오네가 슬며시 다가와, "저쪽으로 차는게 좋을거야. 저쪽." 이라며 고도의 심리전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성공시켰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시메오네는 신사적인 사람이다. 그와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경기후에 악수를 나누었다." 라며 더 이상 악연이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진: 98/99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 마주친 베컴과 시메오네.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
▷ 사우스햄튼을 대표했던 공격수 맷 르 티시에는 데이빗 베컴이 96/97 시즌 윔블던과의 경기에서 성공시켰던 60야드 득점을 가리켜 "자신의 보아왔던 득점 중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 이라 표현했다. 골키퍼 설리반의 키를 훌쩍 넘기며 골문으로 빨려들어간 아름다운 곡선은 르 티시에뿐만이 아닌 여러 축구인들을 감동시켰는데, 맨유의 전설 보비 찰튼 또한 "근래 보기 드문 놀라운 골" 이라는 찬사로써 후배의 활약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첫째 아들 브루클린이 태어나는 순간 베컴은 복잡하게 얽혀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잉글랜드 여성들이 뽑은 가장 섹시한 축구 스타로 선정되는등 여러모로 매력적인 남성임이 분명하지만, 결코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은 아니다. 언젠가 빅토리아는 모 방송사와의 토크쇼를 통해 "남편이 내 속옷을 입고 경기에 출전한다" 라는 푼수끼있는 발언을 내뱉은적이 있다. 그로 인해 베컴은 '게이 기질'이 있는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목소리를 감당해야했지만 오히려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유명 게이 잡지의 표지 모델로 출연하는가 하면, 가끔씩 아내와 함께 게이바에 출입하는 모습을 내비추며 당당함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보이는 베짱을 과시하기도.
▷ 데이빗 베컴은 어린 시절부터 글렌 호들을 존경해왔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친구'와 '스승'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낸 라이언 긱스에게도 친근감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낀다. 99/00 시즌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 리그 8강전을 앞두고 상대 수비수 호베르투 카를로스가 "베컴은 돌파력이 없는 반쪽짜리 선수" 라는 혹평을 내렸던 것을 비롯, 그는 윙어로서 부족한 개인기때문에 종종 비판적인 시각에서 평가되어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베컴은 긱스를 스승삼아 몇가지 트릭과 기술을 배웠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8강전에서는 자신을 비난했던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포함해 3~4명의 수비수를 돌파하고 득점을 올리는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해냈다. 망신을 당한 카를로스는 경기가 끝난 후, "그것은 심리전이었다. 베컴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선수" 라는 변명과 함께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왔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에 없는(?) 찬사를 늘어놓기도 했다.
▷ 잉글랜드의 한 기자는 과거 보비 찰튼(잉글랜드)과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가 같은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지 못한 시절을 가리켜 '대영제국의 비극'이라는 표현으로써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와 함께 '새로운 베스트' 긱스와 '새로운 찰튼' 베컴이 함께 뛰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과 대표팀의 취약한 왼쪽 라인을 예로 들어 라이언 긱스의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는데, 베컴은 "긱스와 같은 뛰어난 왼쪽 날개가 필요하다" 라며 잉글랜드의 많은 축구인들과 생각을 같이했다. 에릭손 감독 또한 기자들에게 "세계의 유명 축구 스타중에서 딱 한명만 잉글랜드 스쿼드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라이언 긱스" 라고 대답했던적이 있다. 그러나 긱스 본인은 웨일즈와 잉글랜드에 관해 질문을 받는것을 결코 달가와하지 않는다.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 조지 베스트]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관심이 많은 동남아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데이빗 베컴의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로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2002 월드컵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도 주가가 한창 상승하고 있는 중. 특히 일본에서는 '베컴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젊은 세대층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나타냈는데, 데이빗 베컴이 월드컵에서 선보인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 모양이 유행하는가 하면 베컴과 관련된 티셔츠, 축구화, 열쇠고리등의 상품이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불티나게 팔려나갔을 정도라고 한다.
P.R.O.F.I.L.E
성명 : 데이빗 베컴(David Beckham)
생년월일 : 1975년 5월 2일
국적 : 잉글랜드
신장 : 183cm
체중 : 70kg
주포지션 : 오른쪽 미드필더
클럽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992~)
주요경력 : 92/93, 93/94, 95/96, 96/97, 98/99, 99/00, 00/01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쉽 우승, 93/94, 95/96, 98/99 시즌 잉글랜드 FA컵 우승, 98/99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96/97 시즌 프리미어쉽 올해의 신인 선수상, 1999, 2001 FIFA 선정 올해의 선수 2위, 1999 프랑스 풋볼 선정 올해의 유럽 선수 2위
- 사커라인 이형석 - |